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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那密實聖訥祗慈悲炤智智證紀』
『奈勿大聖神帝紀(나물대성신제기)』
月嬭神經曰 黃鷄 四月 太弟末仇角干 晝寢于花林 夢見黃龍昇天 雷電風雨 大驚而起 時休禮公主 亦以花林廟主 依神楹而昏迷 忽見百花爛開 有五色彩鳳 自花中出 飛入懷中 抱而見之 乃末仇角干也 奇其夢 而潛步出 伺末仇角干之齋房 角干走出 抱之曰 “吾有好夢 願主成之” 公主曰 “妾亦有夢無 乃神賚也” 乃相抱浴 于神池 而禱于廟神 遂結鴛鴦之好 果有娠 味鄒仙帝聞之 命吉于桃山 爲夫婦 角干時已五十三春秋 公主才十有九春秋 而雲濃雨厚 情若膠漆 盖天定配匹也 仙帝大喜曰 “吾弟之福 勝于朕 百倍” 賞賜甚中 初達禮太后夢見 金色孔雀 而生仙帝女 乃休禮公主也 述禮太后夢見 金色大鳥 而生味鄒仙帝 乃仇道葛文王子也 後五年 又夢白大馬入懷 告于仇道王 王適有疾 不能成其好 命末昕角干成之 生末仇角干 故仙帝心知 大統所歸故也 主旣娠 角干朝朝抱而洗之 白鬚皓明 玉體豊膩 達禮太后戱之曰 “汝夫 以白鬚垂汝腹 而抱汝 汝爲白鬚 而愛汝夫乎” 主曰 “夫乃父帝之胞弟 而國之大柱也 雖非白鬚 豈不愛乎” 主乃 以錦囊威其鬚曰 “母后戱我 無使母后見抱我也” 角干曰 “父母之慈也 可近而視之 何爲避乎” 仙帝聞之曰 “是也” 乃命入桃山 居帝之側 帝與達后 朝暮至 而愛撫之 至翌年 金狗 三月 日益漲 帝與達后爲之 親禱于聖母 命角干曰 “謁花林世神” 至望後 初昏 雷雨 忽作胎動 而入産 達后親奉神火 而撫之 主乃抱角干之膝 而娩分 瑞氣玲瓏 天香滿室 聖子呱呱 而誕 俊逸英邁大異凡兒 仙帝亦至 命角干洗之 而親賜紫衣曰 “今日 始得龍孫 朕不勝喜” 乃命奈勿 加奴婢 給神米 公主角干之喜 無以形也 魚水比翼之情 愈往愈固 聖子鞠養之樂 日甚一日
월내신경(月嬭神經)에서 말한다.
『 황계(黃鷄:己酉, AD349년) 4월, 태제(太弟) 말구각간(末仇角干)이 화림(花林)에서 깊이 잠이 들었는데(盡寢) 꿈에 황룡(黃龍)이 승천하며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침을 보고 크게 놀라 일어났다. 그 때에 휴례공주(休禮公主) 또한 화림묘주(花林廟主)로서 신기둥(神楹)에 기댄 채 혼미(昏迷)한 상태였는데, 홀연 백화(百花)가 흐드러지게 피고 오색빛깔의 봉황(鳳)이 꽃 가운데로부터 나와 품속으로 날아들므로 얼싸안고 그를 보니 곧 말구각간이었다.
그 꿈을 기이하게 여기고 몰래 걸어 나와 말구각간의 재방(齋房)을 엿보니 각간이 뛰쳐나와 (공주를) 안으며 말했다.
“내가 좋은 꿈을 꾸었으니 바라건대 공주가 이루어주시오.”
공주가 말했다.
“첩 또한 꿈을 꾸어 신의 뇌사(神賚)가 없는가 했습니다.”
이에 서로 부여안고 신지(神池)에 목욕하고는 묘신(廟神)에게 기도를 올리고 마침내 원앙의 아름다움을 맺으니 과연 태기가 있었다.
미추선제(味鄒仙帝)가 이를 듣고 도산(桃山)에서 길례를 올려 부부가 될 것을 명하였다.
각간은 그 때 이미 쉰셋의 춘추였고, 공주는 열아홉 살의 춘추였으나 구름은 짙고 비는 진하여, 정(情)이 마치 아교와 옻칠 같았으니 대개 하늘이 정한 배필이었다.
선제(仙帝)는 크게 기뻐하여 말하길 “우리 아우의 복(福)이 짐보다 백배 낫다.”라 하며 상을 내림이 심히 많았다.
애초에 달례태후(達禮太后)가 꿈에 금색공작(金色孔雀)을 보고서 (미추)선제(仙帝)의 딸 곧 휴례공주(休禮公主)를 낳았다. 술례태후(述禮太后)는 꿈에 금색대조(金色大鳥)를 보고 미추선제(味鄒仙帝)를 낳았으니 곧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아들이다. 5년 뒤에 다시 또 하얀 큰말(白大馬)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구도왕(仇道王)에게 고하였는데 왕은 마침 병질이 있어 그 좋음(好)을 이룰 수 없자 말흔각간(末昕角干)에게 명하여 이루게 하고 말구각간(末仇角干)을 낳았다. 그런고로 선제(仙帝)는 심중에 대통(大統)이 돌아갈 연고인 바를 안 것이다.
공주가 이미 잉태를 하자 각간은 아침마다 그를 안고 씻기는데 흰 수염(白鬚)은 새하얗게 밝고(皓明) 옥체는 풍만하고 반지르르하니 달례태후(達禮太后)가 희롱하여 말했다.
“네 남편이 흰 수염을 네 배에 드리우고 너를 안으니 네가 흰 수염을 위해서 네 남편을 아끼느냐?”
공주가 말했다.
“남편은 곧 부제(父帝)의 포제(胞弟)이고 나라의 큰 기둥입니다. 비록 흰 수염이 아니라도 어찌 아끼지 않겠습니까?”
공주가 이에 비단주머니로 그 수염을 담아 넣고 말했다.
“모후(母后)가 나를 놀리니 모후로 하여금 나를 안는 것을 못 보게 하겠습니다.”
각간이 말했다.
“부모의 사랑이다. 가까이하여 보게 할 것이지 어찌 피해야 하는가?”
선제(仙帝)가 이를 듣고 “옳다.”하며 이에 도산(桃山)으로 들어와 제(帝)의 곁에 거처할 것을 명하고 제(帝)와 달후(達后)가 아침 저녁으로 방문해서 그를 애무(愛撫)하였다.
이듬해 금구(金狗:경술, AD350년) 3월에 이르러 (배가) 더욱 불어나자 제(帝)와 달후(達后)가 그를 위하여 친히 성모(聖母)에게 기도하고 각간 일양(日陽)에게 명하여 화림세신(花林世神)에게 참배하도록 하였다. 보름 뒤 초저녁에 이르러서 뇌우(雷雨)가 홀연히 일어나고 태기가 동해서 산실로 들어가니 달후(達后)가 친히 신화(神火)를 받들고 그를 어루만졌다. 공주가 마침내 각간의 무릎을 안고서 분만하니 서기(瑞氣)가 영롱하고 천향(天香)이 실내에 가득찼다. 성자(聖子)가 고고히 태어나니 준일(俊逸)하고 영매(英邁)하였으며 보통아이와는 크게 달랐다. 선제(仙帝) 또한 이르렀는데 각간에게 명하여 아기를 씻게 하고 친히 자의(紫衣)를 내리며 말했다.
“오늘 비로소 용손(龍孫)을 얻으니 짐은 기쁨을 이길 수 없다.”
이에 나물(奈勿)이라 이름하고 노비(奴婢)를 더하고 신미(神米)를 하사하니 공주와 각간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어수(魚水)와 비익(比翼)의 정(情)은 갈수록 더해지고 점점 굳어졌으며 성자(聖子)를 국양(鞠養)하는 즐거움은 하루 하루 날로 깊어갔다.
※월내신경(月嬭神經)은 달례태후(達禮太后)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月嬭와 達禮는 우리말의 ‘달래’에 해당하는 이름을 동음이사(同音異寫)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따라서 월내신경(月嬭神經)은 달례태후(達禮太后) 생전의 저작으로 추정되지만 본문 인용의 단락을 결정짓기가 매우 애매합니다. 편의상 여기서 인용을 끊기는 했지만 이하의 기록 역시 公主 또는 聖子를 (보이지 않는) 주어로 하는 특정 시점의 기사가 계속 되므로 어디까지가 월내신경(月嬭神經)의 인용이고 출전인지 정확한 구분이 어렵습니다.
*庚戌, AD350년, 儒禮尼今紀(유례니금기)의 원년.
六月 主與角干抱聖子 謁仇道世神廟 始宴骨門
6월, 공주와 각간은 성자(聖子)를 안고 구도세신(仇道世神)의 묘(廟)에 참배(謁)하고, 비로소 골문(骨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主= 休禮宮主(휴례궁주)
*角干= 末仇角干(말구각간)
*聖子= 奈勿(나물)
九月 狗徒請奉爲君 許之
9월, 狗徒(구도)가 (聖子를) 奉(봉)하여 君(군)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角干親祀蚊川
각간(角干)이 친히 문천(蚊川)에 제사지냈다.
是歲大豊角干庄有嘉禾瑞穗田民稱賀曰聖子穀也角干乃奉于仙帝帝曰可祀世神而分之乃命達后與公主齋沐而薦于花林
이 해에 대풍(大豊)이 들었는데 각간의 농장(角干庄)에 가화(嘉禾)와 서수(瑞穗)가 있자 전민(田民)들이 칭하(稱賀)하여 이르기를 “성자곡(聖子穀)”이라 했다. 각간이 이에 선제(仙帝)께 받들어 올리자 선제(仙帝)가 말했다.
“세신(世神)께 제사 지내고 그를 분배해야 할 것이다.”
이에 달후(達后)에게 명하여 공주와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화림(花林)에 천신(薦)토록 하였다.
十二月 末昕角干薨
12월, 말흔각간(末昕角干)이 훙(薨)하였다.
*73살.
白豕 二月 主與聖子謁述禮太后陵 所非王陵 月白陵 紫鳳太后陵 末昕角干陵
白豕(백시, 辛亥, AD351년) 2월, 공주가 성자(聖子)와 함께 술례태후(述禮太后)의 陵(릉)과 소비왕(所非王)의 陵(릉), 월백(月白)의 陵(릉), 자봉태후(紫鳳太后)의 陵(릉), 말흔각간(末昕角干)의 陵(릉)을 참배(謁)하였다.
*主= 休禮宮主(휴례궁주)
*聖子= 奈勿(나물)
水午 二月 公主生妹君冶勿
水午(수오, 癸丑, AD353년) 2월, 공주가 매군(妹君:여동생) 야물(冶勿)을 낳았다.
木虎 正月 角干六軍頭上公主亦具戎服騎馬受將士朝禮聖子亦欲騎馬公主乃抱而上馬雖馳而無懼色公主指釰戟將士曰彼不懼乎聖子皆吾臣也何懼之有光明后聞之壯其言曰吾女道留可以妻之
木虎(목호, 甲寅, AD354년) 1월, 각간(角干)은 육군두상(六軍頭上)이므로 공주 또한 융복(戎服)을 갖춰 입고서 말을 타고 장사(將士)들의 조례(朝禮)를 받았다. 성자(聖子) 역시 말에 타고자하므로 공주가 이에 품에 안고서 말에 올랐는데 비록 내달려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주가 검극(釰戟)의 장사(將士)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무섭지 않느냐?”하자 성자가 말했다.
