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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 감옥, 그 생지옥에서 만난 하나님
♣ 시체와 섞여서 복음을 전하다
1902년 가을, 콜레라가 조선을 휩쓸었다. 감옥은 전염병이 창궐하기에 너무나 좋은 장소였다. 환자와 맞닿아있어야 하는 비좁은 공간과 불결한 환경, 불량한 영양 상태는 수많은 죄수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참혹한 떼죽음의 와중에서 이승만은 사투(死鬪)를 벌였다. 그는 여러가지로 그를 도와주었던 미국 의사 애비슨(Avison)에게 연락해서 약을 구했다. 그리고 의사의 지시를 따라 환자들에게 투약하며 보살폈다.
사실을 추적보도 한 특종들을 터뜨린 바 있는 이승만은 참담한 와중에서도 기자 출신의 면모를 잊지 않았다. 1902년 9월 12일 이승만은 영어로 쓴 메모를 남겼다. 그날 하루 감옥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기록이었다.
아홉 개의 항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항목마다 잉크의 진하기가 다르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실려 나갈 때마다 한 줄 씩 기록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죄수 1명 - 화폐 위조범
여자 죄수 1명. 2살짜리 딸을 남기고 갔다.
2명이 한꺼번에, 한 명은 죄수이고 다른 이는 죄수가 아님
여자 죄수 1명
죄수 3명. 하루아침 모두 10명. 콜레라로 죽음
죄수 1명 - 종신형. 16살 먹은 소년, 저녁 8시에 죽음
3명중 2명은 죄수이고 1명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 모두 9시 45분 경
모두 15명이 죽음
죄수 1명 - 위조범, 16번째 죽은 자
죄수 1명 - 소년, 하루에 17명
때론 감상(感想)보다 사실이 더 큰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군더더기 없는 기록이지만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메이게 한다. 살을 맞댄 동료들이 단 하루에 열일곱 구의 시체로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 단 몇 마디로 기록한 죄수들의 사연이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콜레라 환자는 고열과 함께 설사, 구토, 근육 경련을 동반한다. 비좁은 감방에서 옆에 있는 죄수들이 구토하고 설사를 하다가 마침내 쓰러져 죽어버렸을 때, 함께 있던 동료들이 겪어야하는 고통은, 겪지 않은 이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간수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가끔 환자들의 발을 찬 뒤에, 반응이 없으면 밖으로 실어 나르는 것뿐이었다.
끔찍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김형섭은 끔찍한 증언을 남겼다. 어떠 환자가 목마름을 참지 못해 뜰에 있는 하수구로 기어가는 것을 창밖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눕혀져 있는 것은 마치 "어물전에 물고기가 놓여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나마 사람 살 곳이 못되었던 감방이 악취와 시체더미로 가득 차오르던 그때, 이승만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는 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손발을 만지며 도와주려고 애썼다. 옆에 있는 동료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섞이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했다.
콜레라와 싸우는 이승만의 모습은 성자(聖者)에 가깝다. 죽음의 가을을 넘긴 이듬해 이승만은 참혹했던 계절의 기록을 남겼다. 1903년 5월 <신학월보>에 실린 "옥중 전도"이다. 옥중수기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감동적인 글이다.
"혈육의 연한 몸이 오륙년 옥고에 큰 질병 없이 무고히 지내며 내외국 사랑하는 교중 형제 자매들의 도우심으로 하도 보호를 많이 받았거니와,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 줄 믿고 마음을 점점 굳게 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 ...
작년 가을에 괴질(콜레라)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사오일 동안에 육십여 명을 눈앞에서 끌어내릴 새, 심할 때는 하루 열일곱 목숨이 앞에서 쓰러질 때에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으나, 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을 기르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함이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썼다. 자신의 몸이 사슬에 매여 있으면서도 복음은 매이지 않고 전해짐을 기뻐하며 감격에 찬 필치로 기쁨을 노래했다. 이승만의 "옥중전도"는 빌립보서를 연상케 한다.
생지옥에서 구토와 설사를 퍼부어대는 환자들 틈에서, 시신과 섞여가며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찾아온 것은 기쁨이었다. 그야말로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 「독립 정신」, 방대하고 철저한 선각(先覺)의 글
이승만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은 뜨거움이었다. 열혈 청년으로 명성을 떨친, 들끓는 애국심이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른 불덩어리가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게 했다. 이십대의 육체를 사로잡은 불길 같은 열정이 격투를 벌이며 싸우게 했다.
