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目抄(上)
대저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존경(尊敬)해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이른 바 주사친(主師親)이며, 또 습학(習學)해야 할 것이 셋 있으니 소위(所謂) 유외내(儒外內)이니라.
유가(儒家)에는 삼황(三皇)오제(五帝)삼왕(三王)이들을 천존(天尊)이라고 부르니 제신(諸臣)의 두목(頭目)이요 만민(萬民)의 교량(橋梁)이니라. 삼황이전(三皇已前)은 부(父)를 알지 못하여 사람이 모두 금수(禽獸)와 같았으나 오제이후(五帝已後)는 부모(父母)를 분별하여 효(孝)를 함이라. 소위(所謂) 중화(重華)는 완고(頑固)한 부(父)를 공경(恭敬)하고, 패공(沛公)은 제(帝)가 되어 대공(大公)을 배례(拜禮)하였다. 무왕(武王)은 서백(西伯)을 목상(木像)으로 만들고 정란(丁蘭)은 모(母)의 형상(形像)을 조각(彫刻)했으니 이들은 효(孝)의 모범(模範)이로다. 비간(比干)은 은(殷)나라가 망(亡)하려는 것을 보고 굳이 왕(王)을 간(諫)하다가 목을 잘렸고, 공윤(公胤)이란 자(者)는 의공(懿公)의 간(肝)을 꺼내어 자기 배를 째고 간(肝)을 넣고 죽었으니 이들은 충(忠)의 본보기이니라. 윤수(尹壽)는 요왕(堯王)의 스승이고 무성(務成)은 순왕(舜王)의 스승이며 대공망(大公望)은 문왕(文王)의 스승이요 노자(老子)는 공자(公子)의 스승이니, 이들을 사성(四聖)이라 하여 천존(天尊)이 머리를 조아리고 만민(萬民)이 합장(合掌)함이라. 이들 성인(聖人)에게 삼분(三墳)오전(五典)삼사(三史) 등(等) 삼천여권(三千餘卷)의 책이 있는데 결국(結局)은 삼현(三玄)을 벗어나지 못함이라. 삼현(三玄)이란 일(一)은 유(有)의 현(玄)주공(周公) 등(等)이 이를 세웠고, 이(二)는 무(無)의 현(玄)으로 노자(老子) 등(等)이며, 삼(三)에는 역유역무(亦有亦無) 등(等), 장자(莊子)의 현(玄)이 이것이니라. 현(玄)이란 흑(黑)이며, 부모(父母)미생(未生)이전(已前)을 밝히자면, 혹은 원기(元氣)에서 생(生)기고 혹은 귀천(貴賤)고락(苦樂)시비(是非)득실(得失) 등(等)은 모두 자연등운운(自然等云云).
이와 같이 교묘(巧妙)하게 세운다 해도 아직 과거(過去)미래(未來)를 조금도 알지 못하느니라. 현(玄)이란 흑(黑)이고 유(幽)이니 그런 고로 현(玄)이라 하며 다만 현재(現在)만을 아는 것과 같으니라. 현재(現在)에 있어서 인의(仁義)를 제정(制定)하여 일신(一身)을 지키고 나라를 편안케 하며 이에 상위(相違)하면 일족(一族)이 망(亡)하고 가문(家門)이 망한다고 하느니라. 이들 현성(賢聖)이라는 사람들은 성인(聖人)이라 하지만, 과거를 알지 못함이 범부(凡夫)가 등을 보지 못함과 같고, 미래(未來)를 조감(照鑑)하지 못함은 맹인(盲人)이 앞을 보지 못함과 같다. 다만 현재(現在)에 집을 다스리고 효(孝)를 하며 굳게 오상(五常)을 행하면 방배(傍輩)도 존경하고 이름도 나라에 떨쳐, 현왕(賢王)도 이를 불러 혹은 신하(臣下)로 삼고 혹은 스승으로 받들며 혹은 왕위(王位)를 물려 주고 천(天)도 와서 지키며 섬기이라. 소위(所謂) 주(周)의 무왕(武王)에겐 오로(五老)가 와서 섬기고 후한(後漢)의 광무(光武)에겐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와서 이십팔장(二十八將)으로 됨은 이것이니라. 그렇지만 과거(過去) 미래(未來)를 알지 못하므로, 부모(父母)주군(主君)사장(師匠)의 후생(後生)도 돕지 못하여 부지은(不知恩)의 자(者)이니 참된 현성(賢聖)이 아니로다. 공자(孔子)가 이 나라에는 현성(賢聖)이 없고 서방(西方)에 불도(佛圖)라는 분이 있으니, 이분이 성인(聖人)이라고 하여 외전(外典)을 불법(佛法)의 초문(初門)으로 함은 이 때문이니라. 예악(禮惡) 등을 가르쳐 내전(內典)이 건너 오면 계정혜(戒定慧)를 알기 쉽게 하려고, 왕신(王臣)을 가르쳐 존비(尊卑)를 정하고 부모(父母)를 가르쳐 효(孝)의 높음을 알게 하며 사장(師匠)을 가르쳐 귀의(歸依)를 알게 하였느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 가로되「불교(佛敎)의 유화(流化)는 실로 이에 의지하도다. 예악(禮惡)이 앞에 가고 진도(眞道)는 뒤에 열림」등운운(等云云). 천태(天台) 가로되「금광명경(金光明經)에 왈(曰) 일체세간소유(一切世間所有)의 선론(善論)은 모두 이 경(經)에 인(因)함, 만약 깊이 세법(世法)을 알면 즉 이는 불법(佛法)이니라」등운운(等云云). 지관(止觀)에 가로되「나는 삼성(三聖)을 보내서 저 진단(眞丹)을 화(化)하도다」등운운(等云云). 홍결(弘決)에 가로되「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에 왈(曰) 월광보살(月光菩薩)은 그 곳에서 안회(顔回)라 하고 광정보살(光淨菩薩)은 그 곳에서 중니(仲尼)라고 하며 가섭보살(迦葉菩薩)은 그 곳에서 노자(老子)라고 하리라. 천축(天竺)에서 이 진단(震丹)을 가르켜 그 곳이라 함」등운운(等云云).
이(二)에는 월지(月氏)의 외도(外道)삼목팔비(三目八臂)의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비뉴천(毘紐天)이 이천(二天)을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자부(慈父)비모(悲母)또 천존(天尊)주군(主君)이라 하고 가비라(迦毘羅)우우승거(漚樓僧佉)륵사바(勒娑婆), 이 삼인(三人)을 삼선(三仙)이라 부르며, 이들은 불전팔백년(佛前八百年)이전이후(已前後)의 선인(仙人)이니라. 이 삼선(三仙)이 설(說)한 바를 사위타(四韋陀)라고 하여 육만장(六萬臧)이 있느니라, 내지(乃至) 부처가 출세(出世)할 당시(當時) 육사(六師) 외도(外道)는 이 외경(外經)을 배우고 전(傳)하여 오천축(五天竺)의 왕(王)의 스승이 되는 지류(支流)가 구십오(九十五) 육(六) 등(等) 이나 되었느니라. 하나 하나에 유파(流派)가 많으며 아만(我慢)의 깃발이 높기는 비상천(非想天)보다도 높고 집심(執心)의 마음이 굳기란 금석(金石)보다도 더 했느니라. 그 견(見)이 깊고 교묘(巧妙)함이란 유가(儒家)는 비(比)할 바가 아니로다. 혹은 과거(過去)이생(二生)삼생(三生)내지(乃至) 칠생(七生)팔만겁(八萬劫)을 조견(照見)하고, 또한 미래(未來)팔만겁(八萬劫)을 아느니라. 그가 설(說)하는 바 법문(法門)의 극리(極理)는 혹은 인중유과(因中有果)혹은 인중무과(因中無果)혹은 인중역유과(因中亦有果)역무과(亦無果) 등운운, 이는 외도(外道)의 극리(極理)이니라. 이른바 선(善)한 외도(外道)는 오계(五戒)십선계(十善戒) 등(等)을 지키고 유루(有漏)의 선정(禪定)을 수행(修行)하여 상(上)색(色)무색(無色)을 극(極)하고 상계(上界)를 열반(涅槃)이라고 세워 굴보충(屈步忠)과 같이 힘써 올라 가지만, 비상천(非想天)에서 반대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니 한 사람도 천(天)에 머무는 자가 없느니라. 그럼에도 천(天)을 극(極)한 자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니라. 각기(各其) 자기 스승의 교의(敎義)를 받아서 굳게 집착(執着)하는 까닭에, 혹은 동한(冬寒)에 하루 세 번항하(恒河)에 목욕하고 혹은 머리를 뽑고, 혹은 바위에 몸을 던지고 혹은 몸을 불에 태우고, 혹은 오처(五處)를 지지고, 혹은 전라(全裸), 혹은 말을 많이 죽이면 복(福)받고 혹은 초목(草木)을 태우고, 혹은 모든 나무를 예배(禮拜)하니 이들 사의(邪義)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고 스승을 공경(恭敬)함은제천(諸天)이 제석(帝釋)을 받들고 제신(諸臣)이 황제(皇帝)를 예배(禮拜)함과 같으리라. 그러나 외도(外道)의 법(法)구십오종(九十五種)은 선(善)이건 악(惡)이건 한 사람도 생사(生死)를 떠나지 못하니 선사(先師)를 섬기면 이생(二生)삼생(三生) 등(等)에 악도(惡道)에 떨어지고 악사(惡師)를 섬기면 순차생(順次生)에 악도(惡道)에 떨어지느니라. 외도(外道)의 설(說)은 내도(內道)에 들어가는 최요(最要)이니라. 어느 외도(外道) 가로되「천년이후(千年已後)부처가 출세(出世)함」등운운(等云云), 어느 외도(外道) 가로되 「백년이후(百年已後)부처가 출세(出世)함」등운운(等云云), 대열반경(大涅槃經)에 가로되「일체세간(一切世間)의 외도(外道)의 경서(經書)는 모두 이는 불설(佛說)이며 외도(外道)의 설(說)이 아니로다」등운운(等云云),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 「중(衆)에게 삼독(三毒)이 있음을 보이고 또 사견(邪見)의 상(相)을 나타내느니 나의 제자(弟子)(弟子)는 이와 같이 방편(方便)으로써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느니라」등운운(等云云).
삼(三)에는 대각세존(世尊)(大覺世尊)은 이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대도사(大導師)대안목(大眼目)대교량(大橋梁)대선사(大船師)대복전(大福田) 등(等)이니라. 외전(外典)외도(外道)의 사성(四聖)삼선(三仙)은 그 이름은 성(聖)이라 하지만 실(實)에 있어서는 삼혹미단(三惑未斷)의 범부(凡夫)이고 그 이름은 현(賢)이라 하여도 실(實)은 인과(因果)를 분별하지 못함이 영아(嬰兒)와 같으니라. 그를 배로 삼아서 생사(生死)의 대해(大海)를 건널 수 있겠느뇨, 그를 교량(橋梁)삼아 육도(六道)의 길을 넘기 어렵도다. 우리의 대사(大師)는 변역(變易)도 건너셨으니 하물며 분단(分段)의 생사(生死)에 있어서랴,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의 근본(根本)도 없애셨으니 하물며 견사지엽(見思枝葉)의 추혹(麤惑)에 있어서랴, 이 불타(佛陀)(佛陀)는 삼십성도이래(三十成道以來) 팔십(八十)에 입멸(入滅)하시기 까지 오십년간(五十年間)일대(一代)의 성교(聖敎)를 설(說)하셨는데, 일자일구(一字一句) 모두 진언(眞言)이며 일문일게(一文一偈)도 망어(妄語)가 아니로다. 외전(外典) 외도중(外道中)의 성현(聖賢)의 말조차 말한 것이 틀림없어 사실(事實)과 마음이 서로 부합(符合)하였거늘 하물며 불타(佛陀)(佛陀)는 무량(無量)광겁(無量曠劫)이래의 불망어(不妄語)의 사람이로다. 그러므로 일대(一代)오십여년(五十餘年)의 설교(說敎)는 외전외도(外典外道)에 비(比)하면 대승(大乘)이고 대인(大人)의 실어(實語)이니라. 초성도(初成道)의 처음부터 이원(泥洹)의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 설(說)하신 바의 소설(所說)은 모두가 진실(眞實)이니라.
단(但) 불교(佛敎)에 들어 와서 오십여년(五十餘年)의 경(經)들, 팔만법장(八萬法臧)을 생각 하건대 소승(小乘) 대승(大乘)이 있고 권경(權經)실경(實經)이 있으며, 현교(顯敎)밀교(密敎)연어(輭語)추어(麤語)실어(實語)망어(妄語)정견(正見)사견(邪見) 등(等) 여러 가지 차별(差別)이 있느니라. 단(但) 법화경(法華經)만이 교주석존(敎主釋尊)의 정언(正言)이고 삼세(三世)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의 진언(眞言)이니라. 대각세존(世尊)(大覺世尊)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연한(年限)을 가리켜서 그 동안의 항하(恒河)같은 제경(諸經)을 미현진실(微顯眞實)팔년(八年)의 법화(法華)는 요당설진실(要當說眞實)이라고 정(定)하시자 다보불(多寶佛)은 대지(大地)로부터 출현(出現)하여 개시진실(皆是眞實)이라고 증명(證明)하였고, 분신(分身)의 제불(諸佛)은 내집(來集)하여 장설(長舌)을 범천(梵天)에 닿게 하니 이 말은 혁혁(赫赫)하고 명명(明明)하여 청천(晴天)의 해보다도 밝고 밤중의 만월(滿月)과 같으니라. 우러러 믿을 것이며 엎드려 생각할지어다.