“모두 내 신하입니다. 무서울 게 무엇이 있습니까?”
광명후(光明后)가 듣고는 그 말을 장하게 여겨 말했다.
“내 딸 도류(道留)로 가히 처(妻)를 삼을 수 있겠다.”
三月 始謁朝廟及尼今光明后乃召于道留公主宮置宴賜聖子綠綬緋衣
3월, 처음으로 시조묘(祖廟)에 참배하고 (유례) 닛금(尼今)을 배알하였다. 광명후(光明后)가 이에 도류공주(道留公主)의 궁(宮)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차리고 성자(聖子)에게 녹색인끈(綠綬)과 비색(붉은색)의복(緋衣)을 하사했다.
靑兎 三月 尼今賜骨品爵位命修道于好臨阿湌聖子曰願學仙帝道
請兎(청토, 乙卯, AD355년) 3월, (유례) 닛금(尼今)이 (성자에게) 골품(骨品)과 작위(爵位)를 내리고 호림(好臨) 아찬(阿湌)에게 도(道)를 닦을 것을 명하자 성자(聖子)가 말했다. “원컨대 선제(仙帝)의 도(道)를 배우고 싶습니다.”
六月角干公主與聖子冶勿入召文
6월, 각간과 공주는 성자(聖子)와 야물(冶勿)을 데리고 소문(召文)에 들어갔다.
火龍七月公主生弟君小勿
火龍(황룡, 丙辰, AD356년) 7월, 공주가 제군(弟君) 소물(小勿)을 낳았다.
赤蛇三月仙帝賜聖子帶及刀
赤蛇(적사, 丁巳, AD357년) 3월, 선제(仙帝)가 성자에게 띠(帶)와 칼(刀)을 하사했다.
五月光明后與道留來幸于宅聖子以其食讓于道留曰可與吾妻后奇其言命共食之
5월, 광명후(光明后)가 도류공주(道留公主)와 더불어 (공주의) 저택(宅)에 행차하였다. 성자(聖子)가 그 먹을 것을 도류(道留)에게 양보하며 “내 처에게 주겠다.”라고 하니 후(后)는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것을 함께 먹도록 명했다.
八月公主以錦衣獻道留公主光明后亦以木馬贈聖子行赤繩于嘉俳
8월, 공주가 도류공주(道留公主)에게 비단옷(錦衣)을 바치자 광명후(光明后) 역시 성자(聖子)에게 목마(木馬)를 보내서 한가위(嘉俳)에 적승(赤繩)을 행하였다.
※적승(赤繩) :부부의 인연을 맺는 일
黃馬 二月 陪仙帝奉祀花林仙帝大贊之曰進退得其節奠薦合其儀朕有孫也乃命學釰于父公末仇角干聖子曰願學活人釰父公曰聖人用光良將用威常夫用刃吾兒用光則可以祀上帝而理萬民
黃馬(황마, 戊午, AD358년) 2월, (성자가) 선제(仙帝)를 모시고 화림(花林)에서 제사를 받드니 선제(仙帝)가 그를 크게 칭찬하여 말했다.
“진퇴(進退)는 그 절도(節)를 얻었고 전천(奠薦)은 그 법도(儀)에 부합하니 짐은 손자(孫)를 가졌노라.”
이에 부공(父公) 말구각간(末仇角干)에게 검(釰)을 배우도록 명하니 성자(聖子)가 말했다.
“원컨대 활인검(活人釰)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공(父公)이 말했다.
“성인(聖人)은 광명(光)을 쓰며, 양장(良將)은 위엄(威)을 쓰며, 범부(常夫)는 칼날(刃)을 쓴다. 우리 아이가 광명(光)을 쓴다면 가히 상제(上帝)를 제사하여서 만민(萬民)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末仇角干以疾委家于大西公聖子與母主禱于靈廟不效而薨聖子號泣盡痛先是好臨公以末仇角干兵官與公主私悅至是公主欲以好臨公爲繼夫仙帝許之乃吉于鮑祠大西公不悅曰嫂當爲吾妻而好少艾負義信也聖子乃諫曰叔父則吾可以爲父兵官則不可公主撫之曰母之所夫卽汝父也 何言兵官可呼以父也
말구각간(末仇角干)이 병질 때문에 집안(家)을 대서지공(大西知公)에게 맡겼다. 성자(聖子)는 모주(母主)와 함께 영묘(靈廟)에서 기도하였으나 효험도 없이 (말구각간이) 훙(薨)하였다. 성자는 목놓아 울며 지극히 슬퍼하였다. 이에 앞서 호림공(好臨公)은 말구각간(末仇角干)의 병관(兵官)으로써 공주와 더불어 사사로이 좋아(悅)했는데 이에 이르러 공주가 호림공(好臨公)을 계부(繼夫)로 삼고 싶어 하자 선제(仙帝)가 그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올리니 대서지공(大西知公)이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했다.
“형수(嫂)는 마땅히 내 처가 되어야하나 젊고 잘생긴 것(小艾)을 좋아하여 의(義)와 신(信)을 등졌다.”
성자가 이에 (공주에게) 간하여 말했다.
“숙부라면 내가 아버지로 삼을 수 있지만 병관이라면 안됩니다.”
공주가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미의 남편인 바가 곧 네 아버지이다. 어찌 병관(兵官)이라 말하느냐? 아버지로 불러야 할 것이다.”
[末仇公長子冬九城九等假稱遺命欲妻公主公主不聽冬九等强陰之公主泣訴于■■(好臨) 仙帝乃流冬九而命歸好臨也
말구공(末仇公)의 장자 동구(冬九)와 성구(城九)등이 거짓으로 유명(遺命)이라 칭하며 공주를 처로 삼고자 했으나 공주가 듣지 않자 동구(冬九)등이 강제로 음행을 하였다. 공주가 울며 ■■에게 호소하니, 선제(仙帝)가 이에 동구(冬九)를 유배시키고 호림(好臨)에게 시집가도록 명했다. ]
[ ]안은 원문의 세주(細註). <아달라기>에 의하면 판독이 안되는 글자 ■■은 호림(好臨)으로 확인됨.
五月 光明后召聖子于道留宮行馬祭仍命留于宮中時休禮公主與新夫好臨公情好忌聖子諫言而請於后也聖子九歲而道留七歲情意相得不欲相離光明后愛之曰雛鳳凰甚可愛及雍判生聖子亦飮后乳
5월, 광명후(光明后)가 성자를 도류궁(道留宮)으로 불러 마제(馬祭)를 행하고 그대로 궁중(宮中)에 머물도록 명했다. 당시 휴례공주(休禮公主)가 새 남편 호림공(好臨公)과 정분이 좋으므로 성자(聖子)의 간하는 말을 꺼리어 후(后)에게 청탁한 것이다. 성자(聖子)는 9세이고 도류(道留)는 7세였는데 서로 정의(情意)가 들어맞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광명후가 그를 사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어린 봉황(鳳凰)들이 심히 사랑스럽도다!”
옹판(雍判)이 태어나기에 이르자 성자(聖子) 또한 후(后)의 젖(乳)을 마셨다.
土羊 五月 休禮公主生好臨公子好勿思見聖子使人迎之后命與道留覲之公主乃抱聖子而泣聖子曰吾愛好勿不復妬兵官與母宿也公主喜曰母愛兵官如汝愛道留主也聖子頷之自是累出覲母
土羊(토양, 己未, AD359년) 5월, 휴례공주(休禮公主)가 호림공(好臨公)의 아들 호물(好勿)을 낳았다. 성자(聖子)에게 보일 생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맞아오게 하니 (광명)후(后)는 도류(道留)와 함께 가서 뵙도록 명하였다. 공주가 마침내 성자를 안고서 울음을 터뜨리자 성자가 말했다.
“내가 호물(好勿)을 사랑하니 다시는 병관을 시샘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머무르겠습니다.”
공주는 기뻐하며 “에미가 병관을 아끼는 것은 네가 도류공주(道留主)를 아낌과 같은 것이다.”하니 성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로부터 자주 (궁을) 나가 어머니를 뵈었다.
六月禮生宮生大西公子馬兒
6월, 예생궁(禮生宮)이 대서공(大西公)의 아들 마아(馬兒:실성)를 낳았다.
白猿三月仙帝賜紫帶紅紋神衣于聖子碧帶蜻蛉神衣于道留命謁祖廟及尼今尼今乃加爵祿新建道留宮置其隸屬光明后以其尙幼勿許新宮時大西公伊伐湌
白猿(백원, 庚申, AD360년) 3월, 선제(仙帝)가 성자(聖子)에게 보라색 허리띠(紫帶)와 홍문신의(紅紋神衣)를 하사하고, 도류(道留)에게는 푸른색 허리띠(碧帶)와 청령신의(蜻蛉神衣)를 내리고 시조묘(祖廟)와 닛금(尼今)을 배알하도록 명했다. (유례) 닛금(尼今)께서는 이에 작록을 더하고 새로 도류궁(道留宮)을 세우도록 하여 광명후(光明后)에게 예속해 두고 아직은 어리므로 신궁(新宮)을 허용하지 말도록 했다.
당시 대서공(大西公)은 이벌찬(伊伐湌)이었다.
八月光明后生保反公主
8월, 광명후(光明后)가 보반공주(保反公主)를 낳았다.
大西公妃禮生宮得尼今寵入宮休禮公主憐其獨居詣大西公宅私通好臨公知之怒大西公曰嫂爲弟妻誰敢言乎尼今聞之曰大西是也大西公乃欲行吉而休禮不忍棄好臨間日而兩處時聖子與道留學歌于尼今尼今爲之歌曰有龜住海其穴在山聖子不解其意禮生笑曰背三神山而足蹴八海故也尼今曰又有別意禮生止之曰休禮以我之故兩難汝何嘲之聖子乃解請以母歸大西知
대서공(大西公)의 비(妃) 예생궁(禮生宮)이 닛금(尼今)의 총애를 얻어 입궁하자 휴례공주(休禮公主)는 그 홀로 기거함을 딱하게 여기고 대서공댁(大西公宅)에 가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호림공(好臨公)이 이를 알고 화를 내자 대서공(大西公)이 말했다.
“형수(嫂)가 아우의 처가 되는데 누가 감히 말하는가?”
닛금(尼今)이 이를 듣고 “대서(大西)가 옳다”하였다.
대서공(大西公)이 이에 길례를 치르려하자 휴례(休禮)는 차마 호림(好臨)을 버리지 못하고 격일(間日)로 양쪽에 몸을 두었다.
때에 성자(聖子)는 도류(道留)와 더불어 닛금(尼今)에게 노래를 배웠는데 닛금(尼今)이 그를 위하여 노래하였다.
“거북이가 바다에 머무르나 그 굴은 산에 있노라(有龜住海其穴在山)”
성자(聖子)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생(禮生)이 웃으며 말했다.
“등에 삼신산(三神山)을 지고 발로 팔해(八海)를 차는 까닭이다.”
닛금(尼今)이 말하기를 “또 다른 뜻이 있다.”하니 예생(禮生)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휴례(休禮)가 나 때문에 양쪽으로 어려운데 너(汝)가 어찌 그를 조롱하는가?”
성자(聖子)가 마침내 이해하고 어머니를 대서지(大西知)에게 가도록 청하였다.
