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죽산박씨들의 본관지 명칭 연혁에 보면 고려 초에 竹州 라고 했다는 말만 있을 뿐,
이러한 명칭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 초 기록에서 죽주라는 지명이 처음 나오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944년(혜종 1년)에 세운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이다.
이 비의 끝에 죽주(竹州)라는 지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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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직아간 명주(平直阿干 溟州)
기내 명주(奇柰 溟州)
김예경 명주(金芮卿 溟州)
연세대감 명주(連世大監 溟州)
왕간내 원주(王侃奈 原州)
덕영사간 죽주(德榮沙干 竹州)제종사간 죽주(弟宗沙干 竹州)
송암사상 공주(宋嵒史上 公州)
평직촌주 제주(平直村主 提州)귀평일길간 제주(貴平一吉干 提州)
견필촌주 냉주(堅必村主 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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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州:경기도 죽산군(竹山郡)의 고려 초 때 이름(『新增東國輿地勝覽』 卷8, 竹山縣條 참조).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3위의 기록으로 보아 죽주 명칭도 광주와 같은 940년에 붙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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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경기도) [ 安城市(京畿道) ]
정의 경기도4 남단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이천시·음성군, 서쪽은 용인시·평택시, 남쪽은 천안시·진천군, 그리고 북쪽은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6′∼127°31′, 북위 36°53′∼37°09′에 위치한다. 면적은 553.51㎢이고, 인구는 16만 9,545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1개 면, 3개 동, 410개 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에 있다.
자연환경
차령산맥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어 동북쪽에는 400∼500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에는 100m∼200m의 낮은 구릉이 나타나고 있다.
동쪽에는 마옥산(磨玉山, 445m)·묘룡산(妙龍山, 174m)·마이산(馬耳山, 472m)·황색골산(353m)·덕성산(德成山, 521m)·서운산(瑞雲山, 547m) 등이 이천시·음성군·진천군과, 서쪽에는 묘봉(妙峰, 229m)·신선봉(神仙峰, 308m)·덕암산(德巖山, 165m)이 용인시·평택시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에는 쌍령산(雙嶺山, 491m)·경수산(331m)·딸기봉(415m) 등이 용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부 산록지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安城川)은 도중에 한천(漢川)을 합류하고 서북부에서 발원하는 도곡천·도량천은 남진하면서 한천에 합류한다. 고남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한천은 남서진하는 안성천과 합류한다. 군의 중북부에서 발원하는 모두천·기술천 등이 안성천에 합류하고 남부의 금광저수지의 물과 청중천은 서진하면서 안성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안성천은 황구지천(黃口池川)·청룡천(靑龍川)과 합치면서 천안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하천지역에 넓은 충적 평야인 안성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북부에는 청미천이 흐르는데 하천 주변에는 죽산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지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에 속한다. 연평균기온은 11.5℃, 1월 평균기온 ·4.9℃,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강수량은 1,200㎜ 내외이다.
역사
지금까지 이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지만 인접지역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곳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없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죽산면 장원리와 삼죽면 내장리·율곡리에서
민무늬토기와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백제 비류왕 초기에는 안성천을 경계로 마한과 국경을 이루어
마한지역 병탄정책을 실현한 귀중한 병참기지였다.
그 뒤
369년(근초고왕 24) 백제가 마한 전역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이남의 백제영토를 점령하고,
중앙집권적 제도를 실시할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奈兮忽)로 불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가 개혁될 때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되었다.
940년(태조 23)안성현(安城縣)으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 단련사가 두어졌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 지금의 수원)에 잠시 이속되었다가 뒤에 천안에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 다시 분리되어 처음으로 감무가 배치되었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성(竹州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 분투하여 적을 격퇴시켜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송도가 유린되고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는 국난을 당했을 때에도,
양광도(楊廣道 : 지금의 경기도)의 다른 고을은 모두 항복했으나 이곳 사람들은 계책으로 적에게 거짓 항복하여
주연을 베풀어 적장을 유인, 6명을 참수하는 개가를 올려서 적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송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극적루지(克敵樓址)가 안성읍에 있으며, 이 공로로
1362년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수주 관할이었던 양량(陽良)·감미(甘彌)·마전(馬田)·신곡(薪谷) 등 네 부곡이 안성군에 소속되었다. 1366년 공민왕의 총신 김용(金鏞)의 수뢰가 탄로나 마전·신곡은 다시 수주로 환속되었다.
1399년(정종 1)안성군 양양부곡이 분리되어 양지현(陽智縣)이 설치되었다.
안성시는 고려 현종 때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413년(태종 13)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竹州)는 이 때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1434년(세종 16)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죽산의 별칭으로는 음평(陰平)·연창(延昌)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언수(洪彦秀, 일명 洪自修)와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전후 5년간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적군의 북상진로를 저지하고자 분전하다가 35세로 순절한 그의 아들 홍계남이 있다.
또 홍계남과 같이 기호·호서지방의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 이덕남 등 두 의병장의 전첩비가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있다. 이 때 축성한 서운산성(瑞雲山城)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차령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중 경기·충청지방의 군사를 모집하여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공수진퇴(攻守進退)의 전술로 왜장 후쿠지마(福島正則)가 거느린 4,500명의 죽산성 주력군을 상대로 황소를 이용한 복개전차대(覆蓋戰車隊) 공격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변이중(邊以中)의 죽산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 무장(武將) 박찬신(朴贊新), 중군(中軍)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 등이 이끄는 정예 정규군과 이인좌의 무리인 정희량(鄭希亮)·박필현(朴弼顯)·남태징(南泰徵)·박필몽(朴弼夢) 등의 반군이 이곳에서 대진하여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전승을 기념하는 도순무사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가 낙원동에 있다.
1895년공주부 안성군·양성군과 충주부 죽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경기도 안성시·양성군·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성군·양성군과 죽산군의 일부가 병합하여 안성군으로 되었으며,
이 때 12개 면 170개 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읍내면이 안성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7월 1일안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의병항쟁으로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시내 임근수(林根洙)·김명기(金明起), 보개면의 강태영(姜泰榮), 공도면의 오인근(吳寅根), 양성면의 오장환(吳章煥) 등이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전개된 원곡·양성지역의 3·1운동은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의 주도로 2,000여 주민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경주재소(日警駐在所)·우편소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인군 고삼면이 편입되었고, 1983년 2월 15일원곡면 용이리·죽백리·청룡리·월곡리와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보개면 양복리 일부가 금광면으로, 삼죽면 남풍리·동평리·가현리가 보개면으로 편입되었다.
1992년 10월 1일이죽면이 죽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4월 8일대덕면 건지리 일부와 소현리 일부가 안성읍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에 도농통합으로 새로운 안성시가 되었고, 이 때 안성읍을 3개 동(안성1·2·3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1년 6월 1일에 공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죽산면 용설리, 공도면 만정리, 원곡면 칠곡리에서 발굴된 청동기·철기시대 유물이 있다.
성지로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죽산면 매산리의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호),
일죽면 금산리의 망이산성(望夷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138호),
양성면 방신리의 무양성(舞陽城)과 조선시대에 축성된 금광면 금광리의 금광산성(金光山城),
비봉산토성, 서운면 북산리의 서운산성(瑞雲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81호)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홍건적을 섬멸한 기념으로 지은 극적루가 시내에 있었으나 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죽산면의 안성죽산리오층석탑(보물 제435호)·안성죽산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안성죽산리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안성죽산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매산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이 있다.
또한 칠장리의 칠장사(七長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 경내에 칠장사오불회괘불탱(국보 제296호)·칠장사삼불회괘불탱(보물 제1256호)·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칠장사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칠장사소조사천왕상(七長寺塑造四天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칠장사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안성칠장사괘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안성죽림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가 있고, 안성 봉업사지(경기도 기념물 제189호)에는 안성봉업사석불입상(安城奉業寺石佛立像, 보물 제983호) 등이 있다.
또한, 금광면 상중리의 석남사(石南寺)에는 석남사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석남사영산전(石南寺靈山殿, 보물 제823호)·석남사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이 있고, 서운면 청룡리의 청룡사(靑龍寺)에는 청룡사동종(보물 제11·4호)·청룡사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57호)·청룡사감로탱(보물 제1302호)·청룡사금동관음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청룡사대웅전(보물 제824호)·청룡사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9호)·청룡사사적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4호)가 있다.
그 밖에 삼죽면의 기솔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 대덕면 대농리의 안성대농리석불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6호), 죽리에 안성죽리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원곡면 성은리의 청원사칠층석탑(淸源寺七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과 청원사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고삼면의 신창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시내의 안성도기동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이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불연(佛緣)이 많았던 곳으로 혜소국사·언기대사(彦機大師)·벽응대사(碧應大師) 등이 이곳 출신이다. 현존하는 사찰로는 청룡사·칠장사·청원사·운수암(雲水庵,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명륜동의 안성향교(安城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7호), 죽산면 죽산리에 죽산향교(竹山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양성면 동항리에 양성향교(陽城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8호)와 덕봉리의 덕봉서원(德峰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을 비롯하여 도기서원지(道基書院址)·남파서원지(南坡書院址)·계고당(稽古堂)·동안강당지(東安講堂址) 등이 있다. 이외 고삼면 월향리에 서흥김씨삼강정문(瑞興金氏三綱旌門, 경기도 기념물 제77호)가 있다.
원묘 및 신도비로는 대덕면 토현리의 김중만장군영정(金重萬將軍影幀, 보물 제715호)·김중만장군공신록 및 교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의 인목대비친필족자(仁穆大妃親筆簇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미양면 구수리의 이덕남장군묘(李德男將軍墓, 경기도 기념물 제26호)·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가 있다.
또한 낙원동의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明恒先生討賊頌功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일죽면 고은리의 영창대군묘(永昌大君墓, 경기도 기념물 제75호), 삼은리의 안성유명건묘갈비(安城兪命建墓碣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양성면 덕봉리에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가 있다.
그리고 기흥읍 상갈리의 경기도립박물관에는 조영복선생영정(趙榮福先生影幀, 보물 제1298호)·연행일록부연행별장외명현간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4호)·서거정선생묘지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이 있다.
고건축으로는 낙원동의 안성객사(安城客舍,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보개면 북좌리의 전주이씨서원군파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17호), 서운면 청룡리의 이해룡고가(李海龍古家,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양성면 덕봉리의 안성오춘환가옥(安城吳春煥家屋, 전통건조물 제2호) 등이 있다.