단(但) 이 경(經)에 두 개의 대사(大事)가 있는데 구사종(俱舍宗)성실종(成實宗)율종(律宗)법상종(法相宗)삼론종(三論宗) 등(等)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며 화엄종(華嚴宗)과 진언종(眞言宗)의 이종(二宗)은 은밀히 훔쳐서 자종(自宗)의 골목(骨目)으로 하였느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은 단(但) 법화경(法華經)의 본문(本門)수량품(壽量品)의 문저(文底)에 잠겨 있느니라. 용수(龍樹)천친(天親)은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집어 내지 않았으며, 다만 우리의 천태지자(天台智者)만이 이것을 마음에 품었느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은 십계호구(十界互具)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법상(法相)과 삼론(三論)은 팔계(八界)를 세우고 십계(十界)을 알지 못하니 하물며 호구(互具)를 알 수 있으리오. 구사(俱舍)성실(成實)율종(律宗) 등(等)은 아함경(阿含經)에 의(依)하니 육계(六界)를 밝히되 사계(四界)를 알지 못하며, 시방유유일불(十方唯有一佛)이라 하여 일방유불(一方有佛)조차도 밝히지 않느니라. 일체유정(一切有情)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는 설(說)하지 않았으니 한 사람의 불성(佛性)조차도 허락하지 않느니라. 그러하거늘 율종(律宗)성실종(成實宗) 등(等)이 시방(十方)유(有)불(佛)유(有)불성(佛性)이라는 등(等) 말함은 불멸(佛滅)후(後)의 인사(人師)들이 대승(大乘)의 의(義)를 자종(自宗)에 훔쳐 넣은 것이니라. 예(例)컨대 외전(外典)외도(外道) 등(等)은 집견(執見)이 얕으나 불후(佛後)의 외도(外道)는 불교(佛敎)를 듣고 보아 자종(自宗)의 허물을 알고 교묘(巧妙)한 마음이 생겨서 불교(佛敎)를 훔쳐 자종(自宗)에 넣었으니 사견(邪見)이 가장 깊으며, 부불교(附佛敎)학불법성(學佛法成) 등(等)이 이것이니라. 외전(外典)도 또한 이와 같으니 한토(漢土)에 아직 불법(佛法)이 건너 가지 않았을 때의 유가(儒家)도가(道家)는 유유(悠悠)하고 영아(嬰兒)와 같이 어리석었으나, 후한(後漢) 이후에 석교(釋敎)가 건너 가서 대론(對論)한 다음 석교(釋敎)가 점차 유포(流布)되어 감에 따라 석교(釋敎)의 승려(僧侶)가 파계(破戒)때문에 혹은 환속(還俗)하여 집에 돌아가고 혹은 속(俗)과 마음이 맞아서 유도(儒道)안에 석교(釋敎)를 훔쳐 넣었느니라. 지관(止觀)의 제오(第五)에 가로되 「금세(今世)에 많은 악마(惡魔)의 비구(比丘)가 있어서 계(戒)를 버리고 집에 돌아가서 구책(驅策)을 두려워 하여 다시 도사(道士)로 되돌아 가도다. 또한 명리(名利)를 구(求)하여 장노(莊老)를 과담(誇談)하고 불법(佛法)의 의(義)를 훔쳐서 사전(邪典)에 붙이며, 높은 것을 밀어 낮음에 붙이고 존(尊)을 부숴서 비(卑)에 넣어 고르게 하여 평등(平等)케 함」운운(云云). 홍(弘)에 가로되 「비구(比丘)의 몸이 되어 불법(佛法)을 파멸(破滅)한다. 혹은 계(戒)를 버리고 집에 돌아감은 위(衛)의 원숭(元嵩) 등(等)과 같으며, 즉(卽) 재가(在家)의 몸으로 불법(佛法)을 파괴(破壞)하니 이 사람은 정교(正敎)를 투절(偸竊)해서 사전(邪典)에 조첨(助添)하였느니라, 압고(押高) 등(等)이란 도사(道士)의 마음을 가지고 이교(二敎)의 개요(槪要)라 하여 사정(邪正)을 동등(同等)케 하는 의(義)는 이(理)가 없느니라. 일찌기 불법(佛法)에 들어 와서 정(正)을 훔쳐 사(邪)를 돕고, 팔만십이(八萬十二)라는 높음을 밀어서 오천이편(五千二篇)의 낮음에 붙여 가지고 그 전(典)의 사비(邪鄙)로운 가르침을 석(釋)함을 최존입비(摧尊入卑)라고 이름함」등운운(等云云). 이 석(釋)을 보라, 앞의 글의 뜻이니라.
불교(佛敎) 또한 그와 같도다. 후한(後漢)의 영평(永平)때 한토(漢土)에 불법(佛法)이 건너가서 사전(邪典)이 타파(打破)되고, 내전(內典)이 섰느니라. 내전(內典)에 남삼(南三)북칠(北七)의 이집(異執)이 일어나서 난국(蘭菊)이었으나 진수(陳隋)의 지자대사(智者大師)에게 타파(打破)되어 불법(佛法)이 재차(再次) 군류(君類)를 구(救)하였다. 그후 법상종(法相宗)진언종(眞言宗)이 천축(天竺)으로부터 건너갔고 화엄종(華嚴宗)도 출래(出來)하였느니라. 이들 종(宗)가운데 법상종(法相宗)은 오로지 천태종(天台宗)에 적대(敵對)하는 종(宗)으로 법문(法門)은 수화(水火)와 같으니라. 그러나 현장삼장(玄奘三臧)자은대사(慈恩大師)는 위세(委細)히 천태(天台)의 석(釋)을 보고서 자종(自宗)의 사견(邪見)을 갑자기 바꾸었었는지 자종(自宗)을 버리는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은 천태(天台)에 귀복(歸伏)하였다고 보였느니라. 화엄종(華嚴宗)과 진언종(眞言宗)은 본래는 권경(權經)권종(權宗)인데 선무외삼장(善無畏三臧)금강지삼장(金剛智三臧)은 천태(天台)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의(義)를 훔쳐서 자종(自宗)의 간심(肝心)으로 하고, 게다가 인(因)과 진언(眞言)을 보태서 초과(超過)한다는 마음을 일으켰느니라. 그러한 연유(緣由)를 모르는 학자(學者)들은 천축(天竺)에서부터 대일경(大日經)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이 있었다고 생각해 버렸으며, 화엄종(華嚴宗)은 징관(澄觀)의 때에 화엄경(華嚴經)의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라는 글에 천태(天台)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을 훔쳐 넣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일본(日本)아조(我朝)에는 화엄(華嚴) 등(等)의 육종(六宗)이 천태(天台)진언(眞言) 이전(已前)에 건너왔으며, 화엄(華嚴)삼론(三論)법상(法相)의 쟁론(諍論)이 수화(水火)였느니라.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이 나라에 출현하여 육종(六宗)의 사견(邪見)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진언종(眞言宗)이 천태(天台)의 법화경(法華經)의 이(理)를 훔쳐서 자종(自宗)의 극(極)으로 한 것이 탄로되어 버렸느니라. 전교대사(傳敎大師)가 각종(各宗)의 인사(人師)의 이집(異執)을 버리고 오로지 경문(經文)을 우선으로 하여 책(責)하셨으므로 육종(六宗)의 고덕(高德)팔인(八人)이십인(二十人)사십인(四十人)삼백여인(三百餘人)과 아울러 고보대사(弘法大師) 등(等)은 굴복(屈伏)당하여 일본국(日本國)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천태종(天台宗)에 귀복(歸伏)하니, 남도(南都)도사(東寺)일본일주(日本一州)의 산사(山寺)가 모두 에이산(叡山)의 말사(末寺)로 되었노라. 또 한토(漢土)의 제종(諸宗)의 원조(元祖)가 천태(天台)에 귀복(歸伏)하여 방법(謗法)의 죄(罪)를 면(免)하였음도 드러났느니라. 또 그 후(後)에 점점 세상이 쇠퇴(衰退)하자, 사람의 지혜(智慧)도 얕아짐에 따라 천태(天台)의 심의(深義)는 배우는 사람이 없어져 버리고 타종(他宗)의 집심(執心)은 강성(强盛)해지니 점점 육종(六宗)칠종(七宗)에게 천태종(天台宗)이 책(策)함을 당하여 약(弱)해져 가는 고로 결국은 천태종(天台宗)의 석덕(碩德)이라고 숭앙(崇仰)받던 사람들도 모두 꺾여서 그 사종(邪宗)을 돕느니라. 그러는 동안 육종(六宗)팔종(八宗)의 논밭소령(所嶺)은 다 쓰러지고 정법(正法)은 멸절(滅絶)되니 천조태신(天照太神)정팔번(正八幡)산왕(山王) 등(等) 모든 수호(守護)의 제대선신(諸大善神)도 법미(法味)를 맛보지 못하여 나라안에서 떠나 버리신 까닭으로 악귀(惡鬼)가 기회를 타서 나라는 이미 망(亡)하려 하느니라.
이에 내가 우견(愚見)을 가지고 전사십여년(前四十餘年)과 후팔년(後八年)과의 상위(相違)를 생각해 보건대 그 상위(相違)는 많다고 하겠지만 우선 세간(世間)의 학자(學者)도 인정(認定)하고 나 자신(自身)도 그러하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승작불(二乘作佛)과 구원실성(久遠實成)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현문(現文)을 배견(拜見)하건대 사리불(舍利佛)은 화광여래(華光如來)가섭(迦葉)은 광명여래(光明如來)수보리(須菩提)는 명상여래(名相如來)가전연(迦旃延)은 염부나제금광여래(閻浮那提金光如來)목련(目蓮)은 다마라발전단향불(多摩羅跋栴檀香佛)부루나(富樓那)는 법명여래(法明如來)아난(阿難)은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나후라(羅睺羅)는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오백칠백(五百七百)은 보명여래(普明如來)학무학(學無學) 이천인(二千人)은 보상여래(寶相如來)마하파사파제비구니(摩訶波闍波提比丘尼)야수다라비구니(耶輸多羅比丘尼) 등(等)은 일체중생(一切衆生) 희견여래(喜見如來)구족천만광상여래(具足千萬光相如來) 등(等)이니라. 이러한 사람들은 법화경(法華經)을 배견(拜見)하면 존귀(尊貴)한 듯하지만 이전(爾前)의 경(經)들을 피견(披見)할 때는 실망(失望)할만한 일들이 많으니라. 그 까닭은 불세존(佛世尊)은 실어(實語)의 사람이로다. 고(故)로 성인(聖人)대인(大人)이라고 부르느니라. 외전(外典)외도중(外道中)의 현인(賢人)성인(聖人)천선(天仙)이니 함은 실어(實語)에 붙인 이름인데 이 사람들 보다 뛰어나게 제일(第一)인 고(故)로 세존(世尊)을 대인(大人)이라고 부르느리라. 이 대인(大人)은 「유이일대사인연고(唯以一大事因緣故)출현어세(出現於世)」라고 말씀하시고 「아직 진실(眞實)을 나타내지 않았노라. 세존(世尊)은 법(法)을 오랫동안 설(說)한 후에 반드시 응당(應當) 진실(眞實)을 설(說)하느니라. 정직(正直)히 방편(方便)을 버리고」등운운(等云云), 다보불(多寶佛)이 증명(證明)하시고 분신(分身)은 혀를 내미는 등(等) 하였으니, 사리불(舍利佛)이 미래(未來)의 화광여래(華光如來)이고 가섭(迦葉)이 광명여래(光明如來) 등(等)이 된다는 설(說)을 어느 누가 의망(疑網)을 할것이뇨.