金鷄 正月 休禮公主從聖子請改嫁大西公行吉鮑祠尼今與禮生主之大西公六軍頭上
金鷄(금계, 辛酉, AD361년) 1월, 휴례공주(休禮公主)가 성자(聖子)를 좇아서 대서공(大西公)에게 개가할 것을 청하였다.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니 닛금(尼今)이 예생(禮生)과 함께 그를 주재하였다.
대서공(大西公)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이 되었다.
三月 尼今幸大西宅宴飮休禮公主奉歌受幸尼今自是累幸封休禮爲宮主加田宅奴婢
3월, 닛금(尼今)이 대서택(大西宅)에 행차하여 연회하고 마셨다. 휴례공주가 노래를 받들어 올리고 총행(幸)을 받았다. 닛금(尼今)이 이로부터 자주 행차(幸)하니 휴례(休禮)를 봉하여 궁주(宮主)로 삼고 용택(用宅)과 노비(奴婢)를 더하였다.
七月蝶凰宮生副君女潤凰聖子奉歌
7월, 접황궁(蝶凰宮)이 부군(副君)의 딸 윤황(潤凰)을 낳으니 성자(聖子)가 노래를 바쳐올렸다.
十月白海宮生尼今子道寧休禮宮入賀尼今
10월, 백해궁(白海宮)이 닛금(尼今)의 아들 도령(道寧)을 낳으니 휴례궁(休禮宮)이 들어가 닛금(尼今)에게 하례했다.
水狗 四月 道留宮成移居之
水狗(수구, 壬戌, AD362년) 4월, 도류궁(道留宮)이 낙성되자 그리 옮겨서 거처하였다.
五月與道留宮行吉桃山
5월, (성자가) 도류궁(道留宮)과 더불어 도산(桃山)에서 길례(吉)를 치렀다.
六月 與光明后浴于新林神池后曰汝年十三能洗朕躬不久可以行祥受祚隆準鳳皃而不帝者未有
6월, 광명후(光明后)와 더불어 신림(新林)의 신지(神池)에서 목욕하니 후(后)가 말했다.
“네 나이 열셋으로 능히 짐의 몸을 씻으니 오래지않아 가히 행상수조(行祥受祚)할 것이다. 코가 우뚝(隆準)하고 봉황의 모습(鳳皃)이면서 제(帝)가 아니었던 자는 아직 없었노라.”
九月 光明后生內留公主
9월, 광명후(光明后)가 내류공주(內留公主)를 낳았다.
十月仙帝崩
10월, 선제(仙帝)가 붕(崩)했다.
十一月光明后與尼今行祥
11월, 광명후(光明后)가 닛금(尼今)과 더불어 상례(祥)를 행하였다.
※행상(行祥) : 대상(大祥) 소상(小祥)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함인 듯.
黑豕 正月 達禮太后爲桃山主
黑豕(흑시, 癸亥, AD363년) 1월, 달례태후(達禮太后)를 도산주(桃山主)로 삼았다.
二月 尼今與光明后祀祖廟休禮宮主生大西公子大勿
2월, 닛금(尼今)이 광명후(光明后)와 더불어 시조묘(祖廟)에 제사하였다. 휴례궁주(休禮宮主)가 대서공(大西公)의 아들 대물(大勿)을 낳았다.
三月 始學弓馬禮生宮生尼今女吉莫
3월, 비로소 궁술과 기마를 배웠다. 예생궁(禮生宮)이 닛금(尼今)의 딸 길막(吉莫)을 낳았다.
四月 群神尊光明后爲神后 達準生好臨子西今
4월, 군신(群臣)들이 광명후(光明后)를 존숭하여 신후(神后)로 삼았다. 달준(達準)이 호림(好臨)의 아들 서금(西今)을 낳았다.
靑鼠 三月 與母宮謁聖母福父公
靑鼠(청서, 甲子, AD364년) 3월, 모궁(母宮)과 더불어 성모(聖母)를 참배하고 부공(父公)의 복을 빌었다.
四月莫姬生副君子奈己
4월, 막희(莫姬)가 부군(副君)의 아들 나기(奈己)를 낳았다.
十月神后生尼今女其炭
10월, 신후(神后)가 닛금(尼今)의 딸 기탄(其炭)을 낳았다.
十二月副君基臨受禪
12월, 부군(副君) 기림(基臨)이 선양을 받았다.
大西公以六軍頭上讓于長昕公曰兵權不可與人汝可爲之長昕公曰大任不可以禪解不受
대서공(大西公)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을 장흔공(長昕公)에게 양보해 넘기며 말했다.
“병권은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나 그대는 가히 할 수 있다.”
장흔공(長昕公)이 말했다.
“대임(大任)은 선양으로 해결(禪解)해서는 안됩니다.”
『以長昕爲六軍頭上 大西知將欲致仕 故讓于長昕 曰 “兵權不可與人 汝可爲之” 長昕曰 “大任不可 禪解” 而不受 后問之 知長昕之公 仍受之 賜衣酒于長昕母乳帽宮主 曰 “叔母有二子爲股肱” 故壽之』
※<아달라기>에는 위의 기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흔(長昕)을 육군두상(六軍頭上)으로 삼았다. 대서지공이 장차 사임하고자한 까닭에 장흔에게 양보하여 말하기를 “병권은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나 너는 가히 할 수 있다.”하니 장흔이 말하기를 “대임은 선양으로 해결(禪解)해선 안됩니다.”하고 받지 않았다. 후(后)가 그를 듣고 장흔(長昕)의 공변(公)됨을 알고 그대로 그에게 제수했다. 의복과 주식을 장흔의 어머니 유모궁주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숙모는 두 아들을 가져 고굉(股肱)이 된 고로 그를 경하(壽)함입니다.”하였다.
靑牛 正月 長盺公六軍頭上 尼今壽乳帽宮主 時年八十九 而尙康寧
靑午(청오, 乙丑, AD365년) 1월, 장흔공(長昕公)이 육군두상(六軍頭上)이 되었다. 닛금(尼今)이 유모궁주(乳帽宮主)를 축수하였는데 때에 나이 89세였으나 오히려 강녕(康寧)하였다.
三月 道留公主絳服于豆乙宮 妹君初勿生
3월, 도류공주(道留公主)가 두을궁(豆乙宮)에서 강복(絳服?)하였다. 매군(妹君) 초물(初勿)이 태어났다.
※강복(絳服) : 진홍색 복장을 입다?
五月 與妃道留入蚊川宅
5월, 비(妃) 도류(道留)와 더불어 문천택(蚊川宅)에 들어갔다.
火虎 五月 復入蚊川宅 宴狗徒
火虎(화호, 丙寅, AD366년) 5월, 다시 문천택(蚊川宅)에 들어가, 구도(狗徒)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十月 神后生女束炭 達隼生好臨女西林
10월, 신후(神后)가 딸 동탄(東炭)을 낳았다. 달준(達準)이 호림(好臨)의 딸 서림(西林)을 낳았다
赤兎正月聖子夢見赤白兎合爲一大白羊問于母宮母宮曰白兎我也兆在我當發於白羊之年乃行兎祭又問於達禮太后后曰兆在百年之后
赤兎(적토, 丁卯, AD367년) 1월, 성자(聖子)는 꿈에 붉은토끼(赤兎)와 흰토끼(白兎)가 합쳐져 하나의 큰 백양(一大白羊)이 되는 것을 보고 모궁(母宮)에게 물으니 모궁(母宮)이 말했다.
“흰토끼(白兎)는 나다. 조짐이 나에게 있으니 마땅히 백양(白羊)의 해(年)에 발흥하리라.”
이에 토제(兎祭)를 지냈다.
다시 달례태후(達禮太后)에게 묻자 후(后)가 말했다.
“조짐이 백년의 뒤(百年之后)에 있다”
二月 先今儒禮崩
2월, 先今(선금) 儒禮(유례)가 崩(붕)하였다.
三月 進爵阿久
3월, 작위가 아찬(阿湌)으로 진급되었다.
四月 好臨公卒 母宮悲泣曰 好夫思我 而欲見我 不能往見吾其罪 乃祭公象尼今慰之 公尼今之胞弟 年才三十五
4월, 호림공(好臨公)이 졸(卒)하였다. 모궁(母宮)이 슬피 울며 말했다. “좋은 남편이 나를 생각하고 나를 보고 싶어도 와서 볼 수 없었으니 내가 그 죄로다.” 이에 공(公)의 조각상(象)에 제사하니 닛금(尼今)이 그를 위로하였다. 호림공(公)은 닛금(尼今)의 포제(胞弟)로서 나이 35세였다.
九月 以康世女千康 妻夫余太子吉須
9월,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을 부여태자(夫余太子) 길수(吉須)의 처(妻)로 하였다.
黃龍 二月 夫余獻馬
黃龍(황룡, 戊辰, AD368년) 2월,
7월, 제군(弟君) 용물(龍勿)이 태어났다. 七月弟君龍勿生
예생궁(禮生宮)이 닛금(尼今)의 아들 방기(房期)를 낳았다. 禮生宮生尼今子房期
9월, 유모궁주(乳帽宮主)가 훙(薨)하였으니 나해제(奈解帝)의 딸이었다. 모궁(母宮)이 말했다.
“옥모태후(玉帽太后)이다. 계도(鷄徒)의 주(主)가 되어 무릇 30년이니 대서공(大西公)의 어머니이다.”
九月乳帽宮主薨奈解帝女也母宮曰玉帽太后也爲鷄徒主凡三十年大西公之母也
※나해기(奈解紀)에 의하면 유모(乳帽)는 옥모(玉帽)의 딸로 확인이 됩니다. 따라서 원문의 ‘玉帽太后也(옥모태후다)’라는 문구는 ‘玉帽太后女也(옥모태후의 딸이다)’라고 해야 문맥이 통합니다. 아마도 남당선생이 전사하던 도중에 실수로 ‘玉帽太后女也’의 ‘女’자 하나를 빠뜨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土蛇二月神后生尼今女斤丹
土蛇(토사, 己巳, AD369년) 2월,신후(神后)가 닛금(尼今)의 딸 근단(斤丹)을 낳았다.
七月 聖子奉神后欲于蚊川 達隼生旱門子隼門
7월, 성자(聖子)가 신후(神后)를 받들어 문천(蚊川)에서 목욕하였다. 달준(達隼)이 한문(旱門)의 아들 준문(隼門)을 낳았다.
金馬(금마, 庚午, AD370년) 2월,
금마(金馬:경오) 2월, 도류(道留)가 딸 혜리(惠利)를 낳았다.
五月副君訖解受禪 與母宮遊蚊川
5월, 부군(副君) 흘해(訖解)가 선양을 받았다. 모궁(母宮)과 더불어 문천(蚊川)에서 노닐었다.
白羊 二月 母宮生子元勿 神后生女昔丹
白羊(백양, 辛未, AD371년) 2월, 모궁(母宮)이 아들 원물(元勿)을 낳았다.
신후(神后)가 딸 석단(昔丹)을 낳았다.
八月 達禮太后崩于桃山 白海公主代之 達禮后善於巫禱預知陰陽五運 時人神之曰 月嬭有神經 春秋六十九
8월, 달례태후(達禮太后)가 도산(桃山)에서 붕(崩)하니, 백해공주(白海公主)가 그를 대신하였다. 달례후(達禮后)는 무도(巫禱)와 예지(預知)와 음양(陰陽)과 오운(五運)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이 신(神)으로 여겨 말하기를 “월내(月嬭)는 신경(神經)을 가졌다” 라고 하였다. 춘추 69세였다.
