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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의 회고담 10】
김수영 산문 읽기․3
일시 : 2020년 5월 4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이 거룩한 속물들」에는 양계장 운영을 접은 뒤 가건물로 방을 만들어 세를 주었는데, 땅 주인이 구청에 신고하는 바람에 헐어버린 얘기가 나와요. 방을 헐자 기둥, 널빤지, 문짝, 서까래 등이 쌓였어요. 그러자 그것들을 몰래 가져가는 이웃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 Y가 자신의 집을 증축한다고 해서 재목을 갖다 쓰라고 했어요. 그 친구가 누구인지요?
김현경 : 유정 시인이에요. 금호동에 살고 있었는데 집을 늘린다고 해서 재목들을 주었어요. 사람을 불러 리어카에 잔뜩 싣고 갔어요. 거의 다 가져갔어요. 연립주택처럼 방을 네 칸 만들어 방마다 수도를 달았고, 구공탄 아궁이를 놓았어요. 방이 꽤 컸고, 방문도 후레쉬 도어로 했어요. 그런데 땅 주인 송 씨가 구청에 신고하는 바람에 헐리고 말았어요. 산문에 나온 대로 재목들을 집밖에 쌓아 놓으니 저절로 광이 만들어졌는데, 이웃들이 야금야금 가져갔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냈어요.
맹문재 : 이 산문에는 “우리 친구들 중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유행가를 거의 도맡아 쓰는 친구로 속물을 극복한 속물이 있다.”고 했는데 누구인지요?
김현경 : 유호(兪湖) 씨로 생각되네요. 극작가 겸 대중음악 작사가로 인기가 있었어요.
맹문재 : 제가 찾아보니 유호 선생님은 1921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2019년까지 생존하셨네요. 대중음악 <신라의 달밤>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님은 먼곳에> 등을 작사했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도 했네요. 뿐만 아니라 경성중앙방송사 국장, 경향신문 편집국장, 일요신문 편집국장,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 중앙대학교 전임교수, 동양방송 전속작가, 서울예술전문학교 전임교수,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한국방송작가교육원 원장 등 경력이 화려하네요.
다음 산문은 「민락기」에요. 양명문 시인의 시작품 「민락기」가 인용되고 있는데, “민락(民樂)”은 해운대 근처에 있는 작은 어촌 이름이네요. 이 산문에는 강릉에 있는 누이동생의 집에 놀러가 큰 환대를 받은 이야기가 나와요. 마침 누이동생이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와 답례하려고 했는데, 또다시 신세를 지고 말았다고 했어요. 그때의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둘째 시누이 수련은 손이 크고 멋있었어요. 도봉동 친정집에 올 때마다 오징어며 미역이며 김 등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왔어요. 나한테는 옷감을 떠 가지고 와 옷을 해달라고 전적으로 맡겼어요. 시누이는 돈을 잘 썼어요. 명동의 백화점에 나가 쇼핑을 하고, 좋은 식당에 가서 외식을 했어요. 우리한테 하도 놀러오라고 해서 강릉에 갔는데, 2등 차표를 사서 보내와 타고 갔어요. 그때는 1등 차가 없어 2등 차가 곧 1등 차였어요. 강릉에 가보니까 어찌나 잘사는지요. 캐비넷 안에 통조림 깡통이 잔뜩 들어 있었어요. 돈을 쓰면서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었어요. 그래서 김 시인은 돈 많은 것도 좋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사회에는 부정한 돈이 횡행해 김 시인이 경멸했지요.
그런데 언젠가 말했듯이 1969년 칼(KAL)기 납북사건이 일어나 둘째 시누이는 아주 어려워졌어요. 강릉의 병원은 제일 좋은 위치에 이층집 양옥으로 잘 지었어요. 아이들의 고모부인 채헌덕은 내과의사로 개인 병원을 운영했어요.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요. 함흥에서 내려와 서울대를 나와 강릉에서 공군 의무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거기에 주저앉아 개업을 한 것이지요. 납북사건이 일어난 뒤 고용 의사를 두고 병원을 계속해보려고 했는데, 빨갱이라고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모두 처분하고 도봉동 친정집으로 올라왔어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어요. 아이들이 돈암초등학교에 다녀 삼선교에 아파트를 하나 얻었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앉을 자리도 없었어요. 그렇게 작은 아파트는 본 적이 없었어요. 다행히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들은 약대를 나와 지금 대전에서 약국을 하고 있고, 딸은 이화여대 간호학과를 나와 캐나다에 가 있어요.
