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중국문학사-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새소리 1 - 새를 주제로 한 세 곡 (중국 그리고 베트남의 전통음악)
ninebirds 추천 0 조회 18 11.03.15 21: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새소리 1 - 새를 주제로 한 세 곡





中國 - 唐 時代 - 春鶯?(봄꾀꼬리의 노래) - 합주곡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당신은 들어보았습니까? 그럼요! 들어보고말고요! 그렇다면 무슨 새의 소리를 들어보았습니까? 새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새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생겼습니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이 질문은 누구한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한테 하는 물음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요즈음처럼 새소리를 자주 그리고 많이 듣기란 처음이다. 아침마다 새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먼동이 트면 동네 암탉들이 홰나무에 걸터앉아 크게 소리를 내지른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마당의 나무들이나 숲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합창을 한다. 시끄러울 정도다. 들리는 소리들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 음악처럼 들린다.

마을 주변에는 언제나 텃새들이 함께 살고 있다. 흔하게 눈에 띄는 놈들은 아무래도 까치와 비둘기다. 까치들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살기도 하고 몇 녀석이 따로 흩어져 살기도 한다. 전신주에도 집을 짓고 키가 큰 나무들이면 어김없이 까치집들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녀석들은 영악해서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를 않는다. 위험스러울 정도의 거리에 이르러야 마지못해 자리를 옮긴다. 까치는 길조라고 한다. 까치소리를 아침에 들으면 반가운 손님이 오실 징조다. 하지만 녀석들의 소리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얕게 지저귀지도 않는다. 큰 소리로 까악까악 질러댄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녀석들은 불청객이다. 예전에는 콩을 심으려면 그냥 발뒷꿈치로 쿡쿡 눌러대고 콩알 몇 점을 뿌리면 되었다. 이제는 아니다. 콩싹이 돋으면 까치와 비둘기들이 나타나서 싹을 싹둑 잘라 먹는다. 비둘기도 간간이 밭에 내려와 밭을 망치게 하지만 까치는 개체수도 훨씬 많고 더 적극적이다. 영리하기 짝이 없어서 밭을 초토화시킨다. 콩만이 아니라 참깨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농부들은 이제 콩은 아예 모종으로 옮겨 심는다. 그만큼 콩농사가 힘든 작업이 되었다. 생각건대 까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진화를 하였음이 틀림없다. 녀석들의 악착스러움이란 놀라울 정도다. 들판에 나름대로의 영역을 설정하고 침입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백로 정도는 우스운 상대다. 몸의 크기가 열 배도 넘으련만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어 기어이 쫓아내고 만다. 까마귀나 심지어 솔개도 까치들이 덤벼들면 귀찮아서 못 살겠다는 듯이 끝내 자리를 피한다. 까치가 길조라고 대우를 받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다. 바로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키는 자그마하지만 그래도 배와 날개에 하얀 빛을 띠어 착하게 보인다. 언뜻 보면 순한 모양이다. 소리도 판소리처럼 탁하고 저음이다.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듣기가 거북스러운 것은 전혀 아니다. 붙박이 농사꾼처럼 어디 멀리 가지도 않는다. 팔자려니 하며 한 곳을 지키며 산다. 홀로 살지 않고 항시 무리를 지어 사는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누가 침입을 하면, 소위 인간세상으로 말하면 적군이 쳐들어올 때 불굴의 의지로 일어선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맞선다. 끝내 땅을 지키고 적군을 몰아낸다.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까치사랑은 하나의 변용이다.