十月 麗斯由與夫余戰死 子丘夫立
10월, 고구려(麗)의 사유(斯由)가 부여(夫余)와 더불어 싸우다 죽으니 아들 구부(丘夫)가 즉위했다.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1년.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41년(AD37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水袁 六月 基臨帝崩 春秋四十三 帝神后胞弟也 父曰乞淑角干 仁慈愛物 善歌詞 胞弟好臨公卒 哀之 不食肉 作歌 而悼之 神后止之 而不聽 遂禪 而養性羽化
水猿(수원, 壬申, AD372년) 6월, 기림제(基臨帝)가 붕(崩)하니 춘추가 43세였다. 제(帝)는 (광명)신후(神后)의 포제(胞弟)이고 아버지는 걸숙각간(乞淑角干)이었다. 인자(仁慈)하고 사물을 아꼈으며(愛物) 가사(歌詞)를 잘 하였다. 포제(胞弟)인 호림공(好臨公)이 졸(卒)하자 그를 슬퍼하여 고기를 먹지 않으며 노래를 지어서 그를 애도하였다. 신후(神后)가 그를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마침내 선양하고 자성(性)을 기르다가 우화(羽化)하였다.
道留生子霍伊
도류(道留)가 아들 곽이(霍伊)를 낳았다.
十一月禮生宮生聖子女桑期
11월, 예생궁(禮生宮)이 성자(聖子)의 딸 상기(桑期)를 낳았다.
黑鷄 五月 保反公主絳服執火 是日京都雨魚 道路躍鱗 兒童爭取 而食 大者盈尺
黑鷄(흑계, 癸酉, AD373년) 5월, 보반공주(保反公主)가 강복(絳服)하고 불을 잡았다(執火). 이날 경도(京都)에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도로위에서 비늘이 펄떡거리니 아동들이 다투어 취해서 먹었는데 큰 것은 한 자 정도 되었다.
木狗 首月 道留生子長畏 神后生帝女方丹
목구(木狗:갑술) 수월(首月:정월?), 도류(道留)가 아들 장외(長畏)를 낳았다. 신후(神后)가 제(帝)의 딸 방단(方丹)을 낳았다. 木狗 首月 道留生子長畏 神后生帝女方丹
七月母宮生女癸勿
7월, 모궁(母宮)이 딸 계물(癸勿)을 낳았다.
木豕 二月 神后以聖子爲副君
木豕(목시, 乙亥, AD375년) 2월, 신후(神后)가 성자(聖子)로 부군(副君)을 삼았다.
옹판(雍判)이 닛금(尼今)의 아들 옹기(雍己)를 낳았다. 雍判生尼今子雍己
3월, 내류공주(內留公主)가 강복(絳服)하고 불을 잡았다(執火). 三月內留公主絳服執火
4월. 예생궁(禮生宮)이 제(帝)의 아들 하기(河期)를 낳았다. 四月禮生宮生帝子河期
11월, 근초고(近肖古)가 죽(殂)고 근수(謹須)가 섰다. 발해(發亥)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十一月近肖古殂謹須立遣發亥吊之
※근수(謹須) : 앞서 적토 9월조에 나온 부여태자(夫余太子) 길수(吉須)와 동일인인 듯. 〈삼국사기〉에는 근구수(近仇首) 또는 수(須).〈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근귀수(近貴首).〈속일본기 續日本紀〉에는 구소(久素). 귀류(貴流←貴梳?) 등으로 표기됨.
火鼠 正月 尼今有疾 后與副君受朝
火鼠(화서, 丙子, AD376년) 1월, 닛금(尼今)이 질환이 있어 (광명)후(后)가 부군(副君)과 함께 조례를 받았다.
5월 도류비(道留妃)가 산고로 인하여 훙(薨)하였다. 후(后)는 보반궁(保反宮)을 계비(繼妃)로 삼도록 명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올렸다. 도류궁(道留宮)을 혜리택(惠利宅)으로 삼고 새로 보반궁(保反宮)을 세웠다.
五月道留妃固産而薨后命保反宮爲繼妃行吉鮑祠道留宮爲惠利宅新建保反宮
9월, 신후(神后)가 부군(副君)과 더불어 남교(南郊)에서 농작을 품평하고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열어 대접하고 돌아왔다. 때에 후(后)는 이미 부군(副君)의 아이(子)를 임신하고 있어서 부군을 아낌이 배로 깊었다. 유차(帷車:휘장을 친 수레)에서 노래하여 이르되 “하늘은 나이를 가지고 나는 아이를 가지네!”라고 하였다.
九月神后與副君品稼南郊宴父老而還時后已娠副君子愛副君倍甚歌于帷車曰天有年兮吾有子
11월, 신후(神后)가 부군(副君)의 아들 호동(好童)을 낳으니 부군(副君)이 그를 씻겼다. 十一月神后生副君子好童副君洗之
赤牛 正月 神后副君受朝
赤牛(적우, 丁丑, AD377년) 1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조례를 받았다.
四月 神后與副君滯于於桃山 執書華宗等力言災異重出不可無善政 尼今乃決意行禪 禮生生大西知女唐期 行大場
4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비로 막혀 도산(桃山)에 체류했는데, 집서(執書) 화종(華宗)등이 힘주어 말하였다,
“재이(災異)가 거듭해서 일어나니 선정(善政)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닛금(尼今)이 이에 뜻을 결정하고 선양을 거행하였다. 예생(禮生)이 대서지(大西知)의 딸 당기(唐期)를 낳았다.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奈勿王 즉위= AD37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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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 AD378년 기사 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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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 正月 行黃兎祭
3년(己卯, AD379년) 1월, 황토제(黃兎祭)를 행하였다.
패골(貝骨)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광현(光玄)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광현(光玄)은 흘해(訖解)의 딸이며 어머니는 광원(光元)이다. 선궁(仙宮)을 위로하고자 해서 그를 점지한 것이다. 貝骨伊伐湌光玄稟主玄訖解女也母光元也欲爲仙宮而点之
보반(保反)이 제(帝)의 딸 초리(初利)를 낳았다. 保反生帝女初利
공태(公兌)와 홀명(忽明)을 부여(夫余)에 사신으로 보냈다. 公兌忽明使夫余
4월, 왜병(倭兵)이 크게 밀어닥치자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허수아비(草偶) 수천개를 만들어 세우고 용사(勇士) 1천명을 부현(斧峴) 동원(東原)에 매복시켰다. 왜병이 과연 계략에 걸려들어 크게 패퇴하자 추격하여 그를 남김없이 사로잡았다.
四月倭兵大至造草偶數千于吐含山下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倭果中計大敗追擊盡獲之
5월, 북천(北川)에서 궁마(弓馬)를 크게 사열하였다. 五月大閱弓馬于北川
기탄(其炭)을 포제(胞弟) 호물(好勿)의 처로 하였다. 以其炭妻胞弟好勿
미사품(未斯品)을 행군두상(行軍頭上)으로 삼고, 삼생(三生)을 호군두상(護軍頭上)으로, 마아(馬兒)를 행군주부(行軍主簿)로 삼았다. 未斯品行軍頭上三生護軍頭上馬兒行軍主簿
7월, 유두(乳斗)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취선(翠宣)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乳斗伊伐湌翠宣稟主
진(秦)사람 부량(符良)등 7인이 표류하여 도착했다. 秦人符良等七人漂至
8월, 가배(嘉俳:한가위)를 행하였다. 八月行嘉俳
四年 正月 行白龍祭
4년(庚辰, AD380년) 1월, 백룡제(白龍祭)를 행하였다.
벽불(碧彿)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촌씨(村氏)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碧狒伊伐湌村氏稟主
3월, 부여(夫余)가 입공(入貢)하였다. 三月夫余入貢
등보(登保) 각간(角干)이 졸(卒)하였다. 登保角干卒
4월, 큰 물이 나서 산이 무너진 것이 13곳이었다. 四月大水山崩十三所
말구각간(末仇角干)을 추존하여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삼고 말흔각간(末昕角干)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화림(花林)및 월내(月嬭)의 여러 묘(廟)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尊末仇角干爲世神葛文王末昕角干亦如之親祀花林及月嬭諸廟
내류(內留)가 마아(馬兒)의 딸 사류(舍留)를 낳았다. 內留生馬兒女舍留
태성(太聖)이 해궁(海宮)에서 딸 준물(俊勿)을 낳았다. 太聖生女俊勿于海宮
백성중에 무예가 특출하고 협력(脅力)이 남보다 뛰어나며 특이한 기술을 가진 자와 숙련된 기술자(異技熟工)들을 선발하여 병관(兵官)에 소속시켰다. 천거하여 끌어내거나(薦引) 발고(發告)하여 알리는 자에게도 역시 상을 내렸다.
選民武藝特出脅力過人異技熟工者屬于兵官薦引發告者亦有賞賜
가야(加耶)의 모가(慕訶)가 그 서매(庶妹) 사씨(思氏)를 바쳤다. 加耶慕訶獻其庶妹思氏
6월, 토무(土武)를 설치해서 부곡(部曲)과 주군(州郡)의 무사(武士)들을 관장하게 했다. 六月置土武典部曲州郡武士
7월, 보리가 풍작이어서 3년치의 곡식(三年穀)을 얻으매 백성들이 그를 많이 내버리자 관름(官廩)에 거둬들이도록 명했다. 七月豊麥得三年穀民多棄之命收官廩
보색(寶色)을 이벌찬(伊伐湌)으로 물인(勿仁)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宝色伊伐湌勿仁稟主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九月行大場
10월, 고구려 사신 방부류(方夫流)가 왔는데 심히 무례하였다. 삼생(三生)이 그를 죽이고자 했으나 제(帝)가 그를 만류하고 후하게 대우해서 보냈다. 부류(夫流)가 돌아가서 계림(鷄林)에 임금(君)이 있음을 고하였다.
十月麗使方夫流至甚無禮三生欲殺之帝止之厚遇而送之夫流歸告鷄林有君
五年 正月 行金蛇祭
5년(辛巳, AD381년) 1월, 금사제(金蛇祭)를 행하였다.
연해(連解)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운해(雲海)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連解伊伐湌雲海稟主
3월 부여(夫余)가 양마(良馬) 한쌍을 바쳤다. 三月夫余獻良馬一雙
봄,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春夏旱
7월, 등억(登檍)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선운(仙雲)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登檍伊伐湌仙雲稟主
옹판(雍判)이 딸 융기(融己)를 낳았다. 雍判生女融己
11월, 신후(神后)가 제(帝)의 딸 성단(成丹)을 낳았다. 十一月神后生帝女成丹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므로 사자를 파견해서 창름(倉廩)을 열고 그를 구휼하였다. 年荒民飢流亡發使開倉廩賑之
六年 正月 行玄馬祭
내물왕 6년(AD382년) 1월, 玄馬(현마, 壬午, AD382년)祭(제)를 행하였다.
지공(芝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두화(兜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芝公伊伐湌兜花稟主
太公大西知薨年六十八末昕王之庶子也母曰乳帽宮主末仇公愛之如胞弟委以家宝公不自取皆守而歸于帝事太聖如君多私幸而未嘗妬太聖悲泣曰世豈有如我夫者乎願殉而報心帝止之葬以王禮
태공(太公) 대서지(大西知)가 훙하니 나이 68세였다. 말흔왕(末昕王)의 서자(庶子)이고 어머니는 유모궁주(乳帽宮主)라 한다. 말구공(末仇公)이 그를 포제(胞弟)처럼 아껴서 가보(家寶)를 위임했는데 공(公)은 스스로 취하지 않고 모두 간수했다가 제(帝)에게 돌려주었다. 태성(太聖)을 마치 임금처럼 섬겨서 사사로운 행차(私幸)가 많아도 일찌기 질투한 일이 없었다. 태성(太聖)이 슬피 울며 “세상에 어찌 우리 남편 같은 자가 있겠는가? 원컨대 따라죽어서 그 마음에 보답하리라.”하니 제(帝)가 그를 만류하고 왕례(王禮)로써 장사지냈다.
