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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12년왕지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 (전북)
명 칭 : 장수오성리영락12년왕지
지정일 : 1993.08.3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544
설 명 : 이 왕지는 장수근 산서면 오성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크기는 가로 41.5㎝, 세로 43㎝로서 조선 태종이 사간공<思簡公> 천곡<泉谷> 안성<安省>에게 내려준 것이다.
원문은 "왕지안성위가정대부강원도도관찰출척사겸감창안집전륜권농관학사제조형옥병마공사자영락십이년사월이십이일<王旨安省爲嘉靖大夫江原道都觀察黜陟史兼監倉安集轉輪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者永樂十二年四月二十二日>"이다.
이 왕지는 태종 14년(1414년) 당시 청백리로 소문난 안성에게 내린 것으로, 조선 영조 27년(1752년)에 이 왕지를 보존하기 위해 세운 어필각에 보존되고 있다.
● 정황선생 신도비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202호 (전북)
명 칭 : 정황선생신도비(丁황先生神道碑)
지정일 : 2004.07.30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산12
설 명 : 이 비는 조선 중종∼명종때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병조형조정랑(兵曹刑曹正郞),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한 정황(丁황)의 신도비로 영조 19년(1743)에 건립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황은 국가에 하나라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강력히 말하여 꺼리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들추어내는 것을 강직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명성을 떨쳤는데 죄를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라 하였다.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 때의 기록이다.
정황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유배길을 떠나 13년여의 유배생활 끝에 배소 거제에서 1560년 49세로 졸하였다.
선조 즉위 후 복권되어, 이후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임실에 위치한 영천서원은 숙종대 사액서원으로 안처순(安處順)을 주벽으로 하여 정환(丁煥), 정황, 이대유 등이 배향되어 있다.
비의 총 높이는 535cm인데 지대석 40cm, 귀부받침 58cm, 귀부 82cm, 비신 195cm, 이수 160cm이다.
지대석은 4매를 맞춰 놓았으며, 귀부받침은 1매석인데 전면에는 2칸으로 구획하고, 측면은 3칸으로 구획하여 그 안에 연화 등의 꽃문양을 양각하고 있다.
귀부의 귀두는 비교적 섬세하게 잘 표현되었으며, 등에는 귀갑문이 시문되어 있으나 선명하지는 않다.
비신은 잘 마연되었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수는 2마리의 반룡이 표현되어 있는데 역시 문양이 선명하지 못하며, 이수 상면에는 비교적 높은 보주장식이 있다.
● 주 논 개
종 목 : 시도기념물 제46호 (전북)
명 칭 : 논개사당(論介祠堂)
지정일 : 1981.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산3
설 명 : 이 사당은 장수읍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수삼절(長水三節)의 한분이신 의암(義岩) 주논개(朱論介)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54년에 군내(郡內) 각개 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남산공원의 아래봉우리 꼭대기에 창건하였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에게 주논개 생전의 모습
을 재현할 수 있는 영정을 그려 줄 것을 요청하여 김화백이 고증(考證)할 수 있는 여러가지 고서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영정을 그렸다.
당시의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선생이 친필로 휘로를 내려 현판을 각자하여 걸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의암사(義岩祠) 성역화 사업의 줄기찬 추진으로 1973년에 문화공보부에서 승인함으로써, 정화사업에 착수하여 장수읍 두산리 산1번지에 새 부지를 마련하고, 전면적으로 2만여평에 이르는 대지를 조성하여 1974년 사우(祠宇)를 이건(移建).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삼문(三門) 전체 담장공사와 주위 조경공사와 관리사 및 광장공사는 물론 주논개 수명비(竪銘碑)도 경내로 이건하였으나, 초라한 사우를 중건하지 않을 수 없어 중건에 착수하여 우람한 모습으로 중건하고 단청까지 완료하였다.
의암사가 창건된 후에 주논개가 순절한 7월 7일을 택하여 추모대제를 모셔오던중 1968년부터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어 계속하고 있다.
● 합 미 성
종 목 : 시도기념물 제75호 (전북)
명 칭 : 합미성(合米城)
지정일 : 1985.08.16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식천리 177-1
설 명 : 이 성은 지금으로부터 약 1천년전 후백제시대의 성으로서, 둘레 970척, 높이는 밖으로는 15척, 안으로는 5척 정도의 성이다.