중국 - 元 時代 - 烏夜啼(까마귀가 밤에 울다) - 琴歌




비둘기는 산비둘기나 멧비둘기다. 녀석들은 땅에 내려 앉아 모이를 쪼아 먹기도 하지만 대개는 나무숲에 앉아 하루 내내 구구거린다. 음산한 음성이다. 평화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녀석이 지르는 소리는 그리 아름답지가 않다. 동네 옆 야산 기슭이나 밭두렁에는 꿩들이 산다. 아침 산보길에 녀석들이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보통 따로 산다. 둑방길 풀섶에는 까투리가 둥지를 짓고 숨어 산다. 장끼도 몸을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눈에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푸르륵 날아오른다. 께께께 하며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간다. 새벽에 녀석들은 멀리서 꿩꿩 하며 소리를 지른다. 녀석들의 소리가 꿩꿩 해서 이름도 꿩이라 지었나 보다. 텃새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놈은 바로 참새다. 예전에 그렇게 많던 참새들이 지난 수십 년간 잘 보이지 않더니 요즈음은 제법 그 개체수가 다시 늘었다. 키 작은 관목 숲에 떼를 지어 사는데 나무마다 가지마다 빠르게 움직이며 날아다니는 솜씨가 일품이다. 참새떼들의 지저귀는 소리야말로 정말 새소리답다. 무리를 지어 찍찍대는 소리는 자연이 이루어낸 합창이다. 예전에는 때까치나 종달새도 보였지만 근래에는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하지만 산림이 무성해지고 나서 새들은 그 종류의 다양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직박구리도 그 중의 하나다. 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놈이다. 몸은 제법 커서 20c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짙은 회갈색의 몸매가 늘씬하다. 작년 봄에는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집의 안방에 남녘으로 한 면을 통째로 유리창으로 터놓아서 밖의 풍경을 시원스레 볼 수 있게 하였다. 창밖의 살구나무 자귀나무 등이 푸르른 자태를 드러내고 멀리는 숲이 보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직박구리가 아침이면 그것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어김없이 날아와 창을 두드렸다. 다다다 다다다하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자명종이 따로 없었다. 일어나 가만히 보니 살구나무에 앉았다가 다시 창으로 날아와 날개를 퍼득이며 부리로 창을 쪼아댄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기해서 아내에게도 보여주고 아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주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싱긋 웃기만 할뿐이었다.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나무들에 둘러싸인 집이니 새들이 날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커다란 창에 착색을 해놓아 밖에서 보면 안은 보이지 않고 그냥 거울처럼 밖의 풍경이 창에 거울처럼 투영되었다. 그림이다. 새들은 거울 속의 풍경을 실제로 있으려니 믿었나 보다. 직박구리의 눈에는 집이 아니라 풍경의 연속이었고 그 속을 통과하려다가 뜻밖의 단단한 유리창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녀석의 끈질김은 경탄스러웠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에 어김없이 같은 짓을 되풀이한 것은 아직도 이해되지를 않는다.

[지노 프란체스카티(Zino Francescatti)] - 봄날 아침에

지노 프란체스카티

알파벳 별꽃들이 먼 기억 어둠에서 피어난다

직박구리 새들이 바보처럼 창문을 쪼아대다가

유리창 칸막이 너머 꿈의 봄빛

별천지로 날아가는

지노 프란체스카티

겨우내 상처를 입었던 바람도 살랑거리고

게으른 세월의 맺힘도 어슬렁 게슴츠레히

지노 프란체스카티

빨간 알몸의 바이올린은 꽃잎을 벗어 날리고

지우려다 지워졌던 사랑

어둠의 불꽃에 깃발되어 파도치듯 숨 뜨겁고

삶의 여울엔 꽃, 꽃, 꽃.

