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풍기 광고 모델처럼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리는 건 바닷가의 강풍 때문이었다. 오정아가 해안 절벽을 등 뒤로 하고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러곤 한마디 "어우, 추워" 3월의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다. |
지난주 한국바둑계는 한 태극 낭자의 활약을 지켜보며 환호했다.
오정아(22) 2단이었다.
한국ㆍ중국ㆍ일본이 연승전 형태로 겨루는 국제기전 황룡사쌍등배 제5회 대회에서 선봉으로 나와 5연승을 달성했다. 오쿠아 아야 3단(日), 리허 5단(中), 기베 나쓰키 초단(日), 왕천싱 5단(中), 후지사와 리나 2단(日)을 차례차례 격파했다. 오정아가 이 대회 대표가 되기는 처음이었다.
한국바둑계는 한국 여자바둑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오정아의 활약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활약의 요인으로 오정아는 여자바둑리그와 국가대표팀 훈련을 거론했다. 여자바둑리그는 올해 창설됐고, 국가대표팀 훈련(감독ㆍ유창혁)은 작년 봄 출발했다. (사이버오로는 국가대표팀을 공식후원하고 있다.)
◀ 2015 엠디엠 여자바둑리그 12라운드에서 대국을 하고 있는 오정아 2단. 12라운드까지 개인 다승선두(공동, 8승1패)를 달리고 있다.
여자기사들은 더욱 치열해진 경쟁을 하게 됐고 공부량은 늘었다. 공부에 지쳐 기진맥진할 지경이다.
오정아는 여자리그에서 서귀포 칠십리팀의 1주전이다. 팀은 한때 최하위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지만 오정아의 꾸준한 성적과 더불어 팀도 계속 상승했다. 12라운드를 마친 현재 시점에서 오정아는 개인 8승1패를 기록하면서 다승 공동선두를 마크했고 서귀포 칠십리는 2위에 올라섰다.
통합라운드였던 여자리그 12라운드 경기는 10일 전북 부안에서 치렀다. 하루 전 강한 바닷바람이 몰려드는 부안의 해안에서 산책하는 오정아를 만났다.
- 부안 바닷가에 바람이 세다. 오정아 2단도 어릴 때 바람이 많은 고장에서 자라 바다를 잘 알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서귀포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곳은 몇 분이면 바다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다가 흔하니까 잘 안 가게 됐다. 그런데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니 고향의 바닷가가 생각난다.”
- 지난주 내내 중국 장쑤성에서 매일 같이 황룡사쌍등배 대국을 치르고 한국으로 온 뒤 여자바둑리그를 치르러 부안까지 내려왔다. 피곤하지 않나?
“약간 쉴 틈이 있었다. 푹 쉬었고, 서울에서 버스로 내려오는 동안도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컨디션은 괜찮다.”
- 소속팀 서귀포 칠십리는 한때 성적이 바닥을 칠 정도로 안 좋을 때도 있었다. 1주전으로서 마음 고생 했겠다.
“팀으로 리그를 치르는 것이 여자기사들은 다 처음이라 적응하는 과정부터가 다들 쉽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주전이라는 자리가 정말 부담되는 자리라고 느꼈는데, 내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팀에 보탬이 될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 황룡사쌍등배 얘기를 해 보자. 연승을 해내서 짜릿했겠다.
“황룡사쌍등배처럼 국가대항전이면서 연승전 방식을 갖춘 대회는 처음 경험해 봤다. 승리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연승 숫자가 커지는데 무언가 가슴 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한 뜨거운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것 참 매력적인 대회구나, 생각했다.”
- 오정아 2단이 워낙 많이 이겨서 한국의 다른 대표들은 자기 차례 기다리느라 따분했겠다. 하하, 농담이다.
“하하, 다들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격려해줬다. 바둑계 분들의 응원 문자도 많이 받았다.”
▲ 올해 출발한 여자바둑리그는 우리 여자바둑계 환경을 크게 뒤바꿔 놓았다.