이 시대 군량을 이곳에 모았다하여 합미성<合米城>이라 하는데, 이 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이 사용할 물을 지하로 급수하던 수로관 시설이 현재도 남아 있다.
이 수군지(守軍址>는 오늘날에는 와전되어 쑤구머리로 전해지며, 성지<城址>에서 3㎞쯤 떨어진 곳에 신무산이 있는데, 이곳에 허수아비로 군사를 만들어 적군이 합미성으로 오지 않고 신무산<神無山>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찔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으며 몇해전 까지 만해도 성지의 속땅을 파보면 불탄 쌀이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 타 루 비
종 목 : 시도기념물 제83호 (전북)
명 칭 : 타루비(墮淚碑)
지정일 : 1993.08.3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천천면 장판리 46
설 명 : 이 비는 천천면 장판리 앞 장척애<裝尺崖>옆 산기슭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순조 2년(1802년) 8월 당시의 장수현감 최수형<崔壽亨>이 타루비를 세워 순의리<殉義吏>에 대한 충절의 넋을 달랬다.
순의리는 현감 조종면<趙宗冕>을 배행하다가 현감이 장척애에서 죽자 따라서 순절한 장수현의 통인<通引>이었다.
120년이 지난 후에 세워진 비석에는 순의리의 성명이 기재되지 않아 영영 성명을 찾을 길이 없다.
비를 세우자 세상 사람들은 또 다시 기적을 발견했다.
어느 시기가 되면 비각속에 들어있는 비석에서 물방울이 흘러 내린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비석이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다.
비석이 눈물을 흘림은 필경 순의리의 영혼이 신통력<神通力>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비각의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珠聯>이 붙어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다.
"의중태산취기웅장 족답심연시이홍모<義重泰山取其熊掌 足踏深淵視以鴻毛>(의로운 것이 태산과 같이 무거우니 곰의 발바닥을 취했고 깊은 못 속을 밝아 목숨을 기러기 깃털과 같이 가벼히 보다)" 최수형 현감이 세운 타루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좌대 부분이 부러져 다시 세웠으나, 볼품없는 비석이 됨에 따라 후에 지방 사람들이 순의리비<殉義吏碑>를 세워서 비각속에는 비석 두 개가 서 있게 되었다.
비각옆 암벽에는 장척애 심연에 빠져 죽은 조종면 현감의 불망비<不忘碑>가 각자<刻字>되어 있어 더욱 감회가 깊으며, 같은날 세상을 하직한 두분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졌다.
당시 고을을 다스리던 현감도 명관이었으며 배행한 통인도 명철하였던 것이다.
순의리는 의암 주논개, 호성 충복 정경손 같이 장수군의 삼절<三節>로 추대되고 있다.
● 정신재 백장
종 목 : 시도기념물 제101호 (전북)
명 칭 : 백장선생유적(백장선생유적)
지정일 : 1999.04.23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설 명 : 정신제 백장선생은 고려말엽 1342년에 태어나서 포은 정몽주를 스승으로 섬기어 길제, 이색, 정몽주 등 3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로 일컬었으며 공민왕조에 광정대부( 匡靖大夫 ) 이부전서( 吏部典書 ) 보문각대제학( 寶文閣大提學 )의 벼슬을 지냈다.
백장선생은 조선 태조가 백공의 현철하고 고덕한 인품임을 듣고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불응하여 충청도로 유배되었고 이후 태종도 특명을 내려 조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나가지 아니하자 이를 괘씸히 여겨 장수현으로 이배( 移配 )를 시켜 14년동안 이 곳에서 귀향살이를 하였다.
백장선생의 묘 1기와 거북좌대 위에 세워진 신도비 전면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숭의제( 崇義齊 )가 자리하고 있다.
백장선생 관계 유적의 제실인 숭의제( 崇義齊 )와 외삼문인 포충문( 褒忠門 )은 1950년 건립당시의 건축양식이 잘 남아있으며 신도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것으로 작품성은 뛰어나지 못하나 당시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어 지정 ·보존할 필요가 있다.