어느 일요일 날 아이들의 고모부 집안의 결혼식이 있었대요. 처음에는 바빠서 안 갈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꿔 항공사에 전화를 하니 좌석이 없다고 했대요. 그래서 포기했는데, 항공사 측이 단골 고객이어서 좌석을 마련해줘 탑승했대요. 둘째 시누이 부부는 사이가 좋았어요. 세상에 그런 잉꼬부부는 없을 거예요. 납치된 아이들의 고모부는 의사이니까 북한에서 안 보내었어요. 나중에 조종사와 스튜어디스의 불륜 때문에 월북한 것으로 밝혀졌으니 참으로 억울한 일이지요.
맹문재 : 2018년 연세대에서 김수영 시인이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때 오시지는 않은 것 같네요. 다음의 산문은 「삼동(三冬) 유감」이에요. 이 작품에서는 영화 <25시>를 본 이야기가 나와요.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를 유유히 걸어 나와 철조망 앞에서 탄원서를 들고 보초가 쏘는 총알에 쓰러지는 소설가를 생각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고 있어요. 영화를 본 상황이 어떠했는지요.
김현경 : 영화 <25시>를 중앙극장에서 보았어요.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주연으로 나온 명작이에요. 포로 생활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작품이에요. 아주 감동해서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집으로 돌아와 얘기했어요. 나는 영화 일을 하고 싶어 젊은 날에 몽타주라는 편집론도 읽었어요. 우리집 작은아이도 영화를 아주 좋아했어요. 경복초등학교 다닐 때 어느 날 거반 10시가 되어도 집에 안 들어와 걱정한 적이 있어요.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도화극장에서 영화를 두 편 보느라고 늦었던 것이에요. <길> 영화에도 안소니 퀸이 출연했지요. 우산대로 나를 때린 이야기가 나오는 시작품 「죄와 벌」의 상황이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일어난 것이에요.
맹문재 : 이 산문을 보면 마포구 구수동 집 마당에 라일락, 장미, 전나무 등 꽃을 많이 심어 놓았나봐요.
김현경 : 꽃이 많지는 않았지만 장미, 라일락, 금잔화, 개나리 등을 심었어요. 재미있는 일은 행상한테 등나무를 두 그루 사서 한 그루는 도봉동 시가에 보내고 한 그루는 우리집에서 키운 일이에요. 도봉동 집의 등나무는 잘 자라고 꽃도 아주 예쁘게 피었는데, 우리 집 등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 거였어요. 꽃이 피지 않는 등나무도 있더라구요. 친정아버지는 장미 전시회를 열 정도로 잘 키워 나도 장미는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장미는 줄기가 굵어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겨울에 장미나무 둘레를 파고 인분을 넣어 거름을 충분히 주어야 해요. 또 생선뼈를 대독에 넣고 물을 부으면 저절로 삭는데, 그것을 헌 소쿠리 위에 한지를 놓고 부으면 아삭아삭한 뼈가 되어요. 그것을 꽃이 피기 전에 장미나무 옆을 파고 한 숟가락씩 넣어요. 아버지가 키운 그레이스 장미는 살구색 혼합 색깔로 정말로 아름다웠어요. 장미는 벌레가 잘 끼는데 담배꽁초 물로 퇴치하면 되어요. 우리집 장미를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장미를 키우기 위해 유리 지붕으로 한 온실도 마련했어요. 내 동생이 놀다가 유리가 박혀 당주동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도 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폭포」에 “금잔화”가 나오는데 마당에 핀 꽃을 보고 쓴 것인가요? 성북동에 있는 백낙승이라는 분의 별장에서 쓴 작품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이 산문에는 시작품 「라디오 계(界)」와 「먼지」에 대한 소개도 나와요. 두 작품은 마치 유물론과 유심론만한 대척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네요. 작품들을 소개해볼게요.
