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산외 한우마을은 ‘맛있는 한우고기’를 싼값에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방송과 기사에 자주 나온 곳이다. 나는 싱싱하고 고소한 소고기 육회를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이정표가 맛있는 소고기 육회를 먹을 수 있는 산외한우마을에 곧 도착한다고 알려주는데, 그 옆에 낯익은 인물의 이름이 나온다. ‘어? 김개남 장군 묘? 그 분 묘가 이 근처에 있다고? 밥 먹고 오는 길에 들러봐야지.’ 김개남 장군이라면 녹두장군 전봉준과 함께 호남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분이 아닌가? 들러서 분향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개남 장군 묘는 맛있는 한우고기를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정읍 산외 한우마을에서 차로 1~2분 거리에 있다. 문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딱 한 번 이정표가 있고 그 뒤론 아무표지도 없다는 거다. 한우고기를 먹은 뒤에 김개남 장군 묘를 찾으러 갈 분들이여, 차를 천천히 몰면서 오른쪽 길가를 자세히 보면서 가시라. 그래야 장군의 묘가 보인다. ‘이정표가 있거나 아니면 눈에 확 표시가 나겠지.’라며 별 생각 없이 가다간 김개남 장군의 묘를 그냥 지나치게 될 것이다.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어느 개그맨이 했던 말마따나 그냥 지나갈 확률“100프롭니다.”다.
김개남 장군 묘 가는 길임을 이정표는 그곳으로 접어드는 곳에 딱 하나 뿐이다. 자동차로 찾아오는 이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묘 앞에 표지판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묘의 규모가 눈에 잘 보일정도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조금 신경을 쓴 일반인의 묘보다 나을 게 없다. 그나마 묘비에 적힌 글이 한글이라 나처럼 한자 잘 모르는 이들도 묘비를 읽고 찾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김개남 장군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름에 가려서 좀 덜 알려지고 평가도 덜해서 그렇지 손화중(孫華仲:1861~1895)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 되어 호남좌도의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의 묘가 이게 뭐란 말인가?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개남장이 울고간다
남녘부터 개혁하려 개남으로 개명하고 외세침탈 막으려고 동학혁명 주도했다
동학군의 연전연승 개남장의 작전이고 모든공은 동지에게 모든과는 개남에게
수만군사 어데두고 짚둥우리 웬말이냐 초록바위 효수된몸 사후에도 억울하네
애국애족 깊은마음 어느누가 알아줄까 앞으로는 천년만년 개남장을 알아주세
자료를 찾아보니 시의 내용 중에 ‘수천군사 어데두고 짚둥우리 웬말이냐’라는 구절은 관군에 잡혀가는 김개남 장군의 모습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부른 노래에서 따온 것이란다. 청주성 공략에서 패한 김개남 장군은 고향으로 돌아와 후일을 도모하던 중 친구였던 임병찬의 밀고로 관군에 붙잡힌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밀고한 대가로 조정이 임실군수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했다. 일제가 조선에 대한 침탈을 시도하자 최익현과 함께 항일의병활동을 하다가 대마도에 유배당했다. 유배가 끝나고 돌아 온 뒤에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서려다가 붙잡혀 거문도에서 순직했다. 임병찬은 김개남 장군이 꿈꾸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사랑한 전형적인 양반의 충, 백성이 아닌 임금에 대한 충을 실천한 인물인 것이다.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는 김개남 장군을 전주에 압송한 뒤 남원부사 이용헌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1895년 1월 8일 전주 장대에서 참수했다. 그의 수급(首級)은 서울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김개남 장군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썩은 조선을 뒤엎고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김개남은 제 밥줄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외국군대도 서슴지 않고 끌어들인 조선왕실과 양반만이 득세하는 세상을 지키려는 기득권세력에게 누구보다 두렵고 증오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과 증오가 김개남 장군에게 성급하고 끔찍한 죽음을 내리는 동기가 되었으리라. 김개남 장군이 죽은 뒤에 그의 집안 도강 김씨들은 자신들을 추적하여 죽이려는 세력들을 피해 성씨를 바꾸어 숨어 살아야 했다니 기득권 세력들의 집요함은 참으로 대단하다 해야 하나?