백장선생은 고려말(1342)에 태어나 공민왕 때 광정대부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불사이군( 不事二君 )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장수지방의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정진한 분이다.
1850년에 세워진 신도비는 귀중한 사료로 여겨지며, 1960년에 건립된 제각과 묘역도 잘 정비되어 있으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가치가 있다.
● 장재영 가옥
종 목 : 시도민속자료 제21호 (전북)
명 칭 : 장재영가옥(張在英家屋)
지정일 : 1986.09.08
소재지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095
설 명 : 이 가옥은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사병진삼월이십팔일을유오시<崇禎紀元後四丙辰三月二十八日乙酉午時>"라고 기록되어 있어 철종 7년(1856년)에 건립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초석은 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이며, 토방은 자연석을 중첩하여 쌓았다.처마는 홑처마이고,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 맨끝이 부엌이고, 앞쪽으로 찬방이 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정면 앞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기둥은 원기둥이고, 홑처마이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 첫칸은 지붕이 다른 3칸보다 휠씬 낮은데 이것은 후에 달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칸의 기둥만은 각기둥이다.
그 다음칸은 방이고, 그다음은 대청마루이고, 그 다음은 건넌방이다.
행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고, 널판지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공기가 잘 통하도록 지표면으로부터 40㎝높이에 바닥이 널판으로 되어 있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이다.
왼쪽은 변소와 헛간이 있고, 오른쪽은 문간방이 있다.
가운데는 솟을대문이 있고, 문 앞 양쪽에 폭 56㎝, 길이 47㎝, 높이 40㎝의 화강암으로된 하마석이 있다.
본래 하나는 집앞 도로변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본래 문간채의 오른 쪽으로 곳간채가 보이는 정면에 솟을 대문 형식의 중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 권희문 가옥
종 목 : 시도민속자료 제22호 (전북)
명 칭 : 권희문가옥(權熙文家屋)
지정일 : 1986.09.08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177-1
설 명 : 이 가옥은 현 소유자의 5대조가 같은 마을에 있던 큰 집에서 살림을 나게 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하나, 상량에 사랑채는 조선 영조 49년(1773년)에, 안채는 고종 23년(1886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을 살펴보면 전북지방 상류가옥에서는 희귀한 고패형식의 안채와 안채 전면에 세워진 일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서쪽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권씨 자신의 인근에서는 널리 알려진 독농가이기도한 까닭에 이 집은 부농가로서 많이 변모되어 현재도 가옥의 모든 공간이 활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상류가옥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채 껍데기만 남아 있는 사실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건물중 안채, 사랑채, 서쪽채 등은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많이 변개되었다.
문간채는 블록으로 쌓아 창고로 개조하였으며, 바깥채도 벽돌로 지어 외양간, 창고, 목욕탕 등으로 사용된다.
아래채 역시 창고를 비롯하여 담장, 돼지우리, 외양간 등의 축사를 두었다.
이외에도 사랑채 정지의 한쪽을 막아 여물청으로 꾸미고, 안채 남측벽상부에 수장공간을 설치한 점 등을 보면, 이집의 주인이 매우 용의주도하게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채의 2칸 광과 나무채 등을 합하면 이집의 수장공간은 주거공간에 비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랑채 가운데 방의 북쪽을 막아 골방을 두고 권씨가 이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점, 그리고 안채 대청의 한 칸을 비우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 등도 매우 주목을 끈다.
현재 안채의 작은 방에서는 큰 아들내외가, 서쪽채의 방에서는 작은 아들 내외가 기거하고 있다.
상류가옥으로서 커다란 변화없이 권씨 자신의 농사를 지으며 그의 두 아들이 한 집에서 기거하고 있음을 보면 가옥의 규모에 걸맞는 가족체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 가옥은 상류가옥이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매우 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 창원종씨 종가
종 목 : 시도민속자료 제34호 (전북)
명 칭 : 창원정씨종가(昌原丁氏宗家)
지정일 : 1999.11.19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580
설 명 : 이 집은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앞으로 논과 작은 계류가 있고 그 너머로 낮은 야산이 펼쳐져 경관이 좋음.
집 오른쪽에는 작은 종가인 정상윤가옥(문화재자료 119호)이 위치해 있고 왼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계류 위의 언덕에는 반계정이 있다.