그렇지만 이전(爾前)의 제경(諸經)도 역시 불타(佛陀)의 실어(實語)이니라,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가로되「여래(如來)의 지혜(知慧)대약왕수(大藥王樹)는 오직 이처(二處)에 있어서 생장(生長)하여 이익(利益)을 할 수가 없느니라. 소위(所謂) 이승(二乘)의 무위광대(無爲廣大)의 심갱(深坑)에 떨어짐과 또 선근(善根)을 깨뜨리는 비기(非器)의 중생(衆生)은 대사견(大邪見)탐애(貪愛)의 물에 빠지는 것이니라」등운운(等云云). 이 경문(經文)의 뜻은 설산(雪山)에 대수(大樹)가 있어서 무진근(無盡根)이라고 이름하여 이것을 대약왕수(大藥王樹)라고 부른다. 염부제(閻浮提)의 제목(諸木)중의 대왕(大王)이며, 이 나무의 높이는 십육만팔천유순(十六萬八千由旬)이니라. 일염부제(一閻浮提)의 일체(一切)의 초목(草木)은 이 나무의 뿌리내림이고 지엽(枝葉)화과(華果)의 여하에 따라서 화과(華果)가 생기느니라. 이 나무를 부처의 불성(佛性)에 비유(譬喩)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일체(一切)의 초목(草木)에 비유함이라. 단(但) 이 대수(大樹)는 화갱(火坑)과 수륜(水輪)속에는 생장(生長)하지 않느니라. 이승(二乘)의 심중(心中)을 화갱(火坑)에 비유하고 일천제인(一闡提人)의 심중(心中)을 수륜(水輪)에 비유하였느니라. 이 이류(二類)는 영구(永久)히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경문(經文)이로다. 대집경(大集經)에 가로되 「이종(二種)의 사람이 있는데 반드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니, 필경(畢竟)은 은혜(恩惠)를 알지도 은혜를 갚지도 못하느니라. 일(一)에는 성문(聲聞)이요, 이(二)에는 연각(緣覺)이로다. 비유컨대 사람이 있으되 심갱(深坑)에 빠져 버리면 이 사람은 자신을 이(利)롭게 하거나 타(他)는 이(利)롭게 할 수가 없듯이, 성문(聲聞)연각(緣覺)도 또한 이와 같으니, 해탈(解脫)이란 구덩이에 빠져 자신을 이(利)롭게 하거나 타(他)를 이(利)롭게 하지 못함」등운운(等云云). 외전(外典)삼천여권(三千餘卷)의 근본(根本)에 둘이 있으니, 이른바 효(孝)와 충(忠)인데 충(忠)이라 함도 효(孝)의 집에서 나왔느니라. 효(孝)라 함은 고(高)이며 하늘이 높다해도 효(孝)보다는 높지 않고, 또 효(孝)란 후(厚)인데 땅이 두껍다 해도 효(孝)보다는 두껍지 않도다, 성현(聖賢)의 이류(二類)는 효(孝)의 집에서 나왔는데 하물며 불법(佛法)을 배우는 사람이 지은보은(知恩報恩)이 없을소냐. 불제자(佛弟子)는 반드시 사은(四恩)을 알고 지은보은(知恩報恩)을 해야 할지니라. 더구나 사리불(舍利佛)가섭(迦葉) 등의 이승(二乘)은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 삼천(三千)의 위의(威儀)를 다 갖추고 미(味)정(淨)무루(無漏)의 삼정려(三靜慮)아함경(阿含經)을 다 깨닫고 삼계(三界)의 견사(見思)를 멸진(滅盡)하였으니 지은보은(知恩報恩)하는 사람의 모범이로다. 그런데 부지은(不知恩)의 사람이라고 세존(世尊)은 정(定)하셨노라. 그 까닭은 부모(父母)의 집을 나와서 출가(出家)의 몸으로 됨은 반드시 부모(父母)를 구(救)하기 위함이니라. 이승(二乘)은 자신(自身)은 해탈(解脫)이라고 생각 하지만 이타(利他)의 행(行)이 없으니 가령 분분(分分)의 이타(利他)는 있을지라도 부모등(父母等)을 영불성불(永不成佛)의 길로 들어가게 하므로 도리어 부지은(不知恩)의 자(者)가 되느니라.
유마경(維摩經)에 가로되 「유마힐(維摩詰)이 또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묻되 무엇으로서 여래(如來)의 종(種)으로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일체진로(一切塵勞)의 사람들은 여래(如來)의 종(種)으로 됨. 오무간(五無間)으로써 갖추었다 해도 역시 능(能)히 이 대도의(大道意)를 일으키다」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비유컨대 족성(族性)의 자(子), 고원육토(高原陸土)에는 청련부용(靑蓮芙蓉)이 형화(衡華)를 생(生)하지 않으나 비습오전(卑濕汚田)에는 이 꽃이 생(生)함과 같도다」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 「이미 아라한(阿羅漢)을 득(得)하여 응진(應進)이 된 자(者)는 종내(終乃) 다시 도의(道意)를 일으켜 불법(佛法)을 갖출 수가 없느니라. 근패(根敗)된 사람은 그 오락(五樂)에 있어서 또 이(利)롭게 하지 못함과 같음」등운운(等云云), 문(文)의 뜻은 탐(貪)진(瞋)치(癡) 등(等)의 삼독(三毒)은 불종(佛種)이 되고 살부(殺父) 등(等)의 오역죄(五逆罪)는 불종(佛種)이 되며 고원육토(高原陸土)에는 청연화(靑蓮華)가 생(生)할지라도 이승(二乘)은 부처가 되지 않느니라. 이르는 뜻은 이승(二乘)의 제선(諸善)과 범부(凡夫)의 악(惡)과 상대(相對)하건대 범부(凡夫)의 악(惡)은 부처가 될지라도 이승(二乘)의 선(善)은 부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니라. 모든 소승경(小乘經)에는 악(惡)을 훈계하고 선(善)을 칭찬하지만 이 경(經)에서는 이승(二乘)의 선(善)을 비방(誹謗)하고 범부(凡夫)의 악(惡)을 칭찬했으니, 도리어 불경(佛經)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으며 외도(外道)의 법문(法門)같지만 결국은 이승(二乘)의 영불성불(永不成佛)을 강하게 정(定)하신 것이니라, 방등다라니경(方等陀羅尼經)에 가로되 「문수(文殊)가 사리불(舍利佛)에게 말하되 또한 고수(枯樹)가 또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느뇨 없느뇨, 또 산수(山水)가 본처(本處)에 돌아가느뇨 어떠뇨, 절석(折石)이 도로 합치느뇨, 어떠뇨, 초종(焦種)이 싹이 트느뇨 어떠뇨, 사리불(舍利佛)이 가로되 아니외다, 문수(文殊) 가로되 만약 득(得)하지 못할진대 어찌 나에게 보리(菩提)의 기(記)를 얻는가를 마음에 환희(歡喜)를 일으키느뇨」등운운(等云云), 문(文)의 심(心)은 고목(枯木)은 꽃이 피지 않고 산수(山水)는 산(山)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깨진 돌은 합하지 않으며 볶은 종자는 싹이 트지 않으니 이승(二乘) 또한 이와 같아서 불종(佛種)을 볶았다고 함이니라.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 가로되 「모든 천자(天子)여, 아직도 삼보리심(三菩提心)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일으킬지니라. 만약 성문(聲聞)의 정위(正位)에 들어가면 이 사람은 능(能)히 삼보리심(三菩提心)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까닭인즉 생사(生死)로 위하여 장격(障隔)을 하는고로」등운운(等云云), 글의 뜻은 이승(二乘)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내가 수희(隨喜)하지 않으며, 제천(諸天)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므로 내가 수희(隨喜)하노라. 수릉엄경(首楞嚴經)에 가로되 「오역죄(五逆罪)의 사람이 이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를 듣고 아뇩보리심(阿耨菩提心)을 일으키면 도리어 부처가 될 수 있느니라. 세존(世尊)이여, 누진(漏盡)의 아라한(阿羅漢)은 마치 파기(破器)와 같아 영구(永久)히 이 삼매(三昧)를 받을 수 없음이라」등운운(等云云), 정명경(淨名經)에 가로되 「그대들에게 보시(布施)하는 자(者)는 복전(福田)이라 이름하지 않노라. 그대를 공양(供養)하는 자(者)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짐」등운운(等云云), 글의 뜻은 가섭(迦葉)사리불(舍利佛) 등(等)의 성승(聖僧)을 공양(供養)하는 인천(人天) 등(等)은 반드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고 함이니라. 이들 성승(聖僧)은 불타(佛陀)는 제외하고는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이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도사(導師)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많은 인천(人天)대회(大會) 중에서 이렇게 여러번 말씀하심은 본의(本意) 아닌 일이니 오직 결국은 자기(自己) 제자(弟子)를 책(責)하여 죽이려는 것일까, 이 밖에 우려(牛驢)의 이유(二乳)와기(瓦器)금기(金器)반딧불일광(日光) 등(等)의 무량(無量)한 비유(譬喩)를 가지고 이승(二乘)을 가책(呵嘖)하셨느니라. 일언이언(一言二言)이 아니고 일일이일(一日二日)이 아니며, 일월이월(一月二月)이 아니고 일년이년(一年二年)이 아니며, 일경이경(一經二經)이 아니로다. 사십여년(四十餘年)동안 무량(無量)무변(無變)한 제경(諸經)에 무량(無量)한 대회(大會)의 제인(諸人)에 대하여 일언(一言)도 용서하심 없이 비방(誹謗)하시니 세존(世尊)은 불망어(不妄語)라고 나도 알고 남도 알며 천(天)도 알고 지(地)도 알았다. 일인이인(一人二人)이 아니라 백천만인(百千萬人)삼계(三界)의 제천(諸天)용신(龍神)아수라(阿修羅)오천(五天)사주(四洲)육욕(六欲)색(色)무색(無色)시방세계(十方世界)로부터 구름처럼 모여 온 인천(人天)이승(二乘)대보살(大菩薩) 등(等)은 모두 이것을 알고 또 모두 이것을 들었으므로 각기(各其) 자기 국토(國土)에 돌아가서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석존(釋尊)의 설법(說法)을 제각기의 나라들에서 일일(一一)이 말하였을 것이니 시방무변(十方無變)의 세계(世界)의 일체중생(一切衆生)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섭(迦葉)사리불(舍利佛) 등(等)은 영불성불(永不成佛)의 자(者)이므로 공양(供養)을 하면 나쁘다는 것을 알았느니라.
그런데 후팔년(後八年)의 법화경(法華經)에서 갑자기 이를 바꾸어 이승작불(二乘作佛)하리라고 불타(佛陀)가 설(說)하셨으니 인천대회(人天大會)의 사람들이 신앙(信仰)을 할 것이뇨. 믿지 않을뿐더러 선후(先後)의 경(經)들에 의망(疑網)을 일으켜 오십여년(五十餘年)의 설교(說敎)가 모두 허망(虛妄)의 설(說)이 되리라, 그러므로 사십여년(四十餘年)미현진실(微顯眞實) 등(等)이란 경문(經文)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뇨. 천마(天魔)가 불타(佛陀)로 나타나서 후팔년(後八年)의 경(經)을 설(說)한 것인가고 의심(疑心)하던 차에 참으로 진실(眞實)인 듯이 겁국(劫國)명호(名號)라고 하여 이승작불(二乘作佛)의 나라를 정(定)하고 겁(劫)을 나타내며 소화(所化)의 제자(弟子) 등을 정(定)하셨으므로 교주석존(敎主釋尊)의 말씀은 이미 이언(二言)이 되었으니 자어상위(自語相違)라 함은 이것이며, 외도(外道)가 불타(佛陀)를 대망어(大妄語)의 사람이라고 비웃는 것은 이 때문이니라. 인천대회(人天大會)는 흥(興)이 깨져서 실망(失望)하고 있는데, 그 때에 동방(東方)보정세계(寶淨世界)의 다보여래(多寶如來)가 높이 오백유순(五百由旬)넓이 이백오십유순(二百五十由旬)의 대칠보탑(大七寶塔)에 타고 교주석존(敎主釋尊)이 인천(人天)대회(大會)에서 자어상위(自語相違)에 대하여 책(責)함을 당하자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셨지만 불심(不審)이 그래도 풀리라고는 보이지 않아 주체하지 못할 때 불전(佛前)에 대지(大地)로부터 용현(涌現)하여 허공(虛空)에 떠오르시었다. 예(例)컨대 암야(暗夜)에 만월(滿月)이 동산(東山)으로부터 떠오름과 같으니라. 칠보(七寶)의 탑(塔)이 허공(虛空)에 걸리시어 대지(大地)에도 붙지 않고 허공(虛空)에도 붙지 않으시며 천중(天中)에 걸려 보탑(寶塔)안에서 범음성(梵音聲)을 내어 증명(證明)하여 가로되 「그 때에 보탑(寶塔)안으로부터 대음성(大音聲)을 내어 찬탄(讚歎)하여 가로되, 선재(善哉) 선재(善哉)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능(能)히 평등대혜(平等大慧)교보살법(敎菩薩法)불소호념(佛所護念)의 묘법화경(妙法華經)을 가지고 대중(大衆)을 위하여 설(說)하심이 이와 같도다, 이와 같도다.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의 소설(所說)은 그대로 모두 이는 진실(眞實)이니라」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 「이 때에 세존(世尊)은 문수사리(文殊師利) 등(等)의 무량백천만억(無量百千萬億)인 구주사바세계(舊住娑婆世界)의 보살(菩薩)내지(乃至) 인비인등(人非人等) 일체(一切)의 대중(大衆)앞에서 대신력(大信力)을 나타내시도다. 광장설(廣長舌)을 내밀어 상범세(上梵世)에 이르게 하고 일체(一切)의 모공(毛孔)으로부터 내지(乃至)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보수하(寶樹下)의 사자(師子)의 좌(座)위의 제불(諸佛)도 또한 이와 같이 광장설(廣長舌)을 내밀고 무량(無量)의 광(光)을 내심이라」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 「시방(十方)에서 오신 모든 분신(分身)의 부처로 하여금 각본토(各本土)에 돌아 가게 하고 내지(乃至) 다보불(多寶佛)의 탑(塔)도 돌아 가서 다시 본디와 같게 하심이라」등운운(等云云), 대각세존(大覺世尊)이 초성도(初成道)의 때는 제불(諸佛)이 시방(十方)에 나타나서 석존(釋尊)을 위유(慰諭)하여 드린데다가 여러 대보살(大菩薩)을 보냈었다. 반야경(般若經)의 때는 석존(釋尊)이 장설(長舌)을 가지고 삼천(三千)을 덮었고 천불(千佛)이 시방(十方)에 나타나셨으며, 금광명경(金光明經)에는 사방(四方)의 사불(四佛)이 나타났느니라.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육방(六方)의 제불(諸佛)이 혀를 가지고 삼천(三千)을 덮었으며, 대집경(大集經)에는 시방(十方)의 제불(諸佛)과 보살(菩薩)이 대보방(大寶坊)에 모였느니라. 이러한 일들을 법화경(法華經)과 견주어서 생각해 보건대 황석(黃石)과 황금(黃金), 백운(白雲)과 백산(白山), 백빙(白氷)과 은경(銀鏡), 흑색(黑色)과 청색(靑色)과를 예안(翳眼)의 자(者)묘목(眇目)의 자(者)일안(一眼)의 자(者)와 사안(邪眼)의 자(者)는 그릇되게 보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는 선후(先後)의 경(經)이 없으므로 불어(佛語)에 상위(相違)가 없었으니 무엇에 의하여 커다한 의심(疑心)이 생길것이뇨. 대집경(大集經)대품경(大品經)금광명경(金光明經)아미타경(阿彌陀經) 등(等)은 제소승경(諸小乘經)의 이승(二乘)을 탄가(彈呵)하기 위하여 시방(十方)에 정토(淨土)가 있음을 설(說)하고 범부(凡夫)와 보살(菩薩)을 흔모(欣慕)케 하며, 이승(二乘)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로다. 소승경(小乘經)과 제대승경(諸大乘經)과는 일분(一分)의 상위(相違)가 있으므로 혹은 시방(十方)에 부처가 나타나시고, 혹은 시방(十方)으로부터 대보살(大菩薩)을 보내고 혹은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도 이 경(經)을 설(說)하는 연유(緣由)를 가리키고 혹은 시방(十方)으로부터 제불(諸佛)이 모이시며 혹은 석존(釋尊)이 혀를 가지고 삼??三千)을 덮고 혹은 제불(諸佛)?br> ?혀를 내미는 연유(緣由)를 설(說)하심이라. 이는 오로지 여러 소승경(小乘經)에서 시방세계(十方世界)유유일불(唯有一佛)이라고 설(說)하?그 마음가짐을 타파(打破)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법화경(法華經)와 같이 선후(先後)의 여러 대승경(大乘經)과 상위(相違)가 나타나서 사리불(舍利佛) 등(等)의 모든 성문(聲聞)과 대보살(大菩薩)인천(人天) 등(等)이 장비마작불(將非魔作佛)이라고 생각할만한 대사(大事)는 아니니라. 그러함에도 화엄(華嚴)법상(法相)삼론(三論)진언(眞言)염불(念佛) 등의 예안(翳眼)의 무리들이 그러한 경(經)들과 법화경(法華經)과는 같다고 생각해 버림은 어리석은 눈이니라.
