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겨울무장을 하고 하나씩 둘씩 모여드는 선생님들이 좌석 찾아 앉고 인원점검 하고 8시 40분에 출발했다. 다들 칼타임들이다. 연수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연수 공문 띄우느라, 환불해달라는 선생님들 치닥거리하느라 심신이 지친 현상길 총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늘 훤한 얼굴로 마이크를 잡고 시작을 알린다. 이경성 회장님 인사말을 듣고 우리 연수를 진행해 줄 민들레 연구소 조영기 소장의 자세한 안내를 받으니 우리는 정말 어디론가 가는 것 같다.
자! 남원을 향하여 출발이다. 출발하자마자 끼리끼리 이야기꽃을 피운다. 여행은 좋은 것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금방 가까워질 수 있다. 게다가 모두 국어과이고 모두 선생님들이니까 말이다. 과자를 먹어가며 가니 심심치않다. 차에 타자마자 박윤주 재무이사가 나누어준 과자 담긴 비닐봉투는 요술주머니같이 별별 과자와 사탕이 다 들어 있다. 누가 종합선물세트같다고 했다. 사느라 담느라 애썼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선 우리가 만든 「가사문학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연수 교재를 훑어보는 것으로 연수를 시작했다. 우리는 달리는 차 안에서도 연수를 한다. 담양지방 문인과 명승지를 개괄한 이해섭 선생님의 특강 원고를 비롯하여 김시습의「금오신화」와 고대소설「춘향전」, 송순과 정철과 박인로의 가사문학까지 일단 맛을 본다. 우리 회 임원들의 전문성과 정성을 다한 연수 교재이다. 회보의 내용도 들여다본다. 독서지도에 일가견이 있는 교사 3명의 연구물이 들어 있고, 새 교과서의 학습지도안, 특별활동 연극반 지도안 등 국어과 선생님들이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로 되어 있다. 심심할 때 보시라고 임원들 시도 몇 개 있고 수필도 넣었다. 글로만 보던 문학을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밟은 땅을 다시 밟아보며 확인하는 현장연수에 거는 회원들의 기대가 큰 만큼 교재 만드는 데 교육청에서 주는 지원금을 다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 설명을 맡은 이홍자 부회장이 할말 다 하고 마이크를 놓는 줄 알았더니 웬걸 줄줄 늘어놓는다. 넌센스퀴즈, 고사성어 찾기 등 분명 연수는 연수인데 심상치 않은 연수를 하여 지루함을 덜어준다. 아니, 썰렁했나?
가다보면 해가 나고 가다보면 눈발이 날리는 수상한 날씨지만 우리는 남원땅을 향해 달린다. 2층차처럼 높직한 대형버스에 능숙한 기사님의 운전 솜씨에 멀지만 편안하다.
드디어 남원 도착. 현지 가이드 김가혜씨를 만났다. 시간은 좀 늦어 1시 반이 가깝지만 적당한 시장기에 입맛이 당긴다. 남원의 월매집에서 월매한정식을 먹는데 월매동동주를 곁들이니 금상첨화다. 주인 아주머니는 월매 같지 않고 좀 나이 많은 춘향이 같다. 반찬이 여러 가지 나오는데 하나같이 맛깔스럽고 정갈한 것이 우리가 남도 땅에서 밥 먹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사이 밥도 안 먹고 어디로 뛰어 갔다온 조영기 소장이 광한루를 설명해줄 사람을 섭외했다고 한다. 식사 후 광한루 후문으로 들어서니 박한진 소장이 맞아 준다. 광한루 옆 대나무 정원이 아름답다. 겨울인데도 관광객이 많이 보인다. 우선 춘향기념관에 들러 춘향전의 대강을 그림으로 보는데 그 대형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표정이나 인물 배치가 다 그럴 듯했다. 춘향전 설명을 자세히 해주는 박 소장이 너무 진지해서 우리는 좀 답답했지만 동양철학과 음양사상으로 설명해야 하는 오작교와 광한루의 특징을 짚어줄 때는 참 좋았다. 옥황상제가 사는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한 것이란다. 따라서 다리 아래 흐르는 물은 은하수다.
