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모씨는 경기도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숙소의 천정이 내려앉아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식당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정에서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다. 박순자의 남편은 경찰에 오후 4시경 신고해 집단변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현장에서는 사망한 사람들이 쓴것으로 보이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라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등등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메모의 내용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독약을 먹고 죽은게 아닌가 했지만 경찰의 부검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목졸려 죽은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경찰은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목이 졸려 죽은것으로 보았다.
경찰에 의하면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인 이경수에게 자신을 목졸라 죽이게 한뒤 이어 이경수를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목졸라 죽이고 나서 여자들이 모두 죽은 것이 확인되자,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한뒤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메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사망자들의 사망정황은 드러났다지만 왜 이들이 집단적으로 자살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하게 드러난바가 없이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경찰은 사건의 열쇠를 쥔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했지만 이들은 당시에는 잡히지 않았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건 1991년 7월, 사건당시 수배되었던 오대양 직원들중 6명이 자수하면서 의문점들이 일부 밝혀지게 되었다. 자수한 이들의 진술로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쥔것으로 주목받았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이 이미 사건발생전에 반성의 시간에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된뒤 암매장당한 것이 밝혀졌다.
이들의 자수로 다시 사건이 대전지검에서 재조사되었지만, 검찰 역시 1987년 경찰의 수사와 마찬가지로 32명은 집단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수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