그러나 재세(在世)에는 사십여년(四十餘年)을 버리고 법화경(法華經)에 붙은 자(者)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불멸후(佛滅後)에 이 경문(經文)을 개견(開見)하고 신수(信受)하기란 어려우니라. 우선 첫째는 이전(爾前)의 경(經)들은 다언(多言)이고 법화경(法華經)은 일언(一言)이며, 이전(爾前)의 경(經)들은 다경(多經)이지만 이 경(經)은 일경(一經)이로다. 그러한 경(經)들은 다년(多年)이고 이 경(經)은 팔년(八年)이니라. 부처는 대망어(大妄語)의 사람이니 영원(永遠)히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을 굳이 믿으려 한다면 이전(爾前)의 경(經)들은 믿은 일도 있겠으나 법화경(法華經)은 영원(永遠)히 믿지 못하리라. 당세(當世)에도 법화경(法華經)을 모두 믿는 것 같지만 법화경(法華經)은 아니로다. 그 까닭은 법화경(法華經)과 대일경(大日經), 법화경(法華經)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과 아미타경(阿彌陀經)과를 동일(同一)하다고 설(說)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귀의(歸依)하고 각각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 가령 믿는다 할지라도 본의(本意)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느니라.
니치렌(日蓮)이 가로되 일본(日本)에 불법(佛法)이 건너온지 이미 칠백여년(七百餘年)인데 단(但) 전교대사(傳敎大師) 일인(一人)만이 법화경(法華經)을 읽었다고 말함을 모든 사람이 이를 믿지 않느니라. 그런데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 「만약 수미(須彌)를 들어서 타방(他方)의 무수(無數)한 불토(佛土)에 던져 놓은 것도 아직 이는 어렵지 않노라, 내지(乃至) 만약 불멸후(佛滅後)에 악세중(惡世中)에 있어서 능(能)히 이 경(經)을 설(說)함은 이는 즉 어려우니라」등운운(等云云), 日蓮의 강의(强義)가 경문(經文)에 보합(普合)했노라. 법화경(法華經)의 유통분(流通分)인 열반경(涅槃經)에 말대악세(末代惡世)에 방법(謗法)의 자(者)는 시방(十方)의 흙과 같고 정법(正法)의 자(者)는 조상(爪上)의 흙과 같다고 설(說)해졌음은 어찌 할 것이뇨, 일본(日本)의 제인(諸人)은 조상(爪上)의 흙이고 日蓮은 시방(十方)의 흙인가 깊이 깊이 생각할지니라, 현왕(賢王)의 세상에는 도리(道理)가 이기고 우왕(愚王)의 세상에는 비도(非道)가 우선(優先)함이라. 성인(聖人)의 세상에 법화경(法華經)의 실의(實義)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이 법문(法門)은 적문(迹門)과 이전(爾前)을 상대(相對)하여 이전(爾前)이 강(强)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만약 이전(爾前)이 강(强)하다면 사리불(舍利佛) 등(等)의 모든 이승(二乘)은 영불성불(永不成佛)의 자(者)가 되리리 얼마나 한탄(恨歎)할 것이뇨.
둘째는 교주석존(敎主釋尊)은 주겁(住劫)제구(第九)의 감(減)인수백세(人壽百歲)의 때, 사자협왕(師子頰王)에게는 손자(孫子)이고 정반왕(淨飯王)에게는 적자(嫡子)인 동자실달태자(童子悉達太子)일체의성취보살(一切義成就菩薩)이니라. 십구세(十九歲)에 출가(出家)하여 삼십(三十)에 성도(成道)한 세존(世尊)은 처음에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실보화왕(實報華王)의 의식(儀式)을 시현(示現)하시어 십현(十玄)육상(六相)법계원융(法界圓融)돈극미묘(頓極微妙)의 대법(大法)을 설(說)하시자 시방(十方)의 제불(諸佛)도 현현(顯現)하고 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 운집(雲集)하였느니라. 토(土)로 보나 기(機)로 보나 제불(諸佛)이나 시초(始初)라는 점에서나 어떤 일에 있어서는 대법(大法)을 숨기시겠는가. 그러므로 경문(經文)에는 현현자재력(顯現自在力)연설원만경(演說圓滿經) 등운운(等云云), 일부(一部) 육십권(六十卷)은 일자일점(一字一點)도 빠집없이 원만경(圓滿經)이니라. 비유(譬喩)컨대 여의보주(如意寶珠)는 일주(一珠)도 무량주(無量珠)도 꼭 같도다. 일주(一珠)도 만보(萬寶)를 다 내리고 만무(萬珠)도 만보(萬寶)를 다 함과 같으니라. 화엄경(華嚴經)은 일자(一字)도 만자(萬字)도 오직 같은 것이로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라는 글은 화엄종(華嚴宗)의 간심(肝心)일뿐더러 법상(法相)삼론(三論)진언(眞言)천태(天台)의 간요(肝要)라 하고 있으니, 이 만큼 훌륭하신 경(經)에 무슨 일인들 숨기시겠느뇨. 하지만 이승천제(二乘闡提)는 불성불(不成佛)이라고 설(說)해졌음은 옥(玉)의 티라고 보이는데다가 삼처(三處)에까지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고 스스로 말씀 하시어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수량품(壽量品)을 숨기고 설(說)하셨느니라. 그러니 옥(玉)이 깨어지고 달이 구름에 가리우고 일식(日蝕)이 된 것과 같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로다. 아함(阿含)방등(方等)반야(般若)대일경(大日經) 등(等)은 불설(佛說)이므로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화엄경(華嚴經)에 비(比)한다면 보잘 것도 없는 것이니, 그 경(經)에 숨기고 설(說)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경(經)들 속에 설(說)해질 리가 있겠느뇨. 그러므로 잡아하마경(雜阿含經)에 가로되「처음으로 성도(成道)」등운운(等云云), 대집경(大集經)에 가로되「여래(如來) 성도(成道)하여 처음 십육년(十六年)」등운운(等云云), 정명경(淨名經)에 가로되 「처음에 부처는 나무를 대(對)하고 앉아 힘써서 마(魔)를 이겼노라」등운운(等云云), 대일경(大日經)에 가로되「나는 옛날에 도량(道場)에 앉아서」등운운(等云云),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에 가로되 「이십구년(二十九年)」등운운(等云云).
이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경(經)이로다. 다만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는 일은 무량의경(無量義經)에 화엄경(華嚴經)의 유심법계(唯心法界) 방등(方等) 반야경(般若經)의 해인삼매(海印三昧)혼동무이(混同無二) 등(等)의 대법(大法)을 열거(列擧)하고 혹은 미현진실(微顯眞實) 혹은 역겁수행(歷劫修行) 등(等)이라고 낮출 정도의 경(經)에 나는 일찍이 도량보리수(道場菩提樹) 밑에서 단좌(端坐)하기를 육년(六年)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이루었느니라고 하여, 초성도(初成道)인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시성(始成)의 글과 같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법화경(法華經)의 서분(序分)이므로 정종(正宗)의 일은 말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이어서 법화경(法華經)의 정종(正宗)인 약개삼(畧開三)광개삼(廣開三)의 때 유불여불(唯佛與佛)내능구진(乃能究盡)제법실상(諸法實相) 등(等)세존법구후(世尊法久後) 등(等)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 등(等)다보불(多寶佛)은 적문팔품(迹門八品)을 가리켜서 개시진실(皆是眞實)이라고 증명(證明)하셨으니 무슨 일을 숨기리오마는, 구원수량(久遠數量)만은 숨기시어, 나는 처음 도량(道場)에 앉아 나무를 관(觀)하여 또 경행(經行)함 등운운(等云云) 하였으니 이는 최제일(最第一)의 불가사의(不可思議)이니라. 그러므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은 용출품(湧出品)에서 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 보지 못한 금견(今見)의 대보살(大菩薩)을, 부처가 이를 교화(敎化)하여 처음으로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설(說)하시자, 의심(疑心)하여 가로되 「여래(如來)는 태자(太子)였을 때 석(釋)의 궁(宮)을 나오셔서 가야성(伽倻城)에서 멀지 않은 도량(道場)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성취(成就)하셨나이다. 그로부터 이제 사십여년(四十餘年)을 지났아온데 세존(世尊)이시여,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얼마 안되는 동안에 크게 불사(佛事)를 이루셨나이까」등운운(等云云). 교주석존(敎主釋尊)은 이 의문(疑問)을 풀어 주기 위하여 수량품(壽量品)을 설(說)하시려고 이전적문(爾前迹門)에서의 소문(所聞)을 들어서 가로되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천인(天人)과 아수라(阿修羅)는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석씨(釋氏)의 궁(宮)을 나와서 가야성(伽倻城)에서 멀지 않은 도량(道場)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득(得)하셨다고 생각하였느니라」등(等)이라고 운운(云云), 바로 이 의문(疑問)에 답하여 가로되 「그런데 선남자(善男者)여, 나는 실(實)로 성불(成佛)한 이래 무량무변(無量無邊)백천만억(百千萬億)나유타겁(那由佗劫)이니라」등운운(等云云).
화엄(華嚴)내지반야(乃至般若)대일경(大日經) 등(等)은 이승작불(二乘作佛)을 숨길 뿐만 아니라 구원실성(久遠實成)을 숨기고 설(說)하셨느니라. 이러한 경(經)들에 두 가지의 허물이 있으니, 일(一)에는 행포(行布)가 있는고로 아직도 권(權)을 열지 않았다고 하여 적문(迹門)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숨기었느니라. 이(二)에는 시성(始成)을 말하는 까닭에 아직도 적(迹)을 열지 않았으므로 본문(本門)의 구원(久遠)을 감추었느니라. 이들 두가지의 대법(大法)은 일대(一代) 강골(綱骨)이요 일체경(一切經)의 심수(心髓)로다. 적문방편품(迹門方便品)은 일념삼천(一念三千)과 이승작불(二乘作佛)을 설(說)하여 이전(爾前) 두 가지 허물 중에서 하나를 벗었으니라.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도 발적현본(發迹顯本)하지 않았으므로 참된 일념삼천(一念三千)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승작불(二乘作佛)도 정(定)해지지 않았으니, 사교(四敎)의 과(果)도 깨지고 사교(四敎)의 과(果)도 깨지니 사교(四敎)의 인(因)도 깨졌느니라. 이전적문(爾前迹門)의 십계(十界)의 인과(因果)를 타파(打破)하고 본문(本門)의 십계(十界)의 인과(因果)를 설(說)해 나타냈으니, 이는 즉 본인본과(本因本果)의 법문(法門)이로다. 구계(九界)도 무시(無始)의 불계(佛界)에 갖추고 불계(佛界)도 무시(無始)의 구계(九界)에 갖추어져서 참된 십계호구(十界互具)백계천여(百界千如)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이리하여 되돌아 보면 화엄경(華嚴經)의 대상시방(臺上十方)아함경(阿含經)의 소석가(小釋迦)방등반야(方等般若) 금광명경(金光明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대일경(大日經) 등(等)의 권불(權佛)들은 이 수량(壽量)의 부처인 하늘의 달이 잡시 동안 그림자를 대소(大小)의 그릇에다 비추신 것을 제종(諸宗)의 학자(學者)들은 가까이는 자종(自宗)에 미혹(迷惑)되고 멀리는 법화경(法華經)의 수량품(壽量品)을 알지 못해서, 물속의 달을 참된 달이라고 생각하여 혹은 들어 가서 손으로 잡으려 하는가 하면 혹은 밧줄을 가지고 붙들어 두려고 하느니라, 천태(天台)가 가로되 「천월(天月)을 알지 못하고 다만 지월(池月)을 본다」등운운(等云云).