광한루는 1419년에 황희가 건립했다는데 양반이 남문밖에 있는 저자거리 멀찍이 놓고 구경하면서 세상 민심의 흐름을 짚어보는 정보 교환의 장소로 지은 것이라 한다. 일제시대에는 나쁜 놈들이 글쎄 1층은 감옥소로 2층은 재판소로 썼다고 한다. 70년대 들어 정원을 확장하여 지금과 같은 규모가 되었지 처음에는 자그마했다고 한다. 춘향사당으로 가니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의 복사본이 있는데 영정은 다 가짜라는 말에 웃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사람이 그려서 그런지 논개 영정 비슷하다. 진짜 춘향은 사람 마음 속에 있단다. 아무튼 조신하니 예쁜 처녀가 서 있다. 사당 문설주 위에 새겨 놓은 토끼와 거북이 목각상을 설명한다. 이것은 불교 문화와 서민문화의 산물로 거북이의 忠과 토끼의 知慧를 통해 일제 치하를 극복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며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춘향제는 돈 많이 낸 권번이 주관하는데 옛날에는 평양까지 모금을 했다고 한다. 1931년부터 연 1회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일제의 눈을 피하느라 저녁에 지냈다고 한다. 올해로 72년째가 된다고 한다. 단오날 했다가 초파일에도 했다가 지금은 관광객 많이 오라고 어린이날 한다는데, 어린이와 춘향이는 연결이 잘 안 된다.
남원은 시 입구의 춘향터널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소설을 실재화해 놓았다. 문학의 위력이 이처럼 클 수가 있을까? 아예 명칭이 '사랑의 도시, 남원'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사랑을 해야 할 것 같다. 사랑? 좋지! 20년 넘게 문화재 일을 맡아본다는 박 소장의 설명을 들으며 남원 문화에 대한 열의와 정성에 감탄을 하며 광한루를 떠나 다시 차에 올랐다.
이제 88고속도로를 타고 담양으로 향한다. 우리는 담양 시내를 지나 傘仰亭을 찾았다. 면앙정에는 우리가 밤에 강의를 듣기로 한 향토문화연구가 이해섭 선생님이 기다렸다가 설명을 해 주신다. 72세라는데 가파른 면앙정 계단을 단숨에 올라가시는 분이다. 면앙정은 계단에도 연륜이 서려 운치가 있다. 올라가 보니 오른쪽에 굵다고 한마디로 하기에 부족한 거대한 참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뜨인다. 그 용무늬 같은 기둥과 무수히 뻗어나간 가지도 세월을 말해 준다. 왼쪽에는 너른 강쟁(江爭) 뜰을 바라보고 있는 면앙정이 있다. 면앙정가 詩碑도 있다.
무등산 한 활기 뫼히 동다히로 버더 이셔 멀리 떼쳐 와 齋月峰이 되여거늘
이라든가
너라바희 우헤 松竹을 헤혀고 亭子를 언쳐시니
그름 탄 靑鶴이 千 里를 가리라 두 나래 버렸는 듯
이라는 면앙정가 내용 그대로가 눈 아래 보인다. 다만 '옥천산 용천산 나린 물' 곁에 자동차 다니는 길이 생겼을 뿐이고 '긴깁을 폇는 듯'한 길에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것이다.
송순(1493∼1582)은 91세까지 산 분으로 20세에 급제하여 대제학을 비롯 30여 개의 관직을 돌았고, 48세에 은퇴한 후 면앙정을 지었는데 3년 후 다시 복직했다가 연세 81세에 회방연(回榜宴-과거에 급제한 지 60년 되는 잔치)을 3일간 받은 분이고 송강을 비롯한 제자들이 스승인 송순의 藍輿를 직접 메고 이 면앙정 계단을 내려가 침소까지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알고 보니 황진이와도 사귀었다고 한다.
<면앙정 삼언시>가 정자 안에 붙어 있는데 傘有地/仰有天/亭其中/興浩然/招風月/相山川/扶藜杖/送百年(고개를 떨구면 땅이고/고개를 드니 하늘이로구나/그 사이 정자 가운데서/호연지기를 돋우며/풍월을 부르면서/산천을 집어내고/지팡이에 의지하며/ 백년을 보내네- 필자 번역) 라는 내용이다. 최근 수리하면서 현판을 잘못 붙여 정자의 전면이 후면이 되었다고 한다. 설명을 해 주시는 이해섭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전문가는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고, 주변을 둘러보니 가사나 시조 속의 '松竹'이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傘仰亭은 소나무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겨울인데도 풍요롭다. 흩날리는 눈발이 운치를 더해 준다.