장흔(長昕)을 태공(太公)으로 하였다. 長昕太公
지공(芝公)이 병으로 사임하니 한문(旱門)으로 그를 대신하였다. 芝公病免旱門代之
달준(達準)을 품주(稟主)로 하고 화종(華宗)을 육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達隼稟主華宗六軍頭上
설화(雪花)가 삼생(三生)의 아들 사람(沙覽)을 낳았다. 雲花生三生子沙覽
二月 保反生帝女都利 與倭和親互市交婚稱其國曰野
2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딸 도리(都利)를 낳았다. 왜(倭)와 화친하여 호시(互市)를 열고 교혼(交婚)하였는데 그 나라를 야(野)라고 칭했다.
五月以馬兒爲衛頭京都雨魚
5월 마아(馬兒)를 위두(衛頭)로 삼았다. 경도(京都)에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七月 夫余禿山城主布隆率三百人來降命居六部夫余請還之不許 忽明伊伐湌乳雲稟主
7월, 부여(夫余)의 독산성주(禿山城主) 포륭(布隆)이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자 육부(六部)에 거주하도록 명했다. 부여(夫余)가 그를 송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홀명(忽明)을 이벌찬(伊伐湌)으로 하고 유운(乳雲)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18년, AD373년.
十八年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
18년(373) 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투항하였다.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서울에 물고기가 비에 섞여 떨어졌다.
八月帝與神后入海宮行嘉俳于海宮
8월, 제(帝)가 신후(神后)와 더불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해궁(海宮)에서 가배(嘉俳)를 행했다.
十月 內留生馬兒子可留
10월, 내류(內留)가 마아(馬兒)의 아들 가류(可留)를 낳았다.
七年 正月 行水羊祭 光臣伊伐飡 白花稟主
내물왕 7년(AD383년) 1월, 水羊(수양, 癸未, AD383년)祭(제)를 행하였다. 光臣(광신)을 伊伐飡(이벌찬)으로, 白花(백화)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三月 夫余流民三十戶又來降 夫余與倭相通 年年受其民 散置都鄙 倭臣熊彦 美而善辯 與阿尒相通 多聽其言 故國人異反 或歸于我 亦歸于麗 休禮太后生長昕子勿昕 始立戶口典 禁民子母相婚
3월, 夫余(부여)의 流民(유민) 30호가 또 來降(래항)하였다. 夫余(부여)와 倭(왜)가 相通(상통)하니, 해마다 그 백성들을 받아서 도읍과 시골에 散置(산치)시켰다. 倭(왜)의 신하 熊彦(웅언)은 잘 생겼고 말을 잘 하여, 阿尒(아이)와 相通(상통)하니, 그의 말을 많이 따랐다. 그래서 國人(국인)들은 異反(이반)되어, 혹은 우리에게, 혹은 고구려에게 귀속하였다. 休禮太后(휴례태후)는 長昕(장흔)의 아들 勿昕(물흔)을 낳았다. 戶口典(호구전)을 처음 세웠다. 백성들의 子母相婚(자모상혼)을 금지시켰다.
四月 角干登非卒
4월, 각간 등비(登非)가 졸(卒)했다.
七月 乾孝伊伐湌冶勿稟主 夫沙郡人休齒孝于母獵而供肉一日無獸依樹而泣有一角鹿來跪乃獻于帝命畜於海宮賜休齒年穀 束炭生奈己子炭己
7월, 건효(乾孝)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야물(冶勿)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부사군(夫沙郡)사람 휴치(休齒)는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워 사냥을 해서 고기를 이바지하였다. 하루는 (잡을) 짐승이 없어 나무에 기대어 울자 외뿔사슴(一角鹿)이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이에 제(帝)에게 헌상하자 (제는) 해궁(海宮)에서 기르도록 명하고 휴치(休齒)에게는 연곡(年穀)을 하사하였다. 동탄(東炭)이 나기(奈己)의 아들 탄기(炭己)를 낳았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年大豊歡聲連野帝令豊時儉守以備歉歲無使棄麥而逢匈百姓莫不感服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한 해 농사가 대풍이라 환호성(歡聲)이 들판에 이어지니 제(帝)는 영(令)을 내려 풍년일 때 검약을 지킴으로써 흉년일 때를 대비하라하고, 보리를 내버려서 공황(匈)에 봉착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백성들이 감복해 마지않았다.
※<추모경>에 의하면 월가(月歌)는 ‘연소왕(燕昭王)의 궁중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여 황룡국(黃龍國)에서 행해지고 (추모왕 때에) 이르러 우리(고구려)의 풍속이 되었다’라고 했고, <중천대제기>에는 ‘(월가는) 본시 옛 풍속으로 지금은 신라의 풍속이 되었다.是本古俗今爲羅俗’라고 하는 상이한 기록이 보인다.
十二月 祀世神廟
12월, 세신묘(世神廟)에 제사하였다.
八年 正月 行木神祭 乃芥伊伐飡 良臣稟主
내물왕 8년(AD384년) 1월, 木神(목신, 甲申, AD384년)祭(제)를 행하였다.
내개(乃芥)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양신(良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乃芥伊伐湌良臣稟主
4월, 양산(楊山)의 백성 효창(孝倉)이 참새(雀)를 갖고 있어 매우 자그마했는데 황새(大鳥)와 교합하여 황새(大鳥)를 낳으니 구경하는 자들이 저자를 이루고 봉물(奉物) 또한 많았다. 효창(孝倉)이 이를 부당하게 여기고 스스로 가진 것을 제(帝)에게 헌상했다. 제(帝)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대조사(大鳥祠)를 세우도록 명하고 효창(孝倉)을 작관(雀官)으로 삼았다. 옛 풍속에 신작(神雀)을 중시하는 까닭이었다.
四月楊山民孝倉有雀甚小與大鳥合而生大鳥觀者成市奉物亦多孝倉以爲不當自有獻之于帝帝嘉其志命立大鳥祠以孝倉爲雀官古俗重神雀故也
부여의 근수(謹須)가 죽고(殂) 침류(枕流)가 섰다. 그 어머니 아이(阿尒)가 집정(執政)했다.
천세(千世)를 보내서 그를 조문하였다.
夫余謹須殂枕流立其母阿尒執政 遣千世吊之
옹판(雍判)이 제(帝)의 아들 장기(長己)를 낳았다. 雍判生帝子長己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자 안팎(中外)으로 (모두가) 기도를 행하였다. 旱不雨中外行禱
命衛頭等七人送苻良等七人于秦秦主問鷄林何爲新羅答曰時代變革名號改良今何與古同乎秦主曰國君變乎答曰我國擇賢而立自古相傳也豈有變乎但取新羅之好而已秦主問鷄林新羅之義答以神官之所名故不解其深旨而天神所降之地爲鷄林而亦爲新羅
위두(衛頭)등 7인에게 명하여 부량(符良)등 7인을 진(秦)나라에 전송하도록 하였다. 진주(秦主)가 계림(鷄林)이 어찌 신라(新羅)가 되었는가를 묻자 대답하였다.
“시대(時代)의 변혁과 명호(名號)의 개량이니 어찌 지금이 옛날과 같겠습니까?.”
진주(秦主)가 “나라의 임금(國君)이 변경된 것인가?”하고 묻자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어진이(賢)를 택해서 세워 예로부터 상전(相傳)해 왔습니다. 어찌 변경됨이 있겠습니까? 다만 신라(新羅)의 좋음을 취한 것일 따름입니다.”
진주(秦主)가 계림(鷄林)과 신라(新羅)의 뜻(義)을 묻자 답하기를 “신관(神官)이 이름한 바이기 때문에 그 깊은 뜻은 풀 수 없으나 천신(天神)이 내려온 땅이라서 계림(鷄林)이라 하고 또한 신라(新羅)라 합니다.”라고 했다.
위두(衛頭) 등 7인에게 명하여 부량(苻良) 등 7인을 진(秦)으로 (호위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진주(秦主는 부견을 말함, 前秦의 3대왕, 재위 357~385)가 “계림(鷄林)을 어찌 신라(新羅)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답하여 말하기를 “시대가 변혁(變革, 급격히 변하여 달라짐)하였으니 명호(名號, 겉으로 부르는 이름)를 개량(改良, 나쁜 점을 보완하여 고침)하였으니, 지금 어찌 옛 이름과 같음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주(秦主)가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바뀐 것이로구나.(여기서는 왕의 姓씨 또는 王朝가 바뀐 사실을 의미)”라고 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나라는 어진 자를 받들어 왕으로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서로 전해오던 바입니다. 어찌 변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신라(新羅)의 아름다움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주(秦主)가 “계림과 신라의 뜻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답하여 ‘신관(神官)이 거처한 이름으로 그런 연유로 그 깊은 뜻(旨, 임금의 어지)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신(天神)이 내려와 거처한(또는 탄생한) 땅을 계림이라 하고, 신라 또한 그러합니다.(鷄林과 新羅의 의미는 天神이 살았거나 탄생한 땅을 의미하는 듯)
衛頭等自秦回獻金人玉馬等宝器初帝命衛頭七人送符良等七人于秦秦主符堅問鷄林何爲新羅答曰有鷄之瑞故曰鷄林有羅之新故曰新羅符堅曰聞爾國君變何如答曰我國擇賢相傳自古然也非變也故鷄林新羅字雖不同而語實相同堅曰何以相同答曰月主所居之城故也堅曰汝國女主好少夫數易數夫無可配之雄也朕欲娶之何如答曰我國尙神而擇賢非好少夫也堅善其對優禮而送之獻宝于神后及帝后命刻符堅象』
※원문의 해당 기사에는 흐릿하게 X자가 그려져 있는데, <아달라기>에 수록된 <나물대성신제기>를 보면 이 기사가 나물 5년 7월조에 나옵니다.
『위두(衛頭)등이 진(秦)으로부터 돌아와 금인(金人) 옥마(玉馬)등의 보기(寶器)를 바쳤다. 애초에 제(帝)가 위두(衛頭)등 7인(七人)에게 명하여 부량(符良)등 칠인(七人)을 진(秦)에 전송토록 하였다. 진주(秦主) 부견(符堅)이 계림(鷄林)이 어찌 신라(新羅)가 되었는가를 묻자 대답하였다. “닭(鷄)의 상서로움이 있었던 까닭에 계림(鷄林)이라하며, (사방)망라(羅)의 새로움(新)이 있었던 까닭에 신라(新羅)라 합니다.” 부견이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희 나라임금(國君)이 변(變)했다는데 어떠한가?”하자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어진이(賢)를 택해 서로 전해왔으며 예로부터 그러하여 변(變)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계림(鷄林) 신라(新羅)가 글자는 비록 다르나 말(語)은 실상 서로 같습니다.” 부견이 말하기를 “어떻게 서로 같은가?”하자 대답하기를 “월주(月主)가 사는 성(城)인 까닭입니다.”하였다. 부견이 묻기를 “너희 나라 여주(女主)는 젊은 남편(少夫)을 좋아하여 자주 바꾸고 여러 남편이라 가히 짝(配)할만한 영웅(雄)이 없다. 짐이 그를 취해 장가들고자 하니 어떠한가?”하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오히려 신(神)을 숭상하고 현(賢)을 선택하니 젊은 남편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하였다. 부견이 그 대답을 선(善)하게 여겨 두터이 예우(優禮)하고 그를 보내며 신후(神后)와 제(帝)에게 보물을 헌상하였다. (광명)후(后)가 부견(符堅)의 상(象)을 조각하도록 명했다.