니치렌(日蓮)이 생각하여 가로되, 이승작불(二乘作佛)조차도 역시 이전(爾前)이 강(强)한 듯이 생각하니 구원실성(久遠實成)은 또한 비(比)할 데도 없이 이전(爾前)이 강(强)하니라. 그 까닭은 이전(爾前)과 법화(法華)와 상대(相對)하건대 역시 이전(爾前)이 강한데다가 이전(爾前)뿐만 아니라, 적문십사품(迹門十四品)도 오로지 이전(爾前)과 같고 본문십사품(本門十四品)도 용출(湧出)수량(壽量)의 이품(二品)을 제하고는 모두 시성(始成)이 있느니라. 쌍림최후(雙林最後)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사십권(四十卷)그 밖의 법화전후(法華前後)의 제대경(諸大經)에 일자일구(一字一句)도 없이, 법신(法身)의 무시(無時)무종(無終)은 설하지만 응신(應身)보신(報身)의 현본(顯本)은 설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광박(廣博)한 이전(爾前)본적(本迹)열반(涅槃) 등(等)의 제대승경(諸大乘經)을 버리고 다만 용출(湧出)수량(壽量)의 이품(二品)에 붙게 되겠는가.
그런데 법상종(法相宗)이라고 하는 종(宗)은 서천(西天)의 불멸후(佛滅後), 구백년(九百年)에 무착보살(無著菩薩)이라 하는 대논사(大論師)가 있었으니, 밤에는 도솔(都率)의 내원(內院)에 올라가서 미륵보살(彌勒菩薩)께 대면하여 일대성교(一代聖敎)의 불심(不審)을 깨우치고, 낮에는 아수사국(阿輸舍國)에서 법상(法相)의 법문(法門)을 넓히시었다. 그의 제자(弟子)(弟子)는 세친(世親)호법(護法)난타(難陀)계현(戒賢) 등(等)의 대논사(大論師)이며, 계일대왕(戒日大王)이 머리를 조아리고 오천(五天)이 깃발을 꺽고 이에 귀의(歸依)하였느니라. 시나국(尸那國)의 현장삼장(玄獎三臧)은 월지(月氏)에 사서 십칠년간(十七年間) 인도백삼십여(印度百三十餘)의 나라들을 견문(見聞)한 후 제종(諸宗)을 버리고 이 종(宗)을 한토(漢土)에 가지고 와서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하는 현왕(賢王)에게 전수(傳授)하였으며, 방(肪)상(尙)광(光)기(基)를 제자(弟子)로 삼아 대자은사(大慈恩寺)와 삼백육십여국(三百六十餘國)에 넓혔고, 일본국(日本國)에는 인왕삼십칠대(仁王三十七大)고토쿠천황(孝德天皇)의 御宇에 도지(道慈)도쇼(道昭) 등(等)이 배워서 전(傳)하여 야마시나사(山階寺)에다 받들어 모셨느니라. 그러하니 삼국제일(三國第一)의 종(宗)이 되었는데, 이 종(宗)이 가로되, 처음의 화엄경(華嚴經)으로부터 마지막 법화(法華)열반경(涅槃經)에 이르기까지 무성유정(無性有情)과 결정성(決定性)의 이승(二乘)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느니라. 불어(佛語)에는 이언(二言)이 없으니 한번 영불성불(永不成佛)이라고 정(定)하신 이상은 일월(日月)은 땅에 떨어질지라도 대지(大地)는 반복(反覆)할지라도 영원히 변개(變改)가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중에도 이전(爾前)의 경(經)들에서 퇴박한 무성유정(無性有情) 결정성(決定性)을 확실히 지적(指摘)하여 성불(成佛)한다고는 설(說)하지 않았으니, 우선 눈을 감고 생각하여라.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에 결정성(決定性) 무성유정(無性有情)이 정말로 성불(成佛)한다고 있다면 무착(無著) 세친(世親)과 같은 대논사(大論師)현장(玄獎)자은(慈恩)과 같은 삼장(三臧)과 인사(人師)가 이것을 보지 못했고, 이것을 써 놓지 않았겠느뇨, 이것을 믿고 전하지 않았겠느뇨, 미륵보살(彌勒菩薩)에게 질문(質問)을 드리지 않았겠는가. 당신은 법화경(法華經)의 글을 믿는 것 같지만, 천태(天台) 묘락(妙樂) 전교(傳敎)의 벽견(僻見)을 신수(信受)하여 그 견(見)을 가지고 경문(經文)을 보는고로 이전(爾前)과 법화경(法華經)과는 수화(水火)와 같다고 보느니라. 화엄종(華嚴宗)과 진언종(眞言宗)은 법상(法相) 삼론(三論)과는 비교도 안될 초과(超過)의 종(宗)이니라. 이승작불(二乘作佛) 구원실성(久遠實成)은 법화경(法華經)에만 한(限)한 것이 아니라 화엄경(華嚴經) 대일경(大日經)에도 분명(分明)하니라. 화엄종(華嚴宗)의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臧) 징관(澄觀) 진언종(眞言宗)의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 등(等)은 천태(天台) 전교(傳敎)와는 비교도 안될 고위(高位)의 사람이로다. 게다가 선무외(善無畏) 등(等)은 대일여래(大日如來)로부터 직계(直系)이며 바른 상승(相乘)이 있느니라. 이들 권화(權化)의 사람에게 어찌하여 잘못이 있겠는가. 따라서 화엄경(華嚴經)에는 「혹은 석가(釋迦)가 불도(佛道)를 이루고 나서 불가사의겁(不可思議劫)을 지났음을 보다」등운운(等云云). 대일경(大日經)에는 「나는 일체(一切)의 본초(本初)이니라」등운운(等云云). 그러하니 어찌 구원실성(久遠實成)은 다만 수량품(壽量品)에만 한(限)하리요. 비유컨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대해(大海)를 보지 못하고 산골 사람이 서울 장안을 모르는 것과 같음이라. 당신은 단지 수량(壽量)의 일품(一品)만을 보고 화엄(華嚴) 대일경(大日經) 등(等)의 제경(諸經)을 알지 못하느뇨, 게다가 월지(月氏) 시나(尸那) 신라(新羅) 백제(百濟) 등(等)에서도 일동(一同)으로 이승작불(二乘作佛) 구원실성(久遠實成)은 법화경(法華經)에 한(限)한다고 하느뇨.
그렇다면 팔개년(八箇年)의 경(經)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들과는 상위(相違)한다 할지라도, 선판(先判) 후판(後判) 중(中)에서는 후판(後判)에 따라야 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이전(爾前)이 강(强)하다고 생각되노라. 또 다만 재세(在世)뿐이라면 그렇기도 하려니와 멸후(滅後)에 나타난 논사(論師) 인사(人師)들은 대부분이 이전(爾前)에 기울어졌느니라. 이렇게 법화경(法華經)은 믿기 어려운데다 세상이 점점 말(末)이 되어 가면 성현(聖賢)은 점차 숨어버리고 미자(迷者)는 차츰 많아짐이라. 세간(世間)의 얕은 일 조차도 잘못이 많은데 어찌 하물며 출세(出世)의 심법(深法)에 잘못이 없겠느뇨. 독자(犢子) 방광(方廣)은 총민(聰敏)하였으나 역시 대소승경(大小乘經)을 잘못 알았으며, 무구(無垢) 마답(摩沓)은 이근(利根)이었으나 권실(權實) 이교(二敎)를 분별(分別)하지 못했느니라. 정법(正法) 이천년(二千年) 내(內)인지라 재세(在世)도 가깝고 월지(月氏) 내(內)인데도 이미 그와 같으니 하물며 시나(尸那) 일본(日本) 등(等)은 나라도 멀리 떨어지고 언어(言語)도 다르며 사람의 근(根)도 둔(鈍)하고 수명(壽命)도 단명(短命)이며 탐진치(貪瞋癡)도 배증(倍增)하였다. 또 부처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고 불경(佛經)은 모두 잘못되었으니 누구의 지해(智解)인들 바르겠느뇨. 부처가 열반경(涅槃經)에 써서 가로되 「말법(末法)에는 정법(正法)의 자(者)는 조상(爪上)의 흙 방법(謗法)의 자(者)는 시방(十方)의 흙」이라고 있느니라. 법멸진경(法滅盡經)에 가로되 「방법(謗法)의 자(者)는 항하사(恒河沙) 정법(正法)의 자(者)는 하나 둘의 소석(小石)」이라고 써 놓으셨는데, 그러니 천년(千年) 오백년(五百年)에 한 사람도 정법(正法)의 자(者)는 있기 어려우리라, 세간(世間)의 죄(罪)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자(者)는 조상(爪上)의 흙이고 불법(佛法)에 의하여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자(者)는 시방(十方)의 흙이로다. 속(俗)보다도 승(僧) 여(女)보다도 니(尼)가 많이 악도(惡道)에 떨어지리라.
이에 니치렌(日蓮)이 생각하여 가로되, 세상은 이미 말대(末代)에 들어선지 이백여년(二百餘年), 변토(邊土)에 생(生)을 받고 게다가 하천(下賤)하며 또한 빈도(貧道)의 몸이니라. 윤회육취(輪廻六趣)하는 동안 인천(人天)의 대왕(大王)으로 태어나서 만민(萬民)을 복종(服從)케 함은 대풍(大風)이 작은 나무 가지를 불어 흔들 듯 하였을 때도 부처가 되지 않았으며, 대소승경(大小乘經)의 외범(外凡) 내범(內凡)의 대보살(大菩薩)도 수행(修行)해 올라가 일겁(一劫) 이겁(二劫) 무량겁(無量劫)을 거쳐서 보살(菩薩)의 행(行)을 세워 이미 불퇴에 들어갔어야 했을 때도 강성(强盛)한 악연(惡緣)에 걸려 들어 부처가 되지 못하였노라. 누가 알리요, 대통결연(大通結緣)의 제삼류(第三類)가 재세(在世)에 빠졌음인가, 구원오백(久遠五百)이 퇴전(退轉)하여 지금에 이르렀는가. 법화경(法華經)을 행(行)한고로 세간(世間)의 악연(惡緣) 왕난(王難) 외도(外道)의 난(難) 소승경(小乘經)의 난(難)따위는 견디었으나 권대승(權大乘) 실대승경(實大乘經)을 다 깨달은 듯한 도작(道綽) 선도(善導) 호넨(法然)따위와 같은, 악마(惡魔)가 몸에 들어간 자(者)가 법화경(法華經)을 몹시 찬탄(讚嘆)하고, 기(機)는 억지로 낮추어 이심해미(理深解微)라 세우고 미유일인득자(未有一人得者) 천중무일등(千中無一等)이라며 속이는 자(者)에게 무량생(無量生)동안 항하사(恒河沙)만큼이나 여러 번 속아서 권경(權經)에 떨어졌고 권경(權經)에서 소승경(小乘經)으로 떨어졌으며, 외도(外道) 외전(外典)에 떨어져서 결국은 악도(惡道)에 떨어졌다고 깊이 이 것을 알았노라. 일본국(日本國)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다만 日蓮 한 사람이니라.
이것을 한마디라도 입밖에 낸다면 부모(父母) 형제(兄弟) 사장(師匠)에다 국주(國主)의 왕난(王難)이 반드시 닥치느니라, 말하지 않는다면 자비(慈悲)가 없음과 같다고 사유(思惟)되어,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등에 이 두 가지를 대조(對照)해 보니, 말은 아니 하면 금생(今生)은 무사(無事)하나 후생(後生)은 반드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고, 말하면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나리라고 알았노라. 둘 중에서는 말해야 할 것이로되, 왕난(王難) 등이 일어났을 때 퇴전(退轉)할 양이면 아예 그만둘까 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노라니 보탑품(寶塔品)의 육난구이(六難九易)가 생각났느니라. 우리들 같이 힘 약한 자가 수미산(須彌山)을 던질지라도, 우리와 같이 무통(無通)한 자(者)가 건초(乾草)를 지고 겁화(劫火)에는 타지 않을지라도, 우리들 같이 무지(無知)한 자(者)가 항사(恒沙)와 같은 경(經)들을 읽고 외울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은 일구일게(一句一偈)도 말대(末代)엔 갖기 어렵다고 설(說)해짐은 이것이로다. 이번에 강성(强盛)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퇴전(退轉)않겠다고 원했노라.
