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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관부연락선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을 말한다. 여명기의 부산항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대륙침략의 야욕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부관연락선의 내력을
살펴보면 러일 전쟁이 종결된 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연결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는 일본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선박 수송을 계획하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추진하였다.
'관부'(關釜)이라는 이름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와 부산의 앞글자(釜, 부)를 딴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순을 바꾼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또는 일본에서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도 부른다.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협의로는
일제 강점기
및 그 이전의 일본측 노선을 의미하지만, 관습적으로 동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현재의 부관 페리도 위와 같이 부르기도
한다.
그 결과 1905년 9월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 240km를 잇는 1,680톤 급의 정기
여객선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가 시모노세키 항에서 취항하였다. 이것이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첫 번째 정기
연락선이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1,680톤 급의 첫 정기 여객선 일기환(壹岐丸)
두번째로 취항한 대마환(對馬丸)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에 미군의 공습으로 항로가
차단되면서 정기 여객선으로서의 생명이 중단될 때까지 부관 연락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대표적인 운송 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한때 한반도와 일본에서 귀환자들을 수송하는 선박이 이 항로를 정기적으로 왕복하였다.
그 항로개요와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항로개요
·관부항로 시모노세키∼부산 240km 소요 7시간 30분 (1940년 10월)
·하카다부산항로 하카타∼부산 215km 소요 8시간 10분 (1943년 7월)
=항로연혁
·1905년 9월11일-산요 기선이 대한 제국에의 외국항로로서 시모노세키∼부산간에 「관부연락선」을
격일 1왕복으로 신설. 경부선이 개통 하고 있었던 것에 따른다. 이키 마루가 취항.
*1905년 11월1일-대마환이 취항해 매일 운항이
된다.
*1906년 12월1일-철도국유법에 의해 국유화되어, 철도원의 운영이 된다.
*1910년 -한국합방에 따라, 일본 국내항로
취급이 된다.
*1943년 7월15일-시모노세키항의 용량부족과 수송력의 증강의 목적에서,
하카타∼부산간에
「하카다부연락선」신설.
*1943년 10월5일 미명 -관부연락선의 곤륜환이 미국 해군의 잠수함
'Wahoo'의 어뢰직격을 받아 침몰(사망자실종자583명). 이후, 야간
항행이 자숙된다.
*1945년
6월경-선박의 공습에 의한 피재와 대마도 해협의 봉쇄에 의해 사실상
소멸.
일본 재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를 취항시키려는 움직임은 개항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업가이며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 총감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부산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상업 실태를
시찰하였다. 그 후 최초의 일본인 무역 상사인 대창조상회(大倉組商會)를 설립 운영하고 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공동으로 서명하여
1877년 8월에 정기 항로 개설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시부자와 에이이치(좌)와 오쿠라 기하치로(우)
이들은 명치 정부의
대장성(大藏省)에 조선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자금 10만 엔을 대부할 것과 매월 2~3회의 정기 항로를 열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명치
정부는 규슈(九州)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남전쟁(西南戰爭)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 진정된 후에 운항을 허락하겠다고
회답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인적
이동과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정기 항로 개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3년에 일본의 민간 회사에 의해 인천과 오사카(大阪) 그리고
모지(門司)를 연결하는 645톤 급의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취항하였고, 이어서 1902년에는 원산과 4, 원산과 모지를 연결하는 746톤
급의 스미다가와마루[隅田川丸]가 취항하였다. 이 두 선박의 운행이 근대 한일 양국 항로의 효시가 되었으며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에 정기
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밤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 선박이 시모노세키 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운항 시간은 11시간 30분이었고 여객 운임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엔 50전이었다. 이후 1942년 조정된
운임은 1등석 20엔, 2등석 10엔, 3등석 5엔.
관부연락선요금과 여행
시간
일기환(壹岐丸)·대마환(對馬丸)의
시모노세키∼부산간의 운임은 각등 모두 식사 딸린 요금으로.
1등 12엔 양식
2등 7엔
3등 3엔50전
관부연락선의 취항으로
인해 여행 시간이 단축되었다.
오사카-부산 29시간여
오사카-교토 44시간여
도쿄-부산 48시간여
도쿄-교토
60시간여
토쿄-서울간
열차시각표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은 선박 길이 82미터, 폭 10.9미터, 총 규모는 1,680톤에 달하였다.
여객 정원 317명, 화물 3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영국의 해외 항해 선박을 모방하여 만들어져 선단에서 선미까지 평평한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에는 부산항에 이 배를 직접 접안시킬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초량 앞바다에 정박한 후 소형 선박을 통해 승객과 화물을 부두로 이동시켰다. 1912년에는
부산제1부두에 부산잔교역을 개설하여 관부연락선 승객이 바로 열차를 탈 수 있도록 편리를 도모하였다.