몸은 산산이 잘리고 부서지고, 잘린 머리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김개남 장군의 묘는 비어있었다. 김개남 장군의 혼이나마 자신이 살고, 싸우고, 죽어 간 땅을 떠돌지 말고 고향에 만든 빈 묘에라도 찾아들어와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낱 백성인 나는 김개남 장군의 빈 묘를 돌며 애달프고 서글픈 마음이었다. 분향대와 향은 있을 거라 짐작하고 아무 준비 없이 온 까닭에 조의를 표할 것이라곤 고기 집에서 싸들고 온 소주 반병뿐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아 소주를 뿌리고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올렸다. 그래도 내내 미안하고, 죄스럽고, 서글픈 마음이 쉬 가시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서 정읍시청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세 군데를 거쳐서 통화가 된 담당 공무원의 말에 따르면 김개남 장군의 가묘는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단다.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역사에서 가진 의미가 크고, 김개남 장군의 가진 위상이 있는데 어떻게 국가도, 지자체도 아닌 후손들이 관리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정읍시청의 주민생활관리과가 관리하는 현충시설이 되려면 보훈청에 현충시설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해서 통과가 돼야 한단다. 10여 년 전에 신청 했는데 통과가 안 된 것 같단다. 신청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수시로 신청이 가능하단다. 그러면 신청자격은 해당 지자체나 후손들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닌데 자세한 건 양식을 봐야 알겠다고 한다. 낯선 사람의 전화에 끝까지 친절하게 대답해준 그 공무원에게 이런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을 전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를 있는 대로 늘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충실하게 만들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겐 역사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게 하고, 싸우다 죽어 간 선조들이 올바르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읍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고속도로에서 십여 대의 트럭행렬을 만났다. 쌀을 가득 싣고 서울을 향해 달리는 차들이었다. 짐칸에 매단 깃발에는 <대북지원법제화도 쌀값대란 막아내자. 북으로 가는 ‘통일쌀’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쌀값 폭락에 항의하러 가는 농민들의 트럭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잘린 머리가 한양을 향해 갔을 그 길로 농민들의 트럭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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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식물성의 삶 원문보기 글쓴이: 녹두
첫댓글 울분 가득한 글이네요. 녹두님답습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찾아보겠습니다. 제일 아래 <대북지원법제화'도'>의 '도'는 '로'로...
가시면 꼭 소주 한 잔 그득 부어 주세요.^^
김개남 장군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세상을 많이 바꾸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의 기득권이 지금의 기득권이니까요. 얼마나 더 오래 가야 할지.
님의 '문화재 보호 관련' 직접 문의와 이의 제기의 적극적인 의식과 열정을 배웠습니다. 동학농민은 역사의 그늘에서 늘 지배층으로부터 수탈과 억압 당한 민초들의 울분, 정의감, 그리고 구국으로 확산되지요. 산다는 건 '존중받는 것'이어야 하지요. 백성의 권리...인간의 권리...역사는 너무 오래..너무 많이...소수 지배층의 독점과 향유, 그 합리화였지요..그래서 역사 앞에서 늘 가슴 아립니다..봉건 통치하에, 일본군에게 피 흘리며 죽어간 동학농민군 앞에...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 앞에...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습니다. 빨리 그 분들의 뜻이 올바르게 평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읍을 맥없이 다녀왔고 그 한우 거리도 지나갔습니다. 축제 거리를 찾느라 이정표조차도 눈여겨 보지 못 했네요. 미리 알았다면 꼭 들러 봤어야 했을텐데.....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어떤 방식으로 바로 잡아야 할 지 막막합니다. 무조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혼을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녹두님, 고맙습니다. 다시 또 자극을 받고 갑니다. ^^*
우리 후손들에게 꼭 가르쳐야 되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