이렇게 전문가 모시고 가사 문학의 원류를 찾고 있는 우리는 서울 국어 교사들 중에서도 혜택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고 의욕 조금 더 있고 남보다 조금 더 부지런하니 이런 복도 누리는구나 싶다.
담양은 정자의 고장. 원래는 전라도 창평 땅으로 전에는 7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22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 정자의 특징은 방이 있어 4계절용이라는 것이다. 방의 위치가 가운데이기도 하고 한쪽에 치우쳐 있기도 한다. 이곳 정자를 보니 전에 내가 문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조상의 자연친화 정신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무조건 외우게 한 송순의 시조가 더 이해된다.
十年을 經營하여 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淸風 한 간 맛져두고
江山은 드릴 듸 업스니 둘너 두고 보리라
이제 松江亭으로 간다. 松江亭도 계단 위에 높직이 올라 있는데 현판에 竹綠亭이라 되어 있다. 이 아래 냇물이 竹綠川이란다. 돌아가니 松江亭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을사사화의 여파로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鄭澈(1536∼1592)은 이 고장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방영되는 여인천하 시대다. 松江은 26세에 과거에 오르고 1564년 대사헌 벼슬까지 지낸 분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재주가 많아 적도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思美人曲, 續美人曲은 이곳 송강정에서, 星山別曲은 식영정에서 지었다고 한다. 주변 경치를 보니 우거진 대나무 숲과 소나무들, 죽록천변의 바위들로 보아 좋은 시가 나올 만한 경치다. 낙향할 때면 좋은 작품을 남긴 것이 이해된다. 정자 앞에 후대인들이 세운 思美人曲 詩碑가 있다.
이몸 삼기실제 님을조차 삼기시니 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대 노여업다. 평생에 원하요대 한대 녜쟈 하얏더니 늙기야 무슨 일로 외오 두고 글이는고 <사미인곡 서두>
우리 일행 중의 누군가 그랬다. 사미인곡은 최대의 아부문학이라고. 이해섭 선생님은 美人이 여인이 아니고 선조 임금인 점을 강조하여 그가 충신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듯하지만 문학을 전공하는 우리들은 그 정치성을 빼어 버리고 글자 그대로 사랑 노래라면 더 빛이 날텐데 싶다. 松江亭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 밑에 가면 인간은 초라해진다. 그 연륜을 우리는 누릴 수 없고 그 푸르름을 우리는 누릴 수 없다. 인생 백년이 어려운데 나무들을 몇 백수를 누리지 않는가?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우리가 남길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듯이 선생님 모시고 우리 모두 사진 한 장 찍었다.
험한 날씨에 이 두 곳 설명하고 급히 댁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향토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 서울 사람들은 누가 서울에 대해 물으면 어디 하나 자세히 안내 할 줄을 아나? 설명할 줄을 아나? 정말 우리는 건성건성 대강대강 내용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제 우리의 숙소로 가는데 소쇄원 지나 있는 베스트 모텔이다. 가사 문학의 본고장에 웬 모텔? 그게 아니다 광주호를 지나는 곳곳에 모텔, 레스토랑, 찻집이 있어 이게 웬일인가 싶다. 그 중의 하나다. 호주 오페라하우스같이 생긴 집과 버섯 스타일의 집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예정 시간보다 일찍 와서 로비에서 대기하는 일이 생겼다. "그 시간에 웬 청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요번 여행에서 알았다. 숙소 구하는데 어려웠던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는데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40명도 단체라고 소쇄원 근처의 그 많은 모텔들이 단체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이 근처 학생수련원의 8인실방 몇 개밖에 못 구한 조영기 소장이 급기야 담양경찰서를 찾아 간 이야기다. 서울에서 선생님 40명이 오는데 어디서도 숙소를 빌려주지 않으니 그럴 수 있느냐는 항의에 서장이 친필로 선처하라는 싸인을 해 주었는데 그것을 받고도 시쿤둥하니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짧은 손님을 받아야 하는데 잠자는 손님을 받으면 손해를 본다는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모텔은 숙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렇게 여럿이 연수를 다니면 관광지 물 흐린다는 것도 말이다. 우리의 프랭카드를 모텔 벽에 붙이겠다고 하니 모텔 사장이 질색을 하면서 '물 흐린다'고 했다지 뭔가? 