고추태자(古鄒太子)가 훙하니 나이 71세였다. 선도(仙徒)들이 문천(蚊川)에 그 묘(廟)를 세우고 태자사(太子祠)라 했다. 古鄒太子薨年七十一仙徒立其廟于蚊川曰太子祠
7월, 칠황(漆黃)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세붕(世朋)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漆黃伊伐湌世朋稟主
10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딸 눌리(訥里)를 낳았다. 농작이 흉년이어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十月保反生帝女訥里年荒開倉賑民
11월 고구려의 이련(伊連)이 이어서 섰다. 十一月麗伊連繼立
木鷄 正月 思氏生帝子進思 報吉加耶 卒生伊伐飡 孝白稟主
木鷄(목계, 乙酉, AD385년, 내물왕 9년) 1월, 思氏(사씨)가 帝(제)의 아들 進思(진사)를 낳았다. 報吉(보길)이 加耶(가야)로 갔다. 卒生(졸생)을 伊伐飡(이벌찬)으로, 孝白(효백)을 稟主(품주)로 삼았다.
*報吉加耶
= 報吉(보길)이 加耶(가야)로 갔다.
원본의 중간에 如(여)가 생략되어 있다.
2월, 부여(扶余)가 한산(漢山)에 불사(佛寺)를 창건했다. 二月扶余創佛寺于漢山
4월, 보길사(報吉使) 구미(久味)등이 가야(加耶)로부터 돌아와 고하였다.
“모가(慕訶)가 지난 겨울에 스스로 야왕(野王)의 딸을 몰래 맞아들였는데 매우 아름다워서 선실태후(宣失太后)가 그를 질투하자 모가(慕訶)가 마침내 선실태후(宣失太后)를 산궁(山宮)에 유폐(幽)시키고는 병이 있다하면서 배알하지 못하게 한 까닭에 상견치 못하고 왔습니다.”
제(帝)는 사씨(思氏)가 근심할까 두려워 사실 그대로 말하지 말도록 명했다.
四月報吉使久味等自加耶還告曰慕訶自昨冬密納野王女甚美宣失太后妬之慕訶乃幽宣失太后于山宮以爲有疾而不使謁之故不得相見而來 帝恐思氏憂之命勿直言之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발유(發有)를 낳았다. 內留生帝女發有
홀명(忽明)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忽明大日大師
7월, 담해(談解)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초황(綃况)을 품주(稟主)로 하였다.七月談解伊伐湌綃况稟主
8월, 혈성(穴城)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八月大閱穴城
十月 枕流卒 弟辰斯立
10월, 枕流(침류)가 죽고, 동생 辰斯(진사)가 즉위하였다.
火狗 正月 奉宴骨聖太后 聖達伊伐飡 三弘稟主
火狗(화구, 丙戌, AD386년, 내물왕 10년) 1월,
3월, 도령(道寧)등이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가서 선실태후(宣失太后)를 알현하고 왔다. 三月道寧等使加耶謁宣失太后來
부여(扶余)가 관방(關防)을 크게 설치하고 고구려(句麗)에 대비하였다. 扶余大設關防以備句麗
등억(登檍)을 육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登檍六軍頭上
궁인(宮人) 난황(暖凰)이 제(帝)의 딸 음황(陰凰)을 낳았다. 宮人暖凰生帝女陰凰
7월, 도장(道長)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천빈(茜彬)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道長伊伐湌茜彬稟主
제(帝)의 딸 상기(桑期)를 구미(久味)의 처로 하였다. 以帝女桑期妻久味
火豕正月 保反生帝子訥祇
火豕(화시, 丁亥, AD387년, 내물왕 11년) 1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아들 눌기(訥祇)를 낳았다.
※눌기(訥祇) : 흔히 ‘눌지(訥祗)’로 통용되는데 본서에는 ‘눌기(訥祇)’로 나온다. ‘눌기왕(訥祇王)’을 일명 ‘老王’으로도 표기한 것으로 보아 “訥祇”와 “老”는 ‘눌기 = 늙이/늘기’의 음훈대응으로 보임. 즉 訥祇王왕은 '늘기왕'으로 읽는 것이 당시의 원음에 가까운 것이며, 고대인의 형제간 돌림음을 감안하여 美海(未斯欣/未叱希/微叱許)및 寶海(卜好)와 연동시켜 해석하면 그 고대음은 'nlxi(늘키/늘크)' 또는 'nlxeo(늘커)'쯤으로 재구해볼 수 있다.'x(ㅋ)'의 실제음은 '흑석동'을 발음할때의 첫소리로 독일어등에 흔히 보이는 연구개 마찰음
옥겸(玉謙)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천발(茜發)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玉謙伊伐湌茜發稟主
부여(扶余)가 진가막(眞嘉莫)을 달솔(達率)로 삼고 두지(豆知)를 은솔(恩率)로 삼아 병관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扶余以眞嘉莫爲達率豆知爲恩率使屬兵官
※진가막(眞嘉莫) : <고국양왕대제기(故國襄大帝紀)>에는 진가모(眞嘉謨)
3월, 아라(阿羅) 칠붕(七朋)등이 조견(朝見)하고 그 토산물을 바쳤다. 三月阿羅七朋等朝見獻其土物
5월, 옹판(雍判)이 제(帝)의 딸 색지(色支)를 낳았다. 五月雍判生帝女色支
7월, 소줄(昭茁)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등원(登元)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昭茁伊伐湌登元稟主
9월, 부여(扶余)가 말갈(末曷)과 관미령(關彌岺)에서 크게 싸웠다. 九月扶余與末曷大戰闕彌岺
부여(扶余) 여자를 사서 처로 삼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에 앞서 소민(小民)중에 처가 없는 자들이 많이 부여(扶余) 여자를 샀기에 부여가 이를 원망했는데 이에 이르러 그것을 금지시키고 가야민(加耶民)과 서로 혼인하는 것은 그대로 허락했다. 禁買扶余女爲妻先是小民無妻者多買扶余女子扶余怨之至是命禁之仍許加耶民相婚
10월, 대장(大場)을 행하고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十月行大場宴父老
두두선모(豆豆仙母) 줄례궁주(茁禮宮主)가 훙(薨)하였다. 제(帝)의 이모(姨)이다. 豆豆仙母茁禮宮主薨帝姨也
土鼠四月 京師地震
土鼠(토서, 戊子, AD388년, 내물왕 12년) 4월, 경사(京師)에 지진이 있었다.
한현(汗玄)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포기(布杞)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汗玄伊伐湌布杞稟主
사씨(思氏)가 아들 인사(仁思)를 낳았다. 思氏生子仁思
마아(馬兒)를 아찬(阿湌)으로 삼고 미사품(未斯品)을 사벌성주(沙伐城主)로 삼았다. 以馬兒爲阿湌未斯品爲沙伐城主
6월, 경사(京師)에 다시 지진이 있어 선무대장(仙巫大場)을 열었다. 六月京師又震設仙巫大場
7월 당윤(棠尹)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장화(長花)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七月棠尹伊伐湌長花稟主
11월, 얼음이 얼지 않고 눈꽃(雪花)을 볼 수 없었다. 두 해가 대풍이 들자 백성들이 즐겁고 태평(泰平)하여 들판에서 노래하며 춤추었다.
이찬(伊湌) 세기(世己)등이 상주하였다.
“부여(扶余)와 야인(野人)등이 스스로 편안하질 못한데 우리나라만 홀로 태평을 누리는 것은 제(帝)의 힘입니다. 원컨대 수주(壽酒)를 헌상코자 합니다.”
제(帝)가 말했다.
“신후(神后)의 성력(聖力)이다.”
이에 신후(神后)를 받들어 광명신궁(光明神宮)에 천수(天壽)를 올리니 안팎(中外)에서 회집(會集)한 자가 만의 무리(萬衆)였다. 十一月無氷不見雪花兩年大豊民樂泰平歌踊于野伊湌世己等奏曰扶余野人等皆不自安我國獨享泰平者帝力也願獻壽酒帝曰神后聖力也乃奉神后上天壽于光明神宮中外會集者萬衆
토우(土牛:기축389) 정월, 경도(京都)에 크게 역병이 돌고 가야(加耶) 또한 크게 역병이 돌아 선실태후(宣失太后)가 역질로 붕(崩)했다. 제(帝)가 그를 위해 궁중에서 발상(發喪)하며 말했다.
“선실(宣失)은 곧 우리 사씨(思氏)의 어머니이니 또한 나의 어머니 아닌가.”
명을 내려 그에게 후한 부의를 보내도록 했다. 궁중에서 많이 그를 위하는 효(孝)로써 제(帝)에게 아첨하였다. 土牛正月京都大疫加耶亦大疫宣失太后以疫崩帝爲之發喪于宮中曰宣失乃吾思氏之母亦非吾母乎命以厚賻送之宮中多爲之孝以媚于帝
장백(長白)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당진(棠眞)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長白伊伐湌棠眞稟主
2월, 부여(扶余)및 우리(나라) 서변(西邊)에 흙비가 내렸다. 二月扶余及我西邊雨土
모가(慕訶)가 야왕(野王)의 딸을 후(后)로 삼았다. 慕訶以野王女爲后
7월, 누리(蝗)로 곡식이 잘 익지 않자 제(帝)가 그를 근심하여 감식(減食)하니 황제(皇弟:임금의 아우) 소물(小勿)이 간하였다.
“올해 비록 흉작이나 두 해 곡식이 오히려 많습니다. 제(帝)는 만민의 아버지이고 또한 신후(神后)의 총부(寵夫)가 되어서 어찌 스스로를 훼손할 수 있습니까?”
제(帝)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이에 후(后)와 더불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명을 내려 주군(州郡)에 비축창고를 설립하게 하였다.
七月蝗穀不登帝憂之減食皇弟小勿諫曰今年雖凶兩年穀尙多帝以萬民之父且爲神后寵夫何可自毁帝以爲然乃與后入海宮命設州郡備倉
건웅(乾雄)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구심(久心)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乾雄伊伐湌久心稟主
9월, 부여(扶余)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쳐서 그를 이겼다. 九月扶余伐麗南鄙克之
10월, 성동(城東)에 사는 무품녀(無品女)가 명활지(明活池)에서 목욕하자 금액(金液)을 이루므로 그 무리들이 받들어 백양신(白羊神)을 삼았다. 十月城東無品女浴明活池成金液其徒奉爲白羊神
※무품녀(無品女) : <위화진경>에 보이는 무품녀(無品女) 백양선자(白羊奾子).
금호(金虎:경인390) 정월, 신후(神后)가 병질이 있으므로 삼산(三山)에 기도하였다. 金虎正月神后有疾禱于三山
등로(橙盧)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건발(乾發)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橙盧伊伐湌乾發稟主
부여(扶余)가 못을 파서 산을 만들고 궁실을 크게 중수하며 중외(中外)의 진금이초(珍禽異草)를 모아들였는데 대개 아이후(阿爾后)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扶余穿池造山大修宮室集中外珍禽異草盖出阿爾后之意也
제(帝)의 형 동구랑(冬九郞)이 관성(管城)에서 졸하자 잡판(匝判)의 예(禮)로 장사지내도록 명하고 그 서자 10인에게 작위를 내렸다.
