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송일곤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그가 폴란드 유학 중에 만
든 단편영화 [간과 감자]였다. 시적 상징과 비유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영상적 내러티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힘 있는 전개방식, 그 주제의 선명
함과 표현의 강렬함에 나는 놀랐다. 그리고 칸느 영화제 단편부문 대
상을 받은 [소풍]을 보았다. 역시 여백의 공간을 풍요롭게 채우고 있는
시적 영상과 함께, 삶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오래도록 긴 여운을 남겼다.
송일곤 감독의 장편 데뷔작 [꽃섬]은 올해 한국영화계가 거둔 최고의 수확이다.
가벼운 코미디로 극장가를 점령한 조폭들이 도대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올해 우리 영화계는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 불명],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부라더스], 문승욱 감독의 [나비]
와 함께 송일곤 감독의 [꽃섬]이라는 빛나는 보석을 낳았다.
꽃섬은 지도 위에 있지 않다. 꽃섬에 가면 모든 슬픔을 잊을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지금 불행한 것이다. 배를 타고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꽃섬을 찾아가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현실 속의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꽃섬은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꽃섬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내면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나비]에서 낙태의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가던
여인처럼, [꽃섬]에서는 각각의 내면에 차오른 슬픔을 잊기 위해 세 여인이 꽃섬
을 찾아간다. 상처의 원인은 모두 다르지만 그녀들은 너무 큰 슬픔의 무게를
현실 속에서는 견디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말 꽃섬에 가면 그 모든
슬픔이 눈녹듯 사라질까? 그리고 아침이슬같은 새로운 삶이 시작될까?
10대의 혜나(김혜나 분), 그녀는 임신한 몸을 숨기기 위해 붕대로 아랫배를
칭칭 감고 살았다. 진통이 심해지자 공중화장실 변기에 앉아 출산을 하고
자신의 이빨로 탯줄을 자른 뒤 아이를 그대로 변기 속에 버린채 물을 내린다.
20대의 유진(임유진 분)은 뮤지컬 스타였다. 오직 노래만이 그녀 인생의 전부
였지만 설암을 선고 받아 이제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살을 결심한다. 30대의 옥남(서주희 분)은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기 위해
두 눈 질끈 감고 돈많은 늙은 부자와 섹스를 한다. 그러나 노인이 복상사를
하는 바람에 경찰에 신고되고 남편에게 들켜 집을 좆겨난다.
이 세 명의 여자가 찾아가는 곳이 꽃섬이다. 남해 어딘가에 있다는 꽃섬,
그곳에 가면 모든 슬픔이 치유된다는 꽃섬. 버스를 타고 꽃섬에 가던 옥남,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찾아 남해행 버스에 오른 혜나, 그들은 그러나
북쪽 높은 산에 버려진다. 버스기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북쪽으로
가야 한다고 그들을 산 속에 버려두고 떠나버린다. 눈 덮인 깊은 산 속에서
그들은 차의 문을 잠그고 자살을 시도한 유진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낸다.
[꽃섬]은 로드무비이다. 옥남의 친구가 살고 있다는 꽃섬을 찾아가는 세 여인의
여정을 따라가는 과정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눈 덮인 북쪽 산에서
부터 푸른 파도 넘실대는 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치면서
세 여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혜나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노인은, 그녀는
이미 죽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학대하는 남편을 수십 번 칼로 찔러 살해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트럭운전사, 그가 운전하는 트럭 뒤에는 죽은 남자의
관이 실려 있다. 그리고 도시의 밤무대를 전전하면서 서로간의 애증의 갈등에
고통받고 있는 2인조 게이 밴드, 세상은 이렇게 자신만의 무늬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깨 부딪치며 살아가는 곳이다.
[꽃섬]은 일상의 권태를 뚫고 비일상의 영역으로 가 닿는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화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관념의 서툰 차용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의미를
꿰뚫는 뛰어난 상징과 비유이며 그것들은 세 명의 상처받은 여인들이, 그리고
그녀들을 뒤따라가는 우리가, 무사히 꽃섬에 닿도록 도와준다. 혜나의 어깨에
돋아나는 날개라든가, 물 위로 번쩍 떠오른 나룻배, 털털거리는 트럭 뒷 자리에
실려 눈덮인 겨울의 한 복판을 가로질러가는 검은 관, 이런 아름답고 시적
비유의 힘이 넘치는 씬들은 [꽃섬]을 결코 대중적이고 관습적인 영화에 머무르지
않게 만든다.
[꽃섬]의 수상 경력은 이미 화려하다.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관객이 뽑은 최고의 신인감독상을 받았으며, 도쿄, 로테르담,
멜버른, 부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부산에서는 뉴커런츠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수상 경력은 치열한 시장경쟁의 원칙만이 존재하는
저자거리의 극장가에서는 무의미한 것일 것이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염된 더러운 피와 살로 숨쉬는 우리들의 가슴 깊은 곳을 헤치고,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감동의 흔적을 새겨 놓는 이런 영화가 더 많은 관객들과 행복한
만남을 갖기를 바란다.
문승욱 감독의 [나비]나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부러더스] 등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영화들이 극장가에서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비참한 종말을 맞았던 결과를
생각해보면, [꽃섬]의 상업적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다. 더구나 송일곤 감독의
화법은 대중친화적이지 않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편한 마음으로 화면을
응시할 수는 없다.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끈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 이면에는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화두들이 잠복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처절한 성찰
없이 화면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옥남 역의 서주희는 [레이디 맥베드]로 백상예술대상과 한국연극협회 평론가
선정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받은 연극무대 출신 정통 배우이다. 모든 상처를
끌어안는 그녀의 폭넓은 모성애는 영화의 삭막한 주제 속에 물기를 부여한다.
유진 역의 임유진은 신성우가 주연을 맡았던 뮤지컬 [드라큐라]에서 여주인공
로레인역을 맡았었다. 대사는 거의 없지만 삶의 절벽 끝에 다다른 황량함을
뛰어난 표정연기로 보여준다. 가장 거친 캐릭터인 혜나 역의 김혜나는 반항적
이고 일탈된 삶을 개성있는 연기로 묘사한다.
6미리 디지털 카메라로 찍혀졌지만 필름 못지 않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소니
DSR500을 사용하여 화면은 일반 35미리 필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인 클로즈업 쇼트의 적절한 활용, 헨드 헬드의 역동성으로 부유
하는 삶의 비극적 모습을, 그 속에서도 삶에 대한 대긍정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세 여인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