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은 그 속에 정반대의 모습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듯한 사람이다. 나우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찰과 고독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자주 쓰곤 했다. 하지만 호리호리한 큰 키에 약간 구부정한 그의 몸은 예민하면서도 아주 부산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보통 오전 7시 30분 즈음에 시작해서 주로 밤늦게까지,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집과 사무실을 들락날락거린다. 그는 매일 한 번 이상 예배에 참여하고, 영성을 지도하고, 직원들의 문제를 처리하며, 그의 사역 터전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 토론토 바로 북쪽에 자리 잡은 정신^신체지체 장애인들의 공동체)에 있는 많은 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기도할 때의 침묵을 강하게 옹호하는 이 사람은 말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어떤 인터뷰에서 나는 서너 시간 동안 나우웬에게 겨우 서너 개의 질문밖에 하지 못했다. 질문을 할 때마다 그가 관찰한 바와 얽힌 이야기들, 그리고 참고 성경 구절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간간이 그는 소심하게 사과했다. “너무 길게 얘기해서 미안해요.”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어떤 말 이상이다. 그에게는 영성 생활에 대한 통찰이 넘쳐난다. 한번은 그가 침례교 목사 모임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목회는 가장 덜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고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면,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가 늘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사소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알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면이 하나님으로 가득한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아마도 최고의 아이러니는 나우웬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다. 노틀담, 예일, 하버드의 교수였던 그가, 지금은 낮은 지능과 장애로 인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상처입은 치유자」(두란노 역간)와 「영성의 씨앗」(그루터기하우스 역간)과 같은 책들은 수많은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지만, 나우웬은 주로 신앙의 아주 초보적인 수준만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반대의 모습들과 아이러니 속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 그 일관성은 나우웬의 경력과 업적이 아니라 그의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
상처받지 않은 척하지 않기나우웬이 8년 동안 목회자로 섬기고 있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는 리치몬드 힐이라는 작은 마을 전역에 퍼져 있다. 마을 중심에는 오래된 농장과 함께 집 몇 채, 사무실 건물, 마을 회관, 목재 전문점, 기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까지 이 건물들은 자갈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우웬은 작은 파란색 혼다 씨빅을 타고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그 자갈길을 질주하곤 했다. 그 공동체가 도로 포장을 검토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나우웬이 더 빨리 달릴 것을 염려해 도로 포장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브레이크에서의 삶은 인내가 필요한 긴 여정이다. 이곳은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봉사자들이 복음에 따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국제 초교파 공동체 네트워크인 라르쉬(L’Arche, ‘방주’라는 뜻의 프랑스어)에 속해 있다. 최초의 라르쉬 공동체는 1964년 프랑스인 가톨릭 신자 장 바니에가 프랑스의 트로즐리에 세웠다. 나우웬은 1986년부터 데이브레이크에서 살고 있다. 북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라르쉬 공동체 중 하나인 이곳은 백여 명의 삶의 터전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우리에게, 깨어진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분과의 깊은 사귐으로 이끄시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리고 나우웬은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가 상처입은 치유자임을 강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치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으로부터 도망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어릴 때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한 사람과 길게 산책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유머, 통찰, 이해심에 나는 깊게 감동받았다. 데이브레이크가 없었다면, 그 사람뿐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다른 이들 역시 거리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라르쉬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이들이다. 하지만 라르쉬는 하나님이 깨어진 우리를 사랑하심을 기억하며 장애인과 봉사자 모두를 품는다.
