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6 말씀
말씀제목: 누가 장자권을?
본문: 창세기 25, 27~34
27 두 아이가 자라,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29 한 번은,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데, 에서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30 야곱에게 말하였다.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 배가 고파 죽겠다." 에서가 '붉은' 죽을 먹고 싶어 하였다고 해서, 에서를 에돔이라고도 한다.
31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은 먼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파시오."
32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33 야곱이 말하였다.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그러자 에서가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였다.
34 야곱이 빵과 팥죽 얼마를 에서에게 주니,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나갔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오랜 기간 창세기 말씀을 함께 공부도 하고 또 예배 때 본문 말씀으로 삼아 생각해보던 시기가 있었다. 창세기는 1장부터 11장까지 창세기 원역사로 나머지 50장까지는 족장이야기로 크게 나누어진다. 족장들의 계보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마지막으로 요셉으로 이어진다. 오늘 본문은 야곱 이야기의 서론이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과 정반대의 성정을 지닌 인물이다. 예전에 이삭 이야기를 하면서도 말했지만 이삭은 매우 소극적이다. 정신분석학은 이삭의 이런 성격이 아마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를 제물로 바치려 한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이삭에 관한 이야기들 대부분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얻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실로 족장 이삭은 이름뿐이고, 이삭 시대의 실질적인 족장은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이삭의 아내 리브가라고 할 수 있다. 야곱은 제 어머니 리브가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정신분석학을 들먹인다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고 이 두 아들이 평생의 원수가 되어 싸우게 되는 것 역시 일종의 필연이다. 왜소해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법을 확립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법이 굳건하지 않다면 자식들 사이의 관계는 무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식들에게 장자권은 저항할 수 없는 법의 명령이 아니라 사생결단의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것이 된다. 장자권을 둘러싼 야곱과 에서의 싸움은 실질적으로 공석이나 다름 없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이 싸움은 사실 이미 그 결과가 정해진 것이다. 야곱은 아버지의 이름을 무력화한 리브가와 동맹을 맺고 있으며 에서는 이미 상실된 권위와 손잡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성서도 이를 간파하고 있다. 리브가는 이삭과 혼인하고도 20여년 간 아이를 갖지 못해 노심초사하다가 겨우 아이를 갖는다. 아이는 쌍둥이였는데 리브가는 이를 즉시 알아차린다. 쌍둥이가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그야말로 “대가리 터지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25:22b)”라고 점잖게 번역된 구절에서, ‘싸웠다’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은 ‘압박하다, 눌러 부수다(라짜르)’이다. 태 속에 있는 쌍둥이의 싸움을 이처럼 처절하게 묘사할 다른 단어가 있을까? 태 속에 있는 두 아이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리브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역시 22절에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 못 살겠다!”는 말이다. 리브가는 살려달라고 주께 탄원했다. 야훼께서는 리브가에게 대답해 주신다. “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23).”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이렇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형, 곧 큰 자는 에서이고 어린 자, 곧 동생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될 야곱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대대로 소중하게 전한 이유를 바로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항상 ‘어린 자’로서 인식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역사는 힘없는 백성의 그것이었다. 야곱의 자손들은 이후 이집트에서 노역에 시달리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히브리 노예들’이 될 것이다. 역시 어린 자이다. 이스라엘이 간직한 이야기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기 인식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어린 자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믿음이다. 야곱 이야기는 이런 믿음의 전형을 이야기해준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목을 붙든 채 태어난다. 어머니의 태 속에서의 박 터지는 싸움에서 밀려, 나중 된 자가 되었지만 결코 그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비록 쌍둥이였지만 둘째로 태어남으로써 형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인간, 즉 자신의 상실을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난 자, 치열한 욕망의 주체, 그가 야곱이다. 야곱의 삶은 이 상실을 메우려는 투쟁으로 점철된다. 그는 '약자'였기 때문에, 애초에 어떤 기득권도 박탈된 자였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을 회복하기 위해 '약은 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기득권자를 기만하는 자가 된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탈취하며, 어머니와 리브가와 함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자기가 기만을 통해 탈취한 장자권을 보증받는다. 그 결과는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증오로 되돌아온다. 그는 도주한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쳐 외삼촌 라반에게 의탁한다. 물론 여기라고 다른 세상은 아니다. 외삼촌 라반은 굴러온 복덩이를 마음껏 이용해 먹으려 하며, 야곱은 그런 라반을 기만한다. 착취와 기만의 관계에서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 역시 증오이다. 약은 술수를 통해 삼촌의 재산 중 일부를 확보하게 된 야곱은 다시 외삼촌을 두려워하게 된다. 야곱은 확보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라반으로부터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두 아내와 더불어 상당한 재산을 얻었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야곱은 결국 아버지의 땅으로 향한다. 형 에서의 그를 향한 증오가 서슬 퍼런 그곳.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야곱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장자권은 물론 두 아내와 더불어 상당한 재산도 갖게 되어, 그가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 어느 정도는 회복한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내 존재를 위협하는 증오에 시달리고 있는가? 우리는 야곱이 마침내 그의 식구들과 더불어 가진 모든 것을 얍복 나루 너머 에서의 영토로 보내고 난 후 홀로 남아 지새우던 밤이 이 질문의 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밤은 존재가 걸린 물음의 밤이었으며, 창세기는 이를 “어떤 분”과의 씨름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 싸움에서 엉덩이뼈를 다쳐 절름발이가 된다. 결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감출 수 없는 형태로 몸에 새겨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야곱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분”은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창32:28).”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이 겨루시다”라고 한다. 약자 야곱은 약은 자가 되어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기만으로 승리를 얻는다. 그러나 이 승리는 야곱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증오로 되돌아온다. 얍복 나루터의 밤은 이 승리의 의미를 묻는 씨름의 밤이다. 야곱이 지금껏 온 생애, 온 힘과 열정을 기울여 쟁취한 것들의 의미가 그 밤에 재와 같이 사라진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허무와 맞닥뜨린다. 그가 자신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획득한 그 모든 것이 그의 삶에 관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어둠, 한 존재가 사라지는 밤이다. 그러나 그 밤에 자신의 결여가 감추거나 메워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진실이라는 사유의 반전이 일어났을 때, 즉 인간에 대한 승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가 된다. 야곱은 아버지의 장자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증하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 창세기는 이 승리가 신성에 대한 반역이나 도발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축복인데, 그것은 아버지의 장자권에 집착하는 삶에서의 해방이자, 증오를 낳는 욕망의 삶으로부터 놓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장자권을 부러워하는 삶에서,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기득권을 부러워하는 자에게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증오, 궁극적인 무의미와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절름발이 야곱은 이 결여의 표시를 훼손된 정상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성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 고유성을 통해 주체와 세계를 “참 좋은” 것으로 창조하는 분이시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장자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인간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장자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에게서 이 장자권을 가진 자의 삶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