기독교문화재로는 안성구포동성당(安城九苞洞聖堂, 경기도 기념물 제82호), 양성면 미산리의 미리내성지와 김대건(金大建)신부묘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유기장(鍮器匠,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의 주물장(鑄物匠)과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7호) 기능보유자가 이 지역에 있다. 또한 줄타기(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입사장(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안성남사당풍물놀이(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안성향당무(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4호) 등이 있다.
보호수로는 죽산면 칠장리의 칠장사나옹노송, 구포동의 느티나무, 원곡면 칠곡리의 느티나무와 지문리의 홰나무, 대덕면 삼한리의 은행나무, 미양면 용두리의 엄나무와 안성향교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한편 3·1만세운동 현장인 원곡∼양성간의 국도변에는 높이 10.7m의 삼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되어 애국선열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안성향교·죽산향교·양성향교 등이 있었다. 안성향교는 1533년(중종 28)명륜동에 창건되었고, 죽산향교도 같은 해 죽산면 죽산리에 창건되었으며, 양성향교는 17세기 숙종 때에 양성면 동항리에 창건되었다.
1692년(숙종 18)경봉남동에 홍우원(洪宇遠)을 받들기 위해 그의 후학들이 남파서원을 설립하였으며, 1668년 송시열(宋時烈) 등이 그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을 추모하여 도기동에 도기서원을 세워 1669년에 사액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1695년양성면 덕봉리에 오두인(吳斗寅)을 배향하기 위해 사림들이 덕봉서원을 설립하여 1697년에 사액되었다. 또한, 홍우원이 수학하였다는 계고당이 대덕면 소현리에 있었으나 1871년 훼철되었고, 유언집(兪彦鏶)을 추모하여 그 문하생들과 유씨문중에서 1786년(정조 10)경 세운 동안강당이 있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2년 이종두(李鍾斗)가 사립 안성소학교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안성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이 최초이다. 1907년양성면 미산리에 강도영(姜道永) 신부가 세운 사립 해성학교(海星學校), 1909년 안성천주교회내에 프랑스 신부 공베르(한국명 孔安國)가 세운 안법학교(安法學校)가 있다.
또한 1910년양성면 동항리의 적성학교(赤城學校)와 원곡면 산하리에 정응설(鄭應卨)이 설립한 산창학교(山創學校) 등의 사립학교 및 1911년 양성초등학교와 죽산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9년석정동에 안성농업학교가 개교하였고, 1943년 안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안성농업학교는 1965년 안성농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1970년 초급대학 과정인 2년제 안성농업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79년 안성농업전문대학으로 1993년 안성산업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또, 1978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가 설립되었다.
2009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4개 교(분교 2개 교), 중학교 12개 교, 고등학교 8개 교와 두원공과대학, 동아방송대학, 한국폴리텍여자대학과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한경대학교가 있다.
1955년에 개원한 안성문화원은 향토문화발전에 이바지하며, 백성문화제도 개최되고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45개, 유교교당 3개, 천주교성당 6개, 개신교교회 110개가 있다.
민속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남사당(南寺黨)놀이와 거북놀이를 들 수 있다.
원래 남사당놀이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지만 그 원조는 역시 안성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였다고 한다. 1860년대 서운면 청룡리에는 남사당집이 여덟 채가 있었다 하여 팔사당마을이라 불렸고, 바우덕이(박우덕, 또는 김암덕)라는 이가 남사당의 꼭두쇠로서 재질이 총명하고 소고와 춤에도 뛰어나 그에 대한 속요(俗謠)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안성남사당패는 그 뒤 안성복만이패·원육덕패·이원보패로 이어지는데,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을 서며 쇠가락을 전수받은 김기복(金基福)은 오늘날 안성남사당풍물놀이에서 상쇠로 전통 웃다리의 쇠가락을 치고 있다.
남사당패는 우두머리인 꼭두쇠, 기획담당자격인 곰뱅이쇠, 각 연희종목의 연희자 중 선임자격인 뜬쇠, 각 뜬쇠 밑에 있는 기능자들인 가열, 초보자인 삐리, 기능을 잃은 노인들인 저승패, 등짐꾼인 나귀쇠 등 40∼50명으로 구성되며, 풍물놀이를 하는 뜬쇠만 해도 꽹과리·징·장구·북·날라리·버꾸 등이 있다.
이들은 다시 상무동님·회덕님(선소리꾼 중 우두머리)·버나쇠(대접돌리기 중 우두머리)·얼른쇠(요술쟁이 중 우두머리)·덜미쇠(꼭두각시놀음 조종자 중 대잡이)·살판쇠(땅재주꾼 중 우두머리)·어름산이(줄꾼 중 우두머리) 등으로 나뉘어 한패거리가 되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다.
이 때 아무 데나 가서 노는 것이 아니라 곰뱅이쇠가 마을에 미리 들어가서 허락을 받고, 터를 빌려주는 곳에서 마당씻이굿을 벌여 구경꾼들을 판으로 끌어들인 다음 한바탕 크게 논다.
남사당놀이는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마당풍물놀이’라 하여 농악으로 통하는 놀이이고, 둘째는 ‘버나놀이’로 대접을 돌리는 묘기인데 양반을 희롱하는 재담과 소리가 곁들여진다. 셋째는 ‘살판놀이’로 앞곤두·뒷곤두 등 어려운 재주놀이를 벌이며, 넷째는 ‘어름놀이’라 불리는 줄타기놀이로 재담과 소리를 곁들인다.
다섯째는 ‘덧뵈기놀이’인 탈놀음인데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네 편으로 되어 있고, 여섯째는 끝마당으로 ‘덜미놀이’라는 꼭두각시놀이인데 이것도 박첨지마당·평안감사마당 등 일곱 거리로 되어 있다.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제로는 일죽면 고은리 마옥산(磨玉山, 일명 五音山)의 산신제와 방초리의 천제를 들 수 있다.
마옥산의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순에 날을 받아 저녁 5시쯤 행해진다. 산 밑 송림이 무성한 곳에 산신당이 있어 이곳에 소머리를 놓고 제를 지내는데, 제물과 절차가 엄격한 관례로 규제된다.
제관은 목욕재계한 다음 사흘간 외부출입을 삼가고 근신하며, 젯날이 결정되면 어느 누구도 동네의 출입이 금지된다. 제관의 축원은 풍년과 태평성세를 비롯하여 가축의 역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나라에 대한 제사인 국소제(國所祭)를 먼저 지낸 다음 산신제를 지내는 것이 특이하다.
산신제를 지내는 동안 동민들도 각각 떡을 쪄서 일제히 집에서 고사를 지내고, 산신제가 끝나면 마을은 축제분위기가 되어 잔치가 벌어진다. 이곳의 산신제는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다고 한다. 계동·도기동과 삼죽면 기솔리에서도 이와 동일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설화·민요
이 시에는 「오뉘힘내기전설」·「달래지고개전설」 및 사찰유래담·지명유래담과 많은 인물전설·효자전설 등이 전하고 있다.
칠장사 안에는 동강난 비석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난입하여 만행을 저지를 때 홀연 한 노승이 나타나 꾸짖으니, 노한 가토가 칼로 내려치자 노승은 간 곳이 없고 동강난 비석만 서 있었다고 한다.
죽주산성에도 「오뉘힘내기전설」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오라비가 서울에 다녀오는 동안 누이는 성을 쌓는다는 것으로, 그 승부 여하에 따라 서로의 목숨이 걸려 있는 비장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안성 도기동 사람들은 트집쟁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은 갓의 명산지였던 이 마을사람들이 갓을 제작하는 도중에 틀어진 갓을 바로잡을 때 ‘트집잡는다.’라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달래지고개전설」은 비오는 날 이 고개를 넘어가던 오라비와 누이가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해 오라비가 자살하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아차지고개전설」은 충주의 구두쇠 자린고비가 장독에 빠졌던 파리의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워서 그 파리를 쫓아오다가 이 고개에서 놓치고, “아차, 이젠 놓쳤구나!”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담이다.
개심사(改心寺)의 유래담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부처의 가슴에 칼을 꽂은 중이 뒤에 회개하고 불상에서 칼을 빼내자, 칼에 ‘改心’이라는 글이 박혀 있어 절이름을 개심사라 했다는 전설이다.
그 밖에 조선 충신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명나라를 일으켰다는 주원장(朱元璋)에 관한 설화, 명의 이제마(李濟馬)의 출생담, 정약용(丁若鏞)의 명재판, 황희(黃喜)정승이야기, 「개와 고양이의 구슬다툼」, 「다시 찾은 옥새」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이 시에 구비 전승되는 노동요로는 「논매기소리」·「모내기소리」·「나무꾼소리」등이 있고, 의식요로는 「상여소리」·「달구소리」, 그리고 정월이나 팔월 추석에 거북놀이를 할 때 복덕을 빌기 위해 부르는 「고사반」 등이 있다.
그 밖에 타령류로서 「장타령」·「창부타령」·「노랫가락」·「방구타령」, 그리고 “칙칙폭폭 칙칙폭폭/한강다리를 건너간다”라는 「기차타령」 등이 있다.
“여기두 어허하나/저기두 또하나”라는 「하나하나」는 경기도지방의 공통된 모내기소리로 가락이나 가사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논매기소리」를 소개하면 “어하어기럴럴 상사디야/여기하고서 어느데냐/어하얼럴럴 대허리야/일락은 서산에 해는 뚝떨어지고/월출동녘에 저기 저 달이 뜬다/어하어기럴럴 대허리야…….”와 같다. 가락이 단조로우나 길게 올려 뻗으며 구성지고 후렴은 힘찬 것이 특징이다.
다음과 같은 「방아타령」은 초벌김매기(이른바 ‘아시맨다’라고 함.)할 때 주로 부르고, 가끔 디딜방아를 찧을 때에도 부른다. 그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방아가 누구 방아냐/유씨네 가중에 방아로구나/에이여라 방호/동네방네 연재방아/에이여라 방호/동네방네 디딜방아/에이여라 방호/젱이읍내는 물레방아/에이여라 방호…….”
또한 지게목발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나무꾼소리」는 나무꾼의 외로운 마음을 외로운 나무에 비유하여 청춘의 늙어감을 탄식하는 내용으로, 애상적인 가창민요이다. 이 고장에는 ‘밭노래’는 거의 없는데, 이는 이 고장이 논농사 중심이기 때문이다.