나우웬은 자기를 이해하고 싶으면 라르쉬를 경험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인터뷰를 하려는 이들은 데이브레이크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곳만의 독특한 움직임에 젖어 보아야 한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라르쉬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정상’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영적 은사를 세상과 나누는 일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회심할 때 우리는 심령의 가난을 경험합니다.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그들이 지닌 가난함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복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나우웬은 강연 요청을 받고 길을 나설 때면 대부분 장애인 가족을 한두 명 동반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냥 헨리 나우웬이 아닙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 공동체는 정말 예외적인 공동체 같다. 봉사자들은 순진한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와서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공상적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대부분 라르쉬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이나 섬겨온 이들이다. 나는 이곳에서 이탈리아, 독일, 호주, 도미니카공화국 등 세계 전역에서 온 봉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보통 진지한 영적 대화에도 바로 참여한다. (또 휠체어, 리프트, 질병들에 대한 ‘전문적인 대화’도 꽤 많이 들을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어슴푸레한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아일랜드 출신의 봉사자 스칸이 문을 열고 마이클을 태운 커다란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마이클은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걸을 수도 없고, 말도 못하고, 혼자서 식사를 할 수도 없다. 그의 몸에는 추위를 막아줄 망토가 정성스럽게 걸쳐져 있었다. 스칸은 조심스럽게 그의 망토를 벗겼다. 그들은 함께 앉아서 기도를 드렸다. 스칸이 가끔씩 마이클의 몸을 옮겨 주거나 마사지를 해주었다. 라르쉬에서는 육체적인 돌봄과 영성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는 진이 빠지고 정서적으로는 탈진할 수도 있는 일이다. 또 이 일은 계속해서 아픔과 고통을 상기시킨다. 내가 몇몇 장애인 청년들에게 루이스의 「나니아 나라 이야기: 캐스피언 왕자」를 읽어 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함께 있던 봉사자들에게 이런 일은 일상이었다.
성공보다는 예수님과의 사귐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도움을 구하고자 나우웬을 찾아온다. <더 도어>(The Door)의 문화비판적인 편집자 마이크 야코넬리와 복음주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이곳에 와서 오래 머문 적이 있다. 야코넬리는 그 피정 시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하지만 나는 사실 예수님과 함께 있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쉽지만, 하나님이 내 속에서 일하시도록 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우웬은 경험 많은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피로와 영적 탈진을 감지하곤 했다. 그들은 궁금해한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고 싶어 하는, 혹은 다른 이들이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때 그들을 돕고 싶어 하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생명력 있는 삶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요?”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함께한 피정 시간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는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사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쓴 요한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바를 두고 서로 의견을 나눴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서 우리는 사역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단지 오래 전에 사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가 따라야 할 분만이 아닙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사귀며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분입니다.”
복음주의자들만 나우웬을 찾아온 것은 아니다. 나우웬 역시 신학교나 더 많은 청중을 위해 강연해 달라는 여러 초청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찾아간다. 예를 들어, 1992년 여름, 영국에서 매년 열리는 복음주의 예술 종사자들의 초대형 집회인 그린벨트 페스티벌에 나우웬은 주강사로 참여했다. 3만 명이 참석한 집회였다.
나우웬은 복음주의자들이 신앙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 “주저하거나 곤란해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당당함이 저는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렇게 지적했다. “복음주의자들이 쫓겨 다니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삶에 신비적인 영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예수께로 이끌었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내 삶이 얼마나 신실했느냐?’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공적이지 못할 때도 열매 맺을 수 있음을 믿으며 세상에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은 성공 지향 문화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여느 회사들처럼 교회 역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럴 때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전통이 중요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나니.’ 그 열매는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와 상실에서 출발하는 예배데이브레이크에서 삶의 중심은 예배다. 이 공동체는 초교파적이며 다양한 색깔의 개신교도들이 있지만, 예배는 보통 ‘고교회’ 즉 로마 가톨릭이나 영국 성공회 양식을 따른다. 여기저기에 촛불이 타고, 한쪽에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그림이 보인다. 또 다른 한쪽에는 러시아식 예수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제는 알록달록한 스톨(어깨에 걸쳐 무릎까지 늘어뜨린 성직자의 제복)을 갖춘 예식용 제복을 차려입는다. 공동체의 장애인 식구들은 양쪽 편에 앉아 사제를 도울 준비를 한다. 공동체 내의 목재 전문점에서 제작한 방주 모양의 커다란 원목 탁자 주위로 의자들이 놓여 있다. 한쪽 구석에는 ‘규격’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장애인들을 위한 커다란 콩자루 의자가 있다.
