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 - 골라 빼냄. 출 6:1-8.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아브라함과의 약속이 성취되기 까지는 수많은 사건과 역사가 전설의 뒤안길로 사라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 이들이 벌떼처럼 번성하자 힛타이트 족을 몰아내고, 북 아프리카를 통일한 파라오는 위기를 느끼고, 이 샘족을 노예로 묶어버린다. 그래도 번성하니까 ‘아들은 죽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다. 그들은 부르짖었고, 강에서 건져낸 사내아이 하나로 그들을 건져낼 신비한 작업은 시작된다.
성경에 <휴거>라는 단어는 없으나 휴거를 의미하는 단어는 많다. 휴거의 다른 말은 <聖別 ~ 골라 빼냄>이다. 성경에 죽음 없이 휴거된 두 사람, 에녹과 엘리야다. 에녹은 홍수전에 휴거되었고, 엘리야는 환란 중에 휴거되었다. 대신 제자 엘리사가 남아서 고난과 싸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출 6:6-8)
극심한 노역에서 빼내시면서 5가지 약속을 하셨으니 1)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야차)’ <야차>는 ‘꺼내어 구별한다’는 말이다. 긴박하고 처참한 상황에서 자기 백성을 꺼내겠다는 말이다. 2)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나찰)’ <나찰>이란 ‘구원하다’는 말이다. 완전 익사상태에서 100% 남의 힘으로 구출되는 것이다.
3)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가알)’ ~ ‘값을 치루고 사온다’는 의미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은 무조건 구원시키셨다. 4)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라카흐)’ ~ ‘골라간다’는 의미다. 에녹을 ‘라카흐 하셨다.’ 5)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보)’ ~ 장소를 옮기는 것-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보>하셨다. 이 땅에서 저 하늘로 <보>하시는 것이 바로 <휴거>다. 하늘로 <보>하는 데는 순서와 법칙이 숨어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레 23:10,22)
하지가 지나서 모맥이 누렇게 익으면 일단 두렁에 흰 천을 펴고 잘 익은 곡식 한 단 쯤 베어 흔들어 턴다, 초실 추수다. 에녹이 모델. 홍수전에 골라 휴거. 환란을 보지 않고… 행복한 휴거다. 첫 열매 휴거다. 그리고는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계6:12) 천사가 여섯째 인을 떼니 천재지변이 일어나며 하늘이 말리고 땅이 뒤집혀. 땅을 호령하던 임금, 왕족, 장군, 부자들과 강한 자들… 굴과 바위틈에 숨어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그런데 <다미선교회>가 얼마나 설쳤는지, 계시록을 덮게 했다. 하늘로 추수되는 중요한 시점에 <휴거>를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하게 만들었다. 말세의 두드러진 증상이다. 암튼 <추수> - <에녹> <엘리야> <타작마당>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성도’에게 피할 수 없는 코스다. 내 가치 판단이 <자기중심적>인가? <쭉정이>다. <말씀 중심적>인가? <산자>다.
강력한 독재 통치자가 전권을 쥐고 생필품을 구매 통제로 국민을 속박한다. 민증이 인식표다. 사실은 지배수단이다. 오로지 육이 먹고 쓰고 사는데 필요한 표다. 이름 하여 <짐승표> “첫째 천사가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계 16;2) 이들은 얼마나 완악하고 모진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며 고통으로 자기 혀를 깨물어도 회개하지 않는다. “…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 하더라”(계16;10-11)
휴거되지 못하여 남겨진 사람들은 이 환난을 당하거나 피난처로 도망가야 한다. 전 중동지역에 7년 대 기근이 닥쳐왔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은 요셉이 총리로 있는 고센 땅에 피해 있었다. 열 가지 신들이 하늘과 산과 강과 밭과 들에서 가축과 곡식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의 애급에서 고센 땅에 자리를 잡고 번성하게 하셨다. 고센 땅이 피난처 모델이다.