우리는 담양의 물을 흐린 것인가? 그 말을 듣고 정말 우리의 숙박 문화, 더 나아가 비밀스레 진행되는 성문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 보아야 했다. 이런 곳들은 온돌방이 적은 것이고 힘들게 구한 침실 방을 서너 명이 쓸 수밖에 없다지 않은가? 비밀로 할까 하다가 돌아오는 차에서 그런 이야기를 알려 드렸다. 상식(?)을 늘린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배정 받은 방에서 조금 쉬다가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제육볶음인데 싱싱한 야채쌈이 있어 좋았다. 어느새 허물없어진 일행들이 여기저기서 환담을 나누며 식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저녁 강의는 가사문학관에서 7시 30분이다. 우리는 담양의 특별 손님인 셈이다. 휴일인 월요일에 가사문학관 문을 열게 하고 저녁때 그곳 강당에서 강의도 들으니 말이다. 영상물도 본다고 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담양은 유독 공무원이 친절해서일까?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서울중등국어교육연구회 교사들이라는 것이 무게가 있었고 그곳 명사인 이해섭 선생님의 파워가 대단하기 때문이리라. 담양 문화의 수준이 높아서일 것 같기도 하다. 이것도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두 번째 사전 답사에서도 강의실을 못 구한 조영기 소장이 죄송스러워하면서 이해섭 선생님께 모텔 레스토랑에서 강의해 주셔야겠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가사문학관에 전화 한 마디 하시더니 해결을 본 것이란다. 하여튼 우리는 밤중에 관공서 시설을 이용하게 되었다. 선생님 강의를 모텔 레스토랑에서 듣게 되었다면 그분께 얼마나 결례가 될 일인가? 가사문학관의 도움으로 강당을 쓰게 된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해섭 선생님은 향토문화연구가답게 民草에 대한 말씀으로 강의를 시작하신다. 가사의 본고장의 뒷모습이라고 할까? 많은 한량들이 철학과 문학을 논하는 동안 부역하고 공양하느라 부근 백성들은 힘들었었다는 설명이다. 로마 문화의 뒤에는 노예가 있듯이 이곳 문화 뒤에는 백성들의 고초가 숨어 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 훌륭한 일을 하고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조명을 먼저 하셨다. 가사문학관이 있는 남면은 이태의 소설「남부군」의 배경으로 빨치산의 격전지였다고 하니 우리는 지금 고통스런 역사의 현장에 있는 셈으로 현장에서 보니 역사와 문학이 다 새롭다. 그리고 담양 지방의 이런 저런 명소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가령 성산별곡의 星山은 '별뫼'로 이 가사문학관의 동쪽산 이름이라는 설명, 소쇄원에 五曲門이 있는데 다섯 굽이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이 주변에는 다섯 산이 있다는 설명 등. 歌辭보다는 이곳의 지명, 역사에 대한 설명이 많다. 담양은 나이가 '구백야든네살'(이곳 발음으로 여든은 야든이다. '여덟'을 우리는 '여덜'로 발음하는데 이 선생님은 '야듭'이라 하신다.) 이란다. 1017년에 붙여졌다니까. 남부군의 첫무대인 가마골이 금성산성 안에 있는데 거기에는 二千骨이 있다고 한다. '골 谷'자가 아니라 '뼈 骨'자가 지명에 있다. 五死(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돌 나르다 죽고, 더위에 죽고, 얼어 죽음)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힘없는 백성들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알 수 있다.
이 선생님은 금성산성에 대한 자랑이 많다. 다른 산성처럼 지배층만 피신하는 곳이 아니라 백성까지 피신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4월 둘째 일요일에 산성제를 한다니 다시 와 볼 일이다.
강의를 다 듣고나서 25분짜리 가사문학 비디오를 보았다. 이곳 직원들이 수고해 주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다녀 온 면앙정에서부터 내일 볼 소쇄원까지 담양에서 활약한 작가와 문학에 대하여 국문학자들 몇이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 이것을 보니 가사에 대한 확실한 연수가 된다. 듣고 보고 밟아보는 현장 체험 연수의 3박자가 딱딱 맞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2층의 전시실부터 1층의 전시실까지 개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가사문학관의 전문 가이드 이정옥씨의 설명을 들으며 도는데 세상에 그렇게 말도 빠르고 발음도 정확하고 모두 외워서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우리는 이번 연수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놀라고 있지만 진짜 놀랐다. 우리가 명색이 교사인데 이런 수업을 한 적이 있는가 싶다. 감탄에 또 감탄을 하고, 늦은 시간에 우리를 보러 출근하신 관장님께 인사하고 다시 우리의 숙소로 온 시간이 10시가 넘었다.
