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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과 사계리
점심도 늦은 시간인데 아직껏 아침식사 전이므로 식당을 찾는 것이
당연하지만 왜 까탈스럽게도 사계리의 식당만을 고집했는가.
사계리 이가도시락의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서 그랬다.
그래서, 북적대는 식당이라야 실망하지 않게되는 진리를 이미 오래
전에 터득했으면서도 사계리의 한가로운 집을 골라 찾아간 것이다.
과연, 식당이라는 이미지는 지워버리고 전화번호 알려 준 고마움만
기억해야 할 집이다.
산과 더불어 살아오는 동안 두루뭉술해진 것이 내 식성이건만 무척
시장한 참인데도 깨질거리다 일어서고 말았으니까.
.
유감스럽게도 이가도시락 여주인은 출타중에 전화를 받았다.
과객(過客) 상태라 비록 성의는 반감된다 해도 그 때의 후의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방문하려 한 것인데.
그러나, 그녀의 귀가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나그네길.
13년이나 미수로 남아 있는 과제였으므로 통화한 것만도 다행이라
자위하며 대정향교(大靜) 길을 택했다.
대정향교(제주유형문화재 제4호)는 단산(簞山)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서 아주 포근한 느낌이다.
이조는 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에 따라 1현 1교를 시행했다.
태종(3대)16년, 제주도는 1개의 군현에서 제주, 정의, 대정 등 3개로
분할되고 향교 역시 3곳에 설립되었다.
대정향교가 현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효종(17대) 4년이란다.
대정현성 북측 성안에 창건했으나 이사수(移徙數)가 많았던지 자주
옮겨다니다가 온전한 자리를 찾은 듯.
현 소재지 사계리는 넓게는 대정현 관내지면 안덕면에 속한다.
그러니까, 터가 워낙 좋아서 멀리 안덕땅에 자리잡은 것인가.
산방산(1.2)과 단산에 안긴 대정향교(2.3.4)
사계리(沙溪里)는 안덕면 서남부쪽 우뚝한 산방산 자락에 위치한다.
동에는 산방산, 북쪽에는 단산, 남으로는 형제섬과 송악산,가파도가
있고, 대정읍 상모리와 서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2.7Km 해안을 따라 취락이 형성된 명사벽계(明沙碧溪)의 마을이다.
대정향교가 자기 고장을 떠나 단산을 넘고 여기까지 와서 눌러앉은
것으로 보아 이중환의 기준으로 보면(택리지) 사람 살만한 곳인 듯.
해발 395m 산방산(山房山)이 가는 족족 따라왔다.
산방산은 사냥꾼의 잘못 쏜 화살을 맞고 화난 옥황상제가 뽑아던진
한라산봉(峰)이고 뽑힌 자국이 백록담이라는 전설과 산방덕 처자의
애련한(哀憐)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조면암(粗面岩) 산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 공교롭게도 백록담과 산방산 저변의
둘레가 비슷하단다.
<산방산 자락의 한 무자(無子) 부부가 자식을 염원하는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드리던 중 산방산 중턱에서 여아를 발견, 데려왔다.
하늘이 점지해준 아기라고 믿은 부부는 이름을 산방덕이라 했다.
실은 산방산 산신이 인간으로 환생한 것.
처녀가 되어 이웃 총각과 결혼, 행복하게 살고 있는 미모의 산방덕을
노린 사또는 그녀의 남편을 누명을 씌워 죽였다.
산방덕은 인간으로 환생한 것을 후회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바위가 되어버렸다.
그 바위에서 끊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산방덕 전설이다.
산방산 자락에 펼쳐있는 이처럼 넓은 들을 전에는 왜 보지 못했지?.
산방산과 송악산을 수차 오르내리고, 사계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모슬포를 향해 패달을 밟으면서도 모두 무심코 지나쳤기 때문이다.
두 다리로 걸음으로서 비로소 제대로, 자상하게 보는 것이다.
즉, 걷는 의미가 더욱 부각되게 하는 사건이다.
대정현성과 추사적거지
사계리에서 대정현성 추사적거지(謫居址)까지 가는 동안 길의 직선
화와 확포장공사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너른 평원은 사계리 향교 앞들뿐 아니라 가로 막고 있는 단산(簞山)
고개 너머 대정읍 인성리, 안성리, 보성리로 이어진다.
그런데, 인성리의 훤한 들 가운데 방사탑이 서있다.
허(虛)한 부분의 보완과 사귀(邪鬼) 퇴치가 임무라면 해변에만 있어
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도로공사에 시달리고 있는 사계리 너른 들(1.2)
단산고개에서 바라본 모슬봉(3)과 인성리 들에 있는 방사탑(4)
천제연에서 30리, 제주의 3성(城)중 하나인 대정현성(大靜縣城-제주
기념물 제12호)이 상당부분 복원되어 있다.
대정현 설치 2년 후(태종 18년) 초대 현감 유신(兪信)이 백성을 보호
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성이다.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여느 성과 달리 집과 밭 사이에 축조한 것이
이 성의 특징이란다.
대정현성에서는 지역 방어를 위해 설치한 10여곳 봉수대를 통해 원
근 각처에 외적의 침입을 알렸단다.
현성 동문터 안쪽(안성리)에는 추사적거지(사적제487호)가 있다.
추사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체와' 완당세한도'(阮堂歲寒
圖-국보제180호)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완당집(阮堂集),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 등으로 이름난 조선 후기 학자다.
이조 500년 내내 그랬듯이 그도 세(勢) 싸움에서 밀려 이곳 대정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대정성지(1.2)와 추사적거지(3)
처음에는 포교 송계순(宋啓純)부장의 집에서 시작되었단다.