이 집은 인종의 국장( 國葬 )때 예법을 준수할 것을 주장하다 정미사화( 丁未士禍 )때 거제도로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창원정씨 7세손 유헌 정황( 丁惶 )의 후손들이 세거해온 종가임.
안채 앞마당에 검은 바위가 있는데 주변을 파면 그 중간부에 “천하대지( 天下大地 )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 집터가 좋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는 종도리 장여에 “숭정기원후사갑인( 崇禎紀元後四甲寅 ) ”이라는 상량묵서명이 있어 1854년에 19세손 반계 정상규가 함께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음.
솟을대문은 종도리 장여에 세재정묘( 歲在丁卯 )라는 상량묵서명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27년에 21세손 회사 정양수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가 튼ㄷ자형으로 배열되고 사랑채 옆에 행랑채가 축을 달리하여 경사지게 놓였으며 사랑채 앞에는 솟을대문이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조선후기와 일제 강점기에 걸쳐 지어진 상류주택인데 인접한 작은 종가인 정상윤가옥과 대조적임.
같은 시기에 지은 건물이지만 정상윤가옥은 크고 화려한 데 비해 이 집은 큰 종가이면서도 규모가 작아 소박하며 실용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랑채와 안채 모두 중앙부는 앞뒤에 퇴칸을 가진 구조이고 양끝의 퇴칸은 양통집(겹집)의 양통집(겹집)의 구조로 두 형식의 장점을 적절히 조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음.
반계가 건립한 정자 또한 형식보다는 내용을 추구한 실용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집은 안채를 제외하고는 변화된 부분이 많지 않아 원형을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어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월 강 사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1호 (전북)
명 칭 : 월강사(月岡祠)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562-1
설 명 : 월강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 장수현감 최경회( 崔慶會 )장군이 전라도 동북방면의 방어임무를 띠고 들어와 창의소( 暢義所 )를 차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조련하면서 장대( 將臺 )를 차린 곳이다.
순조 28년(1828년)에 사림의 장계에 의하여 예조에서 인가를 얻어 사당을 세웠다.
이 지방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네분이 모셔졌는데, 정신재 백장( 靜愼齋 白莊 ), 퇴휴재 송현산( 退休齋 宋寶山 ), 손재 김남택( 遜齋 金南澤 ), 일휴당 최경회( 日休堂 崔慶會 ) 등의 위패를 모셨다.
고종 5년(1868년) 서원 향사 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광복후 1948년 장수유림의 복설발의로 재건되었다.
● 어 서 각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2호 (전북)
명 칭 : 어서각(御書閣)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
설 명 : 어서각은 추담 장현경<秋潭 張顯慶>에게 하사한 영조의 친필을 보관하기 위하여 정조 23년(1799년)에 건립되었다.
추담 장현경(1730∼1805)은 흥성인<興成人>으로 자는 사응<士應>이며, 호는 추담이다.
영조 28년(1752년) 정시<庭試>에 급제, 춘추관기사관겸홍문관박사<春秋관記史官兼弘文館博士)를 시작으로 각조낭관<各曹郎官>을 거쳐 춘추관기주관<春秋관記注官>, 편수관<編修官> 등을 역임하였다.
어서각에 보관된 어서<御書>는 홍저지<紅楮紙>(22㎝×35㎝)에 쓴 영조의 친필로서 영조 39년(1763년) 겨울 공<公>이 사관으로 입직<入直>하였을 때, 영조께서 정청<政廳>에 나오시어 잣죽과 꿩구이를 내리자, 성은에 감복하여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니 대왕께서도 크게 기뻐하시어 어서를 하사하신 것이라 한다.
● 영 정 각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3호 (전북)
명 칭 : 금남군정충신영정각(錦南君鄭忠信影幀閣)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남면 금곡리 413-4
설 명 : 만운 정충신( 晩雲 鄭忠信 )(1576∼1636)은 나주사람으로 자는 가행( 可行 ), 호는 만운( 晩雲 ), 시호는 충무( 忠武 )이다.
선조 25년(1592년) 가을 무과에 올랐고, 인조 2년(1624년) 이괄( 李适 )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 振武功臣 )을 받고 금남군( 錦南君 )에 피봉( 被封 )되었다.