「상여소리」는 대체로 인생의 허무와 권선징악적인 인과응보를 읊고 있다. 「창부타령」은 임을 그리워하는 연정을 제재로 하여 청춘시절에 실컷 놀자는 내용으로, 가락은 장단과 고저가 다양하며 흥겨운 유흥민요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50%가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지는 30.7%인데, 경지 중 논이 1만1,860ha, 밭은 5,290ha, 과수원은 1,267ha 등이다. 고삼(古三)저수지·금광(金光)저수지·마둔(馬屯)저수지·칠곡(七谷)저수지 등이 주변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옥수수·콩·팥·녹두·감자·고구마와, 채소류로 고추·무·배추·파·마늘·당근,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 등이 생산되고 있다. 산지가 많은 이 지역에는 밤·도토리·은행·대추 이외에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등이 이 지역을 지나고 있는데 고속도로 변에는 목축업·과수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포도가 많이 생산된다. 과실류로 포도·배·사과·복숭아가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22%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 인구의 13.7%이다. 주요 제조업은 식료품제조업·화학 공업·비금속공업·조립금속공업이다. 특히 유기제조업이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
상업시설은 일반시장이 3개가 있는데 읍내에 있는 유기 시장이 잘 알려져 있으며 상설시장의 개설에도 불구하고 안성장(5일장)이 열리고 있다. 안성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로 안성장은 2·7일에 열리는데 안성장은 전국을 상대로 하는 장이다.
이곳에서는 곡류·유기제품·제지류·포도를 비롯한 청과류·채소류가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열리는 우시장은 과거에는 옛날에는 활기를 띠었으나 쇠퇴하고 있다. 안성장 이외에 죽산면의 죽산장이 3·8일, 일죽면의 일죽장이 5·10일에 열리고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서부지역을 남북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동쪽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2008년 말 평택~음성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을 분산시켜주고 있다.
국도 38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국도 45호선이 서북부의 원곡면·양성면을 서남∼북동방향으로 지나고 국도 17호선이 동북쪽에서 중부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고 있다.
지방도로로 339호선·392호선·387호선 등이 안성 시내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지나고 있어 교통로가 잘 발달한 지역이다. 철도는 안성∼천안의 안성선이 있었으나 1989년 폐선되어 교통은 도로에만 의존하고 있다.
관광
이 시는 차령산맥의 지세를 받아 산지와 분지가 발달하고 안성평야 지대에서는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곳은 동북부에 마옥산·마이산·무마산·서운산 등이 연봉을 이루면서 산간 계곡이 수려하고 안성천 유역에 주거지가 발달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많은 전설과 사찰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관광위락시설과 농어촌 위락단지도 조성되고 있어 주요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서울로 왕래하던 길목에 죽주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안성은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요충지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 들고 각종 농산물과 생활수공품들이 집결되었던 문화의 접경지대로 유명했었다.
‘안성맞춤’이라고 할 정도로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상설시장 기능도 한때 가지고 있던 고장이다. ‘안성맞춤’이란 안성 유기그릇과 가죽꽃신이 유명하여 생겨난 말이다.
이와 같이 4통8달하는 육로를 따라 삼남과 한양으로 통하는 이곳의 안성시장 5일장은 조선 3대 시장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상업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관광명소로서는 미륵동네와 사찰들이 많고, 서운산 계곡을 비롯한 저수지와 관광과수단지·산성·향교 등이 있다. 특히 안성 땅에는 언제나 소박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 왔던 미륵부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평 미륵, 기솔리 미륵, 아양동 미륵, 대농리 미륵이 그 대표적이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망을 갖고 마을 어귀나 마을 중심가에 미륵불을 세우고 미륵불의 넉넉한 미소로 그들의 생활에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운산계곡·칠장사·혜초국사비·죽산리의 동간지주·칠장사 철제동간·죽산5층석탑·석남사·안성향교·죽주산성·안성유기 관광토산물·과수단지·고삼저수지·대림동산 수영장·금광저수지·현충탑·안성컨트리클럽·안성공원·고삼농어촌유양단지 등은 이 지역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일곱 도적이 개과천선해 성인이 되었다는 칠장사와, 남사당의 잔영이 남아 있는 청룡사와 불당골, 서운산 깊숙이 숨어 있는 석남사 등은 그 장쾌함에 가슴 벅차는 곳이다.
또한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형성 발전시킨 유랑예술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남사당패’는 안성의 뿌리 깊은 사회적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다. 안성을 무대로 한 유명한 소설 중 허생전·장길산·임꺽정 등의 무대가 이곳 안성 땅이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읍·면
1. 공도읍(孔道邑)
시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31.94㎢, 인구 4만 7,462명(2008년 현재). 읍 소재지는 승두리이다. 본래 양성군(陽城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성군 공제면(孔梯面)·도일면(道一面)·덕산면(德山面)·구룡동면(九龍洞面)·구천리면(九千里面)·영통면(令通面) 등의 각 일부지역이 합쳐져 12개 리로 재편되면서 공도면이 되었다.
면 명칭은 공제면의 ‘공’자와 도일면의 ‘도’자를 딴데서 유래하였다. 1983년소사리(素沙里)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이속되어 현재의 11개 리가 확정되었다. 2001년 6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 전체가 별다른 산지를 찾을 수 없는 평지로서, 읍의 중앙을 흐르는 승두천·유천유역에 충적평야가 크게 발달해 있으며 일부지역에 침식평야도 분포한다. 전체면적에 대비한 경지율이 매우 높고, 논농사를 주로 행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팥 등이며, 채소류로는 수박·참외·오이·호박 등의 산출량이 많다. 또한, 목축업도 발달하여 한우·젖소·닭·산양·오리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전자·식품 등의 제조업체 수도 적지 않으며 숙박 및 음식점 업체수도 다수 산재한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읍의 중앙을 종단하는 가운데 안성인터체인지가 위치하여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 흐름상의 요지 역할을 맡는다. 그 밖에 38번 국도가 평택시에서 이어져 읍의 중앙을 횡단하면서, 364번 지방도 및 3번 시도와 연결되는 등 많은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만정리 신기마을에 고인돌유적이 있다. 관광자원으로 만정리에 위치한 만수저수지와 마정리의 대림동산이 휴양시설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71년 전원주택단지를 목적으로 조성된 대림(大林)동산은 33만 평 규모의 구릉지대에 중앙공원과 각종 체육시설들이 들어서 인근 도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시의 대표적인 관광시설로 각광받는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 중학교 1개 교와 한국폴리텍여자대학이 있다.
승두(蠅頭)·불당(佛堂)·웅교(熊橋)·신두(薪頭)·용두(龍頭)·양기(兩基)·마정(馬井)·만정(萬井)·건천(乾川)·중보(中洑)·진사(珍沙) 등 11개 리가 있다.
2. 고삼면(古三面)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7.80㎢, 인구 2,182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가류리이다.
본래 양지군(陽智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양지군 고동면(古東面)·고서면(古西面)·고북면(古北面) 등 3개 면과 죽산군(竹山郡) 서삼면(西三面) 풍정리(楓井里) 일부 지역이 합쳐져 7개 리로 재편되면서 용인군(龍仁郡) 고삼면이라 하였다.
면의 명칭은 고동·고서·고북 등 3개 면의 앞글자인 ‘고’자를 따고 3개 면을 통합했다는 의미에서 ‘삼’자를 붙였다고 한다. 그 뒤 1963년용인군에서 안성군으로 관할구역이 바뀌었다.
중앙 북쪽에 쌍령산(雙嶺山, 491m), 북동쪽에 경수산(鏡水山, 326m), 중앙부에 금병산(金屛山, 235m) 등이 솟아 있다. 남단의 한천(漢川)과 북동부의 쌍지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일부 분포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구릉성 산지이며 논과 밭의 경지면적은 시 전체에서 하위에 속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임산물로는 산나물·밤·대추·잣 등이 나는데 특히 산나물 산출량은 매우 많다. 축산업으로는 돼지사육이 시 전체에서 제일 활발한 곳이며, 이에 반해 제조업 발달은 미미하다.
교통은 392번 지방도가 면의 남쪽에서 중앙을 지나 북동쪽으로 향하면서 북단으로 이어지는 11번 시도와 만난다. 문화유적은 신창리에 삼층석탑, 월향리에 서흥김씨삼강정·한동수효자비(韓東秀孝子碑)·유양식묘(柳陽植墓)와 삼은리에 안성유명건묘갈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가류(佳柳)·쌍지(雙芝)·삼은(三隱)·신창(新倉)·봉산(鳳山)·대갈(大葛)·월향(月香) 등 7개 리가 있다.
3. 금광면(金光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1.72㎢, 인구 8,903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내우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조령면(鳥嶺面)·대문면(大門面)·가동면(加洞面)·월동면(月洞面) 등 4개 면이 통합되어 15개 리로 개편되면서 금광면이라 하였다. 1987년보개면의 양복리 일부가 편입되어 신양복리가 신설되었다.
면 중앙 북쪽에 청량산(淸凉山, 340m)이 솟아 있고 북동쪽은 칠장산(七長山, 492m)·칠현산(七賢山, 516m)·덕성산(德城山, 520m) 등 비교적 고봉들이 면 전체를 굽어보는 형세이며, 중앙 하단의 국사봉(國師峰, 311m)을 제외하고는 서부쪽으로는 낮은 지역이다.
면의 중앙을 흐르는 한운천(閑雲川)·현곡천(玄谷川)·옥정천(玉井川) 등이 금광저수지와 마둔저수지로 흘러들고, 월동천(月洞川)과 현암천(峴巖川)이 안성천에 합류하면서 주변 유역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시 전체에서 제일 넓은 면적이나 상대적으로 논과 밭 등의 경지면적이 넓지 않고 경지율 또한 높지 않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 등의 농산물 외에 버섯·산나물 등인데, 임산물 중에서 특히 버섯의 생산량은 시 전체에서 제일 많다. 제조업 분야는 아직 활발한 편이 못 된다.
교통은 313번 지방도가 면 서부지역을 종단하고 387번 지방도가 면의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종단하면서 시의 중심지인 시청방향으로 향한다. 이 외에 북쪽의 도로망으로 5번 시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상중리에 석남사대웅전·석남사마애여래입상·석남사영산전·석남사오층석탑·석남사부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오흥리에 마둔사(馬屯祠)·삼한국대부인순흥안씨묘, 금광리에 금광산성, 오산리에 선돌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금광(金光)·오흥(五興)·사흥(四興)·삼흥(三興)·옥정(玉井)·현곡(玄谷)·한운(閑云)·오산(梧山)·장죽(長竹)·석하(石下)·상중(上中)·내우(內隅)·개산(開山)·신양복(新陽福) 등 14개 리가 있다.