희디흰 소리꽃이 흐드러지게 부서진다



베트남 전통악기음악 - Canh Chim Tu Do (자유의 날개)


파주는 남한의 북단이어서 겨울이 오래간다. 봄도 늦어 모란은 오월초가 되어야 봉오리를 터뜨린다. 모란이 필 무렵이면 소쩍새와 부엉이가 밤에 노래를 한다. 울음일까 노래일까. 질문은 부질없는 노릇이요,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어리석음이다. 소쩍새의 노래는 두 음절이다. 정말 소쩍 소쩍하고 소리를 낸다. 올빼미 소리는 보통 세 음절이어서 구분이 된다. 밤새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 잠을 설치게 되지만 이는 생명의 소리다. 봄이 와서 만물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소쩍새도 그 기를 타고 소리를 드러낸다. 그 소리를 듣는 나도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밤을 보내게 된다. 언제인가 모란이 필 때 월식이 일어났다. 자연의 신비스런 현상이었다. 모란과 달 그리고 소쩍새를 위해 시 한편을 붙였다.

[모란이 피는 월식]

밤!

새각시 보름달을

새앙쥐 눈동자가

사각사각 갉아들고 있을 때

보리밭 이랑에서

숨소리도 새근새근

하늬바람 춤바람이

아기 여인을 훔치고 있다

초록빛

손길 따라

부드러운 산등성이

너머너머 깊숙이

배가 불러오더니

기울어 젖어 드는 달무리

울음소리 마다하고

솔부엉이랑

소쩍새랑 두견이도

신명난 듯 박자를 맞추며

모란을

검붉게 터뜨리고 있다

소쩍새하면 미당 서정주의 국화옆에서가 떠오르지만 아래에 소개하는 시인 이경의 싯귀들도 아름답다. 두견이라고 썼지만 시의 대상은 소쩍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소쩍새의 노래를 세음절로 표시하였다. 그것도 의성화하여 '홑적삼'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등잔불 밑에서 말없는 울음을 우는 여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멋진 시적 은유이지만 새소리로만 말하면 이 또한 착각이다. 세음절로 반복되는 소리는 소쩍새가 아니라 올빼미 소리일 것이다. 소쩍새도 올빼미과에 속하여 그놈이 그놈이다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시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정경이 실은 실상이 아니라 시인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고정관념임을 알 수가 있다. 피를 토한다는 소쩍새의 시적 이미지가 오랫동안 누적되어 시인은 이를 바탕으로 그가 들었던 올빼미 소리를 소쩍새로 변환하여 시적 영감을 얻었음이 틀림없다. 그만큼 새소리와 그 소리의 실체인 새를 일치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나도 내가 쓴 위의 시에서 두견이와 솔부엉이를 이야기하였지만 두견이를 보았거나 솔부엉이가 어떻다고 알고서 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다. 어쨌든 이런 사실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시의 아름다움을 읽어본다.