김성근 선생님이 지나면서 내게 하는 말. "연수한다고 해서 교재나 읽어 보라 그러고 밤에는 그냥 노는 것인 줄 알았더니 정말 하네?"라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배꼽잡고 웃었다. 주관하는 우리야 그렇다 치지만 참가하신 선생님들 모두 晝耕夜讀이 아니라 晝讀夜讀하는데 졸지도 않고 잘 듣고 잘 보고 잘 참여해 주시는 대단한 분들이다.
늦은 시간인데 잠 잘 생각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버섯집 '노들강변'을 들르는 분들, 밤중에 산책 가시는 분 등 담양의 밤공기가 어떤지 보려고 나선 분들이 많다. 다들 잠은 내일 서울 가는 차에서 자려고 하시나 보다. 누구는 3시 반까지 이 좁은 동네를 누볐다는 후문이다.
1월 22일
아침이다. 밤새 눈이 내려 산에도 지붕에도 덮여 있다. 경치가 끝내준다. 이게 웬 복이란 말인가? 길이 미끄러울 것이지만 그 걱정은 나중이고 우선은 쌀쌀한 날씨 속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에 잠 덜 깬 눈이 호강을 한다. 베스트 모텔 맞은편이 골 깊은 산 속인 것이 아침에야 보인다. 아침 식사는 무우국. 밤새 야경(?) 도느라 잠 못 자고 술 안 깬 남자들 속풀이국이다.
이제 2일차 일정이다. 瀟灑園이다. 입구의 대나무 숲이 일품이다. 빽빽한 대나무로 어둡다. 그곳을 지나는데 조영기 소장이 침묵 게임을 하잔다. 눈 감고 모두 걸음 멈추고 대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정말 눈을 감으니 더 잘 들린다. 쏴! 멀리서 밀려왔다가 간다. 끝에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말이지.
눈을 뜨니 눈을 살짝 덮어 쓴 소쇄원이 이름그대로 掃灑한 듯 나타난다. 기가 막힌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거기에 햇빛이 살짝 비치니 여기를 백 번쯤 와 보았다는 조영기 소장이 탄성을 지르고 숨을 멈춘다. 어제 밤 남자 9명이 3시 반까지 밀가루 뿌렸다고 현 총무가 웃긴다. 그러면 지금 조명 담당은 누구야?
우리에게 가사문학을 해설하러 가사문학관 소속 김정아씨가 왔다. 園林부터 설명한다. 그냥 정원과 달리 자연을 살려 인공을 약간만 가미한 것이 원림이란다. 조광조의 제자 梁山甫(1503∼1557)가 은둔하면서 올곧은 선비정신 그대로 이상향으로 꾸민 곳이다. 작다고 하면 작은 이 정원에 우주의 이치, 동양철학, 스승에 대한 사랑 등 모든 것을 응축해 놓은 것이다.
待鳳門이 있는데 기다리는 봉황은 다름 아닌 스승 조광조로 1599년 기묘사화로 역사의 주역에서 물러나 사약을 받은 스승을 기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에 오니 곳곳에서 스승 그리고 제자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다. 愛陽壇이 있고 五曲門이 있다. 흐르는 물이 나무대롱을 통해 '上池'에 이르면 물고기를 키우고, '下池'로 가서는 연꽃을 키운다. 霽月堂을 가려면 조심하라고 외나무다리(실은 쌍나무다리임)를 놓았고, 다리 앞에는 살구(杏)나무(은행이어야 한다. 아니다. 있는 그대로 살구나무다라고 설이 분분하단다.)가 있다. 물 건너에는 掃灑處士梁公之廬라 써 있는 뒷담이 보인다. 그 앞에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 먹의 재료인 朱木나무가 있다. 霽月堂은 송시열의 글씨로 가슴 속에 품은 뜻이 '맑은 날 바람'(光風) 같은 사람도 있지만 '비갠 날 달'(霽月) 같은 사람도 있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주인이 거처하는 곳은 霽月堂, 손님이 머무는 곳은 光風閣이다. 양산보는 光風 보다는 霽月인 모양이다. 애련설, 귀겨래사 적힌 방이 한 켠에 있고 마루 밑에는 딸의 관으로 썼다는 두꺼운 널빤지가 보인다.