6이 KBS 제2방송
7이 동 제1방송
그 사이에 시시한 주파가 있고
8의 조금 전에 동아방송이 있고
8.5가 KY인가 보다
그리고 10.5는 몸서리치이는 그것
이 몇 개의 판테온의 기둥 사이에
뒹굴고 있는 폐허의 돌조각들보다도
더 값없게 발길에 차이는 인국(隣國)의 음성
─물론 낭랑한 일본 말들이다
이것을 요즘은 안 듣는다
시시한 라디오 소리라 더 시시한 것이
여기서는 판을 치니까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더 시시한 우리네 방송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지금같이 HiFi가 나오지 않았을 때
비참한 일들이 라디오 소리보다도 더 발광을 쳤을 때
그때는 인국 방송이 들리지 않아서
그들의 달콤한 억양이 금덩어리 같았다
그 금덩어리 같던 소리를 지금은 안 듣는다
참 이상하다
이 이상한 일을 놓고 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해본다
지금은 너무나 또렷한 입체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북 방송이 불온 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 말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회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도 내가 반공산주의자가
아니 되기 위해서는 그날까지 이 엉성한
조악한 방송들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먼저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극도의 낙천주의를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서 해본다
─아아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른 탓이다
―「라디오 계(界)」 전문
네 머리는 네 팔은 네 현재는
먼지에 싸여 있다 구름에 싸여 있고
그늘에 싸여 있고 산에 싸여 있고
구멍에 싸여 있고
돌에 쇠에 구리에 넝마에 삭아
삭은 그늘에 또 삭아 부스러져
거미줄이 쳐지고 망각이 들어앉고
들어앉다 튀어나오고
불이 튕기고 별이 튕기고 영원의
행동이 튕기고 자고 깨고
죽고 하지만 모두가 갱(坑) 안에서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의 얼굴도 무섭지 않고
그의 목소리도 방해가 안 되고
어제의 행동과 내일의 복수가 상쇄되고
참호의 입구의 ㄱ자가 문제되고
내일의 행동이 먼지를 쓰고 있다
위태로운 일이라고 낙반(落盤)의 신호를
올릴 수도 없고 찻잔에 부딪치는
찻숟가락만 한 쇳소리도 안 들리고
타면(墮眠)의 축적으로 우리 몸은 자라고
그래도 행동이 마지막 의미를 갖고
네가 씹는 음식에 내가 증오하지 않음이
내가 겨우 살아 있는 표시라
하나의 행동이 열의 행동을 부르고
미리 막을 줄 알고 미리 막아져 있고
미리 칠 줄 알고 미리 쳐들어가 있고
조우(遭遇)의 마지막 윤리를 넘어서
어제와 오늘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고 침묵과 발악이 오늘과
내일처럼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는
이 갱 안의 잉크 수건의 칼자국
증오가 가고 이슬이 번쩍이고
음악이 오고 변화의 시작이 오고
변화의 끝이 가고 땅 위를 걷고 있는
발자국 소리가 가슴을 펴고 웃고
희화(戱畵)의 계시가 돈이 되고
돈이 되고 사랑이 되고 갱의 단층의 길이가
얇아지고 돈이 돈이 되고 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돈의 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타락의
길이도 표준이 없어지고 먼지가 다시 생기고
갱이 생기고 그늘이 생기고 돌이 쇠가
구리가 먼지가 생기고
죽은 행동이 계속된다 너와 내가 계속되고
전화가 울리고 놀라고 놀래고
끝이 없어지고 끝이 생기고 겨우
망각을 실현한 나를 발견한다
―「먼지」 전문
이 산문을 보면 마루에 난로가 설치되어 있고, 그 난로 위에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나 봐요. 김수영 시인은 난로 위에서 물이 끓는 소리를 좋아했네요. 그 조용한 소리가 현대 사회의 여러 악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민중의식을 보여주네요.
김현경 : 마루에 난로를 놓았는데, 그 난로 위에 항상 주전자를 올려놓았어요. 김 시인이 치질이 있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면 항상 뒷물이 필요했어요. 정남향 집이어서 항상 따뜻했어요. 위풍도 없었어요. 반지하에 독을 하나 묻고 숯을 좀 넣어놓았는데, 그 위에 수박이나 참외를 넣어두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어요. 자연 냉장고인 셈이지요. 성북동 백낙승 씨 별장에도 금잔화가 있었어요. 「폭포」 시작품을 그곳에서 썼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나의 연애시」라는 산문을 보면 「거리」라는 시작품을 해방 뒤 쓴 것으로 나와 있어요. 그런데 그 작품을 찾지 못해 첫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에도 수록하지 못했다고 해요. 이 작품을 왜 못 구하는지요?
김현경 : 「거리」라는 작품을 김 시인이 아주 좋아했어요. 낭만도 있고 정말 수작이에요. 이 작품은 『민생보』에 발표했는데 못 찾고 있어요. 『민생보』는 미군정시대 경무국에서 발간한 기관지에요. 팸플릿으로 된 경찰신문이에요. 한국전쟁 때 모두 잊어버렸어요. 그때 사진이며 책상이며 모두 버리고 맨발로 나왔잖아요. 특히 아버지가 쓰시다가 물려준 책상이 정말 아까워요. 러시아인이 만들었는데, 흑단나무로 못도 안 박힐 정도로 단단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멋」이라는 산문이에요. 이 글에는 떡집 며느리 얘기가 나와요.
