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 1 - 새를 주제로 한 세 곡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당신은 들어보았습니까? 그럼요! 들어보고말고요! 그렇다면 무슨 새의 소리를 들어보았습니까? 새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새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생겼습니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이 질문은 누구한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한테 하는 물음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요즈음처럼 새소리를 자주 그리고 많이 듣기란 처음이다. 아침마다 새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먼동이 트면 동네 암탉들이 홰나무에 걸터앉아 크게 소리를 내지른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마당의 나무들이나 숲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합창을 한다. 시끄러울 정도다. 들리는 소리들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 음악처럼 들린다. 마을 주변에는 언제나 텃새들이 함께 살고 있다. 흔하게 눈에 띄는 놈들은 아무래도 까치와 비둘기다. 까치들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살기도 하고 몇 녀석이 따로 흩어져 살기도 한다. 전신주에도 집을 짓고 키가 큰 나무들이면 어김없이 까치집들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녀석들은 영악해서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를 않는다. 위험스러울 정도의 거리에 이르러야 마지못해 자리를 옮긴다. 까치는 길조라고 한다. 까치소리를 아침에 들으면 반가운 손님이 오실 징조다. 하지만 녀석들의 소리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얕게 지저귀지도 않는다. 큰 소리로 까악까악 질러댄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녀석들은 불청객이다. 예전에는 콩을 심으려면 그냥 발뒷꿈치로 쿡쿡 눌러대고 콩알 몇 점을 뿌리면 되었다. 이제는 아니다. 콩싹이 돋으면 까치와 비둘기들이 나타나서 싹을 싹둑 잘라 먹는다. 비둘기도 간간이 밭에 내려와 밭을 망치게 하지만 까치는 개체수도 훨씬 많고 더 적극적이다. 영리하기 짝이 없어서 밭을 초토화시킨다. 콩만이 아니라 참깨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농부들은 이제 콩은 아예 모종으로 옮겨 심는다. 그만큼 콩농사가 힘든 작업이 되었다. 생각건대 까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진화를 하였음이 틀림없다. 녀석들의 악착스러움이란 놀라울 정도다. 들판에 나름대로의 영역을 설정하고 침입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백로 정도는 우스운 상대다. 몸의 크기가 열 배도 넘으련만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어 기어이 쫓아내고 만다. 까마귀나 심지어 솔개도 까치들이 덤벼들면 귀찮아서 못 살겠다는 듯이 끝내 자리를 피한다. 까치가 길조라고 대우를 받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다. 바로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키는 자그마하지만 그래도 배와 날개에 하얀 빛을 띠어 착하게 보인다. 언뜻 보면 순한 모양이다. 소리도 판소리처럼 탁하고 저음이다.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듣기가 거북스러운 것은 전혀 아니다. 붙박이 농사꾼처럼 어디 멀리 가지도 않는다. 팔자려니 하며 한 곳을 지키며 산다. 홀로 살지 않고 항시 무리를 지어 사는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누가 침입을 하면, 소위 인간세상으로 말하면 적군이 쳐들어올 때 불굴의 의지로 일어선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맞선다. 끝내 땅을 지키고 적군을 몰아낸다.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까치사랑은 하나의 변용이다. 비둘기는 산비둘기나 멧비둘기다. 녀석들은 땅에 내려 앉아 모이를 쪼아 먹기도 하지만 대개는 나무숲에 앉아 하루 내내 구구거린다. 음산한 음성이다. 평화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녀석이 지르는 소리는 그리 아름답지가 않다. 동네 옆 야산 기슭이나 밭두렁에는 꿩들이 산다. 아침 산보길에 녀석들이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보통 따로 산다. 둑방길 풀섶에는 까투리가 둥지를 짓고 숨어 산다. 장끼도 몸을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눈에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푸르륵 날아오른다. 께께께 하며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간다. 새벽에 녀석들은 멀리서 꿩꿩 하며 소리를 지른다. 녀석들의 소리가 꿩꿩 해서 이름도 꿩이라 지었나 보다. 