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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개성상인과 쌍벽 이룬 병영상인을 아시나요 | |
형성과정·역사 조명 첫 학술대회 15세기 병영물품 조달위해 등장 일제 거쳐 전국화…5일장 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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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선 지금도 “북에는 개성 상인, 남에는 병영 상인”이라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남지역 5일장에선 “병영 상인이 없으면 장이 서지 않는다”고들 했다고 한다.
병영 상인은 개성 상인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상인이라고 했지만, 정작 병영 상인의 면모를 확인하는 연구는 전무했다. 지난 15일 전남 강진군 병영면 면사무소에서 강진군 주최로 열린 ‘병영 상인 학술대회’는 역사 속에 희미했던 병영 상인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처음으로 학술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자리였다 박성수 전남대 교수(경영학과)는 이날 주제 발표를 통해 “병영 상인의 뿌리는 해상왕 장보고의 상인 정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청해진은 1896년(고종 33년) 완도군이 설치되기 전까지 강진현에 속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박 교수는 “장보고는 신라-당-일본 사이의 해상 무역과 민간 교류에 독보적인 중개무역을 수행했다”며 “강진은 도자기 등 장보고 선단의 상품을 제공했던 본사 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강진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지역이자, 무역의 요충지였다.
병영 상인의 본격적인 등장은 1417년 전라병영성 축조에서 비롯됐다. 광산현(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던 전라병영성이 강진현으로 옮겨가면서 수천명의 징발자들이 병영에 몰렸고, 군수용품과 생필품의 수요가 폭증했다. 자연스레 병영 사람들은 물자를 조달하는 상인이 됐다. 박 교수는 “병영 재정을 충당하도록 조정에서 군인들에게 상거래 권한을 줬던 것도 상업 활성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병영 상업은 1895년 전라병영성이 폐쇄된 뒤에도 전국으로 뻗어갔다. 병영 상인들은 1930년대엔 만주까지 무명과 베를 팔러 다녔다. 1963년 면 단위에선 드물게 극장이 생겼을 만큼 번화했지만, 80년대 들어 급속히 인구가 줄었다. 하지만 병영 상인 후예들은 5일장이 점차 쇠퇴하자, 서울·부산·인천·호남·제주 등 전국으로 진출해 상권을 장악했다.
2009년 8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강진신문>에 병영상인의 역사를 추적해 12회에 걸쳐 연재했던 주희춘 기자는 “작은 물건부터 취급해 신용을 쌓고 점차 성장하는 끈기와 근검 정신, 어려운 주변 사람들을 돕는 데 후덕한 것이 병영 상인의 특징”이라며 “역사 속에 희미한 병영 상인의 상인정신을 한국 기업가 정신의 모델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ㅡ광주/정대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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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에는 개성 상인, 남에는 병영 상인”
병영에 극장이 있었다는 이야기... 대단했겠네요. 그래서 병영 상고가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