김현경 : 마포 버스정류장 모퉁이에 할아버지가 하는 떡집이 있었어요. 인절미가 아주 맛있었어요. 오후 4시 즈음 되면 떡이 다 팔려요. 그러면 더 이상 만들지 않아요. 그 집의 며느리가 있었는데 워커힐 댄서였어요. 그래서 저녁 때가 되면 출근하는데, 남편도 함께 나가요. 둘이 아주 단짝이었어요. 며느리는 그런 일을 하면서도 며느리 노릇을 아주 잘했어요. 인상도 좋았어요.
맹문재 : 이 산문에 나오는 염상섭 소설가를 만나본 적이 있는지요? 최재서 비평가의 딸과는 친구라고 했으니 보셨을 텐데 인상이 어떠했는지요? 윤백남 작가와 마해송 아동문학가를 아시는지요?
김현경 : 염상섭 소설가는 만나보지는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많이 읽었어요.
최재서 선생님은 대장부처럼 생겼어요. 키도 컸어요. 친일파로 몰려 미군정청 일을 좀 할 정도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어요. 남산 밑에 집이 있었는데, 집에 가 인사를 하면 부인한테 맛있는 것 좀 해주라고 했어요. 최영 친구가 나와 같은 영문과를 다녔기 때문에 책을 빌려오기도 하고 나의 책을 빌려주기도 했어요.
윤백남 소설가의 소설을 친정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했어요. 야담 비슷한 역사 소설을 썼어요. 머리맡에 두고 읽으셨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윤석남 화가의 아버지가 되는 분이에요.
마해송 선생님은 나를 굉장히 이뻐했어요. 무슨 모임에서 만났는데, 나하고 일본어로 대화를 할 정도로 일본어를 잘했어요. 조그마하고 단아해 일본 사람 같았어요. 나 보고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해서 무엇을 읽고 있다고 하니 그러냐고 하면서 대화를 오랫동안 나눈 적이 있어요. 부인이 현대무용을 하는 박외선 선생이었어요. 아들이 마종기 시인이지요. 일본에서 나오는 『모던닛폰』 잡지의 주간도 했어요.
맹문재 : 마해송 아동문학가와도 인연이 있으시네요. 「멋」에는 김수영 시인이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와요. 「나의 연애시」에서도 볼 수 있지요.
김현경 : 의용군에 붙잡혀 갔다가 살아온 일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하도 겁을 먹어서 그 얘기를 나한테도 한두 번 말하고는 입 밖에 내지 않았어요. 김 시인이 어느 날 상주사심(常住死心)이라고 카렌다 끄트머리에 써놓았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어요. 참 뜻이 깊다고 생각했어요.
맹문재 : 다음은 「원죄」라는 산문이에요. 이 산문에는 부인과의 성관계 얘기도 나와요.
김현경 : 재미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어느 날은 성냥 곽을 가지고 들어오기도 했어요. 보신탕을 먹으면 기운이 난다고 하기도 했어요. (웃음)
맹문재 : 다음은 「해동」이라는 산문이에요. 이 작품을 읽으면 집에 목욕탕이 있었던가봐요. 집은 춥지 않았다고 좀 전에 말씀하셨지요.
김현경 : 목욕탕이 있었어요. 항상 구공탄으로 물을 데워놓았어요. 집이 좀 높아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서강 다리도 보였어요. 정남향이어서 따뜻하고 참 이쁜 집이었어요.
맹문재 : 다음은 「미인」이라는 산문이에요.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삼십대까지는 여자와 돈의 유혹에 대한 조심을 처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던 것이 요즘 와서는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방심이 약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되도록 미인을 경원하지 않으려고 하고 될 수만 있으면 돈도 벌어보려고 애를 쓴다.”고도 했어요. 김수영 시인의 시작품 「미인」과 산문인 「반시론」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하게 보이는데요.
김현경 : Y여사 이야기에요. 그때는 강릉에 있는 시누이가 돈도 잘 썼지요. 상대방을 따뜻하게 해주었어요. Y여사는 나에게 옷을 해 입었어요. 나는 옷값을 좀 비싸게 받았지만 아주 세련되게 해주었어요. Y여사는 결혼도 여러 번 할 정도로 아주 세련된 여자였어요. 김 시인이 여자 보는 눈도 세련되었어요. (웃음)
맹문재 : 다음으로 「무허가 이발소」라는 산문이에요. 김수영 시인이 주로 이용했던 이발소였던가 보네요.