4. 대덕면(大德面)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0,94㎢, 인구 1,1665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건지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성군 죽촌면(竹村面)·소촌면(所村面)·견내면(見乃面)·금곡면(金谷面) 등 4개 면과 양지군(陽智郡)의 고서면(古西面)과 양성군(陽城郡) 송오리면(松五里面) 각 일부가 통합되어 14개 리로 구성되었고 안성군 대덕면으로 개칭되었다.
면 전체에 완만한 침식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서쪽과 북쪽 면계의 한천 유역과 남쪽 경계인 안성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배·포도 등의 과실류와 함께 수박·토마토 등의 생산량도 많은 편이다. 축산업으로는 닭을 비롯하여 돼지·사슴 등이 사육된다.
제조업은 건지리 일대에 20만 평 규모의 안성시범공단 안에 무공해 업종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업체가 들어서 있다. 특히 대규모 제조업체가 많은 관계로 시 전체에서 제일 많은 제조업 종사자가 일하고 있다. 이 외에 숙박 및 음식점업도 활발한 편이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 남단을 횡단하고, 387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연결하며 392번 지방도가 면의 북동단을 종단한다. 이 외에 10·14번 시도 등의 도로망이 있다.
문화유적은 토현리에 김중만장군영정과 김중만장군공신록 및 교지, 대농리에 석불입상, 진현리 굴암사에 굴암사마애여래좌상·굴암사마애선각불좌상, 명당리에 고분 등이 있다. 소현리 소천(蘇村 : 일명 소마니)마을 뒷산은 백로와 왜가리의 서식지로 알려졌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고등학교 1개 교, 대학교 1개 교가 있다.
건지(乾芝)·죽(竹)·내(內)·신령(新令)·모산(茅山)·보동(湺東)·소현(蘇峴)·토현(兎峴)·대농(大農)·진현(辰峴)·삼한(三閑)·무릉(舞陵)·명당(明堂)·소내(素內) 등 14개 리가 있다.
5. 미양면(薇陽面)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98㎢, 인구 7,321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양지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성군 목촌면(木村面)·만곡면(晩谷面)·진두면(辰頭面)·우곡면(于谷面) 등 4개 면과 죽촌면(竹村面) 외평(外坪) 일부가 합쳐져 18개 리로 구성되면서 미양면으로 개칭되었다.
남서쪽의 미양산(93m), 남동쪽 경계의 진령봉(125m) 등의 낮은 산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이 평탄한 지형이다. 북단 경계인 안성천을 필두로 면 곳곳을 관류하는 청룡천(靑龍川)·신릉천(新陵川)·양변천(兩邊川)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고,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훨씬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이며, 사과·배·복숭아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채소류로 수박·오이·토마토 산출이 상당량에 달하고, 한우·젖소·돼지·산양·개 사육과 함께 양봉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계륵리에 안성제2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식품·화학·섬유·자동차부품업 등이 발달하였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면 서쪽 끝 신계리를 통과하며, 392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면의 북단을 통과하여 북동쪽으로 횡단한다. 이 외에 1·3·8번 시도가 면의 여러 곳을 연결하면서 392번 지방도와 만난다.
문화유적은 구수리에 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이덕남장군묘(李德男將軍墓), 갈전리에 홍자수묘(洪自修墓), 용두리에는 약 250년 된 엄나무가 있다. 법전리에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양지(陽支)·후평(後坪)·정동(井洞)·마산(馬山)·진촌(眞村)·신계(新溪)·개정(開井)·법전(法田)·고지(古地)·강덕(康德)·양변(兩邊)·구수(九水)·계륵(桂勒)·보체(保體)·구례(九禮)·갈전(葛田)·용두(龍頭)·신기(新基) 등 18개 리가 있다.
6. 보개면(寶蓋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53.01㎢, 인구 6,485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불현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북좌면(北佐面)·가사면(加士面)·거곡면(居谷面)·율동면(栗洞面)·기좌면(其佐面) 등 5개 면의 30여 개 리가 통합되어 18개 리로 개편되면서, 보개면이 되었다.
198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복리의 일부 마을이 금광면으로 이관되었고, 삼죽면의 남풍·동평·가현 등 3개 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면의 북쪽에 달기봉(415m), 동쪽에 국사봉(國師峰, 438m)·보개산(347m), 남서쪽에 청량산, 서쪽에 비봉산(飛鳳山, 278m), 중앙에 돌섯산(179m) 등의 산지가 면 전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남단을 흐르는 안성천을 비롯하여 남풍천·가율천·오두천 등 하천유역에 충적층이 발달하였다. 특히, 신장(新長)·신안(薪安)·북좌(北佐)·남풍(南楓) 등의 저수지가 면 곳곳에 위치하여 관개용수가 풍부한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임산물 재배가 활발한데 밤·호도·대추·잣·버섯·산나물 등이 대표적이다. 축산업은 한우·젖소·돼지·사슴·오리 등의 사육량이 적지 않고, 이 외에 양봉이 제일 활발한 곳이다. 제조업은 금속·레미콘·섬유업 관련 업체가 있으나 대부분 영세한 규모이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 남단을 횡단하고 339번 지방도가 면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한다. 그 밖에 5·12번 시도의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북좌리에 전주이씨서원군파묘역(全州李氏瑞原君派墓域)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가 있다.
불현(佛峴)·북좌(北佐)·오두(烏頭)·신안(薪安)·보평(洑坪)·구사(九士)·내방(內芳)·동신(東新)·양복(陽福)·상삼(上三)·기좌(其佐)·곡천(曲川)·이전(泥田)·가율(加栗)·적가(迪加)·신장(新長)·남풍(南楓)·동평(東平)·북가현(北加峴) 등 19개 리가 있다.
7. 삼죽면(三竹面)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9.04㎢, 인구 3,804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월리이다.
본래 죽산군(竹山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죽산군 서일면(西一面)·서이면(西二面)·서삼면(西三面) 등 3개 면이 통합되어 13개 리의 행정구역을 관할하였고 죽삼면(竹三面)이라 불리다가 삼죽면으로 면 명칭이 바뀌었다.
1987년 1월에 남풍(南楓)·동평(東平)·가현(加峴) 등 3개 리가 보개면으로 이속되어 관할구역이 10개 리로 줄어들었다.
산지로는 북서부에 비봉산(飛峰山, 373m), 동쪽에 도덕산(道德山, 366m), 남동쪽 끝에 칠장산, 서쪽 보개면과 인접하여 국사봉·보개산 등이 솟아 있다. 하천으로는 남단에서 중앙쪽으로 흐르는 안성천, 서부의 기솔천, 북단을 관류하는 율곡천 유역에 충적층이 형성되었고, 덕산(德山)·회암(回巖)·미장(美獐) 저수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추 등과 인삼의 특용작물이 있고, 버섯·잣·도토리·은행 등의 임산물 재배도 활발하다. 이 외에 한우·돼지의 사육량도 상당하며, 특히 양봉도 발달하였다. 제조업은 덕산리에 덕산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새로운 공업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 남서쪽에서 중앙을 관통하여 북동쪽으로 횡단하며 5·12·17번 시도 등 지방 도로망이 확충되는 중이다. 문화유적은 기솔리에 석불입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가 있고, 기솔리에 동아방송대학이 있다.
용월(龍月)·진촌(眞村)·율곡(栗谷)·덕산(德山)·내장(內長)·배태(排台)·내강(內康)·미장(美獐)·마전(麻田)·기솔(基率) 등 10개 리가 있다.
8. 서운면(瑞雲面)
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6.28㎢, 인구 4,443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덕곡면(德谷面)·기촌면(奇村面)·입장면(立長面)·송죽면(松竹面) 등 4개 면 지역이 합쳐져 15개 리로 개편되면서 서운면이라 개칭되었다.
면의 동쪽에 서운산(瑞雲山, 547m) 자락이 중앙으로 뻗어 있고, 북부에서 남부에 걸쳐 계촌천·구수천·양촌천·초성천·북산천 등이 차례로 면 전체를 관류하면서 주변 일대에 넓은 평야지대를 조성해 놓았다. 양촌(陽村)·청룡(靑龍)·중동(中洞) 등의 저수지를 끼고 있는 미작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 등이며, 채소류로 참외·오이·호박과 함께 과실류로 사과·배·포도의 산출이 많다. 버섯·산나물도 많이 나며, 약초·산수유 등의 약용재배가 두드러진다. 제조업은 화학과 요업 관련업체가 있다.
교통은 339번 지방도가 남단에서 중앙을 지나 북쪽 지역으로 종단하면서, 서쪽의 6번 시도와 동쪽의 7번 시도와 이어진다. 문화유적은 청룡리의 청룡사 경내에 청룡사대웅전·청룡사영산회괘불정·청룡사동종과 부도군·청룡사사적비·청룡사삼층석탑·이해룡고가, 북산리에 서운산성(瑞雲山城)·심기조효자문(沈基祖孝子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인(仁)·신기(新基)·신릉(新陵)·오촌(梧村)·송산(松山)·현매(賢梅)·송정(松井)·양촌(陽村)·동촌(洞村)·신촌(新村)·신흥(新興)·북산(北山)·산평(山坪)·청룡(靑龍) 등 14개 리가 있다.
9. 양성면(陽城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3.16㎢, 인구 5,847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항리이다.
본래 양성군 지역으로 고구려 당시에는 사복홀(沙伏忽), 신라 때는 적성(赤城)으로 고쳐 불렸고, 다시 고려 초기에 양성(陽城)으로 개칭된 뒤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 현 수원)에 이속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성군 읍내면(邑內面)·지동면(紙洞面)·송오리면(松五里面)·금곡면(金谷面)·덕산면(德山面) 등 5개 면과 양지군(陽智郡) 고북면(古北面)과 안성군 금곡면(金谷面) 각각 일부 지역이 합쳐져 18개 리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안성군 양성면이라 개칭되었다.
산지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형태를 이루는데 북중앙에 묘봉(卯峰, 229m), 서쪽에 신선봉(神仙峰, 303m), 남서쪽에 고성산(高城山, 298m), 북동쪽에 쌍령산 등 주로 300m 내외의 준봉들이다. 북동쪽 경계를 흐르는 한천(漢川) 이 외에 면 곳곳에 동항천·교동천·진위천·옥정천 등이 관류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었다. 이들 하천유역에 미산·이현·산정·동항 등의 저수지가 산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녹두 등이다. 수박·참외·오이·토마토 등의 채소류, 밤·호도 등의 임산물도 많이 생산된다. 축산업으로는 한우사육이 제일 활발하고 이 외에 사슴·토끼 등의 가축과 양봉도 행해진다. 제조업은 제약·섬유·석재업 관련업체가 있다.
