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과 웅변의 위력
3,1운동은 민족 의지를 보여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힘은 웅변에서 나왔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태화관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은 대중 앞에서 낭독되는 하나의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호소하는 웅변적 선언이었으며,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강조하는 민족사에 남을 명연설이었다.
당시, 한용운의 사회로 정재용이 선언문을 낭독하자, 참석 군중은 체포를 각오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 열기가 전국의 시위로 확산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온 조선인들은 대중 앞에서 연설 행태로 보여준 선언문 낭독이 불꽃이 되어 전국적으로 타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교나 교회, 그리고 시장이나 거리에서 행해진 수많은 선언문의 낭독과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민중은 이를 통해 ‘반드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찾게 되었다.
특히, 같은 날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고,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연설을 하며 만세를 외쳤다.
연설의 내용은 ‘조선은 독립국이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반드시 민족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학생들의 연설은 군중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순식간에 수천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교회와 학교, 그리고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강연이나 설교를 통해 민족의 자각을 일깨웠고, 학생들은 선언문을 복사하여 배포하고, 군중 앞에서 낭독하고 연설을 하며 만세를 이끌어냈다.
특히,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이 주도한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은 학생들의 민족웅변이 군중을 결속시키는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그녀의 외침은 군중을 자극하여 크게 감동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세 운동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학생과 청년들은 3,1운동의 확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전국 각지의 거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연설을 하며 군중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이러한 낭독과 연설에 따라 순식간에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3,1운동에서 보여준 웅변의 위력은 억압된 사회에서 민족의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다시 말하면, 3,1운동은 웅변의 위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웅변의 힘이 바로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끄는 감동적이고 선동적인 위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민족웅변의 힘이 가장 극적으로 발휘된 사건이었으며, 민족적 선언과 연설에 따른 평화적 독립운동이요, 말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 태화관에서 벌어진 일
1919년 3월 1일, 서울은 평소와 전혀 다른 날이었다. 이날 오후 2시를 전후하여 서울 곳곳에서 독립을 외치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초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 장소는 탑골공원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충돌이 일어나 희생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었다. 그들이 모인 장소가 바로 인사동의 태화관이었다.
태화관은 원래 요릿집이었다. 명월관의 분점 격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당시에는 고관이나 문인들이 드나들던 장소였다. 훗날 이곳이 3,1운동의 역사적인 현장이 되었다.
그날 정오무렵부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서울에 있던 29명이 태화관에 모였다.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명은 지방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시간이 오후 2시에 가까워지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최린은 주인 인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도록 했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잠시 후 일본 경찰 약 80명이 태화관으로 몰려와 건물을 포위했다. 밖에는 일본 경찰이 둘러싸고 있었다. 안에는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려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이미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있었다.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청년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곧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여기에 합류하면서 서울 전체가 만세의 물결로 뒤덮였다.
결국,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그 뜻을 받아 거리의 만세운동으로 확산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태화관을 단순히 민족대표들이 체포된 곳이라고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그곳은 총칼을 앞세운 일본 경찰에게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장소였다.
특히, 한용운의 태도는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그는 체포될 것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연설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말과 당당한 행동 뒤에는 ‘나라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태화관 문이 일본 경찰에 의해 둘러싸인 바로 그 순간, 거리에서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만세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태화관 안에서는 독립을 선언했고, 태화관 밖에서는 민중이 그 선언을 외침으로 바꾸었다. 그날 태화관에서 시작된 짧은 선언을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