예배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이다. 때로 헬라어로 ‘퀴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이라는 찬양을 부른다. 이후의 전통적인 절차나 예식, 촛불 등은 ‘고교회 형식’ 그대로다. 어떤 때는 ‘쿰바야’나 다른 간단한 민요를 부른다. 음정이 다 같지는 않다. 모든 예배자가 다 노래를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신음 소리를 내고, 또 어떤 사람은 크게 이를 갈고, 어떤 사람은 침묵한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 내내 몸을 흔들며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설교 시간에는 일부가 사견을 늘어놓거나 반박을 하면서 설교자를 방해한다. 장애인들은 성찬식을 위한 빵과 포도주와 여러 도구를 준비하며 예배 준비를 거들고, 성찬예식을 돕는다. 일이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몇 년 전 내가 이곳에서 접한 첫 성찬식 때는, 잔이 반 정도 돌았을 때 누군가 포도주를 다 마셔 버린 일이 있었다. 우리는 미소를 지었고, 포도주 향만 나는 빈 잔을 입술에 갖다 대며 성찬식에 참여했다.
나우웬도 처음에는 이런 방해를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사역은 쌍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장애인들은 그들의 가난함으로 내게 하나님의 첫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데이브레이크의 경험으로 그는 예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책 「뜨거운 마음으로」(분도출판사 역간)는 ‘예배의 삶’을 실패와 상실을 통해 감사로 가는 여정으로 그린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드러난 시간 나우웬은 공동체의 목회자로 봉사자에게 영성 지도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기도의 시간으로 보도록 격려한다. 낮에는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밤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매일의 기도 시간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말씀하신다고 나우웬은 말한다. 정기적인 훈련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 전체가 기도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따라 이런 인식을 발전시킨다면, 매일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창문’으로 만들 수 있다.
사실, 나우웬의 일은 기도하라는 명령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강하게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눈을 늘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눈을 돌려 자기 발이 닿아 있는 출렁이는 물을 바라보자마자 물에 빠져들어 갔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멈추자마자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눈을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 한, 우리는 어디를 가든 평화를 전하며 이 세상을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영원히 쉴 곳은나우웬 인생의 또 다른 주제는 영적 본향을 향한 탐구였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섯 살 때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꿈을 꾼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아주 작은 아이 시절부터 하나님은 제게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시 남자 아이들은 종종 사제처럼 해 보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제게는 작은 성찬대과 성체를 담는 성합과 예복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하고 놀았지요. 당시에는 그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소명은 다양한 충동에 이끌렸다.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어떤 한 목소리가 ‘네가 이 세상에서 잘할 수 있다는 것, 독자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 줘. 네가 뭔가 성취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라고 말했습니다. 이 목소리는 내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더 진력을 다하라고, 나 자신에 대한 높은 목표를 세우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인생에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예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지 마라. 유명해지고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계속 네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빛을 잃지 않는 것이야.’”
늘 안정을 찾지 못한 나우웬은 자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는 탐구하고 시험해 보며 볼리비아, 페루, 뉴욕 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의 제네시 수도원, 로마에 있는 북미대학(North American College), 그리고 다른 여러 종교 공동체에서 살았다.
영원한 본향은 이루기 어려운 소망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약속과 상징은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거처와 관련된 이미지가 복음서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예수님은 같은 집에서 자기와 같이 살자고 제자들을 초대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몸소 집이 되신다.” 「라이프싸인」(아침영성지도연구원 역간)에 그가 쓴 글이다.
안정을 찾지 못한 나우웬의 갈망은 청년 시절에 끼어든 직업의 갑작스런 변화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1957년에 안수를 받은 후 네덜란드의 한 교구에서 사역을 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주교의 요청에 따라 그는 계속 학교에 남아 6년 동안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 다음 2년 동안은 캔자스에 있는 메닝거 병원에서 머물면서,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는 작업을 했다. 그 후 30대가 되어서야 그는 노틀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르치는 일을 정말 좋아했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는 심리학이 결코 나의 주전공이 될 수 없음을 바로 알아챘습니다. 내게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말씀을 전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내가 대학에 있게 된다면 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강의들은 첫 책 「친밀함」(두란노 역간)에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작가가 될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그의 저술 작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노틀담 대학을 떠난 뒤에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신학교에서 2년간 가르치며 신학을 더 깊이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예일 대학교의 교수로 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런 대학에서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교로부터 몇 년간 가르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그곳에서 10년 동안 머물렀다. 그는 결국 전임 교수가 되었다.