감옥에서도 정열은 식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도왕이 되었고 필봉(筆鋒)을 휘둘러 논설을 썼다. 학교를 세우고 도서관을 운영하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독서에 몰두했고 영어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보통 사람이면 엄두도 내기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으니, 영한(英韓)사전 편찬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영한한(英韓漢) 사전'이다. 영어와 한글과 한문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이승만은 또 다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영한사전 편찬 시도이다. 이승만은 A에서 F까지 총 8223개의 단어를 번역해 냈다. 작업에 투입된 날짜를 따져보면, 하루 평균 20개 정도의 단어와 씨름한 셈이다.
남아있는 원고에는 동서양의 학문에 능통한 이승만의 학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뛰어난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완성되었다면,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 편찬 작업은 1904년 2월에 중단되었다.
그때, 동북아(東北亞)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러일 전쟁이 터졌다. 러일 전쟁은 한마디로 '누가 먹느냐'의 싸움이었다. 먹잇감은 조선이었다. 전쟁의 승자가 조선을 차지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승만의 피가 또 한번 뜨거워졌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한가로이 사전이나 만들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감옥 친구 유성준도 거들었다. "독립 협회 이전의 모든 개혁 운동이 실패한 것은 지도자들이 일반 민중을 교육시킬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네, 독립 운동에 대한 여론을 조성해야 하네,"
조선이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깨어나야만 했다. 그들을 일깨우기 위해선 선각자의 외침이 필요했다. 감옥에 있던 이승만이 역사의 호출을 받았다. 1904년 2월 19일, 만 스물아홉의 죄수가 한성감옥에서 집필하기 시작한 책이 「독립정신」이다.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독립정신」에 대해서 찬사가 쏟아졌다. 이원순은 "자유주의자의 영감으로부터 나온 뛰어난 책"이라고 말했다. 서정주는 "저 방대하고도 철저한 선지자(先知者)로서의 글"이라고 멋스럽게 표현했다.
이한우는 "유길준, 김옥균, 서재필 등에 의해 시작된 초보적 수준의 개화론이 근대 민족주의로 체계화되는 전환점을 맞게 하는 기념비적 저서"로 보았다. 미국의 연설학회 회장과 대학 교수를 지낸, 이승만의 오랜 동료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는 " 「독립정신」은 한국인들의 정치적 성서(Bible)이다. 이 저서를 차근차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승만을 옳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김길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승만이 이 책에 그린 나라와 백성의 조건은 글로벌 현대 선진국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승만을 논하려는 자, 모름지기 이 책부터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독립정신」의 국가 정신이야말로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할 것이다."
유영익은 이승만에 관한 수천 건의 1차 자료를 분석하여 새로운 학문적 결과를 쏟아내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가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정치학과를 지망한 계기는 이승만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분노였다. 4·19가 일어났을 때, 그는 열렬히 찬동했었다.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다.
"1960년대 미국 하버드대학에 유학할 때였습니다. 옌칭 연구소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첫 저서 「독립정신」을 읽으면서 19세기 말에 청년 이승만이 가졌던 비범한 역사관과 세계관에 은근히 놀랐지요. 젊은 나에겐 솔직히 같은 시대 박은식이나 신채호의 역사관, 세계관과 비교하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후 19세기 한국 현대사에 관심의 초점을 모으면서 마침내 4·19때 가졌던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고정 관념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최제우, 전봉준 등과 비교할 때 당시 이승만의 식견과 행동은 탁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승만 연구를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유영익은 「독립정신」에 대하여 옥중에서 5년간 독서를 통해 터득한 독립을 위한 기본 상식 교과서이며, "이승만의 감옥 대학 졸업 논문"이라고 묘사했다.
필자의 소견으로 「독립정신」에서 뚜렷이 읽혀지는 주제를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로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이다. 서문에서 이승만은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중간층 이상의 사람이나 한문(漢文)을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썩고 잘못된 관습에 물들어 기대할 것이 없고, 그 주변 사람들도 비슷하다."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감옥에서도 무디어지지 않은 혁명가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중간층 이상이 썩었다면, 기대할 곳은 백성들이다. 그 백성들을 향하여, 감옥에서 붓을 든 것이다.
"지명과 인명을 많이 쓰지 않고 일상 쓰기 쉬운 말로 설명한 것은 읽기 쉽게 하려는 것이며, 한글로만 쓴 것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특별히 백성에 대해 많이 쓴 것은 대한제국의 장래가 백성에게 달려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통찰했다.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우리나라의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 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올바로 행하며,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여 날로 국민정신이 바뀌고 풍속이 고쳐져서 아래로부터 변하여 썩은 데사 싹이 나며, 죽은 데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
어두운 시대에 캄캄한 감옥에서 이승만의 붓은 희망을 적어간다. 그의 지향점은 부활이다. 죽어가는 조국이 깨어난 백성들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기를, 그는 부활을 꿈꾸며 글을 써내려 간다.