교통은 45번 국도가 동쪽에서 북쪽 중앙으로 종단하며 364번 지방도가 남쪽 지역을 가로지른다. 이 외에 4번 시도가 동서를 연결하는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봉리에 덕봉서원과 오춘환가옥(安城吳春煥家屋), 방신리에 운수암, 동항리에 양성향교 등이 있다. 이 밖에 도곡리에는 느티나무가 있다. 특히, 미산리 소재 미리내성지는 25만 평 규모로 당시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으로, 성지안에 김대건신부의 묘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동항(東恒)·구장(舊場)·석화(石花)·추곡(楸谷)·조일(照日)·도곡(桃谷)·산정(山井)·이현(梨峴)·장서(長西)·난실(蘭室)·노곡(老谷)·미산(美山)·방축(防築)·필산(筆山)·덕봉(德峯)·명목(名木)·삼암(三巖)·방신(芳新) 등 18개 리가 있다.
10. 원곡면(元谷面)
시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37.79㎢, 인구 5,535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가천리이다.
본래 양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성군 원당면(元堂面)·반곡면(盤谷面)·승양원면(升陽院面)·도일면(道一面)·구룡동면(九龍洞面) 지역과 진위군(振威郡) 여방면(余方面)·마산면(馬山面)의 각 일부가 합쳐져 12개 리로 재편되면서 안성군 원곡면이 되었다.
면의 명칭은 원당면 ‘원’과 반곡면의 ‘곡’을 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이(龍耳)·죽백(竹柏)·청룡(靑龍)·월곡(月谷) 등 4개 리가 평택군 평택읍에 이속되었다.
면의 북동쪽에 신선암·천덕산, 동쪽에 고성산, 서쪽에 덕암산(德巖山, 165m)·팔용산(八龍山, 122m), 남서쪽에 백운산(白雲山, 191m) 등 면 전체를 에워싸고 있으나 대부분 낮은 구릉지에 가깝다.
북부의 성은천과 중앙의 통복천(通伏川)이 관류하면서 주변 일대에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었다. 따라서 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데, 상지·칠곡·반제·독정저수지 등 농업 관개용수에 힘입은 바 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담배의 수확량이 특히 많고 호도·잣·산나물 등의 임산물 생산량도 적지 않다. 배·포도를 중심으로 한 과수농업도 크게 발달해 있으며, 한우·돼지·사슴·오리 등의 목축업도 성한데 특히 오리 사육두수는 시 전체에서 절대적이다. 제조업으로는 콘크리트 기계 분야의 중소업체들이 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시원스럽게 종단하고 있으며, 45번 국도가 남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면서 용인시와 연결된다. 340번 지방도가 남서쪽의 교통편의를 도모하고 북쪽에는 387번 지방도가 있다. 이 밖에 면의 중앙에 2번 시도가 국도와 지방도를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성은리에 청원사칠층석탑, 지문리에 최규서어서각(崔奎瑞御書閣)·최만리묘(崔萬理墓), 성은리에 이양섭생가(李陽燮生家)등이 있다. 그 밖에 칠곡리에는 수령 550년 된 높이 30m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지문리에는 수령 300년 된 높이 20m의 회화나무가 있다. 그리고 칠곡리에는 3·1운동기념탑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가 있다.
외가천(外加川)·지문(芝文)·칠곡(七谷)·성은(聖恩)·성주(聖住)·내가천(內加川)·반제(盤諸)·산하(山下) 등 8개 리가 있다.
11. 일죽면(一竹面)
시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55.54㎢, 인구 9,106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천리이다.
본래 죽산군(竹山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죽산군의 남일면(南一面)·남이면(南二面)·북일면(北一面)·북이면(北二面) 전체, 죽산군 제촌면과 음죽군(陰竹郡)의 각 일부 이·동이 합쳐져 15개 리로 재편되면서 죽일면(竹一面)으로 개칭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에 면 명칭이 일죽면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북쪽에 마옥산(磨玉山, 441m), 서쪽에 묘령산(妙龍山, 174m), 남쪽에 마이산(馬耳山, 472m)·황색골산(353m) 등이 솟아 있다.
중앙부를 횡류하는 청미천(淸渼川)과 서쪽 면계의 죽산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방초천(芳草川)·화곡천(和谷川)·신흥천(新興川), 남쪽에 화봉천(花鳳川) 등이 있는데 이 유역에는 충적평야가 크게 발달하였다. 논과 밭의 경지면적이 시 전체에서 제일 넓은 대표적인 농업중심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팥·녹두·깨 등이며, 포도의 산출량이 특히 많다. 수박·참외·오이·호박·토마토 등의 채소류 전부도 그 생산량이 시 전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한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닭 등과 칠면조·거위 등도 사육된다.
제조업은 근래들어 금산산업단지의 조성으로 그 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특히 이 단지내에 최신식 축산물 종합처리장의 완공으로 수도권 전역에 대한 육류공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교통은 중부고속도로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며, 일죽인터체인지를 통해 진출입이 가능하다. 공도면부터 이어지는 38번 국도가 면 중앙을 횡단하고, 북쪽에는 341번 지방도가, 남쪽에는 318·331번 지방도가 있다. 이 밖에 남서쪽에서 동부를 연결하는 16번 시도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금산리 장성거리는 오래 전부터 삼남지방과 직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고, 장암리의 마방거리는 말이 쉬어가던 장소였다.
문화유적은 고은리에 영창대군묘(永昌大君墓)와 금산리에 망이산성이 있다. 그 밖에 신흥리에 선유동 마애불사존상과 세종 때의 문신인 최용소(崔龍蘇)의 묘, 가리에 정조 때의 문신인 홍명호(洪明浩)의 묘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송천(松川)·당촌(唐村)·능국(菱菊)·신흥(新興)·화곡(和谷)·고은(古銀)·주천(注川)·가(佳)·금산(金山)·산북(山北)·죽림(竹林)·장암(長巖)·월정(月井)·화봉(花鳳)·방초(芳草) 등 15개 리가 있다.
12. 죽산면(竹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7.30㎢, 인구 7,991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죽산리이다.
본래 죽산군 지역으로 고구려 때는 개차산군(皆次山郡)이라 하다가 신라 때는 개산(介山)으로 개명되었고, 고려 초기에 죽주(竹州)라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명칭인 죽산(竹山)이라 하였다. 세종 16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부일면(府一面)·부이면(府二面)·남면(南面) 전체와 북일면(北一面) 일부가 통합되어, 15개 리로 개편되면서 안성군 죽이면(竹二面)으로 불리다가 이 후 이죽면으로 개칭되었고, 1992년에 다시 죽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산지로는 북단에 비봉산, 동쪽에 황색골산, 남서쪽에 덕성산, 서쪽 면계에 도덕산·칠장산·칠현산 등 400∼500m의 산자락이 커다란 병풍을 만들었다. 산지 사이사이를 흐르는 용설천·당목천·칠장천·죽산천 등의 하천유역에 충적평야가 조성되었고, 용설·장계 저수지가 관개용수 역할을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이외에 담배·고추의 산출이 주목된다. 목축업도 활발하여 젖소·돼지·사슴·산양 등의 사육량이 비교적 많다. 제조업으로는 두교리에 두교산업단지와 장원리에 장원산업단지가 조성중이며, 면내에 석재·콘크리트·통신기기 등의 업체가 분포한다.
교통은 면의 북단을 가로지르는 38번 국도와 중앙을 종단하는 17번 국도가 대표적인 도로망이다. 이 외에 9·17번 시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칠장리의 칠장사에 칠장사오불회괘불정·칠장사혜소국사비·안성봉업사석불입상·칠장사삼불회괘불정·인목대비친필족자·칠장사당간·칠장사대웅전·칠장사소조사천왕상, 죽산리에 오층석탑·삼층석탑·당간지주·석불입상·죽산향교 등이 있다. 매산리에 석불입상·죽주산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2개 교, 전문대학 1개 교가 있다.
죽산(竹山)·매산(梅山)·장원(長院)·두현(斗峴)·장릉(長陵)·장계(長溪)·용설(龍舌)·칠장(七長)·당목(唐木)·두교(斗橋) 등 10개 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기지(京畿誌)』(1842∼1843)
『경기읍지(京畿邑誌)』(1871)
『기전읍지(畿甸邑誌)』(1894∼1895)
『안성기본통계』(안성시,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경기연감』(경인일보사, 1997)
『경기도 역사와 문화』(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7)
『문화재 안내문안집Ⅰ·Ⅱ』(경기도, 1997)
『전통사찰현황』(문화체육부, 1997)
『안성군지』(안성군, 1990)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지명유래집』(경기도, 1987)
『한국행정제도사』(정시채, 법문사, 1986)
『한말근대법령자료집』(국회도서관, 1971)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6·1957)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안성시(http://www.anseong.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죽산면[ 竹山面 , Juksan-myeon ]
『동국지도(경기)』의 죽산면(죽주) 일대
행정지명 > 면
경기도 안성시
경기도 안성시의 동쪽에 위치한 면이다. 관내에 죽산향교와 칠장사(七長寺)가 있다.
죽산리 · 장능리 · 칠장리 · 두교리 등 10개 법정리가 속해 있다.
조선 시대 죽산부의 중심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일면 · 부이면 · 남면의 여러 동리를 합쳐
죽이면(竹二面)이라 하고 안성군에 편입시켜 10개 동리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1917년 이죽면으로 명칭을 고쳐 유지되다가 1992년 죽산면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개산군(介山郡)은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하니 지금의 죽주(竹州)이다."라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태종 때 주(州)자로 끝나는 군현 명칭은 부(府) · 목(牧)과 구별하기 위해 도호부 이하는
모두 산(山)과 천(川)으로 대신하게 되면서 '죽산'으로 바뀌었다.
세종 때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비봉산(飛鳳山)에 기대어 자리 잡은 죽산 읍치 앞쪽 죽산천상에 대교(大橋, 한다리)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 지역이 양지에서 좌찬역(佐贊驛) · 분행역(分行驛)을 거쳐 동래로 향하는 영남대로(嶺南大路)의 길목임을 상징하는 명칭인 듯하다.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및 '우리나라의 지명' 총론 목차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 국토지리정보원
평산군[ 平山郡 ]
지명
행정구역, 군
면적 1,334.9㎢
황해도 중동부
평산군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금천군과 신계군, 서쪽은 벽성군과 재령군, 남쪽은 연백군, 북쪽은 봉산군과 서흥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5°54′∼126°33′, 북위 38°04′∼38°27′에 위치하며, 면적 1,334.9㎢, 인구 11만5934명(1944년 현재)이다.