이 영정(125㎝×75㎝)은 견본채색( 絹本彩色 )으로 금남군의 좌상( 座像 )을 모사한 것인데, 작자는 미상이다.
후손인 현감 정백흥( 鄭百興 )이 순조 11년(1811년) 3월 16일에 이곳 금곡( 金谷 )에 영당( 影堂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다.
● 화 산 사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4호 (전북)
명 칭 : 화산사(華山祠)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136
설 명 : 화산사는 1961년에 창건되었는데, 파은<波隱> 박수기<朴秀基>, 눌재<訥齋> 박상<朴祥>, 충암<沖庵> 김정<金淨>, 안재<安齋> 박지견<朴枝堅>, 사암<思庵> 박정<朴渟>, 육유정<六柳亭> 박지효<朴之孝> 등을 배향하고 있다.
이 사우<祠宇>는 이곳에 배향하고 있는 분들의 절의<節義>와 진충보국정신<盡忠報國精神>을 높이 받들고 길이 후손에게 거울을 삼게 하고자 건립된 것으로서, 이곳 유림<儒林>들이 주동이 되고,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협조를 얻어 건립하였다.
사당<祠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강당<講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 압 계 서 원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5호 (전북)
명 칭 : 압계서원(鴨溪書院)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산76
설 명 : 압계서원은 산서면 학선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13년(1789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고려조의 명관<名官>인 육려<陸麗>를 비롯 국헌 임옥산<菊軒 林玉山>, 비암 박이항<秘岩 朴以恒>등 3인의 신위를 모셨다.
정조 22년(1798년)에는 삼암 박이겸<三岩 朴以謙>을 배향하였고, 정조 23년(1799년)에는 고산 김설<孤山 金渫>을 배향함으로써 5위를 모시게 되었다.
고종 5년(1868년)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고, 다만 후손들이 설단<設檀>하여 제사만을 모셨으나, 1958년에 중건되었다.
● 창 계 서 원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6호 (전북)
명 칭 : 창계서원(創溪書院)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 566-1
설 명 : 창계서원은 조선 숙종 21년(1695년)에 재상( 宰相 ) 황희( 黃喜 )를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고종( 高宗 ) 5년(1868년)에 철폐되었으나, 1955년 중건하고 방촌( 방村 ) 황희( 黃喜 )를 주벽으로하여 나부( 懦夫 ) 황수신( 黃守身 ), 무명재( 無明齋 ) 강백진( 康伯珍 ), 송탄( 松灘 ) 장용두( 張應斗 ) 등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구서원( 舊書院 ) 터에 1948년에 세운 비가 남아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상현재( 尙賢齋 )가 남아 있다.
● 정 충 복 비
종 목 : 문화재자료 제38호 (전북)
명 칭 : 정충복비(丁忠僕碑)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00
설 명 : 임진왜란때 왜장<倭將> 천융경<川隆景>과 그의 부장<部將>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은 전주성을 공격할 목적으로 금산<錦山>, 진안<鎭安>, 용담<龍潭>등 산읍<山邑>에서 있다가 웅치<熊峙>와 이치<梨峙>에서 패전하였다.
이때 왜적<倭賊>의 한 부대는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장수<長水>에도 침입하였다.
문묘<文廟>를 지키고 있던 충복<忠僕> 정경손<鄭敬孫>은 왜적들이 문묘<文廟>앞에 이르자 문을 굳게 닫고 꿇어앉아 경서<經書>를 외며 말하기를 만약 문에 들려거든 내 목을 먼저 베고 들라하니 왜적들도 늠름한 그 태도에 감복되어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는 쪽지를 주고 퇴거하므로 그 피해를 막아냈다.
안국사혜경이란 왜장은 본래 승려 출신이어서 종교적 심리가 발동되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정경손의 투철한 책임감과 성역을 사수하겠다는 기개에 감동되었음은 더말할 나위도 없다.
임진왜란으로 각지의 읍향교는 거의 소실되었으나, 오로지 장수향교만이
화를 입지 않고 당시의 원형대로 보전되어 그 표본이 되고 있다.
