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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 왕의 변절
역대하 24:15-22
24:15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세라
24:16 무리가 다윗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24: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24: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24:19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24: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4: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24:22 요아스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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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많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들으신 줄 압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들은
목걸이에다가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그 십자가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 이유에 대해서
그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포도원에 농장이 있는데
그 주인이 농부들에게 삯을 받기 위해서
자기 종들을 보내었다,
그런데 농부들이 얼마나 마음씨가 악한지
그 주인이 보낸 종들마다
다 상처 내고 쫓아버리고 죽여버렸다,
그런데도 주인은 참고
아들을 보내면
저 농부들이 잘 대우를 하지 않겠느냐 해서
아들을 보내었더니만
도리어 농부들은 그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 농장은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바로 그 짓을 너희들이 한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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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십자가 의미가 뭡니까?
그것은 농부들의 속마음처럼
우리 인간들의 속마음이
하나님의 속마음과 너무나 대비가 되는
나쁜 마음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인간들이 감추고 있었던 본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극악무도한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십자가가 들추어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말은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입니다,
나는 이렇게 나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내 대신 이렇게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진정한 뜻을 아는 사람이죠.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말씀하시기를 ,
그렇게 사람을 부정적으로 봐서
무슨 목회가 되겠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물론 인간이라는 것이 나쁜 짓도 하지만
착하고 좋은 짓도 많이 있지 않느냐고 따지는데
이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담겨있는
본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깡패 세계에도 의리가 있고
그 나름대로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깡패가 의리가 있은들
그 의리가 하나님 영광이 되겠습니까,
사랑이 있은들
그 사랑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인간 세계가 다 이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채
자기 의를 드러낸다고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인간의 본심이 이미 어두운데
거기서 하나님의 착함과 선행하는 흉내를 낸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사람이 구원 될 만큼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영광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긍정할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 받을 대상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의 입장에 서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우리 인간들을 다시 한번 봐야 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본문에 보면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여호야다 라는 제사장이
일백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왕이 없는 나라에
요아스라는 왕을 새로 세웠지요.
그 왕을 세워놓고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요아스라는 왕은
그 여호야다의 평소 살아 계실 때에 하는 훈계대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신봉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야 마땅한데
17절에 보면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에 있는 소위 지도자들이 몰려와서
왕에게 절을 넓죽하면서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18절에 보니까 자기는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식으로 하면 과연 발전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우리시대에 맞다고 말합니다.
더러는
요아스 왕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믿다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서 우상을 섬기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요아스 왕이 그동안
자기 본심과 무관하게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가 살아 있으니 살아있는 그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하나님을 믿는 체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여호와 섬기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생각할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잘 믿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아들이 잘 믿으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믿는 체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면
체면 차릴 것도 없으니까
깊숙이 있던 자기 본심을
속시원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 생각도 안 하면서
하나님 믿는다고 얼마나 마음고생 많았겠습니까.
참 마음고생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진짜 신앙 인은 이렇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 어느 장소, 어느 때와 관계없이,
환경이나 상황에 전혀 관계없이
어디에 가도 하나님을 잘 섬깁니다.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산 속에 넣어놔도
기도할 사람이고
물 속에 넣어놔도 기도할 사람 이예요.
그저 친구 체면보고
억지로 교회 나와주는 사람은
언제 가는 본심을 자유롭게
펼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본심 깊숙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그저 교회 가까이 있으면
옛날 어릴 때 다녔던 습관대로
억지로 교회에 다니다가
근처에 교회가 없으면
교회 없다는 핑계로 안 다니는 거예요.
어느 것이 본심이냐 하면
우상으로 돌아오고
하나님 버리는 것이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심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본심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큰 기적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된 통으로 얻어 받는
놀라운 변화, 진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성경말씀대로
거듭나는 놀라운 획기적인 기적이 있어야
그 사람은 어디를 가 있든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됩니다.
심지어 불신자 앞에서도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 사랑하게 되지
인위적으로 신앙의 폼 낸다고 해서,
제자훈련 몇 년 한다고 해서,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겼다고해서
그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심만 생기죠.
여기서 여러분들이 하나 아셔야 될 것은
왜 사람들이 하나님 빼놓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를
그렇게 좋아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요아스 왕만
우상 쪽으로 돌아선 게 아니고
밑에 신하들도 다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이 더 좋을 건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말씀 위주거든요.
"내 율례와 법도를 지켜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 위주입니다.
"네 몸은 나의 피조물이니
나에게 몽땅 바쳐라"는 이것이
항상 먼저 선행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무엇이 되든지
하여튼 네 몸과 마음을 다 바쳐라,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시작하는 반면에
여호와 외에 모든 신은 다 우상인데
이 우상들의 공통점은
욕심을 정당화하고 채워준다는 겁니다.
내 전부를 하나님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흥정만 잘하면
내가 소망하는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그리고 내 노력여하에
나의 선행여하에 따라서
큰복도 주어질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가지고
관계하는 신은 전부 다 우상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150년 전에 들어와도
벌써 100년 넘어서 버리면
이미 정신적으로 쇠퇴 할 대로 쇠퇴해져 버립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이지
실상은 기독교가 아니라
우상의 종교로 변하고 말입니다.