이미 이십여년(二十餘年) 동안 이 법문(法門)을 말하니 일일(日日) 월월(月月) 연년(年年) 난(難)이 거듭하느니라. 사소한 난(難)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고 대난(大難)이 네 번인데 두 번은 그만 두고라도 왕난(王難)이 두 번이로다. 더구나 이번에는 이미 나의 신명(身命)에까지 미치고 그 위에 제자(弟子)이거나 단나(檀那)이거나 하물며 잠깐동안 청문(聽聞)한 속인(俗人)들까지도 잡아다가 중벌(重罰)에 처해졌으니 모반(謀反)을 한 사람같이 다루었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제사(第四)에 가로되 「더욱이 이 경(經)은 여래(如來)의 현재(現在)조차도 역시 원질(怨嫉)이 많거늘 하물며 멸도(滅道)의 후(後)에 있어서랴」등운운(等云云). 제오(第五)에 가로되 「일체세간(一切世間)에 원(怨)이 많아서 믿기 어렵다」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 「경(經)을 독송(讀誦)하고 서지(書持)하는 자(者)를 보고 경천증질(輕賤憎嫉)하며 결한(結恨)을 품으리라」등운운(等云云). 제오(第五)에 가로되 「일체세간(一切世間)에 원(怨)이 많아서 믿기 어렵다」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 「여러 무지(無智)한 사람이 악구매리(惡口罵詈)하리라」등(等). 또 가로되 「국왕(國王) 대신(大臣) 바라문(婆羅門) 거사(居士)를 향(向)하여 비방(誹謗)하고 나의 악(惡)을 설(說)하며 이는 사견(邪見)의 사람이라고 말하리라」고. 또 가로되「삭삭빈출(數數擯出)당하리라」등운운(等云云). 또 가로되「장목와석(杖木瓦石)을 가지고 이를 타척(打擲)하리라」등운운(等云云).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그 때 많은 무량(無量)의 외도(外道)가 있어서 화합(和合)하여 함께 마가다(摩訶陀)의 왕(王)인 아사세(阿闍世)에게 찾아 가서 지금은 단 하나의 대악인(大惡人)이 있으니 구담사문(瞿曇沙門)이요,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악인(惡人)이 이양(利養)을 위하는 고로 그 곳에 왕집(往集)하여 권속(眷屬)이 되어 능(能)히 선(善)을 닦지 않으며, 주술(呪術)의 힘으로 가섭(迦葉)과 사리불(舍利佛) 목건련(目犍連)을 조복(調伏)하였나이다」등운운(等云云), 천태(天台)가 가로되 「어찌 하물며 미래(未來)에 있어서랴, 이(理)로써 화(化)하기 어려우니라」등운운(等云云). 묘락(妙樂)이 가로되 「장(障)을 아직 제(除)하지 않은 자(者)를 원(怨)이라 하고 듣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者)를 질(疾)이라 이름함」등운운(等云云). 남삼(南三) 북칠(北七)의 십사(十師) 한토무량(漢土無量)의 학자(學者)가 천태(天台)를 원적(怨敵)으로 삼았다. 도쿠이치(得一) 가로되「졸자(拙者)로다 지공(智公)이여, 너는 누구의 제자(弟子)이기에 세 치도 안되는 설근(舌根)을 가지고 복면설(覆面舌)의 소설(所說)을 비방(誹謗)하느뇨」등운운(等云云). 동춘(東春)에 가로되 「묻되, 재세(在世)의 때도 허다(許多)한 원질(怨嫉)이 있었거늘 불멸도(佛滅度)의 후(後) 이 경(經)을 설(說)할 때 어찌하여 또 유난(留難)이 많은고. 답하여 가로되 속(俗)에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고 하듯이, 이 경(經)은 오승(五乘)의 이집(異執)을 폐(廢)하고 일극(一極)의 현종(玄宗)을 세움이라. 고로 범(凡)을 물리치고 성(聖)을 나무라며, 대(大)를 배제(排除)하고 소(小)를 파(破)하며, 천마(天魔)를 부르되 독충(毒虫)이라 하고, 외도(外道)를 설(說)하되 악귀(惡鬼)라 하며, 집소(執小)를 헐뜯어 빈천(貧賤)이라 하고, 보살(菩薩)을 꺽어서 신학(新學)이라 하니, 천마(天魔)는 듣기 싫어하고 외도(外道)는 귀에 거슬리며, 이승(二乘)은 경괴(驚怪)하고 보살(菩薩)은 겁행(劫行)함이라. 이러한 무리가 모두 유난(留難)을 하니 다원질(多怨嫉)이란 말 어찌 헛되리오」등운운(等云云). 현계론(顯戒論)에 가로되 「승통(僧統)이 주(奏)하되 서하(西夏)의 귀변바라문(鬼辯婆羅門)이 있고 동토(東土)에 교언(巧言)을 토(吐)하는 독두사문(禿頭沙門)이 있어서 이는 물류명소(物類冥召)하여 세간(世間)을 광혹(誑惑)함」등운운(等云云), 논(論)하되 「옛날엔 제조(齊朝)의 광통(光統)에게 듣고 지금은 본조(本朝)의 육통(六統)에서 본다, 실(實)이로다. 법화(法華)에 하황(何況)함에 있어서랴」등운운(等云云), 수구(秀句)에 가로되 「대(代)를 말하면 즉 상(像)의 끝 말(末)의 초(初)이고, 지(地)를 찾으면 즉 당(唐)의 동(東) 갈(羯)의 서(西) 사람을 따지면 즉 오탁(五濁)의 생(生) 투쟁(鬪爭)의 때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유다원질(猶多怨嫉) 황멸도후(況滅度後) 이 말은 참으로 까닭이 있느니라」등운운(等云云). 대저 소아(小兒)에게 뜸을 뜨면 반드시 어머니를 원망하며 중병자(重病者)에게 양약(良藥)을 주면 필연코 입에 쓰다고 한탄(恨歎)하리라. 재세(在世)도 그랬거늘 내지상말변토(乃至像末邊土)에 있어서랴. 산(山)에 산(山)이 겹치고 파도에 파도가 덮치며, 난(難)에 난(難)이 더하고 비(非)에 비(非)를 더함이라. 상법(像法) 중에는 천태(天台)만이 법화경(法華經) 일체경(一切經)을 읽었으며, 남북(南北)이 이를 미워했으나 진수(陳隋) 이대(二代)의 성주(聖主)가 안전(眼前)에서 시비(是非)를 밝히자, 적(敵)은 마침내 없어졌느니라. 상(像)의 말(末)에는 전교(傳敎)만이 법화경(法華經) 일체경(一切經)을 불설(佛說)대로 읽으셨는데 남도(南都) 칠대사(七大寺)가 봉기(蜂起)했으나 桓武(간무) 내지(乃至) 사가(嵯峨) 등(等)의 현주(賢主)가 친(親)히 밝히셨으므로 역시 아무 일이 없었느니라. 지금은 말법(末法)의 처음 이백여년(二百餘年)이며
황멸도후(況滅度後)의 조짐으로서 투쟁(鬪爭)의 처음이 되는 까닭에 비리(非理)를 우선(優先)으로 하고, 탁세(濁世)의 증거로 불러서 한자리에 만나게 함도 없이 유죄(流罪) 내지(乃至)는 목숨에까지 미치려 하느니라.
그런데 니치렌(日蓮)의 법화경(法華經)의 지해(智解)는 천태(天台) 전교(傳敎)에는 천만(千萬)의 일분(一分)도 미치지 못하지만, 난(難)을 견디고 자비(慈悲)가 뛰어났음은 공구(恐懼)함마저 가질 것이로다. 따라서 틀림없이 천(天)의 가호(加護)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일분(一分)의 효험(效驗)도 없을뿐더러 더욱 더욱 중벌(重罰)에 처해짐이라. 도리어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이 몸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가 아닌가, 또 제천(諸天) 선신(善神)들이 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셨는가, 여러 가지로 의심(疑心)스럽도다. 그런데 법화경(法華經)의 제오(第五)의 권(卷) 권지품(勸持品)의 이십행(二十行)의 게(偈)는 日蓮마저도 이 나라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세존(世尊)은 대망어(大妄語)의 사람이고 팔십만억나유타(八十萬億那由佗)의 보살(菩薩)은 제바(提婆)와 같은 허광죄(虛誑罪)에도 빠졌을 것이로다. 경(經)에 가로되 「여러 무지(無智)한 사람이 있어서「악구매리(惡口罵詈) 등(等) 하며 도장와석(刀杖瓦石)을 가(加)하리라」등운운(等云云), 지금의 세상을 보건대 日蓮 이외(以外)의 제승(諸僧) 중에 누가 법화경(法華經) 때문에 제인(諸人)에게 악구매리(惡口罵詈) 당하고 도장(刀杖) 등을 가(加)해진 자(者)가 있느뇨. 日蓮이 없다면 이 일게(一偈)의 미래기(未來記)는 망어(妄語)가 되었으리라. 「악세(惡世) 중(中)의 비구(比丘)는 사지(邪智)이며 마음이 첨곡(諂曲)」또 가로되 「백의(白衣)를 위해 법(法)을 설(說)하여 세상에서 공경(恭敬)받음이 육통(六通)의 나한(羅漢)과 같으리라」이와 같은 경문(經文)들은 지금의 세상의 염불자(念佛者) 선종(禪宗) 율종(律宗) 등(等)의 법사(法師)가 없다면 세존(世尊)은 또 대망어(大妄語)의 사람이고, 상재대중중(常在大衆中) 내지향국왕대신바라문거사(乃至向國王大臣婆羅門居士) 등(等)이라고 있으니, 지금의 새상의 승(僧)들이 日蓮을 참주(讒奏)하여 유죄(流罪)되게 하지 않는다면 이 경문(經文)은 헛됨이라. 또 가로되 「삭삭견빈출(數數見擯出)」등운운(等云云), 日蓮이 법화경(法華經) 때문에 자주 귀양가지 않으면 삭삭(數數)의 이자(二字)를 어찌 하리요, 이 두자는 천태(天台) 전교(傳敎)도 아직 읽지 않았으니 하물며 여인(餘人)에 있어서랴. 말법(末法)의 초(初)의 증거, 공포악세중(恐怖惡世中)이라는 금언(金言)이 맞는고로 오직 니치렌(日蓮) 한 사람이 이를 읽었노라. 예(例)컨대 석존(釋尊)이 부법장경(付法臧經)에 써서 가로되 「아(我)의 멸후(滅後) 일백년(一百年)에 아육대왕(阿肉大王)이란 왕(王)이 있으리라」 마야경(摩耶經)에 가로되 「아(我)의 멸후(滅後) 육백년(六百年)에 용수보살(龍樹菩薩)이란 사람이 남천축(南天竺)에 나오리라」대비경(大悲經)에 가로되 「아(我)의 멸후(滅後) 육십년(六十年)에 말전지(末田地)라는 자(者)가 지(地)를 용궁(龍宮)에 구축(構築)하리라.」이들은 모두 불기(佛紀)와 같이 되었으니, 불연(不然)이면 누가 불교(佛敎)를 신수(信受)하리요, 그런데 부처는 공포악세(恐怖惡世) 연후말세(然後末世) 말법멸시(末法滅時) 후오백세(後五百歲) 등(等)이라고 정묘(正妙)의 이본(二本)에 확실하게 때를 정(定)하셨느니라. 당세(當世)에 법화(法華)의 삼류(三類)의 강적(强敵)이 없다면 누가 불설(佛說)을 신수(信受)할 것이며, 日蓮이 없다면 누구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로 하여 불어(佛語)를 도우리요. 남삼(南三) 북칠(北七) 칠대사(七大寺) 등(等)도 역시 상법(像法)의 법화경(法華經)의 적(敵)에 드니 하물며 당세(當世)의 선(禪) 율(律) 염불자(念佛者) 등이 벗어나리요. 경문(經文)에 이 몸이 보합(普合)하였으므로 감죄(勘罪)를 당하면 더욱 더욱 기쁨이 더함이라. 예(例)컨대 소승(小乘)의 보살(菩薩)이 미단혹(未斷惑)이므로 원겸어업(願兼於業)이라 하여 짓고 싶지 않는 죄(罪)이지만 부모(父母) 등이 지옥(地獄)에 떨어져 대고(大苦)를 받고 있음을 보고 그 모습대로 업(業)을 만들어 원(願)해서 지옥(地獄)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데,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을 기뻐함과 같음이라.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 당시(當時)의 책고(責苦)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지만 미래(未來)에 떨어져야 할 악도(惡道)를 벗어 나리라 생각하니 기쁘니라.
단(但) 세간(世間)의 의심(疑心)도 그렇거니와 자심(自心)도 의심(疑心)하는 것은 어찌하여 천(天)이 도우시지 않느뇨. 제천(諸天) 등(等)의 수호신(守護神)은 불전(佛前)의 어서언(御書言)이 있어서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에게는 원숭이일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라고 말한다면 조속(早速)히 불전(佛前)의 서언(誓言)을 다해야 하리라 생각하거늘 그렇지 않음은 이 몸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가 아닌 것일까, 이 의문(疑問)은 이 서(書)의 간심(肝心)이요, 일기(一期)의 대사(大師)이므로 곳곳에 이것을 쓰고 그 위에 의문(疑問)을 강(强)하게 해서 답(答)을 마련하리라.
