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강원도 바다의 그 출렁이는 파도가 보고 싶고 그 바닷가언저리에서 공을 치고 싶은 마음에 나는 급작스럽게 만남을 주선해서 삼척을 향하기로 했다.
하루 걸이로는 좀 먼 감이 없지 않았으나 자연의 맛이나 공치는 맛이나 다정한 사람 만나는 맛이 그런 우려보다 훨씬 큰 부피이기에 일을 또 저지르고 말았다.
일찍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영 들지를 않는다. 겨우 잠이 들어서도 한 새벽에 자꾸 깨지고 결국 아침 일찍 잠자리를 털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제 낮에 문산에서 공을 치면서 다정히 건네주는 어느 아줌마의 손길에 일순 판단이 흐려져서 덥썩 받아 마신 캔 커피가 주범이었다.
커피는 언제나 작은 정과 함께 유혹으로 다가오기에 자주 넘어가고 나는 한밤이나 새벽에 눈을 말똥거리며 후회를 하곤 한다.
아니면 '이쁘장'한 아줌마하고 먼 여행을 같이해야하는 설렘 때문에 어릴 적 소풍전야처럼 잠을 설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둘의 요인이 합해지면서 더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건 말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할 일 없이 얼쩡거리다 같이 갈 일행을 더 채울 요량으로 문자를 날리는데 마침 우리 집 손님 내외가 일찍 시내를 나간다기에 나는 어제 밤에 '와이프'가 끓여 놓은 김치찌개에 밥 말아서 '후르륵' 밀어 넣고는 그 둘은 지하철역에 내려놓고 약속장소에 한참이나 빠른 시간에 나갔다.
거기는 원래는 견인차 보관소이지만 사람들이 여러 대의 차로 나누어 와서 한차로 합해서 고속도로로 밟고 시골로 내려가는 일종의 만남의 장소로 더 잘 애용되는 그런 곳이다.
주로 골프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서울이나 다른 곳에서 와서 여기서 모여 한차로 내려가는 그런 곳이다. 나는 주로 시골로 테니스를 하러갈 때나 여행을 갈 때 여기로 약속 장소를 정해서 한 차로 '합방'을 하는 곳으로 자주 이용을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금은 수상쩍은 사람도 있다.
오늘은 나도 너무 일찍 온 터라 동료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약간은 수상쩍은 남녀의 '합방'을 볼 수 있었다. '빼꼬롬'하게 생긴 여자 차는 경기도 차고 언뜻 보기에 '떳다방' 주인같은 남자 차는 강원도 차다. '휭' 하니 와서 휙 싣고 날라가는 폼이 적잖이 나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바였지만 그렇다고 쫒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난 그저 음악이나 들으며 무료히 부족한 잠 덕에 약간 '얼빵한' 몸을 '구슬르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한 참 만에 나하고 같이 갈 아줌마가 도착해서 짐을 싣고 나오는데 그 두 남녀가 만나 한차로 가는 장면과 우리를 바로 코앞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전의 그 아저씨들이 우리 둘을 보는 시선이 뒷통수에 따가 왔다.
"세상에 희한한 년 놈들이 즐비하군!"
뭐 이런 말이 내 차 꽁무니를 한동안 쫒아오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나의 벼락치기 작전 덕에 다른 일행을 더 확보하지 못한 터라 우리 둘은 오붓한 드라이브라면 드라이브고 데이트라면 데이트인 모양새가 되어서 경부고속도로 달려 영동고속도로로 꺾어 들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대관령을 넘지 않은 듯이 넘어서 강릉에서 또 다른 친구를 태우고 삼척으로 향했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삼척은 공비들만 허공을 날라 다니는 곳이 아니고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그런 따뜻한 곳이었다.
그리고 나도 두어 번은 지나갔었고 작년에 '환선굴'이란 곳을 지나다 들렸었는데 거기가 바로 삼척이었다. 삼척은 그렇게 나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폭풍으로 장마로 몇 번인가 물에 잠기었었다는 테니스장에 들려서 우리를 기다리는 친구와 악수로 즐거운 만남을 대신하고 바닷가를 '쭈욱' 따라가다 '소망탑'이란 조금은 외국 영화의 무슨 '게이트' 같은 조형물을 지나 약간 어설프게 조성 된 조각공원에 도착하여 바다를 내려다보니 바다와 파도와 그 부서짐이 절묘했다.
먼바다는 파란 색이고 가까울수록 짙은 초록이고 그 것들은 솟아서 파도가 되고 작은 물방울과 섞이며 뿌연 녹색이 되었다가 결국 하얀 너무나 하얀 흰색의 파편으로 부서져 서로 휘감기며 내 가슴에 쌓였다.
양배추의 하얀 속 같기도 하고 어느 날 봤던 비행기 날개 밑의 그 하얀 구름 같기도 하고 '하이타이' 물거품같기도 하고 어린 날의 꿈 '아이스께끼'의 그 달콤하고 시원함 같은 그런 느낌으로 날 유혹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만 폼잡고 점심 먹으로 가잔다.
마침 바닷가 길옆에 너무도 절묘한 곳에 위치한 훌륭한 식당은 우리 일행과 같은 회원이고 원 고향은 여기이나 지금은 부산에서 사는 어느 친구의 누님이 운영하는 그런 곳이다.