텃새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놈은 바로 참새다. 예전에 그렇게 많던 참새들이 지난 수십 년간 잘 보이지 않더니 요즈음은 제법 그 개체수가 다시 늘었다. 키 작은 관목 숲에 떼를 지어 사는데 나무마다 가지마다 빠르게 움직이며 날아다니는 솜씨가 일품이다. 참새떼들의 지저귀는 소리야말로 정말 새소리답다. 무리를 지어 찍찍대는 소리는 자연이 이루어낸 합창이다. 예전에는 때까치나 종달새도 보였지만 근래에는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하지만 산림이 무성해지고 나서 새들은 그 종류의 다양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직박구리도 그 중의 하나다. 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놈이다. 몸은 제법 커서 20c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짙은 회갈색의 몸매가 늘씬하다. 작년 봄에는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집의 안방에 남녘으로 한 면을 통째로 유리창으로 터놓아서 밖의 풍경을 시원스레 볼 수 있게 하였다. 창밖의 살구나무 자귀나무 등이 푸르른 자태를 드러내고 멀리는 숲이 보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직박구리가 아침이면 그것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어김없이 날아와 창을 두드렸다. 다다다 다다다하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자명종이 따로 없었다. 일어나 가만히 보니 살구나무에 앉았다가 다시 창으로 날아와 날개를 퍼득이며 부리로 창을 쪼아댄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기해서 아내에게도 보여주고 아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주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싱긋 웃기만 할뿐이었다.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나무들에 둘러싸인 집이니 새들이 날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커다란 창에 착색을 해놓아 밖에서 보면 안은 보이지 않고 그냥 거울처럼 밖의 풍경이 창에 거울처럼 투영되었다. 그림이다. 새들은 거울 속의 풍경을 실제로 있으려니 믿었나 보다. 직박구리의 눈에는 집이 아니라 풍경의 연속이었고 그 속을 통과하려다가 뜻밖의 단단한 유리창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녀석의 끈질김은 경탄스러웠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에 어김없이 같은 짓을 되풀이한 것은 아직도 이해되지를 않는다. [지노 프란체스카티(Zino Francescatti)] - 봄날 아침에 지노 프란체스카티
알파벳 별꽃들이 먼 기억 어둠에서 피어난다
유리창 칸막이 너머 꿈의 봄빛
지노 프란체스카티
게으른 세월의 맺힘도 어슬렁 게슴츠레히
빨간 알몸의 바이올린은 꽃잎을 벗어 날리고
어둠의 불꽃에 깃발되어 파도치듯 숨 뜨겁고
희디흰 소리꽃이 흐드러지게 부서진다
파주는 남한의 북단이어서 겨울이 오래간다. 봄도 늦어 모란은 오월초가 되어야 봉오리를 터뜨린다. 모란이 필 무렵이면 소쩍새와 부엉이가 밤에 노래를 한다. 울음일까 노래일까. 질문은 부질없는 노릇이요,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어리석음이다. 소쩍새의 노래는 두 음절이다. 정말 소쩍 소쩍하고 소리를 낸다. 올빼미 소리는 보통 세 음절이어서 구분이 된다. 밤새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 잠을 설치게 되지만 이는 생명의 소리다. 봄이 와서 만물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소쩍새도 그 기를 타고 소리를 드러낸다. 그 소리를 듣는 나도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밤을 보내게 된다. 언제인가 모란이 필 때 월식이 일어났다. 자연의 신비스런 현상이었다. 모란과 달 그리고 소쩍새를 위해 시 한편을 붙였다. [모란이 피는 월식] 밤! 새각시 보름달을 새앙쥐 눈동자가
사각사각 갉아들고 있을 때
숨소리도 새근새근 하늬바람 춤바람이
아기 여인을 훔치고 있다
손길 따라 부드러운 산등성이 너머너머 깊숙이
배가 불러오더니
울음소리 마다하고 솔부엉이랑 소쩍새랑 두견이도
신명난 듯 박자를 맞추며
검붉게 터뜨리고 있다
새는 목을 풀어 울었다 저 산에 피던 느릅나무 속잎 단풍 들도록 이 산에 떡갈나무 찬비 오도록 홑. 적. 삼... 홑. 적. 삼
돌이키지 못할 봄밤을 홀로 울었다
맨발로 따라가며 목이 터지게 불렀노라 오는 봄은 눈부시어 바라 볼 수조차 없더니
돌아서 가는 사랑이 몸서리치게 아름답더라
새는 목이 쉬어 울었다 그러나 봄은 가는귀가 먹어 듣지 못하였노라 듣지 못하였노라
다시 한 백 번을 더 봄이 온다 해도
꽃이 아주 말라 떨어지기 전에는 봄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
산기슭 오솔길엔
머릿결 냄새가 떠돌았다
털북숭이 짐승인데
초록은 사랑으로 가슴을 패이고
안개 속에 목욕을 하다가
뜨거운 수증기에 알몸을 가렸다
두근거리는 손길은 안개 속을 더듬다가
열락의 웅덩이에 빠져들고
적셔드는 산길
철늦은 사랑 사시나무 우듬지에 앉아
뻐국 뻐국 소리를 질러댔다 |
출처: 미 그리고 또 아름다움 원문보기 글쓴이: 황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