1읍 13개 면 161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남천읍 신남천리이다.
자연환경
이 군의 경계는 대체로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각 면의 경계,
특히 북쪽은 멸악산맥이 서남에서 동북방향으로 뻗어 있어 500∼700m의 산지가 군의 북부에 치우쳐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서남부의 재령군·벽성군계에 있는 운달산(雲達山, 600m)이 군내로 뻗어내린 것을 비롯해
관봉(冠峰, 527m)·주지봉(主之峰, 712m)·멸악산(滅惡山, 816m)·천괘산(天掛山, 470m)·청룡산(靑龍山, 525m)·
금동산(金銅山, 524m)·영덕산(永德山, 398m)·불수산(佛首山, 390m) 등이 있다.
남부에는 황의산(黃衣山, 473m)과 3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가 분포한다.
하천으로는 예성강의 상류가 군의 동쪽 경계를 이루며 남류하고 화양천(花陽川)·누천(漏川)·남천(南川) 등이
북부의 산지에서 발원해 군내를 흐르고 있다.
연평균기온 10.5℃, 1월 평균기온 -6℃, 8월 평균기온 25.9℃, 연강수량 1,389㎜이다.
역사
[고 대]
해상리 회골에 있는 고회암용식 동굴이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밝혀짐으로써, 구석기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으로서 처음 다지홀(多知忽)이라고 불리다가 뒤에 대곡군(大谷郡)으로 편성되면서 개정되었다.
395년(광개토왕 5) 고구려군이 이 곳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했고,
523년(안장왕 5)에는 백제의 무령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는 틈을 타서 고구려군이 이 곳으로부터 백제에 침입한 일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방 요충지로 부각되어
748년(경덕왕 7) 대곡성을 수축하였다.
782년(선덕왕 3)에는 대곡성이 패강진(浿江鎭)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부터 군주(軍主)가 두어져 예성강 이북, 대동강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826년(흥덕왕 1)에는 300리에 달하는 패강장성이 축조된 바 있다.
패강진 관하의 10여 주현이 궁예(弓裔)에게 항복한 904년부터 평주(平州)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유금필(庾黔弼)·박수경(朴守卿) 등 4명의 호족이 이 곳 출신이다.
[고 려]
995년(성종 14) 방어사진(防禦使鎭)으로 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이후 지주사(知州事)가 부임하였다.
1272년(원종 13)부터 잠시 복흥군(復興郡), 즉 배천에 예속되기도 하였다.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평주성에 돌입해 살육을 자행하자 성이 텅 비게 되었는데,
1253년 몽고 장수 야굴(也屈)이 전주까지 침입했다가 환궁할 때 교동의 별초(別抄)가 밖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해 복수하였다.
[조 선]
1413년(태종 13)에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총 2,130호 6,323명으로 해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일행이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남천 동쪽 2㎞ 지점에 유숙한 일이 있는데,
그 터에 주필대(駐蹕臺)가 세워져 있으며, 병자호란 후 8년간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돌아오다 유숙했던 인산면 기린리에는 영소대(靈昭臺)가 세워져 있다.
태백산성은 1733년(영조 9)에 개축되었는데, 4개의 몽성과 8개의 성문을 갖춘 요새로서
도호부사가 수성장을 겸하는 외에 별장과 승장을 따로 두었다.
자모산성(慈母山城)은 임꺽정(林巨正)이 웅거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의 인구는 1759년에 총 8,424호 3만6678명이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이 곳은 인구증가율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
[근 대]
1895년(고종 32)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산군으로 고쳐졌다.
이 곳은 전통적으로 유림의 조직이 강력한 곳이었으며,
1896년에는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와 연계되어 일부는 제천에서, 일부는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하는 평산의병이 조직되어 평산·배천·연안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인 외에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특색을 보여주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해 활동한 바 있는 서의배(徐義培)·유상렬(柳相烈)·조창선(趙昌善) 등과
이완용(李完用)의 암살을 시도했던 정의도(丁義道) 등이 있다.
1906년 서남부의 6개 면이 연안군으로 이속되어 1930년 당시에는 14개 읍·면과 161개 이로 편성되었으며,
인구는 1942년에 총 2만852호 11만813명이었다.
유물ㆍ유적
해상리의 동굴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각종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되었던 관계로 이 지역에는 평산면 산성리에 태백산성(太白山城),
마산면 다보산에 자모산성(慈母山城), 서봉면 철봉리에 철봉산성(鐵峰山城) 등의 성지가 있으며,
성내에는 당시의 시설물인 장대(將臺)·문루·군기고·창고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특히 태백산성은 대곡성·평산산성·성황산성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영조 때 개축된 것인데,
성내에는 태사사(太師祠)라는 사당이 있는 등 매우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주목된다.
태사사는 신숭겸(申崇謙)·유금필·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의 신상(神像)을 모신 곳으로,
고려 때 창건되었다가 1796년(정조 20)에 사액되었다.
왕실의 유적으로는 남천읍 보산리에 있는 주필대와 인산면 기린리의 영소대를 들 수 있다.
주필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실과 정부 일행이 서울을 버리고 서북방면으로 피난갈 때 하룻밤을 유숙했던 곳이다.
또 영소대는 병자호란 다음 해 이른바 남한산성조약에 따라 소현세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
왕자 일행이 중국 청나라로 끌려가 8년 동안 치욕적인 억류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서울로 향하던 도중 하루를 묵은 곳이다.
불교유적으로는 원효가 창건했다는 인산면 기린리 성적산에 관북사와, 평산면 은담리 방원산에 있는 북수사(北岫寺)가 있다.
또한 서봉면 월봉리에서는 고려 후기에 속하는 종(鐘)이 출토된 바 있다.
금암면 제궁리에는 10∼11세기에 해당하는 청자도요지가 있다.
유교유적으로는 동양서원(東陽書院)과 구봉서원(九峰書院)이 있다.
평산온천 부근에는 고려 말의 신안이 종신하도록 이 곳에서 머물며 조선에서 보내는 녹봉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의
배록동유허비(排祿洞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는 큰 길이 이 지역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통의 주요 시설인 역참(驛站)과 원점(院店)이 많았는데 그 유지가 아직도 다수 남아 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서는 개경에서 서북으로 나가는 금교도(金郊道) 관하의 16개 우역(郵驛) 가운데
금암·보산·안성·반석·기린·온천 등의 6개 역이 이 곳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암·보산·안성의 3개 역은 역정(驛丁) 75명씩을 배치한 일과역(一科驛), 즉 1등역에 속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교육ㆍ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평산면 빙고리에 평산향교(平山鄕校)가 있다.
서원으로는 마산면 당후리에 동양서원과 적암면 면곡리에 구봉서원이 있다.
동양서원은 1650년(효종 1)에 창건되어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는데 신숭겸과 이색(李穡)을 봉사한다.
구봉서원은 박세채(朴世采)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역시 1697년에 사액되었다.
특히 이 서원에는 오늘날 중요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는
≪의례≫·≪남계연보≫·≪중봉집 中峰集≫·≪수심경 授心經≫·≪사서당기 四書堂記≫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 군은 본래 유교사상이 강해 갑오개혁 후에도 개화의 물결이 천천히 들어왔고 배일사상이 강한 고장이었다.
따라서 새 <교육령>에 의한 1면1교정책으로 각 면에 보통학교가 세워졌으나 사숙(私塾)이 널리 보급되었다.
군내의 유지들에 의해 육영학교(育英學校)·음월학교(陰月學校)·명신학교(明新學校)·양정의숙(養正義塾)·
광명학교(光明學校) 등 약 60여 개의 사숙이 있었다.
중등교육기관은 광복 전까지는 없었고, 서울·평양·개성 등지로 유학하였다.
1930년에 2년제 남천공립농잠학교(南川公立農蠶學校)가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4개교, 농잠학교 1개교, 심상고등소학교 2개교가 있다.
종교현황은 불교사찰 2개, 천주교성당 5개, 개신교교회 9개가 있다.
산업ㆍ교통
이 군은 면적이 도내에서 곡산군 다음으로 크며, 경지면적도 벽성군·연백군과 더불어 넓은 편으로, 그 중 밭이 80%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밀의 생산 이외에도 감자·배추·무·파·가지·호박 등 소채류의 생산이 많다.
또한 완초·대마·박하의 산출이 많고 신암면 월봉리 월웅산 일대에서 생산된 밤과 문무면 일대의 잎담배와
고산리의 벌꿀도 특산물로 유명하다.
임야가 많아 다량의 목재를 생산하며, 해주·사리원·개성 등지로 반출된다.
광공업으로는 금·은·텅스텐·형석·천연슬레이트 등 광물의 매장이 많다.
용산면과 인산면에서 질이 좋은 고령토가 생산되므로 항아리·옹기 등을 제작하는 요업이 발달해 인접한 군에 많이 출하된다.
상업활동은 10개의 시장이 있는데, 그 중 남천장이 제일 크다.
남천읍에 신남천장·남천장, 금암면에 한포장, 세곡면에 누천장, 적암면에 온정장,
마산면에 한천장, 신암면에 배천장, 인산면에 기린장, 문무면>에 문무장, 안성면에 물개장이 있다.
그 중 한포장은 농산물, 문무장은 축산물, 누천장은 해산물, 신남천장은 공산품을 각각 주요 거래품으로 한다.
교통은 평부선 철도가 평산-남천-서흥군 신막을 지나며, 이와 병행해 1등국도가 지나고 있다.
남천과 신계, 금천군 시변리와 해주 등지를 각각 잇는 2등도로와 3등도로가 있다.
읍ㆍ면
[남천읍南川邑]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읍. 면적 151.84㎢, 인구 1만9447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신남천리이다.
본래 옛 평산군의 보상면(寶上面)과 보하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을 합해
보산면(寶山面)으로 했고, 1937년 읍으로 승격되어 남천읍으로 개칭하였다.
서부에 영덕산, 동북부에 국수봉(國水峰, 387m) 등이 솟아 북부는 대체로 산지가 많다.
그러나 남부는 200m 이하의 평지로서 군데군데 작은 구릉이 기복되었을 뿐이다.