1912년 부산잔교역 이전
1912년 부산잔교역을 준공, 곧바로 열차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의 접안 시설이 근대화되면서
정기 여객선의 규모와 편수가 계속 늘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걸쳐 시기에 따라 약간 승객 수가 감소한 경우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연락선을
통한 인구 이동은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1943년 10월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곤륜환(崑崙丸) 선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심해졌다. 1945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관부 연락선의 모든 선박을 안전한 항로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일제 강점 하의 관부 연락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적,물적 수송의
대동맥 중 하나로 식민지 시기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해운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 침탈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이 항로는 일본 -
조선 - 만주로 이어지는 대륙 침탈 기지의 중계 노선으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에 국가 정책적,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노선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노선이 개설된 1905년의 부산, 시모노세키간 총 수송 승객 수가 약 35,000명인데 이것이 점차
늘어나 1910년대 말에는 40만명을 넘고, 1930년대 후반이 되면 100만명을 넘어서며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징용,징병하기
시작하는 1940년대가 되면 200만에서 많게는 300만에 가까운 인원을 수송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여객 수송과. 해방 직후의 귀환자 수송을 합하면 총 3000만 명 이상의 승객이
관부연락선을 이용하였다
관부연락선의 종류
선명 |
운항기간 |
총톤수 |
길이 (m) |
정원 (명) |
적재량 (t) |
속도 (Knot) |
일기환 (壹岐丸) |
1905.9
~ 1931.5 |
1680 |
79.4 |
337 |
300 |
15 |
대마환 (對馬丸) |
1905.11
~1925.12 |
1679 |
82.5 |
337 |
300 |
15 |
고려환 (高麗丸) |
1913.1
~ 1932.10 |
3029 |
102 |
603 |
930 |
16 |
신라환 (新羅丸) |
1913.4
~ 1945.5 |
3024 |
98.9 |
603 |
930 |
16 |
경복환 (景福丸) |
1922.5
~ 1945.6 |
3620 |
114.3 |
949 |
430 |
20 |
덕수환 (徳壽丸) |
1922.11
~ 1945.6 |
3620 |
114.3 |
945 |
430 |
20 |
창경환 (昌慶丸) |
1923.3
~ 1945.6 |
3620 |
114.3 |
945 |
430 |
20 |
금강환 (金剛丸) |
1931.11
~ 1945.5 |
7082 |
134.1 |
1746 |
3170 |
23.2 |
흥안환 (興安丸) |
1937.1
~ 1945.6 |
7082 |
134.1 |
1746 |
3170 |
23.2 |
일기환 (壹岐丸) |
1940.11
~ 1945.6 |
3519 |
103.8 |
- |
4617 |
17.2 |
대마환 (對馬丸) |
1941.4
~ 1945.6 |
3516 |
103.8 |
- |
4617 |
17.2 |
천산환 (天山丸) |
1942.9
~ 1945.6 |
7907 |
143.4 |
2048 |
2223 |
23.3 |
곤륜환 (崑崙丸) |
1943.4
~ 1943.10 |
7908 |
143.4 |
2050 |
2223 |
23.4 |
배 이름을 보면 묘한 특징이 있는데 아직 정식으로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 아닌 1900년대에는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섬들(壹岐,
對馬島)에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가 본격화된 1910~1930년 사이에 취항한 배의 이름은 한국의 왕조 이름(신라, 고려), 궁궐 이름(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산 이름(금강산)으로 옮아가고,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이후에는 만주, 중국의 지명{싱안(싱안링산맥),
천산(天山),
곤륜(崑崙(쿤룬)}으로
옮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일본 → 대한제국 → 만주 → 중국으로 점차 확장되는 일제의 침략 의도가 배 이름에 들어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
1922년에 취항한 경복호
1936년부터 취항한 금강호
일본인들의 조선 도항에는 큰 제한이 없었으나 조선인들의 일본
도항에는 여러 차례 제한이 있었다. 일본 도항을 위해서는 도항증명서를 얻어야 했는데, 이런 도항 허가제는 일본 본토의 정치,경제 사정에 따라
여러 번 폐지되었다가 다시 생기기를 반복했다. 최종적으로 내지 도항제한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45년 3월에 이르러서였는데 이것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본 본토 내의 노동력이 부족해 더 이상 도항 제한을 둘 이유가 없었던 일제의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기주(韓琦柱)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여가수였던 윤심덕(尹心悳)이 1926년 8월 4일 이 노선의 덕수환을 타고
가던 중 새벽 4시 대마도 근해를 지나던 중 애인이었던 유부남 김우진과 함께 자살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이 사건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으며, 1991년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탔던 배도 이 관부연락선이며,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의 주인공 유태림이 유학 갈 때 탔던 배가
관부연락선이다.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에서 나오는 가사가 이
관부연락선이다.
일본에서 작성된 관부연락선의
인원수송실적
이
노선은 1905년부터 운항이 중지되는 1945년까지 40년간 총계 약 3천만에 달하는 인원을 수송하는 등 명실상부한 조선과 일본 간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조선과 일본을 잇는 다른 해운노선도 많았지만, 통계자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조선과 일본간을 도항한 약 8,90%의
인원이 부관연락선을 통해 한일간을 왕복했다. 물론 물류 수송의 측면에서도 부관연락선은 큰 역할을 담당한 노선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유학생, 사업가, 노동자 등이었으며 노동자의 경우 일본 내에서 값싸고 일본인에 비해 힘이 세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았다. 우리집의 경우, 1940년대초 경남 문산읍 안전리에서 조상대대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이 일본 효교현으로 일자리를 찾아 부관연락선을 탔으며
그곳에서 누나와 형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조선인 상대로 작은 식당을 운영한 내력을 갖고
있다,
전시 체제가 가동되던 1930년대
말 ~ 패망까지의 시기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연고로 관부연락선에는 수많은 한이 서려있다.아래표는 1937년부터
1945년 5월까지 일본으로 송출된 조선인 현황표이다.
출처 : 다음 카페 "호숫가쉼터" " 피에스타" 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