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 그 현장을 찾아서 (5)
오후 네시 반에 출발한 우리의 버스는 황산벌을 찾아가는 중이다. 금강을 가로지른 황산대교를 건너자마자 금강정(錦江亭)이란 정자가 있고 고층 아파트도 보이는 강경시내를 지났다. 시간을 재촉하여 연산면 소재지인 듯싶은 곳을 지나치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집안 웃 어른댁으로 연산댁과 논산댁이 원님댁으로 서슬이 시퍼렇고 인근에 세도가 컸는데 ‘이렇게 작은 골짜기의 원님이었구나….’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에 아로새겨진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이야기에 ‘얼마나 넓은 곡창지대 벌판일까’ 궁금증이 많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협소하기 짝이 없는 골짜기 마을이라 의외였다. 삼태기모양의 우리고향 동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을의 농토들이다. 외길로 달리던 첫 번째 버스가 모퉁이에 걸려 우리는 모두 내려서 벌써 다섯 시 반, 늦은 발길을 재촉했다. 손교수님의 설명이 이곳이 관창이 계백과 싸우다 장렬히 숨진 관창골이라 일러주어서 촌로들에게 물어보니 관창골이란 이름을 전연 모르고 지명이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라고 한다. 천년세월에 마을 이름마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는가 보다.
논둑길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외딴집 한 채의 노인에게 산성으로 오르는 길을 물어 오솔길의 잡풀을 헤치며 중간 중간 밤나무가 있어 알밤 두어 개도 주우면서 걸었다. 산 중턱에 띠를 두르듯 자동차 한대가 지날 만큼 큰길이 나있고 성재골이라는 곳에 「약사암」이라고 절이 하나 있다. 약사암 뒤로 1Km쯤 올라가니 수풀 속에 감추어진 석축으로 쌓은 황산산성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성곽을 한바퀴 돌아보고 싶었지만 벌써 여섯시이니 산성입구에 올라서서 우물자리, 양곡창고보관소등 손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황산벌은 야트막한 작은 동산에 백여 명 만 늘어서면 적을 차단할 만한 골짜기, 지금 한창 패인 벼이삭이 익어가고 있다. 그 뒤쪽 건너가 백제 오천결사대가 순절한 시정골(屍井里), 백제멸망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는 시선이 아프다.
그리고 마두리뒷산 충장봉이라 일컬어지는 성삼문 생가와 사당, 연산 저수지건너편에 있는 성삼문 묘소 등을 손교수님이 가르키는 방향을 상상을 하며 어렴풋한 영상을 그려볼 뿐이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산실인 만복사가 저쪽으로 25Km 거리에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경주보다 부여가 요새중의 요새였는데 난공불락이 무너진 것은 의자왕이 성충의 간언을 무시하는 바람에 백제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수군이 금강 하구로 들어오고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 육군이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장 계백 장군은 5000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일전을 벌려서 당나라군사13만 명과 신라군사 5만 명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지라 4번이나 물리쳤다.
신라어린 장수 화랑 반굴이 죽음을 각오하고 홀로 돌격 장렬히 전사하고 화랑 관창이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 사로잡히는데 사로잡힌 자가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안 계백장군은 말에 관창을 포박하여 다시 돌려보낸다. 그러나 관창은 다시 돌격 하였고 또 사로잡혀 몇 번을 놓아줘도 다시 올 것을 안 계백 장군은 결국 관창의 목을 베어 말에 묶어서 보낸다. 결국 사랑하는 아들을 시체로 맞게 된 두 장군을 본 신라군이 결국 사기가 올라 돌격 하여 와 결국 최선을 다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5천의 군사는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하고 시정골에 묻혀 백제멸망이 되었다. 백제멸망이후 이 황산벌은 백제의 멸망지이자 후백제의 멸망지이기도 하다. 견훤의 아들 신검을 왕건이 격파하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창건 한 개태사가 천호리에 있다는 설명을 듣고 오늘 문학기행을 마감하기로 했다. 성상문 생가와 사당이 있는 곳과 연산 저수지 사이에 있다는 계백장군의 묘 참배를 못함을 아쉬워하며 우리는 관창골을 후진으로 빠져나가 기다리고 있을 버스를 향하여 휙휙 작은 도랑을 뛰어넘으면서 논둑 밭둑길로 뛰었다. 여섯시 반에 하산하기 시작하고 관창골(관동리)을 빠져 나오는데 일곱시가 넘었다.
문학기행 후기 (6)
이번 문학기행은 나에게 새로운 역사인식을 하게 하였다.. 일백오십 여명 그 누구도 불평한마디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겨운 산을 오르내리고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하고 무엇보다 한건의 사고도 없었다. 교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뛰기는 다반사고 모르던 학우들과도 친목을 두터이 하였다.
삼천 궁녀가 빠져 죽었다는 백마강은 강이라기보다는 큰 내로 보였다. 백제멸망의 원인을 후세사람들이 과장하여 표현한 탓이라 생각된다. 백제는 그저 역사의 저편에 나의 기억에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것인데 이제 나의 마음은 무언지모를 처연한 아픔을 느낀다. 이 땅에 나고 사라진 어쩌면 나의 직계조상이 겪은 참담한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충효의 문제와 우리가 간직하고 보존해야 할 문화, 대도시의 편리한 21세기 개발문화 향유에 문화재 보존이라는 미명아래 부여주민이 겪어야하는 불편함에 대한 미안함등 무언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내면에 이는 파장을 느낀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나라는 강대국의틈바구니 반도국가로서 거기다가 이념의 남북문제로 먹히느냐, 먹느냐 항상 긴장상태에 않다.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 중 가장 풍요롭고 문화가 발달하였던 백제도 나당연합군에 하루아침에 멸망되지 않았던가.
모처럼 반만년 만에 찾아온 풍요로움의 대한민국, 세계무역경제11위의 위용에 최고 통치자나 정책입안자들의 오판이 없고 지혜로운 리더쉽을 발휘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백제멸망의 유왕산 추모제와 같은 문화행사를 거울삼아 대한민국의 무궁한 번영을 우리 사천 칠백만 모두 자각하고 나라발전에 일조하기를 기원한다.
슬픈 이야기
소정 민문자
방장선산(方丈仙山)섬 옛 영화
포룡정(抱龍亭) 전설을 안고
궁남지(宮南池)는 연꽃으로 쓸쓸히
미소 짓는다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
따라 걷는 길
왕포천(旺浦川)
백구와 해오라기만 날아오르고
슬픈 이 땅의 역사
천년 한 서린 낙화암 조룡대, 유왕정
백마강은 울며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