- 황룡사쌍등배, 이번에 우리가 우승할 것 같지 않나?
“이번 멤버들이 짱짱하다. 김혜민ㆍ최정ㆍ오유진ㆍ김채영ㆍ나까지 전원 여자리그 1주전들로 구성됐다. 다음 타자 오유진이 끝낼지도 모른다. 알아서 척척 해내는 후배다.”
- 가장 힘들었던 판은 어느 판이었나?
“기베 나쓰키와 둔 판이다. 종국이 얼마 남지 않을 때까지 져 있었는데, 기베 나쓰키가 막판에 실수를 했다. 사전에 기베 나쓰키의 기보를 보면서 실력이 상당하단 사실을 알았고 쉽지 않은 승부가 되겠구나 하고 예상했다. 실상, 그 판뿐 아니라 다른 판들도 운이 꽤 따라줬다. 후지사와 리나와의 대국만 쉽게 끌어갈 수 있었고 나머지에선 완승이 없었다. 특히 초반마다 고전했다.”
- 리허와 둔 바둑에선 관통하는 자리를 두지 않고 축머리 쪽에 손을 돌려 화제가 됐다. 모험이었을 텐데?
“당시에는 관통하는 자리가 실리로 별로 커 보이지 않아서 손이 가질 않았다. 나중에 상대한테 그 자리를 막히고 보니 굉장히 두터운 자리였다."
- 이기고서 가장 기뻤던 대국은 어느 대국?
“왕천싱과 둔 대국이다. 내가 볼 때 현재 중국 여자기사 중 최고의 기사는 위즈잉이고 그 다음이 왕천싱이다.”
- 왕천싱은 변칙 포석을 들고 왔는데 당황하지 않았나?
“왕천싱은 근래 여러 가지 신기한 포석을 실험해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었다. 목진석 단장께서 중국과 일본 대표들의 기보를 수십 장 인쇄해서 나눠주셨다. 거기에 왕천싱이 이번에 들고 나온 포석도 있었다. 그 덕에 나도 대략적인 구상을 해 놓을 수 있었다.”
- 밤마다 우리 대표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우리 대표들은 낮에 실전을 연구하고 밤에는 숙소에선 보드게임을 즐기며 쉬었다. 나는 거기엔 잘 참여하지 못했다. 다음날을 대비해야 해서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 연승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공부량이 많아졌다. 여자리그와 국가대표팀 훈련으로 공부량이 늘 수밖에 없다. 올해 창설된 여자리그는 여자기사들에게 팀 경쟁에 대한 의욕을 촉발시켰다. 성적을 내기 위해,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다들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한편으론 너무 경쟁이 심하다 보니까 기운이 다 빠져나가 체력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지친 선수들도 보인다. 내가 파악한 숫자만 다섯 명 이상이다.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나도 지치긴 마찬가지다.
국가대표팀 훈련 또한 공부량을 늘려줬다. 최대 수혜자는 여자기사들일 것이다. 남자기사들은 평균적으로 여자기사들보다 기량이 뛰어난데 국가대표 훈련에 참가하면 여자기사들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공부한다. 상위 랭커들도 늘 가까이에 있다. 궁금한 게 생기면 몇 걸음 걸어가 물어보면 된다. 유창혁 감독님, 최명훈 코치님, 목진석 코치님이 여기저기 돌면서 연구에 참여하신다.
여자리그와 국가대표팀 훈련은 고되지만. 꿈을 이루려면 고생스런 훈련을 생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겨내고 있다.”
- 온라인 뉴스 등을 통해 팬들의 반응을 보나?
“황룡사쌍등배 1차전 기간엔 뉴스와 댓글을 안 볼까도 생각했는데 주위에서 자꾸 보여줬다. 보길 잘했다. 정말이지, 팬들의 칭찬과 격려를 보다 보면 힘이 부쩍부쩍 났다.”
- 실력뿐 아니라 '예쁘다'는 반응도 있던데.
“하하하. 3개국어로 표현하겠다. 감사합니다. 셰셰, 땡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