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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과 경관 l 희귀한동식물/광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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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嶺南)의 젖줄 낙동강(洛東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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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은 태백산 천연의 못 황지(潢池)를 원류로 하여 주봉(主峯) 아래의 산을 뚫고 남쪽으로 흘러 안동에 이르러 반변천(半邊川)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함창(咸昌)을 지나 김해(金海)에 이르는 장장 512㎞의 대하천(大河川)이다.
낙동이란 상주(尙州)의 동쪽을 말함이다. 경상도 중앙을 흘러 크고 작은 평야를 이룩하여, 일찍부터 이 강 유역에 20여국을 [弁辰韓] 형성하였고, 후에 가야(伽耶)와 신라(新羅)로 뭉쳐, 독특한 가야문화와 찬란한 신라 천년의 문화를 이룩하였으니 이를 실로 낙동강이 이룩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江하류에는 기름진 평야가 발달한 반면에 강의 상류에 속하는 안동부근은 흐르는 구비마다 천혜(天惠)의 절경(絶景)을 이루고 그 곳곳마다 누각(樓閣)과 서당(書堂)을 세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하나같이 낙동강과 주변의 절경을 글로서 표현했다. 또한 역대로 우수한 학자, 정치가가 쏟아져 나와 학향(學鄕) 안동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낙동강 하류의 배가 안동까지 드나들 정도로 물이 깊고 맑아 관개(灌漑) 및 교통에도 큰 몫을 하였으나 해방 후부터는 해마다 홍수의 범람으로 많은 희생을 가져왔으며 강변의 모래밭은 점점 더 넓어지고 높아만 갔다. 그래서 1970년대에 들어서 정부의 4대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10월에 안동 다목적 댐이 준공되어 새로운 명소(名所)로 등장하였다.
이 안동 다목적 댐의 준공으로 말미암아 부산을 비롯하여 마산, 진해, 울산, 대구, 구미 등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주요 산업대도시의 생활 및 전력 공업용수(工業用水)를 공급하고 김해평야를 비롯한 유역(流域)의 모든 평야에 홍수(洪水) 피해를 줄이고 농업용수 공급을 보장하게 되었다. 이상의 관개, 생활 및 공업발전(發展), 홍수근절 등 직접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5,000㏊의 수면적(水面績)과 100㎞에 달하는 인공(人工)호수가 이루는 절경은, 이 일대에 산재(散在)해 있는 수많은 문화재(文化財)와 함께 관광 및 휴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웅부안동(雄府安東)의 새로운 앞날을 약속해 줄 것으로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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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영봉(靈峰) 학가산(鶴駕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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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영주, 예천의 삼각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예부터 학(鶴)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日月山), 서남쪽에 팔공산(八空山), 멀리 북쪽으로는 한줄기 소백산맥이 아련히 보이고, 산기슭마다 명문취락(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마루에는 군데군데 허물어진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있고, 당시 멀리 남쪽으로부터의 소식을 중앙으로 전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는 봉수대(烽燧臺)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쪽 기슭에는 애련사(愛憐寺), 광흥사(廣興寺)가 천년의 역사(歷史)를 말해주고, 또한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 수십길 바위사이로 솟아나는 신효(神效)한 약수는 신비의 학가산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산마루 부근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사이사이로 갖가지 풀과 버섯들이 깔리어 자연림을 이루고 있다. 봄이 되면 산중턱에 빨간 매화가 온통 골짜기를 붉게 물들여 장관을 이루는데 특히 사람의 눈을 끌게 하는 것은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산목련(山木蓮)의 대군락이다. 학가산은 웅대하거나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괴석으로 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에 큰 짐승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기슭에 나타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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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선생과 도산서원(陶山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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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북쪽으로 말끔히 포장된 퇴계로(退溪路)를 따라서 버스로 약 40분간 달리면 동방의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李滉) 선생께서 도학을 닦고 문도(門徒)들을 교육했던 서당이 있는 도산서원에 도착하게 된다. 1970년 정부의 문화재 보호정책에 힘입어 이 서원(書院)일대를 보수정화(補修淨化)하여 1557년에 선생이 손수 지은 글방인 도산서당(陶山書堂)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1575)후에 그를 존모(尊慕)하던 선비들이 창건한 서원의 건물 및 생존시에 사용하던 유물들이 잘 정비되어 있어, 생시 이 곳에서 검소하게 생활했던 모습들을 불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조선조 연산군 7년(1501년)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溫惠里)에서 태어났다. 