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적인 가뭄과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때문에 나라 전체가 뒤숭숭합니다. 오늘은 이런 분위기를 감안해서 다소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2012년 도이칠란트에서 제작된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다루는 몇 가지 주제를 생각해봅니다.
1) 한국 관객들에게 도이칠란트 영화는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 (1987),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1999) 등으로 유명한 빔 벤더스 나, 도이칠란트의 재통일을 소재로 한 <굿바이 레닌> (2003) 정도가 우리 관객에게 알려진 도이치 영화나 감독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유럽영화, 그 중에서도 진지하게 주제를 다루지만 재미없는 도이칠란트 영화를 업자들이 잘 수입하지 않습니다.
2) 오늘 소개하실 영화 <한나 아렌트> 역시 같은 범주의 영화 아닙니까?!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은 도이칠란트의 대표적인 여성 감독입니다. 올해 73세인 폰 트로타 감독이 주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문제적인 여성의 일대기나 특정한 시기를 영화화하여 우리에게 사유할 논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일컬어 폰 트로타 삼부작이라 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1986), <위대한 계시> (2009),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그것입니다.
3) 간단하게 각각의 영화에 대해 소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여성 혁명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일찍이 레닌과 더불어 논쟁할 정도로 뛰어난 사회주의 이론가이기도 하고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자 로자는 전쟁과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연설을 합니다. 하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불어 닥친 애국주의 광풍에 휩싸인 동료 남성 혁명가들의 배척을 받게 됩니다.
<위대한 계시>는 여덟 살 나이에 수녀원에 맡겨진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일대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수녀원 생활 30년 후에 원장수녀의 뒤를 잇게 된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의 시대배경인 12세기 초는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사회참여가 극도로 제한되었던 시기입니다. 힐데가르트는 이단으로 몰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아렌트의 삶 가운데 1960년부터 1964년까지를 조명합니다. 이른바 ‘세기의 재판’으로 알려진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변호하는지 목도한 아렌트의 글쓰기와 그것이 야기한 사회적 반향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영화를 제외한 두 작품 모두 ‘서울 국제여성영화제’ 초청작이었다는 것이죠!
4)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주범 아이히만의 자기옹호에서 ‘악의 평범함 banality of evil’이라는 명제를 찾아냈다고 들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출신 정치 철학자입니다. 그녀 역시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 감금된 일도 있습니다.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그녀는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하게 됩니다. 재판기록과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그녀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함에 관한 보고서>를 출간합니다.
500만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 대량학살(제노사이드)의 빌미를 제공한 책임자이자 장본인이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주장을 폅니다.
“나는 연속과정에서 일을 접수하여 중계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명령을 받고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내가 한 일은 행정절차에 따른 작은 역할이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시키는 것을 실천한 관리였을 뿐입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공직자의 용기란 조직된 위계질서입니다.”
수백만 인명을 사지로 몰아넣은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악마도 냉혹한 살인마도 아닌 50대 중년남성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는 신념에 사로잡힌 특별한 인간도, 나치즘의 이념에 광분한 광신도도 아니었어요. 아렌트의 사유는 여기서 비롯합니다.
5) 아렌트의 생각을 조금 정리해 주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렌트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야기할 파국적인 결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인간. 주어진 과업을 로봇이나 자동인형처럼 기계적으로 실행한 <모던 타임스>의 실제 주인공 아이히만.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히틀러의 명령에 몸을 던진 나치의 충직한 하수인이 아이히만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정치적으로 구조화된 악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죄악이다!” 아렌트는 그런 논리와 유사한 생각에 도달합니다.
6)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커다란 사회적 비난과 반향에 시달렸다고요?!
소수의 지인을 제외하고 모두가 등을 돌렸습니다. 그녀가 제시한 문제, 즉 나치에 협력한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신랄했기 때문입니다. 고도로 조직화된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은밀하게 나치의 만행을 방조했다는 것이 아렌트 주장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불과 5-6년 지속된 나치의 통치에 굴종한 유대인 사회와 지도자들을 비판한 아렌트의 사유를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죠. 일제의 직접지배 36년과 그 이전의 간접지배를 합하면 50년 가까운 세월 종복으로 살아온 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입니다. 당시 지배계층과 지도자들의 충실한 방조와 추종이 없었다면 일제의 압제가 그토록 견고하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첫댓글 악의 평범함, 따지면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자기기만하며 살면서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대구 수성구에서 출마한디고 큰소리치는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고만고만하지 않다는 것을 웅변하려고 설치는, 참 외로운 꼭두각시인 것 같습니다. 그도 알고 있겠지요. 북의 핵이 북의 문제이고 미국의 문제라는 것을. 오늘 한국사회에서 맡아야 할 자신의 배역이 무엇인줄은 알터인데, 그래야 대구 사람들이 덜 불쌍할 터인데.....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대면하는 허다한 인총의 흉중에 자리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악함이
돌이킬 수 없는 거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합니다. 사유와 동행하지 아니하는
행동이 야기하는 악의 온상을 걷어내는 작업이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