帝兄冬九郞卒于管城命以匝判禮葬之爵其庶子十人
2월, 보반(保反)이 제(帝)의 아들 보해(宝海)를 낳았다. 二月保反生帝子宝海
4월, 구려(句麗)가 사신을 보내와 미녀(美女) 3인과 양마(良馬) 7쌍을 헌상했다. 말은 병관(兵官)에 소속시켜 기르게 하고, 여자는 황제(皇弟) 소물(小勿) 호물(好勿) 대물(大勿)의 비(婢)로 삼았다.
四月句麗遣使獻美女三人良馬七雙馬屬兵官畜之女爲皇弟小勿好勿大勿之婢
정월, 상기(桑期)가 구미(久味))의 딸 사사(沙沙)를 낳았다. 五月桑期生久味女沙沙
말갈(末曷)이 부여(扶余)를 침공하여 적현성(赤峴城)을 함락시켰다. 末曷侵扶余陷赤峴城
7월, 연당(連棠)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양불(良弗)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連棠伊伐湌良弗稟主
9월, 곡식이 크게 풍작이라 대장연(大場宴) 베풀었다. 九月穀大登設大場宴
白兎 二月 思氏生帝子大思 柰明伊伐飡 况仁稟主
白兎(백토, 辛卯, AD391년, 내물왕 15년) 2월, 思氏(사씨)가 帝(제)의 아들 大思(대사)를 낳았다. 柰明(나명)을 伊伐飡(이벌찬)으로, 况仁(황인)을 稟主(품주)로 삼았다.
4월, 내류(內留)가 마아(馬兒)의 딸 아로(阿老)를 낳았다. 이에 마아(馬兒)를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아 -제명(帝)을 출명(出命)하는 것을 품주(稟主)라 불렀다(?)-出命帝命呼曰稟主(해석난해) 마아(馬兒)는 얼굴이 아름답고 아첨을 잘하여 어려서부터 제(帝)의 용양군(龍陽君)이 되었으며 그 어머니 예생궁(禮生宮) 역시 제(帝)와 사통(私通)하여 자녀를 낳았으므로 마아(馬兒)에게 점차 총애가 더하였다. 이에 이르러 신후(神后)가 병으로 혼미하여 정령(政)이 제(帝)및 보반(保反)과 내류(內留)에게서 나오자 마아(馬兒)가 이로써 부군(副君)의 일을 행하니 일국(一國)이 그를 영예(榮)롭게 여겼다.
四月內留生馬兒女阿老乃以馬兒爲大阿湌出命帝命呼曰稟主馬兒皃美而善媚自幼爲帝龍陽君其母禮生宮亦與帝私通生子女寵漸加馬兒至是神后病昏政出於帝及保反內留馬兒以是行副君事一國榮之
7월, 고구려왕(麗王) 담덕(談德)이 부여(扶余)를 대파(大破)하니 석현(石峴)등의 10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七月麗王談德大破扶余石峴等十城皆降之
※6월, 왕은 스스로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기(祖奇) 우옥(于屋) 해방(解放)등에게 명하여 백제(百濟)를 정벌하여 석현(石峴) 인물(仁物)등의 10성을 취하고 평양(平壤)의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채워(實)넣었다. 六月王自將四萬軍命祖奇于屋解放等伐白濟取石峴仁物等十城移平壤民戶實之 <소수림왕기>의 국강호태왕 원년 기사.
9월, 술호(述戶)가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를 낳았다. 九月述戶生道寧女福壽
담덕(談德)이 루부(婁夫)등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부여(扶余)를 치지 않는다고 제(帝)를 책망했다. 이에 미사품(未斯品)등에게 명하여 소리 높여 호응하는 척하며 고구려비(麗婢) 3인을 모두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談德遣婁夫等責帝起兵伐扶余乃命味斯品等佯作聲應以麗婢三人皆爲宮人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빼앗았다. 10월에 우옥(于屋)등이 관미성(關彌城)을 함락했다. 진사(辰斯)가 아이(阿爾)와 더불어 구원행궁(狗原行宮)으로 나가서 사냥으로 일삼으니 국인들이 많이 그를 비난하였다.
十月麗拔闕彌城 辰斯與阿爾出狗原行宮以田獵爲事 國人多非之
제(帝)가 계물궁(癸勿宮)에 행차(幸)하여 그 아들 계억(癸檍)에게 옷과 쌀을 내렸다. 帝幸癸勿宮賜其子癸檍衣米
11월, 진사(辰斯)가 구원(狗原)에서 졸(卒)하니 아이(阿爾)가 이에 아신(阿莘)을 임금(君)으로 삼았다. 十一月辰斯卒于狗原阿爾乃立阿莘爲君
※아이(阿爾) : <소수림대제기>에는 ‘가리(佳利)’
十月又引水陸軍分七道攻關彌城晝夜不休二十日而拔之其城四面峭絶海水圍繞故辰斯以爲不落而與其妻佳利獵?于狗原經旬而待我退至是聞陷而驚倒仍不起而死佳利乃以枕流子莘代之』<소수림대제기> 영락대제 2년 임진(392) 10월 기사.
『10월, 다시 수륙군(水陸軍)을 이끌고 7도(七道)로 나누어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했는데 주야불휴(晝夜不休)로 20일간 공격하여 그를 함락했다. 그 성(城)은 사면이 초절(峭絶)하고 해수(海水)가 둘러싼(圍繞) 까닭에 진사(辰斯)는 (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그 처 가리(佳利)와 함께 구원(狗原)에서 10흘이 지나도록 사냥하며 우리가 퇴각하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에 이르러 함락 소식을 듣고는 놀라 쓰러지더니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가리(佳利)가 이에 침류(枕流)의 아들 아신(阿莘)으로 그를 대신하였다.
제(帝)가 담덕(談德)에게 도령(道寧)등을 보내서 토산물로 답(答)하였다. 담덕(談德)이 말하기를 “네 임금의 애신(愛臣) 마아(馬兒)를 보기 원하노라.”하였다.
帝遣道寧等于談德以土物答之談德曰汝君愛臣馬兒願欲見之
이찬(伊湌) 세기(世己)가 훙(薨)하니 나이 57세였다. 공(公)은 고전(古典)에 박식하고 외사(外史)에 두루 통달해서 신법(新法)을 세움으로써 국치(國恥)를 바로 잡은 것이 많았으므로 국인들이 그를 애석히 여겼다.
伊湌世己薨年五十七公博識古典旁通外史多立新法以正國恥故國人惜之
흑룡(黑龍:임진392) 정월, 마아(馬兒)를 담덕(談德)에게 보냈다. 黑龍正月送馬兒于談德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어 나밀(奈密)의 딸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맞아들여 좌우(左右) 소비(小妃)로 삼고 보금(寶金)을 비궁대부(妃宮大夫)로 삼았다. 보금(寶金)은 나밀(奈密)의 조카(猶子)이다. 몸이 크고(身長) 식견이 있어 과공주(寡公主) 천성(天星)을 그 처로 하였다. 正月遣胥狗迎奈密女雲帽霞帽爲左右小妃以宝金爲妃宮大夫宝金奈密之猶子也身長而有識以寡公主天星妻之 <소수림대제기>의 영락대제 2년 임진(392) 기사. 마아(馬兒) = 보금(寶金) 또는 실주(實主) <삼국유사>
반권(般權)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고류(古留)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船權伊伐湌古留稟主
二月神后崩于寢宮帝爲之不食保反曰母后雖多功汝若不食吾誰爲夫帝乃與保反行祥葬神后于長陵分骨于各夫隆陵神后乃阿爾兮聖后之第七女也身長七尺重二百斤一食盡一豚能善鄕歌神事繼阿爾兮爲雌皇四十余年易夫帝五位皆有子女味鄒帝女莫姬仁竦足竦卒留古留道留丹判匝判雍判保反內留儒禮帝女曰其炭基臨帝女曰東炭斤丹昔丹訖解帝女曰方丹今帝子曰好童叔丹女曰成丹春秋六十九王孫數百人性至仁愛民不喜亂淫唯夫帝副君外不用私臣國中大事令決于骨老上仙不以私行以此國治掛孝者塡道國中盡白
2월, 신후(神后)가 침궁(寢宮)에서 붕(朋)하였다. 제(帝)가 그를 위하여 음식을 먹지 않으니 보반(保反)이 말했다.
“모후(母后)가 비록 그대에게 공(功)이 많으나 그대가 만약 먹지를 않으면 나는 누구를 남편으로 삼습니까?”
제(帝)가 이에 보반(保反)과 더불어 상례를 행(行祥)하여 신후(神后)를 장릉(長陵)에 장사하고 유골을 각 남편의 융릉(隆陵)에 나누었다 (유골을 나누어 각 남편의 능(陵)을 북돋았다.?) 신후(神后)는 곧 아이혜성후(阿爾兮聖后)의 제 7녀이다. 신장(身長)이 7척이요 몸무게가 2백 근이었으며 한 번의 식사에 돼지 한 마리를 다 들었다. 향가(鄕歌)와 신사(神事)에 능숙하고 잘 하였으며 아이혜(阿爾兮)를 이어서 자황(雌皇)이 된지 40여년에 부제(夫帝)를 바꾼 것이 5위(位)였으며 모두 자녀를 가졌다.
미추제(味鄒帝)의 딸은 막희(莫姬), 인송(仁竦), 족송(足竦), 솔류(率留), 고류(古留), 도류(道留), 단판(丹判), 잡판(匝判), 옹판(雍判), 보반(保反), 내류(內留)이며, 유례제(儒禮帝)의 딸은 기탄(其炭)이며, 기림제(基臨帝)의 딸은 동탄(東炭), 근단(斤丹), 석단(昔丹)이고, 흘해제(訖解帝)의 딸은 방단(方丹)이며 금제(今帝)의 아들은 호동(好童), 숙단(叔丹)이고 딸은 성단(成丹)이었다. 춘추는 69세였으며 왕손(王孫)은 수백 명이었다. 성품이 지극히 어질고 백성을 아꼈으며 난음(亂淫)을 좋아하지 않아 오직 부제(夫帝)와 부군(副君)외에는 사신(私臣)을 기용하지 않았다. 국중대사(國中大事)는 골로(骨老)와 상선(上仙)들로 하여금 결정케 하고 사사로이 행하지 않음으로써 이 나라를 다스렸으니 상복을 입은 자(掛孝者)들이 길을 가득 메워 나라 안이 남김없이 흰색이었다.
3월, 담덕(談德)이 마아(馬兒)를 볼모로 삼고 부여상(夫余象)을 우리에게 보냈다. 三月談德以馬兒爲質送夫余象于我
4월, 난황(暖凰)이 마아(馬兒)의 딸 마씨(馬氏)를 낳았다. 四月暖凰生馬兒女馬氏
5월, 담덕(談德)이 그 아버지 이련(伊連)을 계승하여 섰다. 五月談德繼其父伊連而立
5월 정묘 삭(朔)에 일식이 있었다.