사람 사는 곳이 오래 보존된다고 맞은 편 입구에 살면서 이곳을 돌보는 후손들이 장작을 가끔 땐 흔적으로 그으름도 보인다. 정자에는 1992년 아마츄어 화가 박민숙이 그렸다는 소쇄원 전경의 그림이 있는데 무척 훼손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많이 찾다가 전체가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霽月堂에서 한 계단 내려 낮은 문을 지나가면 光風閣이 있다. 12개의 기둥은 12지를 상징하는지 12개월을 상징하는지 싶은데 그곳은 손님이 와서 글을 짓는 공간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소쇄원은 溪流와 천연의 바위를 그대로 살린 한국식 정원이다. 모양 내느라 나무 하나 돌 하나 제 모습인 게 없는 인공의 일본 정원이나 영국식 정원과 다른 한국의 원림을 제대로 보았다. 박정아씨의 설명 덕이다.
어제 가사문학관 강당에 쳐 놓았던 프랭카드를 담 아래 두르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제 息影亭이다. 이름도 멋지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곳이란다. 그림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따라 있는 것. 빛이 있으니 그림자가 있고 존재 있으니 그림자가 있다. 내 가는 곳에 그림자가 있다는 석천 임억령(1496∼1568)의 말을 인용하신 이해섭 선생님 강의가 생각난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곧 사람. 따지고 보면 '사람이 쉬어가는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세운 정자라는 데 이 고장이 스승 제자 관계만 아름다운 줄 알았더니 장인 사위 관계도 아름다운 곳이다.
식영정은 息影亭 四仙(정철, 고경명, 백광호, 송익필)이 모여 문학을 논하고 교유를 즐기던 곳이다. 여기에 현판으로 걸려 있는 息影亭 20詠이 星山別曲이 된 것이라 한다. 그 아래 芙蓉亭(연꽃 정자), 棲霞堂(노을이 깃드는 집)이 있어 시인 묵객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임을 알겠다. 息影亭 아래 소나무 사이사이로 광주호가 보이고 특히 息影亭 바로 옆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소나무가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피는 목백일홍의 미끈한 나무 몸통을 보면서 이곳 정경에 진분홍 꽃을 더하여 상상해 본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정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하고 싶다.
김정아씨의 설명을 들으며 느낀 점 하나. 말로만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된다. 내용을 글로 써 주고 그리고 설명하면 좋을 텐데 싶다. 정자 이름 하나 하나에도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현판을 보며 '아! 그것이로구나.' 하고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본 그 정자를 학생들에게 설명한다고치면 그 명칭부터 풀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서하당'이라 듣기만 하면 답답하여 '서하'가 서쪽 노을(西霞)인지, 노을이 머무는 것(棲霞)인지 한자로 써 주기를 원하는데 학생들은 한자를 모르니 다만 소리만 듣는다. 학생들에게 '棲霞堂'이 '노을이 머무는 집'이라는 것, '芙蓉堂'이 '연꽃이 있는 집'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뜻을 모르니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모든 교과가 뜻풀이에 시간을 다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 단절은 한자를 쓰지 않는데서 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국어교사인 우리도 현판에 써 있는 글자를 다 못 읽어내는 형편이니 이 나라 국어 교육이 한자를 무시하고서야 맥을 추스르겠나 싶다.
이제 鳴玉軒으로 가려고 하는데, 눈발이 더 날리고 길이 공사 중이어서 큰 버스 진입이 어렵다는 선발대의 전화에 발길을 環碧堂으로 돌렸다. 아깝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 중의 하나라는데… 거기는 목백일홍 필 때가 좋다니까 다음에 다시 올 핑계거리로 남겨두자. 대신 지난 해 이곳에 들렀다가 쓴 졸시 '목백일홍'을 소개해 본다.