[두견아, 그만 네 봄을 놓아주아라] - 이경

꽃이 지고서도 한참 더

새는 목을 풀어 울었다

저 산에 피던 느릅나무 속잎 단풍 들도록

이 산에 떡갈나무 찬비 오도록

홑. 적. 삼... 홑. 적. 삼

돌이키지 못할 봄밤을 홀로 울었다

그대 산모퉁이 돌아가고 있을 때

맨발로 따라가며 목이 터지게 불렀노라

오는 봄은 눈부시어 바라 볼 수조차 없더니

돌아서 가는 사랑이 몸서리치게 아름답더라

봄이 가고 나서도 한참 더

새는 목이 쉬어 울었다

그러나 봄은 가는귀가 먹어 듣지 못하였노라

듣지 못하였노라

다시 한 백 번을 더 봄이 온다 해도

꽃이 지기 전에는

꽃이 아주 말라 떨어지기 전에는

봄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

제비와 물총새도 낯이 익은 새다. 이들은 여름철새다. 봄이면 먼 남방의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온다. 하지만 근래에는 보기가 드물다. 눈을 비비고 찾아보아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어렸을 때 물가에는 항시 물총새가 버들가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참새보다 약간 큰 녀석이 뾰족하고 긴 부리에 몸은 새파랗게 빛이 난다. 나뭇가지 위에서 물속으로 헤집고 들어가서 피라미라도 물고 나오는 녀석의 솜씨가 눈에 선하다. 그 때는 농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논이나 개울에 물고기들이 가득하였다. 먹이가 풍부하니 물총새가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제비는 집집마다 처마 밑이나 심지어는 대청마루 대들보에도 집을 짓고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았다. 새끼들이 먹이를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가 기억에 어렴풋하다. 가을이면 전신주 전깃줄에 새까맣게 내려 앉아 있거나 떼를 지어 공중을 나는 모습은 하나의 장관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모내기철만 되면 들판에는 백로떼가 날아든다. 커다란 백로를 비롯하여 중백로도 보인다. 중백로는 백로에 비해 몸집이 작다. 머리와 등날개에 누런빛이 점점이 감돈다. 백로들은 모를 심기 위해 논을 써래질할 때 그 뒤를 무리지어 따라 다닌다. 갈아엎은 흙에서 이것저것 수많은 먹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미꾸라지가 대표적인 먹이일 게다. 수십 년 전에는 벌판 옆 솔숲마다 백로떼들이 하얗게 무리를 지어 앉아 볼만 하였지만 지금은 그 개체수가 줄어 듬성듬성하다. 그래도 수년 전부터 빠르게 수가 늘어나고 있다. 농약을 줄인 결과다. 논에 우렁이가 다시 나타나고 참게들이 돌아온다. 송사리와 왜몰개 등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먹이들이 제법 풍부해져 백로들도 늘어나고 있다. 녀석들의 소리는 단조롭다. 노래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꾸꾸꾸하는 것이 전부다. 개울가에는 왜가리도 눈에 띈다. 문산천은 제법 큰 개울인데 그 둑방을 걸어가노라면 왜가리와 백로들이 어울려 먹이를 찾고 있다. 왜가리는 회색빛 날개에 부리와 다리가 길고 머리의 볏에 붙은 털이 날렵하다. 오랫동안 관찰을 하였지만 섭섭하게도 왜가리의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녀석은 홀로 살아 외롭게 보인다.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먹이를 찾아 물을 응시한다. 말없이 몇 시간씩 버티고 있는 낚시꾼의 모습이랄까.

오월 중순이면 이곳 파주에는 아까시꽃이 만발한다. 희디 흰 찔레꽃도 바보처럼 꽃망울을 하늘의 별처럼 터뜨린다. 이 때쯤이면 휘파람새를 비롯하여 뻐꾸기가 나타나고 무엇보다 꾀꼬리가 노래를 한다. 뻐꾸기는 짙은 회흑색 날개에 몸길이가 20cm는 넘을 것 같다. 통상적으로 뻐꾸기 소리는 뻐국 뻐국하며 두 박자의 음절이다. 그러나 녀석들이 짝을 이루어 희롱을 할 때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낸다. 빠르게 뻐뻐꾸 뻐뻐꾸하며 세음절로 바뀐다. 녀석들은 나무에 앉아서도 소리를 내지만 날아가면서도 노래를 한다. 숲이 무성해진만큼 뻐꾸기도 개체수가 늘어 여기저기서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아침마다 산책을 하면 녀석들은 벌써부터 사랑의 놀음을 한다. 안개가 자욱해도 녀석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노래를 한다. 숲의 생명이 싱그럽기만 하다. 오래 전에 쓴 시 한편을 읽는다.

[안개 속의 사랑]

안개비가 아침을 매만지더니

산기슭 오솔길엔

머릿결 냄새가 떠돌았다

나무와 풀들이

털북숭이 짐승인데

초록은 사랑으로 가슴을 패이고

산허리 산등성이

안개 속에 목욕을 하다가

뜨거운 수증기에 알몸을 가렸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두근거리는 손길은

안개 속을 더듬다가

열락의 웅덩이에 빠져들고

살 비린내 축축이

적셔드는 산길

봄 뻐꾸기

철늦은 사랑

사시나무 우듬지에 앉아

뻐국 뻐국 소리를 질러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속 ------------------------------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