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이라는 10여 년의 대동란 동안 중국 대륙에서 불교의 불씨를 어렵게 보존해 낸 공은 단연 조박초(1907~2000)에게 돌릴 만하다. 격변의 시기에는 권력의 향방을 잘 포착해야 살아남는 법이다. 조박초는 타고난 정치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탁월한 언변과 글 솜씨를 이용하여 권력자들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다가갔고, 권력의 이동을 누구보다 빨리 포착해 내는 감각이 있었다.
또한 중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으나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을 때 불교 교류를 명분으로 외교적 다리를 놓아주는 지혜도 빛났다. 그리하여 조박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권력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그를 찾도록 만들었다. 이에 관한 부분은 차후에 상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필자의 눈에 조박초는 중국 대륙의 공산화 후에 불교를 벗어나 정계(政界)에 입문했어도 얼마든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아니, 오히려 불교를 벗어던지고 완전히 정치판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성공에 훨씬 유리할 수도 있었을 시기가 제법 길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박초는 왜 일생을 불교 부흥에 매달리며 노심초사하고 동분서주했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조박초가 불교를 떠나 정계에 올인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청년기에 경험했던 불교 부흥 운동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시작된 중국의 불교 부흥운동은 단순히 종교 부흥 운동이 아닌 전 국민적 차원의 정신 부흥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에 불을 지핀 사람은 승려가 아닌 양문회(楊文會)라는 재가거사였다. 양문회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사회가 내우외환과 거듭되는 재난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서양 열강은 물밀 듯 밀려들어 중국을 점령하고 부를 착취하지만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 의지처가 없는 백성들은 도처를 유랑했으며, 지식인 사회도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떤 이는 축재(蓄財)를 통해 혼자만의 살 길을 도모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해외로 탈출하고자 하는가 하면, 비현실적 문학이나 예술에 기대어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해결책을 찾고자 고심했다.
양문회(1837 ~ 1911)도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흔들리는 영혼이었던 양문회는 어느 날 무심코 서점의 한 모퉁이에 놓여있던 《대승기신론》을 읽고 중국이 가야 할 길을 불교에서 발견한다. 그는 “백성이 이기적이어서는 나라를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서양을 배우려 하지만 무명에 가려 기껏 배워 봤자 “각자의 이익에만 몰두하니 이래 가지고는 아무리 나라를 일으키려 해도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두문불출하면서 ≪대장경≫을 읽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불교를 통해 마음을 닦을 것을 제안하였다. 양문회는 전통 학문에 밝았을 뿐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미국과 유럽에서의 공직생활을 통해 서양 사정에도 밝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서양이 기술적으로 우수하기는 하나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러한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았고, 이에 따라 궁극의 길은 불교를 통해 찾는 것이 유일한 방향이라고 굳게 믿었다. 오랜 전란으로 불경을 구하기가 힘든 현실 속에서 양문회는 영국에서 알게 된 일본 승려 난죠분유(南條文雄:1849~1927)을 통해 일본의 불전(佛典)을 구입하는 한편, 재산과 목숨을 걸고 전국을 돌며 자료를 구해 불전을 판각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인재를 모아 현대식 불교 교육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양문회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인재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그곳이 바로 중국 근대 불교 부흥 운동의 발상지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다.
양문회의 불교 운동은 당시 소수의 지식인이나 정객들의 이른바 은둔을 통한 자기위로의 불교와는 거리가 먼, 불법으로 시대를 바로잡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취지의 불교였다. 양문회는 불교를 발전시켜야지만 나라를 구하고 민중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고 부국강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불교는 이미 크게 쇠퇴하여 회복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는 “승려들이 불경을 시험 보는 제도가 없어지고, 계율과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똑똑한 자이건 우둔한 자이건 구분하지 않고 도첩을 받는다. 이에 경·율·론에 대해 전혀 몰라도 쉽게 주지가 된다. 이런 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졸렬하고 속됨이 말할 수 없으니 지식인 사대부들이 이 때문에 불교를 무시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조박초가 불교에 입문하던 때에 양문회는 죽고 없었지만 양문회의 불교 부흥 운동은 전역으로 퍼져 나가 그가 남긴 염원이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대였다. 당시 불교 부흥 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재가 지식인 불자에 의해 전개되었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여전히 구태를 답습하고 있었다. 한편 금릉각경처의 불교 부흥 운동이 교육과 연구 위주의 부흥 운동이었다면 상하이의 불교는 수행과 재난구제를 중심으로 한 실천 불교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그러한 실천 불교를 이끈 핵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관경지(關絅之)였다. 관경지는 상하이 조계(租界)의 혼합법정에서 대법관을 지냈던 상하이의 대표적 고위 인사였다. 그는 40대 초반, 즉 1920년대 초반에 관직을 내려놓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그 후 20여 년 동안 철저한 수행과 난민구제 활동에 전념하다 여생을 마친 재가 불교 거사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양문회의 불교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은 제2, 제3의 관경지가 꽤 있었다. 그들은 눈 앞의 혼란과 고통을 이겨내려면 불교의 지혜와 선정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불법(佛法)으로 시대를 바로잡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모임을 결성하고 각종 불교 활동과 빈민구제 활동 등의 대사회사업을 펼쳐 나갔다.
마침 조박초가 폐병을 얻어 상하이 관경지의 집에 의탁했던 1927년은 상하이에서 실천 불교의 뿌리가 상당히 내려진 상황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심히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시기에 시대의 명사와 재력가들이 불교로 몰려들어 수행과 보시를 함께하며 불교부흥의 주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조박초는 바로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느닷없이 찾아온 폐병으로 말미암아 불교 변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사연은 다음 호에서 상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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