그 후 지방유생 강도순(姜道淳)의 집으로 옮겼는데 원래의 적거지는
1948년의 4. 3사태때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초가들은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1984년에 재건한 집들이라고.
추사는 유배생활중에도 서화의 창작은 물론 제주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곳, 추사의 유배지는 2007년에 제주기념물제59호에서 사적제487
호로 격상되었다.
그런데, 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적거지에서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입장(入場)을 차단하고 공사중이다.
추사기념관을 신축하나본데 얼토당토 아니한 짓들일랑은 제발 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추사의 출생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도 기념관이 있다.
다산 정약용도 출생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뿐 아니라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도 큰 규모의 기념관이 있다.
이 분들 외에도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는 지자체들이 갖은 치성을
다 드리고 있다.
지역 홍보에 큰 효과는 물론 중요 관광상품으로 판단하는 듯.
괴이쩍은 역사인식
대정에서 10리 모슬진(摹瑟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모슬봉 자락 왼쪽을 타고 남서진하는 길이다.
도중에 상처투성이 시멘트기둥 하나를 발견했으나 무심코 지나쳤다.
그것이 옛 육군제1훈련소 정문 기둥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모슬진에
도착한 후라 다시 가보는 것을 포기했다.
6. 25 민족동란의 발발로 대구, 부산에 있던 훈련소를 통합해 일제의
오무라병사(大村兵舍) 터에 창설한 것이 육군제1훈련소다.
모슬포는 물, 먹거리의 부족으로 일명 못살포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의약품까지 부족하여 훈련을 마치고 전선에 나가기는 커녕 훈련중
사망한 장정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전해진다.
한데, 훈련소의 역사성을 부각하며 유적지로 꼽고(등록문화재제409
호) 여러 조형물들을 세우면서도 정작 대문(정문)은 방치하고 있다.
대문(大門)이 얼굴이라는데.
문기둥은 상처뿐인데 그 안에 '평화의터'를 세우고 기념사진에 얼굴
내밀기 바쁜 명사들의 면면을 보는 순간 속이 몹시 메스꺼워졌다.
육군제1훈련소터에 들어선 '평화의 터' 탑(상)과
대정초등학교내에 있는 공군사관학교훈적비(하)-전재-
하모리의 모슬진은 제주9진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진터가 없다.
숙종(19대)2년,목사 윤창형(尹昌亨)이 중문동에 있던 동해방호소를
이전해 축성했다는 모슬진인데 모슬포항 개발로 사라져버렸단다.
어이없게도 진터가 택지로 매립되었다니 말이 되는가.
해안 경비의 강화를 위해 이건까지 했다는 역사성이 강한 모슬진을
개인주택지로 둔갑시키다니.
그러고도 이 지역이 전쟁유적박물관이라고?
유적으로는 일제의 오무라병사를 비롯해 일군탄약고, 알뜨르비행장,
통신대, 지하벙커와 동굴진지 등이 있다고 자랑(?)한다.
육군제1훈련소와 강병대교회를 비롯해 워커운동장,맥냅((McNabb)
미군 기지, 공군사관학교 사적비, 육군29사단 창설비, 육군98병원과
포로수용소 등은 6.25동란과 관계된 유적들이다.
그래서 잘 보존해 역사성을 남겨야 한다고?
말은 맞는데 언행이 왜 이리 따로 가고 있을까.
참으로 괴이쩍은 역사인식.
혼란스러워졌다.
여전히 못살포인가
모슬포에 찜질방이 있음을 사계리에서 확인했으므로 여유로웠다.
대로들을 걷는 동안 찜질방 외의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아직 없다.
그만큼 찜질방은 나의 대로에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
한데, 불경기의 영향을 가장 민감하게 받는 곳중 하나가 찜질방이다.
그래서, 이즈음 문을 닫는 찜질방이 늘어감에 따라서 나의 한 시름도
커가는 중이다.
모슬포 중앙시장통을 묻고물어 찜질방을 찾아냈다.
그런데, 카운커의 여인은 손님이 귀찮았던가.
아니면 내가 탐탁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주인이건 종업원이건 그 자리에 있는 한 고객을 반가이 맞을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고객의 궁금사항을 풀어줄 의무가 있는 그녀는 내 질문에
묵비권 행사로 일관했다.
구내식당과 PC방 유무를 묻는 것은 기본인데 왜 그랬을까.
팔도 찜질방을 순력(巡歷?)중이지만 처음 겪는 무응대였다.
모슬포찜질방
절박했다면 굴욕(?)이라도 참았을까.
그러나, 서둘러 제주시행 버스에 올랐다.
역시, 단골의 매력인가.
가까운 중문지역을 두고 멀리 제주시의 단골 황금불가마(찜질방)를
향하고 있으니.
가고, 오는 중거리 버스여행중 생각의 테마(thema)는 모슬포였다.
못살포는 옛말일 뿐 오늘날은 잘살포라는 모슬포가 왜 이렇게 나를
무겁게 할까.
모슬진, 훈련소터가 날 혼란스럽게 하더니 찜질방이 말문을 막았다.
미시적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보면 모슬포는 분명 잘살포일 것이다.
하나, 거시적으로 보면 여전히 못살포이며, 그러므로 거듭나야 한다.
서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유적지, 관광자원이 지천이면 무슨 소용인가.
그걸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다룰 사람이 없는데.
매우 유감스런 표현이지만 생각이 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 깡통들의
집단 같다 할까.
어찌 모슬포만의 일인가.
고 함석헌옹의 말을 빌리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