뒤틀린 허리는
안으로 새긴 인고의 세월인가
벗은 여인네 미끈한 하얀 몸통 같아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 격조인가
범접 못하게 휘고 꼬인 줄기에
무리지어 피고 지는 작은 꽃송이는
남도 땅 길가 가로수로
한적한 절간 약수터 옆 그림자로
부처님께 올리는 백일 정성으로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열정으로
늘 진분홍 얼굴이로구나
광주직할시로 들어서는 큰 다리 건너니 냇물에 물이 흐른다. 그런데 옛날에는 물이 더 많았나 보다. 성산별곡에 나오는 龍沼가 바로 여기고 여기가 釣臺雙松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거기에
짝마즌 늘근 솔란/釣臺예 세여두고/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를 헤쳐두니/환벽당 龍의소헤/배앏페 다핫나니
를 보면 그렇다.
環碧堂은 '푸르름을 두룬 집'이라는 뜻인데 글자 그대로 소나무 숲에 둘러 있으니 일년내내 푸르름 속에 있겠다. 현판 글씨는 송시열이 쓴 것인데 다른 글씨체와 다르다. 조부 묘를 찾아온 송강을 사촌 김윤제(1501∼1572)가 환벽당에서 낮잠 자다가 꿈에 용을 보고 찾아보게 하니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 피신해 있던 어린아이더란다. 불러 몇 마디 물어 보니 영특하여 거두었고 나중에 외손주 사위로 삼았다는 내력이 있다고 한다. 송강정, 식영정, 환벽당이 다 정철의 문학과 관련이 있다. 그가 어릴 적에는 외가덕에 살고 자라서는 처가덕에 살았다고 김정아씨가 설명하니 남자 선생님들이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다. 김윤제와 정철이 만난 것이 전설처럼 들린다. 있었던 이야기도 세월이 흐르면 전설이 되고 살았던 건물도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가 된다. 때로는 그럴 수 있는데 우리는 대개 오래된 것은 허물고 오래 지난 이야기는 묻어 버린다.
우리가 차에 타면 눈발이 날리고 차에서 내리면 눈이 그치고 이상스럽게 날씨도 협조하는 가운데 오늘 오전 일정이 거의 다 끝났다. 이제 죽림박물관으로 간다.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 竹鄕이다. 대나무는 60년 만에 쌀벼 같은 꽃이 피는데 꽃이 피면 같은 뿌리에 연결된 대나무가 다 죽는다는 나무다. 대나무는 보기와 달리 3개월이면 다 자라는 나무다. 여기 와서 보니 대나무 뿌리는 잔뿌리가 얼키고설킨 대단히 큰 덩어리라는 것을 알겠다. 지진이 나면 대나무밭에 숨으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왕대와 솜대와 맹종죽이 있다. 전시관 입구와 정원은 대단히 크게 잘 지어 놓았는데 전시품목은 그만 못한 박물관이다. 죽제품이 이제 사양산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삼정회관 찾아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불고기 백반. 차를 타고 갈 때나 모여서 설명을 들을 때는 대식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차려 놓은 상을 보면 대식구라는 것을 알겠다. 불고기 백반과 맛있는 게장을 잘 먹고 조영기 소장이 내는 맥주로 우리 일정의 마지막 식사 중에 건배를 했다. 어디가나 '위하여!'하며 건배하고 싶은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사를 마치고 기어코 이곳의 특산물을 사 가지고 가겠다는 몇 선생님들이 김가혜씨 안내로 죽물 가게를 찾았는데 하나 같이 중국산, 베트남산이고 담양산은 별로 실용성이 없는 것들로 선반 높은데 올려져 있어 하나도 못 사고 기분만 나빴다. 할머니 떡도 싸야 사먹는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 것이 비싸서 시장성이 없는데 어쩌랴? 그런 말하는 당신들이 좀 사라고 한다는 담양 사람들 속사정이 이해가 간다. 담양산은 일본 등지에 고가품으로 나간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된다. 죽물 사러 갔다가 허탕치고 오는 사람, 기어코 뭐 사 가지고 오는 사람들 기다렸다가 笑笑禪房으로 향했다.