예성강이 동쪽 군계를 남쪽으로 흐르며 도중에 남천을 합치는데, 이들 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시설도 잘 되어 각종 농작물의 재배에 적당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밀·조·박하·과실·팥 등이다. 그 중에서도 사과는 품질이 좋아 ‘황주사과’라는 이름으로 외국에도 수출한다.
삼가리·산막리·싸리재 등지에서는 천연슬레이트가 많이 채취된다.
삼가리에는 슬레이트가공공장이 설치되었으며, 삼가리 동막마을에서는 품질이 좋은 화강암이 산출된다.
면의 서남부를 경의선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남천역이 있으며 경의가도가 경의선에 병행하고,
북쪽의 신계, 동쪽의 시변리, 서남쪽의 평산온천 등 각 방면에 2등도로·3등도로가 통하는 등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어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신남천(新南川)·남천(南川)·보산(寶山)·노동(盧洞)·양암(陽巖)·월하(月下)·운천(雲川)·
두무(斗武)·삼가(三佳)·수구(水口)·갈탄(葛灘)·산막(山幕) 등 12개 이가 있다.
[고지면 古之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0.08㎢, 인구 5,13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오리이다.
남부에 천지산(天地山, 372m)·불지산 등이 솟았고, 그 여맥이 북부 전역에 미치어 100m 내외의 구릉을 곳곳에 기복시킨다.
예성강의 지류인 고지천이 면의 북부를 흘러 연안에 소규모의 기름진 평지를 전개시켜 이 면의 주요 생산지와 거주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팥·조·과실 등이다. 특히 이 면의 풍토가 밤과 배의 생육에 적당해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광업으로는 금릉리의 천저산(千猪山)과 달성리·서오리에서 금·은을 채굴하는데,
그 중에서도 서오리의 사금광은 1940년대에 성황을 이루었다. 송정리에 주물공장이 있으며,
면 일대에서 제조되는 풍석(돗자리)과 자리(지적)는 다른 지방에까지 판매된다.
서오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마을에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있을 뿐 교통은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서오(書梧)·대룡(大龍)·송정(松亭)·금릉(金陵)·완정(浣亭)·달성(達城)·봉암(鳳巖)·세관(洗冠) 등 8개 이가 있다.
[금암면金巖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23㎢, 인구 7,00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한포리이다.
서남부에 학현(鶴峴, 182m), 북부에 봉화산(峰火山, 214m) 등이 솟아 있지만 대체로 평지가 많다.
특히 동남단을 남북으로 흐르는 예성강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주요 생산지대가 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콩을 비롯해 쌀·보리·대마 등이다. 그 중에서도 콩은 무와 함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저탄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 도진이 있었고, 강변에도 저탄원(猪灘院)이 있었다.
경의선 철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한포역이 있다.
철도와 병행해 경의가도가 통하고,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도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한포(汗浦)·대촌(垈村)·강정(江亭)·필대(筆垈)·부정(斧亭)
·재궁(齋宮)·용촌(龍村)·화암(花巖)·저탄(猪灘) 등 9개 이가 있다.
[마산면馬山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3.19㎢, 인구 7,33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한촌리이다.
서북부에 관모산·각호산(角虎山, 503m) 등이 솟아 일반적으로 산지대이지만 남부는 100m 내외의 구릉이 기복되었고
평탄한 면도 많아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콩 등이며, 특산물로 인삼이 있다.
면의 전지역에서 품질이 좋은 밤이 산출된다. 곳곳에서 고령토를 생산할 수 있어 요업이 발달했는데,
그 제품은 ‘평산옹기’로 불린다.
금천∼해주간의 2등도로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통과하고, 도중에 주요 마을에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나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유적으로는 당후리에 동양서원이 있고, 면의 동부에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였으며
병자호란 때에 백성들의 피난처였던 자모산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한촌(漢村)·천초(泉草)·성기(聖ㄱ基)·대경(大慶)·
은촌(隱村)·서촌(西村)·가동(稼洞)·도평(桃坪)·간평(間坪)·석수(石手)·당후(堂后)·주답(注畓)·입암(立巖) 등 13개 이가 있다.
[문무면 文武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1.27㎢, 인구 1만87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문구리이다
멸악산을 주봉으로 하는 멸악산맥이 면의 중앙부 남쪽을 동서로 뻗어내려 서단에 단강산(丹江山, 480m)·
옥녀봉(玉女峰, 408m), 동북단에 천괘산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재령강의 지류인 은파천(銀波川)이 흘러 여러 곳에 작은 분지형 평지가 형성되었고,
이와는 달리 면의 동남부에는 누천의 지류인 노천이 흘러 유역에 규모는 작지만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콩·보리·조 등이다. 고산리에서는 양봉이 활발하며, 면의 전지역에서 특산물로 잎담배가 재배된다.
은파천을 따라 동서로 통하는 등외도로가 있고 도중에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명승지로는 고대웅장한 멸악산이 있고 산에는 ‘천자(天子)의 분묘’가 있다고 한다. 산의 남쪽 절벽에 폭포가 있어 장관을 이룬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문구(文區)·화원(花院)·창평(昌坪)·고산(孤山)·양어(養魚)·구손(舊孫)·물안(物安)·자창(自昌)·
미로(未老)·재명(才明)·금은(金銀)·지당(池塘)·대택(大澤)·화랑(花浪)·청수(淸水)·한정(寒井) 등 16개 이가 있다.
[상월면上月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31㎢, 인구 5,12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촌리이다.
동남부에 멸악산맥에 속하는 단강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은 북쪽으로 뻗어내려 곳곳에 100m 내외의 구릉을 기복시킨다.
그 구릉 사이를 기린천(麒麟川) 및 작은 내들이 북쪽으로 흘러 은파천으로 들어가는데,
그 유역에 소규모의 저지가 형성되어 이 면의 주요 생산지대 및 거주지역이 된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밭농사가 주가 되며 주요 농산물은 보리·밀·콩·조·면화 등이다.
면의 동부에 남북으로 통하는 3등도로와 주요 마을에 연결되는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녹탄리에 교동인씨(喬洞印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신촌(新村)·동막(東幕)·녹탄(綠灘)·계동(桂洞)·하월(下月)·석교(石橋)·용수(龍水)·대촌(大村) 등 8개 이가 있다.
[서봉면西峰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1.19㎢, 인구 9,30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당우리이다.
서부에 천괘산·설라산(雪羅山, 408m), 남부 중앙에 철봉산(鐵峰山, 503m), 북부에 금동산·청룡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은 전역에 미쳐 곳곳에 100∼200m의 구릉을 기복시킨다.
서남쪽 고지면과의 경계에 누천이 흘러 예성강으로 들어가고 북서부 산지에서 발원하는 여러 작은 하천들도
모두 예성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들 하천 연안에는 작은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조 등이다.
광업으로는 철봉산에서 금·은이 채굴되고, 해수리와 범안리에서는 품질이 좋은 백색 대리석과 화강암이 산출된다.
경의선철도가 면의 동단을 지나지만 주민들은 남천역을 많이 이용한다. 남천읍에서 해주 방면으로 2등도로가 지난다.
명승지로는 당우리의 용두천 상류에 천상정(川上亭), 어사천리에 삼모정, 만탄리에 맹동과 종유동(鍾乳洞)인
금주굴(金柱窟)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당우(塘隅)·장륙당(藏六堂)·범안(泛雁)·봉동(鳳洞)·어사천(御史川)·삼산(三山)·용두(龍頭)·
월봉(月峰)·해수(海水)·주촌(舟村)·진포(進浦)·상령(商嶺)·철봉(鐵峰)·만탄(晩灘) 등 14개 이가 있다.
[세곡면細谷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00.95㎢, 인구 9,54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누천리이다.
서부에 장성산(長城山, 245m), 중앙부에 응봉산(鷹峰山, 287m), 남부에 독정산(獨亭山, 212m) 들이 연달아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면 전역에 미치어 100m 내외의 구릉을 곳곳에 기복시킨다.
북쪽 신안면과의 경계를 예성강의 지류인 누천이 동서로 흐르고, 면내의 작은 하천들도 모두 이에 합치며
연안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 중 누천리에 있는 장수평(長水坪)은 경지면적이 약 200여㏊이고 수리시설도 잘 되어 있어 이 면의 주요 생산지대가 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조·팥 등이다.
광업으로는 생금리에 중석광과 형석광이 있다. 남천∼해주간의 2등도로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고,
누천리에서 신원(新院) 방면으로 등외도로가 나뉘며, 광평리에서 각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생금리에 효자교(孝子橋)가 있다.
군동리에 남양양씨(南陽梁氏), 진보리에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누천(漏川)·적성(赤城)·군동(群洞)·석교(石橋)·오포(梧浦)·진보(眞寶)·운봉(雲峰)·생금(生金)·죽동(竹洞)·응촌(鷹村)·덕촌(德村)·광평(廣坪)·수동(修洞)·은동(隱洞)·도천(道川) 등 15개 이가 있다.
[신암면新巖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43.10㎢, 인구 1만9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배천리이다.
서부와 남부에 옥녀봉·각호산 등이 솟아 산지대를 이룬다.
북쪽 중앙부에는 멸악산맥의 주봉이 되는 멸악산이 솟아 그 산줄기가 동서로 뻗어 문무면과의 경계가 된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여러 작은 내들은 누천에 합쳐 동남쪽의 면계로 흐르고
동부에는 주암천(舟巖川)이 흘러 누천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전개되어 주요 농경지 및 거주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조·면화·밤 등이다. 특히 월봉리의 월웅산밤은 어느 지방보다도 수확량이 많다.
광산자원으로는 적은 양이지만 곳곳에서 형석광이 발견된다. 누천∼청석두리간의 3등도로가
면의 남부 누천을 따라 동서로 횡단하고, 이 도로에서 북쪽의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나뉘지만 대체로 교통은 불편하다.
명승지로는 원전리에 문회암(文會巖)과 그 북쪽 성북리에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하는 상암정(象巖亭)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배천(白川)·수회(水回)·장동(長洞)·원전(院田)·재동(齋洞)·대촌(大村)·당평(堂坪)·
주상(舟上)·성북(城北)·청룡(靑龍)·태봉(台峰)·반월(半月)·가정(柯亭)·월봉(月峰)·남산(南山)·검현(劒峴)·문림(文林) 등 17개 이가 있다.
[안성면安城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4.04㎢, 인구 8,11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물개리이다.