김현경 : 구수동 집 옆 골목으로 좀 올라가면 무허가 이발소가 있었어요. 김 시인이 단골로 다녔어요. 김 시인은 시내에 나가서 이발을 하지 않고 그곳에 다녔어요. 머리가 잘 자라는 편이었어요. 어떤 때는 머리를 빡빡 깎고 와요. 시 한 편을 쓰려면 그렇게 몸부림을 했어요. 똑같은 시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쪽으로 가면 얼음 창고인 동빙고가 있었어요.
맹문재 : 「세대와 화법」이라는 산문을 읽어보면 김수영 시인은 문인협회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문인협회가 정부의 산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김현경 : 모든 단체를 싫어해요. 그래도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는데, 그만큼 김 시인의 시가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와선」이라는 산문을 보면 김수영 시인이 헨델의 음악에 상당히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소음에 민감했는데, 그래도 음악은 들었는가 봐요.
김현경 : 우리 집에 전축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들으면 와서 같이 들었지요. 그 판들을 아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에요. 나는 베토벤의 실내악을 좋아했어요. 베토벤이 타계하기 직전에 쓴 현악 4중주는 정말로 대단하지요. 그래서 나는 유행가를 잘 몰라요. 「와선」은 <원효대사>라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고 쓴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독자의 불신임」「들어라 양키들아」「아직도 안심하긴 빠르다」「방송극에 이의 있다」「창작 자유의 조건」「자유의 회복」「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등의 산문은 4·19혁명을 토대로 자유, 언론 자유, 민중, 혁명 등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4·19혁명 때 김수영 시인은 어떠한 행동을 취하셨는지요? 집회에 참석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좋아서 난리였어요. 흥분한 상태였지요. 매일같이 시내에 나가서 행렬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나한테 얘기를 해주었어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작품도 많이 썼어요.
맹문재 : 「저 하늘 열릴 때」라는 산문은 김병욱 시인에 대한 편지 형식으로 쓰여졌어요. 언젠가 김병욱 시인에 대해 말씀해주셨지요. 한국전쟁 때 만난 적도 있다고 했지요.
김현경 : 1949년 언더우드 2세 연희대 총장의 부인이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있었는데, 김병욱 시인이 가담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어요. 그때 연희대 강사였는데, 그 사건으로 강의 자리도 잃었지요. 그래서 이북으로 갔지요. 6·25때 내려와 나하고 혜화동에서 만났어요. 김 시인을 만나러 우리 집으로 오다가 길에서 나를 만난 것이에요. 그래서 다방에 들어가 자초지종 얘기를 했어요. 김 시인이 의용군에 붙잡혀 간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어요. 고생을 많이 할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북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군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 차림이었어요. 체격이 김 시인만큼 컸어요. 부인과 아들 하나가 있고, 6·25 전에 김 시인의 고모님 댁에 놀러오기도 했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운영하던 <유명옥>에 와서 식사를 한 적도 있어요.
맹문재 : 김병욱 시인과 관련된 사건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네요. ‘1949년 2월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을 받고 귀국하던 길에 모윤숙 시인은 인도의 정치인 메논의 초청을 받아 한 달 간 머물렀다. 3월 17일 오후 3시경 연희대 뒷산에 있는 언더우드 2세(원한경) 집에서 모윤숙 시인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교수 부인들이 모였다. 이때 연희대학 민주학련위 좌익 학생 3명이 모윤숙 시인을 살해하기 위해 집에 침입해 총격을 가했는데, 실수로 원한경의 부인 에델 와그너 여사가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알게 되니 김병욱 시인의 상황이 다소 이해되네요.
「아직도 안심하긴 빠르다」라는 산문은 4·19혁명 1주년을 기념해서 쓴 것이네요. 이 산문에는 그동안 양계를 하면서 뉴캐슬 예방주사에 커미션을 내지 않고 맞히기가 어려웠는데, 4·19혁명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고 했네요. 이 상황이 궁금하네요.
김현경 : 뉴케슬 예방 주사에 쓸 약을 구하기 어려웠어요. 약국에서 파는 것이 아니라 큰 무역상 사무실에서 팔았어요. 소공동에 있었어요. 그러니 돈을 좀 얹어주어야 했어요. 주사는 김 시인이 놓았어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잖아요. 양계를 하면서 한 번도 전염병으로 닭을 잃은 적은 없었어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 맹문재 孟文在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 『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