거기에는 우상의 예수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진짜 여호와 신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디에 가도
하나님 생각하고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 앞에서든,
안 믿는 친척들과 어른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은
절대로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성령의 기적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떤 목사가 와서 복음적이지 않는 사기를 치고
협박을 해도 끄떡없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온 천지가 우상 덩어리라도
그걸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몸은 교회에 와 있는데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설교가 길다고 불평하고
교회밖만 나가면 마음대로 활개치고
술 마시고 놀음하는 그들의 자유로움이
은연중에 부러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를 10년 다니든, 20년을 다니든
항상 그 마음속에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핵심이 지금 19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제가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속마음을 이렇게 잘 아시는지 놀랐습니다.
분명히 들키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데
이상스럽게 성령이 임한 선지자들이
자꾸 다가서드라는 것입니다.
"너 성공했다고 믿고있지?
가관이야~넌 진짜도 아니고 가짜야,
너 엉터리로 신앙 생활 하고 있는 것 맞잖아",
이런 식으로 이래저래 쑤시면서 다가온단 말입니다. 이게 참 신기한 거예요.
온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모든 것이 나자빠졌는데도 불구하고
평신도 가운데 진실로,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러 더러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거냐 말이죠.
목사가 제자훈련 잘 시켜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 만난 기적을 받은 사람이
정말이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큰 교회 부럽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도 감사할 사람 이예요.
큰 교회 다닌다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직분도 부러워하지 않고
목사도 부러워하지 않고
그런 성령 받은 평신도들은
목사 안 되도
오직 주님만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있어요.
진짜 성경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자꾸 대비가 되면서
자신의 속내를 하나님께서 들키도록
촉구를 하는 겁니다.
아직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이니까
기회를 준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이 본문에서는
돌아오게 하려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130년 동안 살다가 죽은
그 제사장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그 사람이 스가랴라는 선지자인데
이 스가랴 선지자가
평소에 신학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예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아무리 신학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아니하면
감히 왕 앞에 그런 소리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식인데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덤벼들겠습니까.
단순한 오기가 아니에요.
학문적 오기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이런 바른 소리를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정말로 하나님은 귀신이고 도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버린 줄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참, 희한하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지으신 분이 되어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농땡이 부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지,
사람들은 모르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도사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린다는
하나님의 심중의 뜻을 그대로
신하들에게 알려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선지자가 왕을 설득시킨다든지
회개시킨다는 책임과 의무는 없습니다.
여러분 그걸 꼭 명심해야 됩니다.
목사가 설교 잘한다고
그 교인들 신앙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목사의 임무는 증거 하는 것 뿐 이예요.
"이렇게 하면 당신들 지옥 갑니다"
라는 소리를 할 뿐이지
협박 공갈해서 목사 말 잘 들으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음흉한 목사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만 전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마지막 심판 때에 하실 그 기준 그대로
이 지상에서도
그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이러한 관점에서
너희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전달할 뿐이지요.
회개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소관이고.
그런데 이러한 증언을 했을 때에
21절에 보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을 높여야 될 그 성전 뜰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종을
죽여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보고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 사건이 왜 벌어진 거예요?
우리를 살려 주라고 오신 그 주님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우합니까?
돌로 쳐죽이듯이 못박아 죽이잖아요.
십자가는 결국 이래서 터진 사건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도 믿고 세상 욕심도 챙기고
둘 다해도 구원되지 않겠느냐,
설마 그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진짜 하나님의 종이 와서
잔소리 해버리면
대번에 오기가 쏟아져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조목조목 무엇이 잘못 되었으며
주의 뜻이 아니라서
우리가 그런 바른 선지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맞기는 맞는데 어쨌든 싫다는 거죠.
그래서 죽여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또 우리는 생각하기를
"오 신이시여!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이만한 신앙 생활을 좀 봐 주십시오"라고
자기 변명을 하지만
막상 진실한 주의 종이 와서 잔소리 해버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을 느끼는 것이 우리 마음이지요.
그걸 그대로 본문이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니까
마지막에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라고 외칩니다.
스가랴가 마지막 죽으면서
하나님께 지금 이 사태를 지켜 봐 주시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 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자, 여러분
보통 생각하기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신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잘 대우해서
남들에게 보란듯이 출세시키고 성공하는 인물로,
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이 얼른 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을
하나님은 그냥 개죽음 당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4장에도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 잘 드린 동생이
형한테 도리어 개죽음 당하잖아요.
이런 개죽음이
사도행전 7장에도 나오는데
스데반 집사님이 바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있는데
저희들이 돌로 쳐죽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십자가 사건이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보고
재수 없는 놈이라고 돌리지 마시고
그렇게 억울하게 복음 때문에
고생 당한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도 그렇게 당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행여나 예수님 죽음에
우리가 동참한 마음은 아닌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 편에 서서
나도 같이 당했다는 그런 마음인지
스스로 자기의 속마음을 한번 살펴보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서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마음으로,
진짜 하나님의 똑바른 정신으로
옳은 소리를 하는데
"듣기 싫다, 나가 죽어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기심과 질투심이
번져 나오지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고 할 때,
기분 좋게 듣는 남편 누가 있겠습니까.
"뭐가 남편보다 예수가 더 소중해,
우리 가정이 최고지"
라고 반발하고 싶은 그 반발을
그냥 일상적인 것으로 묻어두지 마시고
"바로 예수님을 죽인 이 십자가사건의 못된 마음이
내 속에도 들어있구나,
이래 놓고도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회개하면서
"이래서는 안 돼, 이건 신앙이 아니야,
이런 신앙을 가지고서는
제대로 구원될 수 없어"라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돌아가심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은 어디를 가도
신앙생활을 잘하며
여호야다와 같은 진실한 신앙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