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야耕雲野
죽장초등학교를 지나서부터 솔안 쪽으로 펼쳐진 들을 이른다. 근대에 와서는 ‘홈보들’이라 했다. 1960년대 말까지 지금의 송내교 밑에 이 들(논)에 물을 대기 위한 살보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살보’란 나무를 엮어 만든 보洑로 이 보를 홈보라 했다. 지금은 경운야도 인가가 들어서서 많이 좁아졌고 보洑도 콘크리트로 막아 큰 보가 되었다. 안동 권씨들이 세거하면서 정착하여 개척한 들로서 여헌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친구인 강재强哉의 후손들이 일군 이 들(野)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당시에는 장터마을이 없었고 안마을과 솔안에 작은 마을이 있어 들이 제법 넓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고 논도 대부분 밭으로 변했다.
경운야
『시냇물의 남쪽에는 한 들이 있는데 마을과의 거리가 겨우 1, 2리里에 불과하다. 이 들의 토지는 벼와 보리가 잘 자라고 기장과 수수도 잘 자라니, 만일 힘써 농사를 짓는다면 충분히 굶주림을 면할 것이다. 구름을 헤치고 밭을 갈며 비를 맞으며 호미질을 하는 것은 진실로 산중의 좋은 일인데,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노인과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 혹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고 혹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게 자신을 비유하였으니 우리들이 홀로 이윤의 뜻을 뜻하고 와룡의 마음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의 이름을 ‘경운耕雲’이라 한 것은 이를 사모思慕해서이다[溪之南(계지남)。有一野(유일야)。距村纔一二里(거촌재일이리)。是野之田(시야지전)。宜稻宜麥(의도의맥)。宜黍宜梁(의서의량)。如能力耕(여능력경)。足以無飢(족이무기)。坡雲而耕(파운이경)。帶兩而鋤(대양이서)。固山中之勝事(고산중지승사)。而莘野耕叜(이신야경수)。南陽臥龍(남양와룡)。或樂堯舜之道(혹락요순지도)。或託管樂之比(혹탁관악지비)。則吾儕獨不可以志伊尹之志(칙오제독불가이지이윤지지)。心臥龍之心乎심(와룡지심호)。野名耕雲(야명경운)。有所慕也(유소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