계찰(季札)이라 하는 자(者)는 마음의 약속(約束)을 어기지 않으려고, 왕(王)의 중보(重寶)인 검(劍)을 서군(徐君)의 묘(墓)에 걸었고, 왕수(王壽)라 하는 이는 냇물을 마시고 금(金)으로 만든 돈을 물에 던졌으며 공윤(公胤)이라 하는 이는 배를 가르고 주군(主君)의 간(肝)을 넣었으니, 이들은 현인(賢人)이며 은혜(恩惠)를 갚는 것이니라. 하물며 사리불(舍利佛) 가섭(迦葉) 등(等)의 대성(大聖)은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 삼천(三千)의 위의(威儀) 하나도 빠짐없고, 견사(見思)를 끊고 삼계(三界)를 떠나 버린 성인(聖人)이로다. 범제(梵帝) 제천(諸天)의 도사(導師)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안목(眼目)이니라. 그런데 사십여년(四十餘年) 동안 영불성불(永不成佛)이라고 퇴박하여 버려져 있었는데, 법화경(法華經)이라는 불사(不死)의 양약(良藥)을 먹고 볶은 씨앗이 싹트고 깨진 돌이 합치며 고목( 木)에 꽃피고 열매가 맺듯이 부처가 된다고 허락받아 아직 팔상(八相)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어찌 이 경(經)의 중은(重恩)을 갚지 않을소냐. 만약 보답하지 않느다면 그들 현인(賢人)보다도 못하여 부지은(不知恩)의 축생(畜生)이니라. 모보(毛寶)가 구(救)해준 거북은 의류(衣類)의 은(恩)을 잊지 않았고, 곤명지(昆明池)의 대어(大魚)는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고 명주(明珠)를 밤중에 바쳤느니라. 축생(畜生)조차도 역시 은혜를 갚는데 어찌 하물며 대성(大聖)에 있어서랴. 아난존자(阿難尊者)는 곡반왕(斛飯王)의 차남(次男)이고 나후라존자(羅睺羅尊者)는 정반왕(淨飯王)의 손자(孫子)이라. 인중(人中)에서 지체 높은데다가 증과(證果)의 몸으로서 성불(成佛)이 억제(抑制)되어 왔는데, 팔년(八年)의 영산(靈山)의 자리에서 산해혜(山海慧) 답칠보화(蹋七寶華) 등이라고 여래(如來)의 호(號)를 받으시었다. 만약 법화경(法華經)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지체가 높고 대성(大聖)일지라도 누가 공경(恭敬)해 받들겠느뇨. 하(夏)의 걸(桀) 은(殷)의 주(紂)라고 함은 만승(萬乘)의 주(主)이고 토민(土民)이 귀의(歸依)하는 바이니라. 그러나 악정(惡政)으로 나라를 망(亡)하게 하였으므로 지금에 와서도 악인(惡人)의 본보기로는 걸주(桀紂) 걸주(桀紂)라고 하니, 하천(下賤)의 자(者) 나병(癩病)의 자(者)도 걸주(桀紂)와 같다고 하면, 욕 먹었다고 화가 나느니라. 천이백(千二百) 무량(無量)의 성문(聲聞)은 법화경(法華經)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누가 그의 이름이라도 듣고 그의 소리라도 배울 것인가. 일천(一千)의 성문(聲聞)이 일체경(一切經)을 결집(結集)하였더라도 보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하물며 이 사람들을 회상(繪像) 목상(木像)으로 만들어서 본존(本尊)이라고 숭앙(崇仰)하겠느뇨. 이는 오로지 법화경(法華經)의 힘에 의해서 모든 나한(羅漢)이 귀의(歸依)받으시게됨이라. 모든 성문(聲聞)은 법화(法華)에서 떨어져 버린다면 고기가 물을 떠나고 원숭이가 나무를 떠나며, 소아(小兒)가 젖을 떠나고 백성이 왕(王)을 떠난 것과 같으니라. 그러니 어찌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버리실손가. 모든 성문(聲聞)은 이전(爾前)의 경(經)들에서는 육안(肉眼)에다가 천안(天眼) 혜안(慧眼)을 얻고 법화경(法華經)에 와서 법안(法眼) 불안(佛眼)을 갖추었으므로 시방세계(十方世界)까지도 조람(照覽)하시리라. 그러니 어찌 하물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안에 있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지견(知見)하시지 못하리요. 설사(設使) 니치렌(日蓮)이 악인(惡人)이어서 일언(一言) 이언(二言) 일년(一年) 이년(二年) 일겁(一劫) 이겁(二劫) 내지(乃至) 백천만억겁(百千萬億劫) 이들 성문(聲聞)을 악구(惡口)하고 매리(罵詈)하며 도장(刀杖)을 가(加)해 온 상태라 할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을 신앙(信仰)하는 행자(行者)란다면 버리시지 못하리라. 비유(譬喩)컨대 어린아이가 부모(父母)를 욕한다고 부모가 이를 버릴 것인가, 효조(梟鳥)는 어미를 먹지만 어미는 이를 버리지 않으며, 파경(破鏡)은 애비를 해치지만 애비는 이에 따름이라, 축생(畜生)조차도 이와 같거늘 대성(大聖)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버리겠느뇨. 그러하기에 사대성문(四大聲聞)이 영해(領解)한 글월에 말하되「우리들은 이제야말로 참으로 성문(聲聞)이로다. 불도(佛道)의 소리를 가지고 일체(一切)로 하여금 듣게 하리라. 우리들은 이제야말로 참으로 아라한(阿羅漢)이로다, 모든 세간(世間) 천인(天人) 마(魔) 범(梵)에 있어서 널리 그 중에서 응당(應當) 공양(供養)을 받으리라. 세존(世尊)은 대은(大恩)이 있으시어 희유(希有)한 일을 가지고 연민교화(憐愍敎化)하여 우리들을 이익(利益)케 하심이라. 무량억겁(無量億劫)에도 누가 능히 보답(報答)할 자(者)가 있으리요. 수족(手足)으로써 공급(供給)하고 두정(頭頂)으로써 예경(禮敬)하며 일체(一切)를 가지고 공양(供養)할지라도 모두 갚을 수 없느니라. 혹은 받아서 양 어깨에
메고 항사겁(恒沙劫) 동안 정성을 다하여 공경(恭敬)하고, 또한 미선(美膳)과 무량(無量)한 보의(寶衣)와 모든 와구(臥具) 종종(種種)의 탕약(湯藥)으로써 하고, 우두전단(牛頭栴檀)과 모든 진보(珍寶)를 가지고 탑묘(塔廟)을 세우며, 보의(寶衣)를 땅에 깔고 이와 같은 것으로써 공양(供養)하기는 항사겁(恒沙劫)에 이른다 해도 역시 보답(報答)하지 못함이라」등운운(等云云).
모든 성문(聲聞)들은 전사미(前四味)의 경(經)들에서 얼마나 많은 가책(呵嘖)을 받고 인천(人天) 대회(大會) 중에서 치욕(恥辱)스럽던 일은 부지기수(不知其數)로다. 그러하므로 가섭존자(迦葉尊者)의 제읍(渧泣)의 소리는 삼천(三千)을 울렸고,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는 망연(亡然)해져서 들고 있던 일발(一鉢)을 버렸으며, 사리불(舍利佛)은 반식(飯食)을 토하고 부루나(富樓那)는 화병(畵甁)에 분(糞)을 넣었다라고 혐오(嫌惡)당했느니라. 세존(世尊)은 녹야원(鹿野苑)에서는 아함경(阿含經)을 찬탄(讚歎)하여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를 스승으로 하라는 등, 은근(慇懃)히 칭찬하시더니 이제 또 어느 사이에 자신이 설(說)한 바를 이렇게도 비방(誹謗)하시는가, 이언(二言) 상위(相違)의 허물이라고도 해야 하리라. 예(例)컨대 세존(世尊)이 제바달다(提婆達多)를, 너는 우인(愚人)이며 남의 침을 먹는다고 매리(罵詈)하셨으므로 독전(毒箭)이 가슴에 들어간 듯이 생각하여 원망하며 가로되 「구담(瞿曇)은 불타(佛陀)가 아니로다. 나는 곡반왕(斛飯王)의 적자(嫡子)이고 아난존자(阿難尊者)의 형(兄)이며 구담(瞿曇)의 일류(一類)로다. 아무리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은밀하게 교훈(敎訓)해야 하거늘, 이러한 인천(人天) 대회(大會)에서 이 정도의 대화(大禍)를 면전(面前)에서 말하는 자가 대인(大人) 불타(佛陀) 중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오래 전에는 처(妻)로 인한 적(敵)이고 지금은 일좌(一座)의 적(敵)이라, 오늘부터는 세세(世世) 생생(生生)에 대원적(大怨敵)이 되리라」고 맹서하였느니라. 이로써 생각 하건대 지금의 여러 대성문(大聲聞)은 본래 외도(外道) 바라문(婆羅門)의 집안에서 나왔으며 또한 모든 외도(外道)의 장자(長者)였으므로 제왕(諸王)의 귀의(歸依)를 받고 제단나(諸檀那)에게 존경(尊敬) 받았으며, 혹은 종성(種姓)이 고귀(高貴)한 사람도 있고 혹은 부복(富福)이 충만(充滿)한 사람도 있느니라. 그러한데 이런 영관(榮官) 등을 버리고 만심(慢心)의 번당(幡幢)을 쓰러뜨리고 붙어 속복(俗服)을 벗고 회색(壞色)의 분의(糞衣)를 몸에 걸치고 백불(白拂) 궁전(弓箭) 등(等)을 버리고 일발(一鉢)을 손에 들고 빈인(貧人) 걸개(乞丐) 등과 같이 되어 세존(世尊)에게 따라 붙어 풍우(風雨)를 막을 집도 없고 신명(身命)을 이어 갈 의식(衣食)도 핍소(乏少)한 상태인데, 오천(五天) 사해(四海) 모두가 외도(外道)의 제자(弟子)(弟子) 단나(檀那)이므로 부처조차도 구횡(九橫)의 대난(大難)을 만나심이라. 소위(所謂) 제바(提婆)가 대석(大石)을 굴렸고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취상(醉象)을 풀어 놓았으며, 아기다왕(阿耆多王)의 마맥(馬麥) 바라문성(婆羅門城)의 장(漿) 전차바라문녀(旃遮婆羅門女)가 발(鉢)을 배에다 숨겼었다. 이러니 하물며 소화(所化)인 제자(弟子)(弟子)가 당한 수난(數難)은 말할 나위도 없느니라. 무량(無量)의 석자(釋子)는 파유리왕(波琉璃王)에게 살해(殺害)되고, 천만(千萬)의 권속(眷屬)은 취상(醉象)에게 밟혔으며, 화색비구니(華色比丘尼)는 제바(提婆)에게 살해(殺害)되고, 가려제존자(迦廬提尊者)는 마분(馬糞)에 묻혔으며, 목건존자(目犍尊者)는 죽장(竹杖)에게 살해(殺害)되었느니라. 게다가 육사동심(六師同心)하여 아사세(阿闍世) 파사닉왕(波斯匿王) 등(等)에게 참주(讒奏)하여 가로되 「구담(瞿曇)은 염부제일(閻浮第一)의 대악인(大惡人)이로소이다. 그가 가는 곳은 삼재칠난(三災七難)이 우선하니, 대해(大海)가 중류(衆流)를 모으고 대산(大山)이 중목(衆木)을 모은 듯이, 이 구담(瞿曇)이 있는 곳엔 중악(衆惡)을 모았나이다. 소위(所謂) 가섭(迦葉) 사리불(舍利佛) 목련(目連) 수보리(須菩提) 등(等)이외다. 인신(人身)을 받은 자(者)는 충효(忠孝)를 우선해야 하거늘, 그들은 구담(瞿曇)에게 속아서 부모(父母)의 교훈(敎訓)도 받아들이지 않고 집을 나와 왕법(王法)의 선지(宣旨)에도 위배(違背)하여 산림(山林)에 갔으니, 일국(一國)에 머물러 있지 못할 자(者)이외다. 그러므로 천(天)에는 일월(日月) 중성(衆星)이 변(變)을 나타내고 지(地)에는 중요(衆夭)가 성(盛)하다는 등 호소(呼訴)함이라. 이도 견디기 어렵거늘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불타(佛陀)에게도 따르기 어렵게 되었느니라. 인천대회(人天大會)의 중회(衆會)의 자리에서 때때로 가책(呵嘖)의 소리를 들었으므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모르고 다만 방황하는 마음뿐이니라. 거기다가 큰 중에도 대난(大難)의 제일(第一)이었던 것은 정명경(淨名經)에 설(說)하여 진 「보아라, 그대에게 보시(布施)하는 자(者)는 복전(福田)이라고 이름하지 않노라, 그대를 공양(供養)하는 자(者)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느니라」등운운(等云云). 글의 뜻은 부처가 암라원(菴羅苑)이라는 곳에 계실 때 범천(梵天) 제석(帝釋) 일월(日月) 사천(四天) 삼계제천(三界諸天) 지신(地神)
용신(龍神) 등(等) 무수항사(無數恒沙)의 대회(大會) 중에서 가로되, 수보리(須菩提) 등(等)의 비구(比丘)들을 공양(供養)하는 천인(天人)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리라고, 이러한 말을 들은 천인(天人)이 이들 성문(聲聞)을 공양(供養)하겠느뇨. 결국에 있어서는 부처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이승(二乘)을 살해(殺害)하심이 아닌가 보이므로 지각 있는 사람들은 부처를 싫어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부처를 공양(供養)해 드리는 김에 남은 것을 가지고 겨우 신명을 유지해 나아갔느니라. 그러므로 일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건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들만이 설(說)해지고 법화(法華) 팔개년(八箇年)의 소설(所說)이 없는 채 입멸(入滅)하시었다면 어느 누구가 이들 존자(尊者)를 공양(供養)할 리가 있겠느뇨. 그러니 현신(現身)에 있어서 아귀도(餓鬼道)에 살아야만 했었느니라.