후에 관직에 진출하여서도 벼슬자리보다는 자연과 학문을 사랑하여 항상 그의 염원은 오로지 고향에 돌아가 학문연구에 전념하는데만 있어서 틈만 있으면 벼슬에서 물러날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회갑을 넘어서 부터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오직 자연 속에 묻혀서 자연을 통하여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가 문도들과 함께 생활했던 이 곳은 도산기(陶山記)를 보면, 「영지산(靈芝山)의 한줄기가 동으로 뻗어 도산이 되었으며 어떤 이는 산이 다시 한번 솟았다 하여 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옛날 이 산 속에 질그릇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도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이 그렇게 높거나 우람한 편은 아니지만 우뚝 솟은 산은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지 않고, 주위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이 산을 향하여 모두 읍하고 있고, 맑은 강물도 이 산을 감싸고도는 듯하다. 왼편에는 청량산(淸凉山)에서 뻗어온 동취병(東翠屛)의 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고 도산 뒤로는 퇴계가 흐른다. 아득하면서도 전망이 트이고 깨끗한 바위를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우거진 노송(老松)사이로 온갖 새들이 지저귄다. 여기서 그는 「산새가 지저귀는 봄, 초목이 피어나는 여름, 서릿발이 차가운 가을, 설월(雪月)이 엉기는 겨울」 철따라 바뀌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었다. 저 유명한 도산 12곡(陶山十二曲) 중에 한 수를 보면
청산은 어찌하야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야 주야에 끊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하였으니, 이처럼 그가 도산에 묻혀 지내니 명종(明宗)은 「도산은 산수가 얼마나 좋은 곳이기 퇴계는 고향에 돌아간 이후로 다시 상경할 생각조차 않는가? 내 비록 도산에 직접 찾아갈 형평은 못되나 그림으로나마 꼭 구경하고 싶으니 화가를 도산에 내려보내 그 곳 산수를 그대로 그려서 나에게 보여주도록 하라」하고 화가를 내려보내 도산의 경관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그 그림 위에 퇴계의 「도산기」를 쓰게 하여 병풍으로 만들어 감상하였다고 한다.
낙동강의 맑은 물이 지금은 안동댐의 축조로, 산줄기 사이사이 온통 호수를 이루며 주변의 산들로 수면은 푸르다 못해 검정으로 변하고 그 위로 띄엄띄엄 낚시를 드리우고, 서원 앞 호수 위 우뚝 솟은 시사단(試士壇) 위로 유유히 학들이 날으니 마치 한 폭의 동양화 수병풍(繡屛風)을 펼친 듯 하다.
안동에는 예안(禮安)을 거쳐 서원에 이르던 옛길은 호수에 잠기고, 새로이 호수를 끼고 닦은 깨끗한 퇴계로에는 전국에서 모인 낚시꾼, 명승과 선생의 덕을 기리는 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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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보존 마을로 지정된 하회(河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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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이 소속된 풍천면(豊川面)은 동으로 풍산읍, 서쪽은 예천군 지보면, 남으로 의성군 신평면, 북은 예천군 호명면에 각각 접하고 있다. 조선말에 풍산현이 1914년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풍천면(豊西, 豊南 병합)과 풍산면(豊山, 豊北 병합)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험준한 산과 넓은 평야는 없고 낙동강의 상류(花川)가 面의 중앙을 지나고 있어 그 주변에 약간의 경작지가 산재한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동쪽으로 태백산맥의 지맥인 해발(海拔)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줄기의 끝이 마을 안까지 뻗혀 마을의 지형은 마치 손등과 같은 아주 낮은 골을 짓고 있으며, 남서쪽에는 일월산(日月山)의 남산(감투봉)과 원지산(遠志山)이 솟아있고 마을의 북쪽으로는 화천(花川)의 대안(對岸)인 부용대(芙蓉臺)의 암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우람하게 솟은 부용대의 절벽이 낙동강 상류 폭 200∼300m의 화천을 동(東)에서 서(西)로 흘러와서 다시 동으로 역류하였다가 또 서쪽으로 구비치게 하여 동류수(東流水), 서류수(西流水),의 별칭을 갖게 하고 태극형(太極形),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다리미형이니 하는 하회마을의 독특한 지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 하회마을에는 일찍이 동쪽 화산기슭에 선주민(先住民)이 살고 있었으나 풍산 류씨의 8세인 전서(典書) 종혜(從惠)공이 풍산 상리(上里)에 살다가 여기에 입향(入鄕)한 후 허(許)씨, 안(安)씨, 류(柳)씨의 각 동족집단이 혼거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중엽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과 임란(壬亂)때 명상(名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이후로 역대를 통하여 풍산 류씨의 동족집단이 이 곳을 동족 확포(擴布)의 중심으로 삼은 지 5세기 여에 그들의 동족 성원들은 이 촌락을 중심으로 영남의 웅족(雄族)으로 생활하여 왔다.
