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순창에서 선교사를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첫 교인이 되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6.25전쟁
직후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순창 장날 울부짖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나 둘 모아 본인의
생계를 담당하던 오이 밭을 팔아 고아원을 만드셨다. 나는 소녀시절을 고아원 아이들과 구분없이 섞여 지냈고 처녀시절에는 그들을 돌봤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아원집 딸이 광주 양로원집 아들과 결혼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초창기에 어려운 양로원 살림에 어르신들은 120명, 의식주가 형편없는 상황이었다. 목욕시설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목욕을 5~6개월하지않고 지내온 어르신들이라 설득해서 목욕시켜드리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숙소 옆 한 칸의 간이목욕통에 물을 끓여 목욕을 하게 했는데 싫다고
버티는 어르신들과 온갖 씨름을 다해야 했다. 사탕이나 타월, 세숫비누를 선물공세용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14년 전,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천혜 경로원'의 새 식구가 되었다. 배는 임신 8개월쯤 되는 임산부 같았고 다리는 휘어져 걷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젊은 시절에는 여러 도시를 돌며 공장생활을 했는데 결혼은 못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름도 쓸 줄몰랐다. 상담 중에 당신의 성씨가 실제로는 문씨였는데 임씨로 되었다는 말을 했다. 면사무소에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그런데 피해의식이 있어서인지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양로원 식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방에만 계시면서 개미가 나온다고 농 사이에 파스를 붙이고, 창문 사이로 찬바람 들어온다고 파스로 도배를 하곤 했다.
그런데 다른 어르신들보다 젊어서 "기철오빠"라고 불렀더니 아주 좋아하셨다. 그렇게 오빠가 되면서 할아버지는 점점 변화되어갔다. 경로원 안에 있는 교회에도 나오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찬송가를 부를 때나 성경을 읽을 때 집중하지 않고 두리번두리번만 하다가 예배를 마치면 곧장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분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는지 천 원씩을 헌금바구니에 넣은 것이었다. 너무 기특(?) 해서 고맙다고 말씀드렸더니 나중에는 더 많이 넣을 것이라며 웃으셨다.
몇 해 전 한글공부반을 시작하려고 학생을 모집했다. 제일 처음 모인 인원은 8명. 그 안에 기철오빠도 포함되었다. 얼마동안은 다들 열심이었다. 하지만 노인학생들은 점점 싫증을 내며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했다. 교수방법이 안 좋아서 그럴까? 아니면 기억력 감퇴와 자존심 문제일까? 고민하다가 선물공세로 학생을 더 모으고 교실도 조용한 방으로 바꿨다. 하지만 6개월이나 1년 정도가 고작이었다. 몸이 아파서, 또는 입원해서, 아니면 세상을 떠나서...숫자가 줄어 한글학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기철오빠는 조금씩 글자를 깨쳤다. 어느날은 경로원 바로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 혼자 오랫동안 서 있다가 오더니
"버스가 37번, 12번, 1번, 9번이 옵디다."
하시는 것이었다. 어찌나 신통하던지 칭찬을 해드렸다.
그 얼마 후 오빠는 핸드폰을 샀다며 직원들에게 전화번호를 다 적어달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거셨다. 숙직하고 퇴근한 직원이 낮잠을 자는 시간에도 전화를 해서 "지금 뭐하고 있어?" 하시고는 전화를 끊었다. 예외가 없었다. 하루는 새벽 5시에 단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국장님! 지금 뭐하고 있소?" "오빠, 저 자다가 깼어요. 이렇게 일찍 전화하지말고 낮에 하시면 좋겠어요." 하고 끊었다. 숫자와 한글을 조금씩 일게 되니 재미가 붙으셨던 것이다. 교회에 와서도 찬송가가 나오는 화면을 보며 입을 딸싹딸싹 움직여 본인이 아는 글씨를 읽었다. 신앙심이 생겼는지 세례도 받으셨다. 헌금도 2천원으로 올렸다. 사무길에 와서 빳빳한 신권으로 바꿔가지고는 헌금을 넣는데 천 원짜리 두 장을 옆 동료들 보란 듯이 쫙 펴서 넣으신다.
깍쟁이였던 예전과는 엄청 달라지셨다. 여름에는 직원들에게 수고한다면서 아이스크림 사먹으라며 천 원을 살짝 주시기도 하고, 가끔 당신이 거주하는 3층 직원들에게 왕만두며 닭튀김도 한턱씩 쏘신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지켜볼때면 신기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한글공부에 단단히 맛을 들여서, 늦깎이로 대학교에 입학한 자원봉사자 남자선생님을 붙여드렸더니 열심히 공부하신다.
지난 9월 말, 나는 후원자 몇 분과 중국에 있는 태항산 관광을 갔다가 귀국하기 전날 호텔계단에서 미끄러넘어져 다쳤다. 귀국하자마자 입원하여 이틀 후 수술 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다. 기철오빠가 전화를 했지만 입원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직원을 통해 편지를 보내오셨다. 편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럴 수가? 어떻게 편지까지 써서 보낼 실력이 되었을까? 언제 이렇게 공부를 해서 본인의 마음을 그대로 전할 정도로 발전했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감사합니다."
너무 너무 보람 있었다. 글씨 연습하라고 드린 이면지에 연필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고쳐쓰고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소중한 편지 덕분에 수술한 내 다리가 금방 나아진 것 같았다.
- 한국기독여성문인회 주부편지 2015년 2월호
승리하는 삶 '오빠의편지' 中에서 -
첫댓글 기철오빠는 늘 버스 정류장과 전화부스를 분주히 다니셨는데~멋져지셨네요^^ 총무님..다리는 어떠세요??
많이 좋아져서 아장아장걷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