그런데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들을 동춘(東春)의 대일륜(大日輪)이 한빙(寒冰)을 소멸(消滅)하듯 무량(無量)의 초로(草露)를 대풍(大風)이 영락(零落)하듯이 일언(一言) 일시(一時)에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 취소(取消)하고 대풍(大風)이 흑운(黑雲)을 불어 없애고, 대허(大虛)에 만월(滿月)이 있듯이 청천(靑天)에 일륜(日輪)이 떠 있듯이 세존법구후(世尊法久後) 요당설진실(要當說眞實)이라고 비추어 밝히시어 화광여래(華光如來) 광명여래(光明如來) 등(等)이라고 하여 사리불(舍利佛) 가섭(迦葉) 같은 이들을 혁혁(赫赫)한 일륜(日輪) 명명(明明)한 월륜(月輪)과 같이 봉문(鳳文)에 써 놓고 귀경(龜鏡)에 밝혀 놓으셨기 때문에 여래(如來)가 입멸(入滅)하신 후의 인천(人天)의 모든 단나(檀那)들에게 마치 불타(佛陀)와도 같이 숭앙(崇仰)을 받으신 것이 아니겠는가. 물이 맑으면 달은 반드시 그림자를 띄우고, 바람이 불면 초목(草木)이 옆으로 휘어지지 않을소냐.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가 있다면 이들 성자(聖者)는 대화(大火) 속을 지나서라도, 대석(大石) 속을 뚫고서라도 문안드려야 하느니라. 그런데 가섭(迦葉)의 입정(入定)도 사안(事案)에 따라야 할 일이지 어찌 된 일인고 불심(不審)스럽기 그지 없도다. 후오백세(後五百歲)에 해당하지 않는 것일까. 광선유포(廣宣流布)가 망어(妄語)로 될 것인가, 아니면 니치렌(日蓮)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가 아닌 것일까, 법화경(法華經)을 교내(校內)라고 낮추며 별전(別傳)이라고 칭(稱)하는 대망어(大妄語)의 자(者)를 지키시는 것일까, 사폐각포(捨閉閣抛)라고 정(定)하여 법화경(法華經)의 문(門)을 닫아라, 경권(經卷)을 버리라고 새겨놓고, 법화당(法華堂)을 없애 버리는 자(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일까, 부처 앞에서 맹서는 하였지만 탁세(濁世)에 있어서의 대난(大難)이 격심(激甚)함을 보고, 제천(諸天)이 내려 오시지 않는 것일까, 일월(日月)은 천(天)에 계시고 수미산(須彌山)은 지금도 무너지지 않고 있으며, 해조(海潮)도 증감(增減)하고 사계(四季)도 정(定)해진 대로 어김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하고, 대의(大疑)는 더욱 더욱 쌓이기만 하느니라.
또 제대보살(諸大菩薩) 천인(天人) 등(等)의 경우는 이전(爾前)의 경(經)들에서 기별(記別)을 얻은 것 같지만 수중(水中)의 달을 잡으려 하듯 그림자를 체(體)라고 생각하듯이 형색(形色)만이 있을 뿐 실의(實義)도 없으며, 또 부처의 은혜(恩惠)도 깊은 듯하면서도 깊지 않음이라. 세존(世尊)이 초성도(初成道)의 때는 아직 설교(說敎)도 없었는데 법혜보살(法慧菩薩) 공덕림보살(功德林菩薩)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 금강장보살(金剛臧菩薩) 등이라 하는 육십여(六十餘)의 대보살(大菩薩)이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의 국토(國土)로부터 교주석존(敎主釋尊)의 어전(御前)에 오시어서 현수보살(賢首菩薩) 해탈월(解脫月) 등(等)의 보살(菩薩)의 청(請)에 따라 십주(十住) 십행(十)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 등(等)의 법문(法門)을 설(說)하셨느니라. 이들 대보살(大菩薩)이 설(說)한 바의 법문(法門)은 석존(釋尊)에게 가르치심을 받은 것이 아니었으며,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범천(梵天) 등(等)도 와서 법(法)을 설(說)하였으되 역시 석존(釋尊)에게 가르치심을 받은 것은 아니로다. 통틀어 화엄회자(華嚴會座)의 대보살(大菩薩)이나 천룡(天龍) 등(等)은 석존(釋尊) 이전(以前)에 불사의해탈(不思議解脫)에 주(住)하였던 대보살(大菩薩)이니라. 석존(釋尊)의 과거(過去) 인위(因位)의 제자(弟子)인 것일까, 아니면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선불(先佛)의 제자(弟子)인 것일까, 일대교주(一代敎主)인 시성(始成)의 정각(正覺)의 부처의 제자(弟子)는 아니로다. 아함(阿含) 방등(方等) 반야(般若)의 시(時)에 사교(四敎)를 부처가 설(說)하셨을 때야 말로 겨우 제자(弟子)가 생기게 되었음이라. 이 것도 또한 부처의 자설(自說)이기는 하지만 정설(正說)은 아니로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방등(方等)과 반야(般若)의 별(別) 원(圓) 이교(二敎)의 의취(義聚)를 벗어나지 않았느니라. 그 별(別) 원(圓) 이교(二敎)는 교주(敎主) 석존(釋尊)의 별(別) 원(圓) 이교(二敎)가 아니로다. 법혜(法慧) 등의 원별이교(圓別二敎)이니라. 이들 대보살(大菩薩)은 남의 눈에는 부처의 제자(弟子)인가 하고 보이지만 실은 부처의 스승님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로다. 세존(世尊)은 그 보살(菩薩)의 소설(所說)을 청문(聽聞)하여 지(智)를 연 후에 거듭 방등(方等) 반야(般若)의 별(別) 원(圓)을 설(說)하였으니 모습도 다르지 않은 화엄경(華嚴經)의 별(別) 원(圓) 이교(二敎)이니라. 그러므로 이들 대보살(大菩薩)은 석존(釋尊)의 스승이로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들 보살(菩薩)을 열거(列擧)하여 선지식(善知識)이라고 설(說)해졌음은 이때문이니라. 선지식(善知識)이라 함은 오로지 스승도 아니고 오로지 제자(弟子)도 아닌 것이니라. 장(臧) 통(通) 이교(二敎)는 또 별(別) 원(圓)의 지류(枝流)이니 별(別) 원(圓) 이교(二敎)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장(臧) 통(通) 이교(二敎)를 아느니라. 사람의 스승이라 함은 제자(弟子)가 알지 못하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 스승이니라. 예(例)컨대 부처 이전의 모든 인천(人天) 외도(外道)의 이천(二天) 삼선(三仙)의 제자(弟子)이며 구십오종(九十五種)까지 유파(流派)가 생겼지만, 삼선(三仙)의 견(見)을 벗어나지 못함이라. 교주석존(敎主釋尊)도 그에게 배워 전해서 외도(外道)의 제자(弟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무사지(無師智)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인천(人天)도 대사(大師)라도 숭앙(崇仰)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전사미(前四味)의 동안은 교주석존(敎主釋尊)이 법혜보살(法慧菩薩) 등(等)의 제자(弟子)이니라. 예(例)컨대 문수(文殊)는 석존(釋尊)의 구대(九代)의 스승이라 함과 같으니라. 통상(通常)은 제경(諸經)에는 불설일자(不說一字)라고 설(說)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니라.
부처가 성수(聖壽) 칠십이(七十二)의 해에 마갈제국(摩竭提國) 영추산(靈鷲山)이라는 산(山)에서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說)하시었는데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들을 들어 지엽(枝葉)을 그 속에서 포함(包含)시켜서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고 취소(取消)하셨음은 이 때문이로다. 이 때야 말로 제대보살(諸大菩薩)과 모든 천인(天人)들은 당황하여 실의(實義)를 청(請)하겠노라고 말씀드렸었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실의(實義)라고 생각되는 일이 한 말씀 있었지만 아직 실(實)이 없었다. 비유(譬喩)컨대 달이 뜨려고 하여 그 실체(實體)는 동산(東山)에 가리워졌고 빛은 서산(西山)에 비추지만 사람들이 달의 실체(實體)는 보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의 약개삼현일(畧開三顯一)의 때에 부처는 약(畧)해서 일념삼천(一念三千) 심중(心中)의 본회(本懷)를 말씀하셨느니라. 처음 있는 일이라 두견이의 처음 우는 소리를 잠이 덜 깬 사람이 한 마디 들은 것과 같이 달이 산 끝에 나왔지만 구름에 덮여 있듯이 희미하였는데 사리불(舍利佛) 등(等)은 놀라서 제천(諸天) 용신(龍神) 등(等), 그 수(數)가 항사(恒沙)와 같으며 부처를 구(求)하는 모든 보살대수(菩薩大數)는 팔만(八萬)이 있느니라 또 모든 만억국(萬億國)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와서 합장(合掌)하여 경심(敬心)을 가지고 구족(具足)의 도(道)를 들으려고 원한다는 등(等), 청(請)하였느니라. 경문(經文)의 참뜻은 사미(四味) 삼교(三敎) 사십여년(四十餘年)동안 아직도 듣지 못한 법문(法門)을 듣고 싶다고 청(請)했다는 것이니라. 이 글월에 구족(具足)의 도(道)를 듣고자 원한다고 함은 대경(大經)에 가로되 「살(薩)이란 구족(具足)의 의(義)에 이름하노라」등운운(等云云). 무의무득대승사론현의기(無依無得大乘四論玄義記)에 가로되 「사(沙)란 역(譯)하여 육(六)이라 하니 호법(胡法)에는 육(六)으로써 구족(具足)의 의(義)로 하느니라」등운운(等云云). 길장(吉臧)의 소(疏)에 가로되 「사(沙)란 번(翻)하여 구족(具足)이라 함」등운운(等云云). 천태(天台)의 현의(玄義)의 팔(八)에 가로되 「살(薩)이란 범어(梵語)이며 여기서는 묘(妙)라고 번(翻)하느니라」등운운(等云云). 부법장(付法臧)의 제십삼(第十三) 진언(眞言) 화엄(華嚴) 제종(諸宗)의 원조(元祖)이고 본지(本地)는 법운자재왕여래(法雲自在王如來)이며 적(迹)으로는 용맹보살(勇猛菩薩)이라고 칭(稱)한 초지(初地)의 대성(大聖)의 대지도론천권(大智度論千卷)의 간심(肝心)에 가로되「살(薩)이란 육(六)이라」등운운(等云云), 妙法蓮華經이라고 함은 한어(漢語)이니라, 월지(月支)에서는 살달마분다리가소다람(薩達磨分陀利伽蘇多攬)이라고 한다. 선무외삼장(善無畏三臧)의 법화경(法華經)의 간심(肝心) 진언(眞言)에 가로되「담謨三曼陀沒駄南歸命普佛陀唵三身如來阿阿暗惡開示悟入薩縛勃陀一切佛枳攘知娑乞蒭毘耶見아아담三沙縛如虛空性羅乞叉儞離塵相也薩哩達磨正法浮陀哩迦白蓮華蘇駄覽經惹入吽遍직住發歡喜縛曰羅堅固羅乞叉함擁護吽空無相無願娑婆訶決定成就」이 진언(眞言)은 남천축(南天竺)의 철탑(鐵塔)속에 있는 법화경(法華經)의 간심(肝心)의 진언(眞言)이니라, 이 진언(眞言)가운데 살리달마(薩哩達磨)라고 하는 것은 정법(正法)이니라. 살(薩)이라고 하는 것은 정(正)이로다. 정(正)이라 하는 것은 묘(妙)이니라, 묘(妙)는 정(正)이니라, 정법화(正法華) 묘법화(妙法華)라 함은 이것이니라. 또 妙法蓮華經의 위에 南無(나무)라는 이자(二字)를 두었으니 南無妙法蓮華經가 이것이니라. 묘(妙)란 구족(具足)이고 육(六)이란 육도만행(六度萬行)이니 모든 보살(菩薩)의 육도만행(六度萬行)을 구족(具足)하는 모습을 듣고자 생각한다는 것이로다. 구(具)란 십계호구(十界互具)이고 족(足)이라 함은 일계(一界)에 십계(十界)가 있으면 당위(當位)에 여계(餘界)가 있음이니 만족(滿足)의 의(義)이니라. 이 경(經) 일부팔권(一部八卷) 이십팔품(二十八品)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가 하나 하나에 모두 묘(妙)의 일자(一字)를 갖추어서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불타(佛陀)이니라. 십계(十界)에 모두 기계(己(界)의 불계(佛界)를 나타냄이라. 묘락(妙樂)이 가로되「역시 불과(佛果)를 갖춤이라. 여과(餘果)도 또한 그러하니라」등운운(等云云). 부처가 이에 답(答)하여 가로되「중생(衆生)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열게 하려 함」등운운(等云云). 중생(衆生)이라함은 사리불(舍利佛) 중생(衆生)이라 함은 일천제(一闡提) 중생(衆生)이라함은 구법계(九法界)이니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는 이에 만족(滿足)함이라. 「나는 본래(本來) 서원(誓願)을 세우되 일체(一切)의 중(衆)으로 하여금 나와 여(如)히 동등(同等)하게 하여 다름이 없게 하려고 원
하였던 바 내가 옛날에 원(願)했던 대로 지금은 이미 만족(滿足)하였느니라」등운운(等云云).
제대보살(諸大菩薩) 제천(諸天) 등(等)은 이 법문(法門)을 듣고 영해(領解)하여 가로되 「우리들은 옛부터 이제까지 자주 세존(世尊)의 설(說)을 들어 왔사오나 아직 한 번도 이와 같은 심묘(深妙)한 상법(上法)을 듣지 못했음이라」등운운(等云云), 전교대사(傳敎大師) 가로되 「우리들은 옛부터 자주 세존(世尊)의 설(說)을 들음이라 함은 옛날 법화경(法華經)의 전(前)에 화엄(華嚴) 등(等)의 대법(大法)을 설(說)함을 들었어도 라는 뜻이니라. 아직 한 번도 이와 같은 심묘(深妙)한 상법(上法)을 듣지 않았다고 함은 아직도 법화경(法華經)의 유일불승(唯一佛乘)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다고 함이라」등운운(等云云), 화엄(華嚴) 방등(方等) 반야(般若) 심밀(深密) 대일(大日) 등(等)의 항하사(恒河沙)의 제대승경(諸大乘經)은 아직 일대(一代)의 간심(肝心)인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대강(大綱)이고 골수(骨髓)인 이승작불(二乘作佛) 구원실성(久遠實成) 등(等)을 아직 듣지 못했다고 영해(領解)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