촌락의 중앙지대가 화산 능선의 연장으로 높아져 있고 능선을 등으로 하고 강(江)을 향하여 경사진 골을 따라서 주택들이 세워졌기 때문에 동향, 서향, 남향, 북향의 모든 좌향(座向)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류씨의 입향조(入鄕組)가 처음 이 곳에 들어 왔을 때는 수목이 울창하였으며, 현재의 충효당(忠孝堂), 양진당(養眞堂)은 현장의 수목을 벌채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마을 한가운데에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고목이 된 느티나무(희귀의 종 참고) 한 그루와 마을 서쪽에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다. 마을과 강의 백사장 사이에는 풍수설(風水說)에 의하여 마을의 허한 곳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노송림(老松林)이 전연 인공의 냄새를 찾기 어렵고, 이 곳 절경을 돋구어 찾는 이의 발길을 끈다.
이곳 부용대에는 풍산 류씨의 큰 자랑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 류성룡(柳成龍) 형제분이 남긴 화천서당(花川書堂), 옥연정(玉淵亭), 겸암정(謙菴亭), 상풍정(翔風亭) 등의 건물이 산재하고, 대(臺)하에는 형제암, 능파대(凌波臺) 등의 암석들과, 굽이 돌아치는 푸른 강물, 숱한 전설이 옛날의 화려함을 말해주고 있다. 안동댐이 축조된 후 수심은 좀 얕아졌으나 넓은 백사장은 가히 장관을 이루며, 여름철에는 낙동강의 명물인 은어(銀魚)가 잡히는 천연의 욕장(浴場)이기도 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연화부수형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면 몰락한다고 하고, 다리미형이라서 우물을 파면 불이 꺼진다고 하여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러한 천혜(天惠)의 지역에서 철에 따라 별신굿(정월), 화병(花餠)놀이(3월), 단오절(5월), 풋굿, 줄불놀이(7월)등의 행사가 행하여졌으며, 오랫동안 옛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 마을에는 국보 2, 보물 4, 중요민속자료 9점 등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15점이나 된다. 그래서 1984년 1월 10일 하회마을 전체를 민속보존마을로 지정하였다. (중요민속자료 122호)
요즈음 안동시내에서 버스가 다니면서부터는 이 지방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서도 이 마을을 찾는 이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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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루(四大樓)의 하나인 영호루(映湖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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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富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 (1547년)의 대수(大水)로 누각은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重創)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하여 100여년 동안 안동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甲戌年) 대수(大水)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九潭)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 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향토애(鄕土愛) 짙은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드디어는 안동시가지 남편 강언덕인 정하동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보게 되었다. 노송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신비의 영봉 학가산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이 시가지를 에워싼 영남산 줄기는 철따라 색깔이 변하니,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은 온통 시가의 모습을 다르게 한다.