김가혜씨가 '笑笑禪房 지킴이'라고 명함에 썼기에 무슨 찻집 같은 것을 하는 줄 알았는데 강쟁 읍내에 내려 골목으로 들어가 찾아간 집은 그냥 김가혜씨 개인집이었다. 햇빛 잘 드는 마루에는 묵은 나무로 짠 널찍한 테이블이 있고 큰 액자들에 여기저기 매달린 작은 소품 같은 조명들이 잘 어울리는 편한 곳이었다. 우리는 그 집 내실까지 들어가 앉아 차를 얻어먹게 되었다. 자기 집에서 차 한잔 드리려고 했다지만 세상에 남의 집 내실에 앉아 일부러 낮에 들른 남편 국근섭씨의 소리를 청해 듣고 더운 물을 부으니 꽃잎 노랗게 피어나는 국화차를 마시다니. 보통 실례가 아니지만 운치는 그만이다. 우리 연수의 마무리를 이렇게 할 줄이야. 쑥대머리를 듣고 즉석 춘향이로 뽑힌 이신자 선생님과 주고받는 춘향가를 듣고 인생살이 이야기가 담긴 사랑가를 들으니 일어나기가 싫다. 작은 화분에 딸기가 매달려 있고 따뜻한 차가 있는 그 공간에 모두가 부르는 진도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흥∼ 흥, 아리랑 고개로 내가 넘어 가네.
놀다 가세, 놀다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 가세.
정말 우리는 놀다가고 있구나. 이 각본에 없는 이벤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김가혜(정숙)씨와 그의 남편이 펼친 즉흥환상곡에 취해 우리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정겹게 훈훈하게 살아가는 그들 모습을 본 것이 가사문학 연수 내용 못지 않은 소중한 연수가 되었다.
우리는 「가사 문학의 원류를 찾아서」란 이름의 이번 연수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인연의 바다에서 1박 2일 머무른 것이고 인정의 마당에서 1박 2일 거닐다 온 것 같다. 남원에서부터 만난 가이드가 다섯 명인가? 그보다 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설명해주신 분들만도 그렇다. 모두다 친절했고 헌신적이었다. 그 중의 한 분, 김가혜(정숙)씨와 그 부군이 우리를 정말 놀라게 했다.
이제 일어나서 다시 출발이다. 서울로 간다. 어제 떠날 때의 심정과 너무나 다르다. 꽉 채운 것 같기도 하고 다 비운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잡생각을 깨끗이 비우고 그 자리에 무언가 새로운 감흥으로 꽉 채웠으니까. 국어교사인 것이 고마웠으니까 말이지. 연구회 임원인 나만 그럴 것인가? 일어서기 전에 그 집에서 쓴 소감문을 보면 주최측이 아닌 연수자의 소감을 알 수 있겠지.
차에 앉으니 또다시 다음 연수 주제와 장소 고민이 들려고 한다. 직업병인가 보다. 이제 겨우 끝났으니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의 소감문에 내년에도 이런 연수를 하면 꼭 다시 참석하겠다는 말씀이 많으니 우리의 이번 연수를 잘 된 것 같다. 안심이다.
서울 진입이 늦으면 길이 막힐까봐 고속도로를 달린다. 두 군데 휴게소를 들러 간식으로 배를 채우며 늦게 서울에 들어섰다. 서울은 여전히 막히고 바쁘다. 우리가 다녀 온 곳과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그것을 활력으로 알고 다시 학교에서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야겠지. 보고 느낀 것을 써먹어야겠지. 이 연수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특히 우리 연수를 더욱 알차게 차질 없이 진행해준 민들레 연구소 조영기 소장과 전문 가이드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2년 1월 25일 昭林 이홍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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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소림님의 좋은 글을 이제야 보다니,,, 명가혜 공지로 올려주셔도 좋은 글인듯 싶습니다. 처음 방문하여서 궁굼한 부분을 상당히 알게 되었군요, 그런데, 명가혜 주인 양주분께서 저들이 길손이 되어 직접 보고 느껴서 참 속내를 알아 낼 수 있는 기회를 간직케 하시려는 깊은 뜻을 가지신 그 맘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첫댓글 소림님의 좋은 글을 이제야 보다니,,, 명가혜 공지로 올려주셔도 좋은 글인듯 싶습니다. 처음 방문하여서 궁굼한 부분을 상당히 알게 되었군요, 그런데, 명가혜 주인 양주분께서 저들이 길손이 되어 직접 보고 느껴서 참 속내를 알아 낼 수 있는 기회를 간직케 하시려는 깊은 뜻을 가지신 그 맘을 이제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