거기에 도착하여 창가에 따뜻한 햍빛을 받으며 자리를 하니 바로 옆에 다가와 있는 바다의 절경이 돌도 맛있게 씹힐 그런 곳이었다.
가격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먹은 자연산 회와 매운탕은 그 분들의 정과 함께 나의 조그만 뱃속을 채우고도 남아돌아 어찌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다시 테니스장에 와서 우리는 게임을 했다.
부족한 잠에 장거리 운전 뒤에 거기 유명클럽의 회원들간의 친선게임이라니 내내 그 놈의 캔커피가 나의 오늘 여행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처음부터 가지고 온 터였다. 이제 드디어 게임을 해야 하는 마당에 그런 우려가 사실로 입증되리란 생각에 초조했다.
어디고 우리네 '공꾼'들의 생각은 매 한가지다.
한번 붙어 봐서 서로간의 공이 팽팽해서 비슷하거나 지거나 하면 그 정의 두께가 처음 만난 사이일지라도 갑자기 두꺼워 지지만 낯설음이나 다른 요인에 의해 게임이 안 풀려 터무니없이 지기라도 하면 붙으려던 정도 달아나기가 일수이기에 처음 간 코트에서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 일단 이기고 봐야 더 정이 생기는 것이 우리 공의 세계라는 것을 오랜 시간 떠돌아다니며 익히 익혀 온 터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마음에 본전도 못 건지고 간다면 요번 여행의 다른 즐거움이 아무리 큰 들 다 ' 쭈그려 처박아 놨다 입는 추리닝'꼴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려와는 달리 게임은 이상하게 잘 풀렸다.
누가 밤새 술 마시고 아침에 필드에 나가서 공을 치는데 자기 생애 최고의 점수를 냈다더니 나도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심하는 마음이 컸던지 이상하리 만큼 공이 잘 맞아줘서 게임들이 순순히 잘 풀렸다.
춥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도 좋고 만난 분들의 공 스타일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그랬던지 그 동안 꾸준히 '난타'공을 쳐온 덕인지 그 분들도 상당한 실력이었지만 유별나게 잘 맞아서 승률을 엄청 바람직하게 '건지고'는 날이 어둑해 지니 우리는 다시 다른 식당을 향했다.
으잉!
바닷가에 도착하니 막 빨간 해가 뜨고 있지 않은가?
너무도 거짓말 같아서 다들 해란다.
아니 이 시간에 무슨 해란 말인가? 해는 서쪽으로 지고 여긴 동쪽이니 달이 뜨는 것이 아니냐는 나의 말에 수긍 반 의심 반의 눈총들을 보낸다.
그럴 만큼 적당히 허리에 구름을 휘감고 있는 그것은 크고 붉었다.
일행을 기다리는 사이에 그것은 물에서 완전히 튀어 나와 토끼가 나타나니 달이었음이 증명이 되었다.
이제 만월은 좀 지났지만 아직도 동그랗다고 말할 만큼의 그런 넉넉함으로 우리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식당에 들어서니 저녁을 먹기 위해서라기보다 '곰치국'을 먹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속초에서 식구들과 좌판에서 횟감을 산 적이 있는데 횟감하고 이상하게 못 생긴 물고기를 좌판 아줌마가 권하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이 '물곰'이었다. 돌아와 매운탕을 끓이니 맛은 엄청 좋았는데 어찌나 '흐물거리던지' 희한한 경험으로 아직도 생생한데 오늘 먹는 이 처음 먹는 곰치국의 주원료가 그 고기란다. 그러니까 국은 초면이지만 그 물고기는 구면인 셈이다.
처음에는 바닷가니 당연히 '곰치'물고기 이름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물곰'과 김치를 원료로 만드는 국이라 '곰치국'이라 하고 삼척의 특산물이라 한번 먹어본 사람은 무슨 첫 애인 기억하듯이 평생을 기억에 안고 산단다.
그건 가시만 없다면 '바닷물고기 순두부국'이라고 하면 딱 일 것이다.
부드럽기가 그렇고 그 순한 맛이며 '흐물거리며' 입에 빨려 들어가는 맛이 그렇고 느낌이 그렇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운동을 했음에도 워낙 잘 먹은 점심이 아직도 창자구석에 남아 있는 터라 밥은 드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 국만은 열심히 '후르륵'거려서 비웠다.
그 맛은 삼척의 맛이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의 맛 그것이었다.
그런 맛을 만나려고 나는 이 먼 거리를 달려온 모양이다.
그 부드러운 맛과 달밤과 파도소리와 좋은 친구들과의 어우러짐은 훌륭한 교향악인들 그런 완벽한 합주을 앞설 수가 있겠는가?
곰치국의 맛을 입에 '돌돌'굴리며 또 만난 친구들의 따뜻함을 가슴에 저미며 어두워진 밤길을 달려 올라오는 기분은 후다닥 내려온 여행길치고는 '건진 것'이 너무도 많아서 기쁜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강릉 친구를 내려 주고 대관령을 넘어 달려오는 길에 어제의 그 '캔 커피'가 끈질기게 되살아나서 마지막 카페인의 효혐을 발휘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옆자리 아줌마의 말똥말똥한 눈빛이 그 놈을 멍청하게 만들고 남음이 있었다.
집에 적당히 시간 맞추어서 도착하여 친구가 전에 준 더덕주를 한잔 털어 넣고 잠을 청하니 이래서 그나마 삶이 값진 것이려니 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