일찍이 우탁(禹倬),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이황(李滉)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 했거늘, 다시 복원된 이곳 누각에 올라, 눈아래 비단을 펼친 듯한 대하(大河)와 경관을 바라보면, 그 누가 속세(俗世)의 시름을 잊지 않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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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진령(隔塵領)의 절경(絶景) 도연폭포(陶淵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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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내에서 동쪽으로 18㎞, 국도를 따라 20분 쯤 차를 달리다가 망천(網川)에 이르러 오른쪽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 울퉁불퉁한 돌길을 20분쯤 달리면 길이 오르막이 되면서 오른쪽에 격진령(隔塵領)의 수려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 빠져 흐르는 도연폭포가 보인다.
격진령은 폭포 옆에 깎아 지른 듯이 따로 솟은 높이 50m, 길이 300m의 바위산으로서 층암절벽의 기화요초(奇花妖草)와 산마루에 솔숲을 얹고 있는 모습이 천하일색이다. 격진령을 아늑히 둘러 싼 높고 짙푸른 산색과, 검은 벼랑밑을 미끄럽게 흐르는 파아란 물빛과 햇빛 아래 더욱 하이얀 돌빛과의 조화...... 폭포 주변의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을 연발케 한다.
이 폭포는 아득한 옛날엔 격진령 산허리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물이 멀리 산자락을 돌아 흐르던 것이 오랜 세월 홍수와 급류가 산허리를 드리받아 그만 산을 무너뜨리고 바로 떨어지게 된 것으로 요사이도 홍수가 지면 물이 비좁은 폭포로만 다 흐를 수가 없어 멀리 산자락을 돌아서 흐른다. 폭포의 높이는 불과 4m에 불과하지만 낙동강 지류의 수개의 폭포중 가히 으뜸이다.
삼백리 상류인 일원산에서 발원(發源)하여 흐르는 반변천 본류인 만큼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어지는 일이 없고, 특히 홍수때 이 폭포를 통과하는 수량(水量)은 전국의 어느 폭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폭포 양편 닳고 닳은 거대한 규암의 형해(形骸)는 이름 그대로 기름바위요, 폭포밑은 질그릇 같이 움푹 패여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고, 폭포를 뛰어 오르지 못해 모인 고기떼들로 천렵꾼 또한 성시(盛市)를 이룬다.
폭포 왼쪽 솔숲 속에는 조선조(朝鮮祖) 명유(明儒),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縕) 선생의 유허비각(遺墟碑閣)과 은거(隱居)하던 초당(草堂)과 정자(亭子)가 있고 옛적엔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 육부자(六父子)가 공부하던 장육당(藏六堂)도 있었다. 격진령 암벽 중허리에 새겨진 낙연현류(落淵縣流)·선유창벽(仙遊蒼壁)·표은고풍(瓢隱古風) 등 세칭 하남삼절(河南三絶)의 문구를 보아서도 이 곳이 얼마나 사람들의 기림을 받던 곳인가를 알만 하다.
돌아 프르는 물을 따라 격진령의 끝으로 가면 돌다리를 건너 선찰서 입구가 보인다. 사변 전 화재로 지금은 산신각만 남아 있고 마당 앞에는 석간수만 쉼없이 흐르며 옆 벼랑 위엔 쪽대문만 남은 선유정 옛터 또한 세월 속에 까마득히 잊혀져 가고 있어 적막하고 유현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교통이 다소 불편하여 찾는 이가 많이 않아 오히려 멋을 아는 이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이제 이 폭포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고 영영 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아쉬움을 금할 길 없어 여기에 천렵하던 일화를 하나만 기록해 둔다.
"陶淵瀑布漁, 個個盤上漁, 作時然後食, 合江恨無書"
이 한시는 도연폭포에서 고기를 잡아 식사에 임하던 선비들이 글모르는 합강 어른을 놀려 주고자 한시를 짓는 자만이 고기를 먹자고 합의하므로 글모르는 합강 어른이 한탄한 시로서 정말 재미있는 글이라고 하여 오늘날 전해오고 있다.
시의 뜻은 "도연폭포 고기가, 개개인 반위에 올려져 있는데, 시를 지은 후에 먹도록 하자 하니, 합강은 글모르는 것이 한이로다." 이다. 여기서 우리는 옛사람들의 풍류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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