"당장 시급한 것은 모든 사람이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마음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백성들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백성들이 변한다면 이는 나라를 위해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씨만 잘 뿌려 놓으면 반드시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육의 중요성이다. 나라의 주인된 백성, 그처럼 중요한 백성이 교육을 받지 못해서 무지한 상태라면, 나라의 희망은 없어진다. 이승만은 탄식한다. "백성들을 일깨울 책 한 권도 없고, 그들에게 말 한마디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 어떻게 그들이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
따라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길은 교육에서 시작된다. "어느 나라든지 백성이 모두 썩어 활력을 잃어버리면 여러 해 동안 교육을 통해 활력을 회복해야만 개화(改化)가 스스로 뿌리내릴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어떤 제도나 주의(主義)도 세울 수 없으며, 설사 우연히 어떤 제도를 들여온다 하더라도 쉽게 쓰러질 것이니 그것은 제대로 뿌리내렸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승만이 훗날 '교육 대통령'으로 불리우며 '교육 혁명' 또는 '교육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한성 감옥에서부터 쌓아올린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이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현실, 국제 정세, 선진국의 역사 등을 두루 논한 뒤, 마지막에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을 주장한다. 강령까지도 모두 소개한 뒤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재주만 키운다면, 이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처럼 세상을 해롭게하는 기운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도 위험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도 해로운 것이니, 차라리 재주를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하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케 하는 것이 마음의 수양에서 시작된다고 했듯이,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서 무슨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와 세계를 넘나들며 외면의 세상을 종횡무진으로 논하던 붓끝은 내면으로 향했다. 마음이 잘못된 백성이 주인이 된들, 교육을 받은들 잘못된 세상을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바로잡을 것인가? 이승만은 말한다.
"세계 문명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회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일반 백성들까지도 높은 도덕적 수준에 이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곳에서 싹을 틔우고자 애쓰고 있는데,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는 온 세계와 접촉할지라도 참된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신학문을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며, 외교를 위해 아무리 힘써도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도 서양의 앞선 나라들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도덕적 의무를 존중해도 사회 기풍이 한결같지 않을 것이며, 자유를 소중히 여겨도 자유의 한계를 몰라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여기에 열거한 내용들은 모두 「독립정신」에서 전개된 주제들이다. 개방, 신학문, 외교, 주권, 도덕, 자유가 중요하다고 실컷 강조한 이승만은 마지막에 그 모든 것들이 기독교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허사가 된다고 결말짓는다. 감옥에서 생각하고 연구하며 고뇌한 끝에 내린 결론은 기독교였고 복음이었다. 기독교 신앙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를 영국과 미국처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
원로 극작가 신봉승은 「이동인의 나라」 서문을 감탄으로 시작한다. "선각(先覺)의 젊은이란, 얼마나 멋진 영예인가."
「독립정신」을 읽은 나의 소감이 바로 그것이다. 만 스물아홉 살의 이승만에게 보이는 선각의 발자취는 명예롭고 찬란하다. 신봉승의 글은 이어진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자애로우며, 공명하고 정대하여 누구를 만나도 꿀림이 없는 도덕적 용기를 가진 젊은이들 ... 나라의 미래를 위해 몸소 횃불을 짊어지고 스스로 불덩이가 되었던 선각자의 숭고한 희생이 있고 없음에 민족의 명운이 갈라지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정말 그렇다. 횃불이 없으면 길이 있어도 길이 아니다. 보이지도 않고 갈 수도 없다. 누군가 겨례의 앞길을 밝힐 횃불로 자신을 불태울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 선각의 깨달음을 펼쳐 보인 이승만은 선각의 희생마저도 담당하려고 한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나 혼자라도 지키며, 우리 2천만 동포 중 1999만 9999명이 모두 머리를 숙이거나 모두 살해된 후에라도 나 한 사람이라도 태극기를 받들어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전진하며,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을 각자 마음속에 맹세하고 다시 맹세하고 천만 번 맹세합시다."
이승만의 결단은 결단이면서 동시에 예언이었다. 이천만 가운데 홀로 남겨져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실제로 실천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공산화를 저지하는 싸움을,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해냈다. 스물 아홉 살, 젊은 죄수의 심장에 새겨진 비원(悲願)이 우리 민족의 운명이 되고 축복이 되고 길이 되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웅의 길, 파란만장하며 장엄하고 고통스러우며 고독한, 위대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