후세사람들은 그의 의행을 거룩히 여겨 헌종 12년(1846년) 향교 문전에 의거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 수 열 비
종 목 : 문화재자료 제40호 (전북)
명 칭 : 수열비(樹烈碑)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920
설 명 : 수열비는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수열평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때 장수지방에 침입한 왜적들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부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이때 화평마을에 살고있던 양사무<梁思無>의 부인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아침밥을 짓고 있다가 들어닥친 왜적들에게 젖가슴을 잡히는등 모욕을 당하자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나와 젓가슴을 칼로 베어 왜적들의 면전에 뿌렸다.
부인은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들아 욕심나는 젖을 가지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 대성일갈하니 적들은 부인의 위엄에 눌려 달아났으며, 부인은 많은 피를 쏟고 그 자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뒤에 유림에서 이를 나라에 상주하여 예조에서 비를 세우게하니, 이것이 "세 임진양사무처해주오씨수열비<歲 壬辰梁思無妻海州吳氏樹烈碑>"이며, 뒷면에 수열평<樹烈坪>이라 썼으므로 마을 이름도 화평에서 수열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문<碑文>은 선조의 제12남인 인흥군 영<仁興君 瑛>의 아들 낭선군 우<郎善君 우>가 썼다.
● 원흥석불입상
종 목 : 문화재자료 제41호 (전북)
명 칭 : 원흥석불입상(元興石佛立像)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1
설 명 : 이 석불은 산서면 마하리 뒷편 팔공산 기슭에 있는 원흥사<元興寺> 법당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는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져 있었다고 한다.
입상인 이 석불은 무릎 이하가 땅에 묻혀 있으며, 얼굴은 이마보다 밑이 넓어서 살이 쪘고 귀는 커서 어깨에 닿았다.
눈과 입은 작은 편이나, 코는 뭉툭하며 큰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지 않으며, 어깨와 몸의 하부의 너비가 동일하여 둔한 느낌을 주고 두손은 양 소매 속으로 넣어 감추어져 있다.
머리는 나발을 표현한 듯하나 분명하지 않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목은 매우 짧은 편이나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다.
양 옷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옷주름을 표현하였으나 지극히 형식적이다.
● 정상윤 가옥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19호 (전북)
명 칭 : 정상윤가옥(丁相潤家屋)
지정일 : 1986.09.08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582
설 명 : 이 가옥은 사계리 서원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8년에 건립되었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남향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정면의 기둥은 원기둥이며, 나머지 기둥등은 모두 각기둥이다.
천정위에 모두 다락을 넣은 것이 특징이고 환풍을 위해 전면과 후면에 빗살창을 넣었다.
이 건물은 서편 뒤쪽으로 부엌이 있고, 앞쪽으로 방이 하나 있으며 다음에 안방이 있고, 안방과 건넌방 사이는 미닫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다음이 대청마루이고 그 다음이 앞뒤로 방이 2칸 있다.
안방은 뒤쪽으로 조그마한 방이 하나 더있는 겹질의 형태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정면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기둥은 원기둥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며 팔작지붕이다.
영춘헌( 永春軒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와 같이 천장위에 다락을 만들고 ㄱ자형으로 동쪽으로 뻗친 대청누각이다. 이 사랑채도 안채와 같이 측면 기둥은 모두 각기둥이다.
서쪽으로부터 방이 둘 있으며, 그 사이는 안채와 같이 미닫이이고, 뒤쪽으로 부엌이 있으며, 윗방 다음에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대청의 뒤쪽에 사당이 따로 없기 때문에 이곳에 신위를 모신다.
그 다음이 건넌방이고, 거기서 남으로 뻗쳐서 누각형태의 마루가 있다.
동서남이 탁 트여서 시원한 감을 준다.
곳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남북으로 뻗쳐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곳간채의 낮은 편에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기둥은 각기둥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통하는 안문은 팔작지붕에 홑처마이고, 그 옆에 조그마한 소문이 있다.
문의 윗부분은 자연스럽게 타원형으로 짰는데 아주 인상적이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하나씩 방이 있다.
● 자 락 정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29호 (전북)
명 칭 : 자악정(自樂亭)
지정일 : 1990.06.30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내면 삼봉리 942
설 명 : 자락정은 조선시대 사인( 舍人 ) 김영호( 金永浩 ), 감사( 監司 ) 박수기( 朴秀基 ) 등이 창건하였으나, 퇴폐되어 1924년 양가문의 후예가 중건하였다.