씨족이 무탈하게 대 민족을 이루었을 때 뼈저린 노역과, 절망의 고통으로 정 떨어지게 하고, 어린양의 피와 홍해의 세례와 시내산 계약이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결론난다. 모세 오경의 현실 판이 신약시대이다. 교회가 그 피난처이고, 구원의 방주였다. 약속하신 재림의 실현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아브라함 후손의 피난처가 고센 땅이었다면 바빌론 포로들의 피난처는 그발 강가였다. 애급의 우상통치 못 지 않는 바벨론의 통치도 쉽지 않다. 더구나 포로로 잡혀간 난민들이랴!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스룹바벨이 그들의 인도자다. 에녹처럼 환난 전에 휴거되지 못한다면 엘리야처럼 환난과 핍박 속에서 어떤 땐 사르밧 촌에 숨어 지내고, 어떤 땐 맞서 싸우고, 대결도 해야 했다. 성령의 지시와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모퉁이에 남겨진 이삭은 내 땅 없는 <고아와 과부와 객> 같은 자들을 위한 남겨둠이다. 다니엘 때처럼 견뎌야 한다. 하나라도 나ᅟᅥᆷ김없이 다 거두신다! 할렐루야!
저는 군부 유신독재와 싸웠던 동부연회 젊은 목사 44인이었다. 그 땐 정부가 <보안법>으로 모두를 통제했었다. 그 때 고문 받고 뼈저리게 당했던 운동권의 핵심들이 지금 편집장, 보도국장이 되어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똘똘 뭉친 이들의 완벽한 통제다. 언론의 완전 장악은 치명적인 무기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못 느낀다. 짐승의 표 독재로 가는 길목이다. 이들은 ‘좌 빨’로 몰리니까 수구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한다. 이들에겐 좌우 합일에는 관심이 0도 없다. 오로지 적폐청산 숙청이다.
이북에는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숨어서 신앙을 지켜내는 무리들이 있다. 성경의 <성>만 꺼내도 재판 없이 사형, 숙청되는 사회다. 전 세계에 단 한 곳이다. 독재자는 1호 식품을 만드는 농장, 어장, 목장이 따로 있다.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이들은 계시록의 계시를 보여주는 현실이다. 이 정부가 이대로 간다면 영락없이 우리에게도 닥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Ⅰ. 동행 영성.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휴거되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본능에 충실한 육신을 데리고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죄짓지 않고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하며 산다는 말이다.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절대 불가하다. 오죽하면 ‘행위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다‘ 했겠는가? 그렇다고 ’따로국밥하자‘는 건가? 어차피 율법은 포기하고 은혜를 구하자! 수만 번 용서하시는 은혜에 얹혀살자. 그건 뉴 영지주의 아닌가?
‘내 기도하는 이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기도하는 순간만은 죄의 생각도 나를 점령하지 못한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는 그 때는 죄가 나를 좀먹지 못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과 대면하고 있는 그 순간! 흠과 티가 없는 제물 아닌가? 이미 각 떠서 드려진 상태 아닌가? 그 엄위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오면서 예배를 드리다니!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할렐루야!
Ⅱ. 담대함 영성. 엘리야가 휴거된 것은 담대한 믿음이었다.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왕상 18:8-11)
극심한 기근을 선포하고 숨어버린 엘리야는 신고대상 1호다. 농경신 바알이 우로를 주관하는 게 아님이 증명되었다.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니까 더욱 아합은 엘리야를 뒤졌다. 사형 0순위다. 3년 반을 기도하던 옐리야는 나타나 갈멜산 대결을 선포한다. ‘누가 참 신인가?’ 결국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아작 내었다.
그의 담대함에는 언제나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응답되는 기도의 사람- 담대한 사람이다. 무적의 사람이다. 하늘의 계시가 살아 있는 영성의 사람은 육신에 매어 살지 않는다. 체면, 존심, 위신, 권위 … 매장된 지 오래다. 할렐루야! 에녹처럼 동행하던가, 엘리야처럼 기도로 무장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