나우웬은 예일을 좋아했지만 자신이 부름받은 곳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영적 삶이 깊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고, 그리스도에게 충분히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좀 더 기본적인 무언가를 원했습니다.”
나우웬은 이를 위해 기도했다.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르쉬의 총무인 장 리세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것이다. 그는 라르쉬의 창립자 장 바니에의 안부 인사를 전했다. “나는 이런 안부 인사가 강의를 해 달라거나, 글을 써 달라거나, 그곳에서 피정 시간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나우웬의 생각과는 달리, 그 방문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었다. 오히려 리세는 며칠 동안 나우웬의 집에 머물면서 그를 위해 멋진 식탁을 준비하고 실제적인 면에서 그를 도왔다.
“당시에는 그저 놀랐지만, 나중에는 라르쉬의 정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이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맺는 방식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서 무언가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리세의 방문은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1981년, 나우웬은 모든 것을 끊고 예일 대학을 사임한 후 남미 대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몇 번의 여름을 보내면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곳이 이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아니 적어도 이 일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동기에는 자신의 풍요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일기 「소명을 찾아서」(성요셉출판사 역간)에서 라르쉬에서 소명을 찾으려 했던 것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다. “남미로 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발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니카라과를 방문했다가 2개월간의 미국 순회강연을 떠났다. 이 일로 그는 탈진했고, 그에게는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다. “나는 이렇게 피곤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며 내 영혼이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너무 외로웠고 망가져 있었습니다.”
나우웬은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최초의 라르쉬 공동체에서 6주를 보냈다. 그곳에서 순회강연으로 쌓인 피로를 회복하고 자신의 일을 재평가했다. 라르쉬는 그에게 치료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머물 수 있고, 돌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나우웬은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버드에는 그가 좋아했던 것들이 많았지만 이곳 역시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내 성공이 내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내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버드에서의 경험은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내가 있었던 곳 중에서 가장 힘든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야심만만한 학교였고 때로는 거만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내 마음과 영혼을 깊게 할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우웬은 그가 알고 있던 한 본향을 찾아갔다. 그가 트로즐리에서 1년간 지내면서 쓴 일기는 「새벽으로 가는 길」(바오로딸 역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 후 나우웬은 토론토에 있는 데이브레이크의 목회자로 초청받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느꼈던 것은 내 전 생애에서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일들은 내가 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도권을 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느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나우웬은 감사하게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 일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성공적인 작가이자 아이비리그의 교수는, 사회가 가라고 하는 길을 거꾸로 가고 있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최고이자 가장 명석한 이들을 위한 기관’을 떠나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간다고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이 장소는, 저자이자 강연자인 그의 전문 지식에 가장 관심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장애인들이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한다면, 이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깨지고, 상처입고, 아무런 가식 없는 사람들은 의미 있어 보이는 자아를 내려놓게 만듭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무언가를 보여 줄 수 있고, 무언가를 증명할 수 있고, 무언가를 세울 수 있는 그 자아 말입니다. 그들은 내가 철저하게 연약한 존재라는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되찾게 하고, 어떤 성취와도 상관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데 마음을 열게 해줍니다.”
나우웬은 또한 자신의 욕구에 대해 이보다 더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었다. 외적인 본향을 찾다 보니, 더 깊은 내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외적인 불안함은 하나님만을 의뢰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증상이었다. 그는 고백한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때, 당신은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것에 집착할 것입니다. 친구의 사랑은 당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88년 데이브레이크의 후원을 받아 6개월의 휴가를 얻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나우웬은 라르쉬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정확히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일이라는 사실에 여전히 놀라면서도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은 마침내 자신의 본향을 찾은 것일까? 그가 남은 인생 동안 라르쉬에 머물러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우웬은 라르쉬로의 부르심이 자신이 예일이나 하버드에 갔을 때와는 다른 것임을 믿고 있다. 그는 떠날 계획이 없다(1996년 9월 21일 눈을 감을 때까지 헨리 나우웬은 데이브레이크를 떠나지 않는다/역주). 데이브레이크에 있는 그의 방에는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약간의 구식 가구들과 몇몇 성화와 성상들이 있다. 정말 집같이 느껴진다. 이곳이 그의 마지막 거주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헨리 나우웬은 그가 간절히 원하던 첫사랑의 집에 훨씬 가까이 다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