남부에 멸악산맥에 속하는 천괘산·청룡산·금동산 등이 연달아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북부로 뻗어내려 곳곳에 100∼300m의 구릉을 기복시킨다.
예성강의 지류인 남천이 면내의 작은 하천들을 합하면서 동남류하는데, 그 연변에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 등이다. 칠보산에서 당귀·백출·만삼 등 각종 한약재를 많이 재배한다.
총수리에서 청석슬레이트가 산출되어 인근 군면에 출하된다. 경의선철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면의 중앙에는 물개역이 있다. 경의가도가 경의선과 병행해 지나며, 면내를 동서로 횡단하는 1등도로와 등외도로가 나 있다.
명승지로는 총수산 동쪽 기슭에 옥류천이 있다.
양촌리에는 가평이씨(加平李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물개(物開)·설현(雪峴)·총수(葱秀)·발참(撥站)·속실(粟實)·양촌(陽村)·제암(祭巖)·덕암(德巖)·당인(唐仁)·
마유(馬踰)·유천(楡川) 등 11개 이가 있다.
[용산면龍山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56㎢, 인구 5,18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탄리이다.
면의 동부에 멸악산맥에 속하는 관모봉(冠帽峰, 446m)·국사봉(國士峰, 273m) 등이 있고,
남부에 목단산(牧丹山, 304m), 북부에 주지봉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은 면의 전역에 뻗어내려
다시 미수봉(眉秀峰, 271m)·관봉 등의 구릉을 기복시킨다.
따라서 면의 북동부는 산지가 연달아 있고 서남부는 구릉성 산지의 지형을 형성하는데,
그 사이에 화양강이 흘러 하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콩·밤·인삼 등이다. 그 중에서도 밤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면 전역에 걸쳐 고령토가 많아 곳곳에 도요(陶窯)가 설치되었으며, 그 제품은 ‘용산옹기’라 해 인접군면에 판매된다.
해주∼평산간의 2등도로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고, 이 도로에서 북쪽으로 여러 등외도로가 나뉘지만 대체로 교통은 불편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석탄(石灘)·평촌(坪村)·두동(杜洞)·화촌(花村)·석사(石沙)·미수(眉秀)·광암(廣巖)·노동(老洞)·삼봉(三峰) 등 9개 이가 있다.
[인산면鱗山面]
군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136.41㎢, 인구 6,91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기린리이다.
남부 벽성군과의 경계에 운달산이 솟았고 그 주맥 동단에 주지봉, 중앙부에 부아산(負兒山, 455m),
북부에 불수산·옥녀봉·주봉(周峰, 253m) 등이 연달아 솟았다.
이러한 남북 산지 사이에 동서로 긴 평야가 전개된다.
이 평야 동쪽에는 기린천이 흘러 은파천으로 들어가고, 서쪽에는 곡천(曲川)이 흘러 재령강에 합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밀·조 등이며, 농가의 부업으로 누에치기와 축우를 한다.
광업으로는 수마리에 금광이 있고, 곳곳에서 고령토가 생산된다.
남부산지에 도로가 미비해 불편하지만, 북부는 누천∼청석두리간의 3등도로가 통과하고
이 도로에서 각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나뉘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유적으로는 기린리에 관북사와 영소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기린(麒麟)·낙촌(洛村)·허사(許沙)·건천(乾川)·평촌(坪村)
·강도(綱桃)·주련(住輦)·진천(眞川)·대미(大美)·토옥(土沃)·진석(眞石)·수마(水麻) 등 12개 이가 있다.
[적암면積巖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6.41㎢, 인구 7,97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온정리이다.
남쪽에 국수봉, 동북단에 불지산(佛芝山, 341m) 등이 솟아 그 여맥이 면내에 미치어 곳곳에 100m 내외의 구릉을 기복시킨다.
그러나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지대가 낮아 경작지로 이용되는데 그 중에서도 예성강의 지류인
고지천(古之川) 유역은 토지가 기름지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조 등이다. 농가의 부업으로 누에치기를 한다.
남천∼해주간의 2등도로가 북부를 통과하고, 이 도로에서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하지만 대체로 교통은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위동리 등 4개 마을에 걸친 황의산 아래에 황희가 은거 휴양하던 유지가 있고,
면곡리에 구봉서원, 녹동리에 신안의 유허비, 신답리에 서보(徐輔)의 옛터가 있으며,
명승지로는 국수봉에 조개우물, 온정리에 알칼리성 단순천인 평산온천이 있다.
녹동리에 영산신씨(靈山申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온정(溫井)·송암(松巖)·신답(新畓)·갈산(葛山)·면곡(綿谷)·위동(位洞)·한정(寒井)·녹동(祿洞)·세동(細洞)·행정(杏亭) 등 10개 이가 있다.
[평산면平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8.75㎢, 인구 3,86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은담리이다.
본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읍면(外邑面)이었는데 그 뒤 평산면으로 개칭하였다.
대체로 전역이 평야로 되어 있는데 면의 중앙부를 예성강이 남북으로 곡류해 지류인 구연천(九淵川)·남천과 함께
유역에 기름진 평야를 전개시킨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밀·과실·대마 등이다.
특히 과실 중 배의 생산이 많아 옛날부터 명산지로 손꼽혔다.
경의선 철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가며 평산역이 있다.
철도와 병행해 경의가도가 통과하며 은담리를 중심으로 각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산성리에 태사사와 태백산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은담(隱潭)·빙고(氷庫)·산성(山城)·단구(丹邱)·직하(稷下)·전도(傳道)·화산(花山) 등 7개 이가 있다.
평산군(북한)
황해북도 남부에 있는 군. 동쪽은 금천군, 서쪽은 인산군, 남쪽은 황해남도 봉천군, 북쪽은 서흥군·신계군에 접해 있다.
동경 126○13′∼126○35′, 북위 38○10′∼38○28′ 사이에 있으며,
면적 약 520㎢, 인구 13만4500여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성면의 대부분과 문무면·신암면·평산면의 일부지역, 남천읍·서봉면·금암면으로 개편되었다.
행정구역은 평산읍과 청학(靑鶴)노동자구, 월천(月川)·탄교(灘橋)·임산(林山)·산수(山水)·기탄(岐灘)·예성(禮成)·
평화(平和)·복수(福水)·삼룡(三龍)·산성(山城)·한포(汗浦)·옥촌(玉村)·주포(舟浦)·봉탄(峰灘)·해월(海月)·
청수(淸水)·봉천(鳳川)·삼천(三千)·용궁(龍宮)·와현(臥現)·상암(上巖) 등 21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평산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북쪽과 서쪽이 높고, 동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북서쪽을 멸악산맥(滅惡山脈)이 달리고 있으며, 여기에 영덕산(永德山, 398m)·청학산(靑鶴山, 525m)·천괘산(天掛山, 470m)·
멸악산(816m) 등이 솟아 있다. 이 사이의 안부(鞍部)를 평부선 철도와 1호국도(목포-서울-신의주)가 지난다.
북동쪽은 국수봉(國水峰, 387m)·학봉(鶴峰, 401m)이 솟아 있고, 이 사이를 예성강(禮成江)이 넓은 횡곡을 이루면서 남류한다.
서쪽은 멸악산에서 성북산(城北山, 360m)으로 이어지고, 남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누천(漏川)이 곡류를 그리면서
봉천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예성강 유역으로 심한 곡류로 흐르며 남부에서는 군계를 형성한다.
중앙은 철봉산(鐵峰山, 503m)과 같은 잔구가 남아 있기는 하나 대체로 200∼300m 가량의 낮은 구릉이 65%, 200m 이하의 땅이 30%, 300m 이상의 산지는 5% 가량의 넓이를 이루고 있다.
주요 기반암은 석회암·사암·역암·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다. 연평균기온은 9.8℃, 1월 평균기온 -7.2℃, 8월 평균기온 24.6℃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325㎜로 우리 나라에서는 많은 편이다. 산림면적은 군면적의 64%를 차지하며,
소나무·참나무·이깔나무·밤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산림갈색토가 넓게 분포하며 충적토가 쌓인 곳이 많다.
[산업·교통]
농경지는 군면적의 24%를 차지하며, 이 중 밭이 59%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이고, 그 밖에 벼·콩 등이 생산된다. 과일은 사과가 많이 생산되고, 배·복숭아 등도 재배되고 있으며,
남부의 주포리·봉탄리 일대에서는 밤을 가꾸어 ‘평양밤’으로 거래되고 있다. 또 ‘평산대추’는 유명한 특산물이다.
지하자원이 풍부해, 임산리 부근에서는 슬레이트, 봉천리 일대에서는 대리석·화강암 등이 많이 채굴되고 있으며,
군의 여러 곳에서 나는 형석은 질과 양에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되어 있다.
이 군은 황해북도에서 사리원 다음가는 교통의 요지로 알려져 있다.
군의 중앙을 지나는 평부선과 함께 평양·개성간 고속도로, 1호국도(목포∼서울∼신의주)가 관통하고 있다.
또한 평산에서 신계를 거쳐 강원도의 세포(洗浦)에 이르는 청년이천선(靑年伊川線)이 건설되어 북한의 동서 교통의 간선이 되었다. 평산을 중심으로 봉천·해주·신계와의 사이에도 도로가 통해 있다. 예성강의 한포(汗浦)까지는 상당히 큰 배가 다닌다.
[교육·문화]
유적으로 구평산(舊平山)의 산성리에 있는 태백산성(太白山城)은 성안에 서문루(西門樓)·동문루(東門樓)·태사사(太師祠)가
남아 있고, 평화리에 있는 주류대(駐留臺)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할 때 머물렀던 곳이다.
멸악산에는 주천자(周天子) 또는 여진(女眞) 금황제(金皇帝)의 시조묘라고도 전하는 천자묘(天子墓)가 있다.
멸악산은 멸악산식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갈나무를 비롯해 북부광엽수림(北部廣葉樹林)과
신갈나무가 섞인 혼합림으로 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산성리에 평산향교가 있었으나 그 터만 남아 있고, 한포리에 있던 동양서원(東陽書院)도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태백산성 안에 신숭겸(申崇謙)을 비롯한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묘(始祖廟)인
태사사(太師祠)가 있는데, 6·25전쟁 때 불탔으나 지금은 복구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평산고등중학교가 있다.
「三國史記」
「高麗史」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
「平山邑誌」
「地方行政區域發展史」(內務部, 1979)
「黃海道誌」(黃海道誌編纂委員會, 1981)
「韓國考古學地圖」(韓國考古學會, 1984)
「人物의 고향」-北韓篇(, 中央日報社,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