주위의 경관은 정자로 하여금 더욱 경계를 아름답게 하는데, 풍천의 맑은 물과 섬과 같이 치솟은 석벽에 정자가 조화되어 가히 제일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 홍 학 당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47호 (전북)
명 칭 : 흥학당(흥학당)
지정일 : 1999.07.09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97, 98-1
설 명 : 지역 11개 성씨 대표가 모여 인재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으로, 숙종 43년(1717)에 세워 영조 31년(1755)과 고종 2년(1898)에 고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출입문을 들어서면 흥학당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ㅡ자형 건물이다.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구성하여 세울 당시의 평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역 명문학당의 기능은 사라졌으나 이 지방 미풍양속의 맥을 이어오는 계남향약 발상지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건물의 구조나 세부 기법에서도 광무 2년(1898) 고쳐 세울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전통적인 건축 기법을 엿볼 수 있다.
● 절렬양정씨 지려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71호 (전북)
명 칭 : 절렬양정씨지려(節烈兩丁氏之閭)
지정일 : 2000.11.17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 429
설 명 : 이 정려각은 절개와 지조를 지킨 두 분 여성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 경종 3년(1723)에 세우고 순조 19년(1819)에 고친 것이다.
정황(丁煌, 1512∼1560)의 후손들이었던 이 분들의 행적은 정려 안에 걸린 현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한 분은 정유재란(1597년) 때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고 스스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고, 또 한 분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지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 정려각에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솜씨가 담겨 있는데 정면과 측면이 각 한 칸씩이지만 정면이 더 넓은 편으로 시원한 느낌이 들고 내부는 2칸으로 나누어 두 정려의 정려판을 걸어놓은 상태이다.
● 침 령 산 성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76호 (전북)
명 칭 : 침령산성(砧嶺山城)
지정일 : 2000.12.29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남면 침곡리 산73-2외
설 명 : 이 산성은 백제말에 신라와의 전투를 위해 쌓은 전방기지로 추정되는 것으로서 오랜 세월이 흘러 성벽의 많은 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이미 폐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두 봉우리와 그 중간부를 감싼 석성으로서 둘레는 500m 정도이다. 수구가 있는 동남쪽은 60m에 걸쳐 7.7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드물게 수구 석벽에 암거까지 설치된 곳도 있다.
또한 남쪽 동·서 양단 모서리 부분에는 폭 4m 내외의 돌출된 대지가 설치되어 있어 치(雉)와 같은 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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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근대문화재 제189호
명 칭 : 천주교 수분공소
지정일 : 2005.06.18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667-1외 2필지
설 명 : 1943년 경상남도 함양본당의 이상화 신부와 전라북도 진안 어은동 김양홍 신부는 두본당의 인접지역인 무주,남원,임실 등지의 공소를 방문하가 위해 서로 왕래하는 중간지점인 이곳에 쉬어가는 쉼터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고 수분리에 강당과 침실을 짓게 된 것 이 수분리 본당의 모체가 되었다 1921년에 공소건물 개수공사를 착수하였다 당시 기와공장은 70리 거리인 함양에 있었는데 이곳까지 기와를 등짐으로 날랐다고 한다 성당지붕을 개수하고 내.외벽을 고쳤으며 창고 식당등을 짓고 정원을 정비하였다 1926년에는 수분리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37년에는 장수읍 본당으로 옮겼다 이후 1946년 이기순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을 다시 수분리로 옮겼으나 한국전쟁시 조상익 신부가 군종신부로 입대함에 따라 신부가 공석이 되어 남원본당 공소로 되었다 1954년 장계에 장수군 전지역을 관장하는 본당이 신설됨에 수분리 본당의 시대는 끝나고 장계천주교회 소속 공소가 되었다 이후 1977년 장수천주교회가 설립되면서 장수천주교회 소속 공소가 되었다
신유박해때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고갯마루 가까이서 방황하던 천주교인들은 남원에서 장수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인근에 가게 되었다. 바로 이 수분리 천주교마을은 숨어지내던 김대건 신부가 들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