제(帝)가 보반(保反)과 더불어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하였다. 기탄(其炭)이 호물(好勿)의 아들 진물(珍勿)을 낳으니 쌀과 옷을 하사했다. 帝與保反后行吉鮑祠其炭生好勿子珍勿賜米衣
■■■后■仙帝■■帝□□□■后□■■■凡四十六■
[글자 판독이 안되는 원문의 세주(細註)부분]
8월, 아신(阿莘)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석현(石峴)등 5성(五城)을 수복하게 하였다. 八月阿莘使眞武收復石峴等五城
10월, 담덕(談德)이 평양(平壤)에 9사(寺)를 창건했다. 談德創九寺於平壤
태공(太公) 장흔(長昕)이 훙했다. 太公長昕薨
수사(水蛇:계사393) 정월, 큰 눈이 내렸다. 인공(忍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현기(玄杞)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水蛇正月大雪 忍公伊伐湌玄杞稟主
3월, 보반후(保反后)가 제(帝)의 아들 미해(美海)를 낳자 제(帝)가 친히 그를 씻겼다. 三月保反后生帝子美海帝親洗之
5월,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功)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五月野人入寇待其無功而退追擊獨山大破之
7월, 부여(扶余)가 수곡(水谷)에서 대패하였다.七月扶余大敗于水谷
10월, 곡식이 대풍이므로 대장연(大場宴)을 베풀었다. 十月穀大登設大場宴
제(帝)가 태후(太后) 보반(保反) 내류(內留)와 더불어 해궁(海宮)에 들어갔다. 帝與太后保反內留入海宮
목마(木馬:갑오394) 2월,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수로(首老)를 낳았다. 木馬二月內留生帝女首老
유훤(乳萱)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현승(玄勝)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乳萱伊伐湌玄勝稟主
3월, 제(帝)의 사씨(思氏)가 제(帝)의 아들 왕사(王思)를 낳았다. 三月思氏生帝子王思
5월, 운화공주(雲花公主)가 제(帝)의 딸 총씨(寵氏)를 낳았다. 五月雲花公主生帝女寵氏
8월, 부여(扶余)가 구려(句麗)와 누수(泪水?)에서 크게 싸우고 패배하여 돌아갔다.八月扶余與句麗大戰泪水敗歸
※누수(泪水) : 패수(浿水)의 오기(誤記)인 듯. <소수림대제기>와 <소수림왕기>의 영락 5년 을미(394) 8월의 기사에는 모두 패수(浿水)로 나옴.
궁인(宮人) 월씨(月氏)가 소물(小勿)의 아들 관월(關月)을 낳았다. 월씨(月氏)는 곧 고구려 미녀이다. 宮人月氏生小勿子關月氏乃麗美女也
10월, 감문군(甘文君) 숙록(叔鹿)이 입조(入朝)하였다. 十月甘文君叔鹿入朝
12월, 천동(茜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화명(華明)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十二月茜冬伊伐湌華明稟主
목양(木羊:을미395) 5월, 보반(保反)이 아들 실상(實相)을 낳았는데 혹은 황제(皇弟) 호물(好勿)이 사통하여 낳은 것이라고도 한다. 木羊五月保反生子實相或曰皇弟好勿通而生也
9월, 말갈(末曷)이 쳐들어오자 삼생(三生)등이 실직(悉直)의 들판에서 영격(迎擊)하여 대파하였다. 획득한 마필(馬匹)이 심히 많았으므로 그를 크게 포상하였다.
九月末曷入寇三生等迎擊大破于悉直之原所獲馬匹甚多大賞之
황제(皇弟) 호물(好勿)이 아찬(阿湌) 삼여(三輿)의 처 개신(芥臣)을 빼앗아 처로 삼았다. 제(帝)가 그를 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皇弟好勿奪阿湌三輿妻芥臣妻之帝禁之不得
영술(英述)이 숙단(叔丹)의 아들 명숙(明叔)을 낳았다. 英述生叔丹子明叔
화원(火猿:병신396) 정월, 휴례태후(休禮太后)가 병질이 있자 죄수들을 방면하였다. 火猿正月休禮太后有疾放囚
등로(登老)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유선(乳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登老伊伐湌乳宣稟主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을 구려(句麗)에 보내어 미녀를 바치고 마아(馬兒)를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담덕(談德)이 그 누이 두씨(杜氏)를 마아(馬兒)의 처로 하고서 보내지 않았다. 遣水酒干宝末于句麗獻美女請還馬兒談德以其妹杜氏妻馬兒而不送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 : <소수림왕기> 영락 6년 병신(396) 조에는 ‘태수(太守) 보마(寶馬)’로 나옴. <삼국사기> 눌지왕조에는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문자와 음의 유사성으로 보아 '수주간(水酒干) 보말(宝末)과 동일인이 아닌가 의심된다.
‘水酒干(스불캄/스불칸)’은 ‘=酒多(수블한) = 徐弗邯 = 徐發翰 = 角干(ㅅ뿔칸)’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이표기로 추정됨.
4월, 우화(宇花)가 호동(好童)의 아들 호원(好原)을 낳았다. 四月宇花生好童子好原
5월, 아신(阿莘)이 그 태자 전지(腆支)를 야인(野人)에게 볼모로 보냈다. 五月阿莘以其太子腆支質于野人
7월, 구■(久■)의 아들 심(沁)을 사인(舍人)으로 삼고 사찬(沙湌) 하기(河期)를 내위두상(內衛頭上)으로 삼았다. 구미(久味)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았다. 七月以久■子沁爲舍人沙湌河期爲內衛頭上 久味伊伐湌
10월, 초리(初利)를 하기(河期)의 처로 삼았다. 보반후(保反后)가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十月初利妻河期保反行吉鮑祠
火鷄正月內留生女聖明或曰好童私而生也 權公伊伐湌
화계(火鷄:정유397) 정월, 내류(內留)가 딸 성명(聖明)을 낳았는데 혹은 호동(好童)이 사통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권공(權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았다.
3월, 두씨(杜氏)가 마아(馬兒)의 아들 격중(鬲中)을 낳았다. 三月杜氏生馬兒子鬲中
※두씨(杜氏) : 두양(杜陽), 천성(天星)으로도 표기됨
부여(扶余)가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扶余築雙峴城
5월, 사씨(思氏)가 딸 방사(方思)를 낳았다. 五月思氏生女方思
7월, 북로(北路)가 가물고 누리(蝗)가 있자 명하여 1년 조세를 제하였다. 七月北路旱蝗命除一年租
강명(康明)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원의(元義)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康明伊伐湌元義稟主
9월, 보반(保反)이 아들 호연(好淵)을 낳았는데 사신(私臣) 심(沁)이 증(烝)하여 낳았다. 九月保反生子好淵私臣沁之所烝而生也
흘해닛금(訖解尼昑)의 서자(庶子) 무알(武謁)을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訖解尼昑庶子武謁爲級湌
제(帝)는 호동(好童)이 색사로 황란(荒色)하자 그를 걱정하여 방기(房期)에게 명하여 그를 가르치게 했다. 帝以好童荒色憂之命房期敎之
土狗正月帝女初利生河期女阿胡利進河期爵一吉湌加其母禮生大品紫衣
토구(土狗:무술398) 정월, 제(帝)의 딸 초리(初利)가 하기(河期)의 딸 아호리(阿胡利)를 낳았다. 하기(河期)의 작위를 일길찬(一吉湌)으로 진급시키고 그 어머니 예생(禮生)에게 대품자의(大品紫衣)를 더하였다.
골선(骨宣)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등인(登仁)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骨宣伊伐湌登仁稟主
2월, 보반(保反)이 하기(河期)와 더불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보반(保反)은 스스로 길모(吉母)가 되어 누차 하기(河期)를 끌어 들였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사신(私臣)중에 총애가 융성하였으나 제(帝)가 능히 금할 수 없었다. 二月保反與河期入海宮先是保反自爲吉母累引河期至是益甚寵隆於私臣帝不能禁
3월, 영술(英述)이 숙단(叔丹)의 아들 향숙(享叔)을 낳았다. 三月英述生叔丹子享叔
4월, 해궁(海宮)에 큰 불이 났는데 보반(保反)과 하기(河期)가 함께 탕(湯)으로부터 업혀서 달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난해 말하기를 ‘골신의 불이다(骨神火也).’라고 했다. 혹은 말하기를 ‘초리(初利)가 질투해서 도적을 시켜 방화한 것’이라고도 했다. 四月海宮大火保反與河期自湯負走人皆非之曰骨神火也或曰初利妬而使賊放火也
제(帝)는 재앙이 많으므로 선무(仙巫)들을 모아 그를 굿풀이(禳) 하게했다. 帝以多災會仙巫禳之
7월, 해궁(海宮)의 사상자 7인과 유공자 20인에게 포상하였다. 七月賞海宮傷死子七人有功者二十人
태홍(泰虹)을 이벌찬(伊伐湌)으로 하고 소을(小乙)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秦虹伊伐湌小乙稟主
黃豕 正月 以扶余降民分置南路 擇其有技者屬于各典 以通其才 生鳥伊伐湌 公兒稟主
황시(黃豕:기해399) 정월, 부여(扶余)의 투항해온 백성들을 남로(南路)에 분산 배치하고 (전문)기술을 가진 자(有技者)를 뽑아 각 전(典)에 소속시킴으로서 그 재주를 소통케 했다.
생오(生烏)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공아(公兒)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3월, 제(帝)의 아들 호동(好童)이 초리(初利), 준물(俊勿), 사류(舍留), 도리(都利)등과 함께 형산(兄山)으로 돌아갔다. 三月帝子好童與初利俊勿舍留都利等畋于兄山
4월, 두씨(杜氏)가 마아(馬兒)의 아들 연중(兗中)을 낳았다. 담덕(談德)이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길보를 알렸다(報吉). 혹은 말하기를 연중(兗中)은 담덕(談德)이 사통하여 낳았다고 하는데 모습이 담덕(談德)과 닮았다. 四月杜氏生馬兒子兗中談德爲之設宴報吉或曰兗中者談德所私而生也皃似談德
7월, 메뚜기떼(飛蝗)가 들판을 해치자 제(帝)가 그를 위해 음식을 줄이고 자신을 책망했다. 七月飛蝗敝野帝爲之減饍責己
8월, 보반(保反)이 하기(河期)의 딸 상연(上淵)을 낳았다. 八月保反生河期女上淵
10월, 휴례태후(休禮太后)가 붕하였다. 말구릉(末仇陵)에 장사하고 대서릉(大西陵)에 유골을 나누어 백릉(白陵)이라 이름 하였다. 十月休禮太后崩葬于末仇陵分骨大西陵名曰白陵
금서(金鼠:경자400) 2월, 사씨(思氏)가 딸 식사(息思)를 낳았다. 심궁(心宮)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우비(羽比)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金鼠二月思氏生女息思心宮伊伐湌羽比稟主
5월,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호명(皓明)을 낳았다. 五月內留生帝女皓明
명을 내려 해궁(海宮)의 공사(役)를 파하였다. 제(帝)의 몸이 편치 않은데다 해궁(海宮)이 이롭지 않다는 말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命罷海宮役以帝不寧有言海宮不利故也
9월, 금관(金官)의 사신 도무(徒武)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九月金官使徒武等來獻土物
10월, 친히 휴례태후릉(休禮太后陵)에 제사하니 어마(御馬) 3마리가 모두 무릎을 꿇고 소리내어 슬피 울며 마치 사람처럼 눈물을 흘려 뚝뚝 떨구었다. 제(帝)는 마음에 감동해서 병이 되었다. 十月親祀休禮太后陵御馬三頭皆跪膝哀鳴如人啼淚下滂滂帝感而成疾
도리(都利)가 옹기(雍己)의 딸 도매(都妹)를 낳았다.都利生雍己女都妹
12월, 큰 눈이 내렸다, 제(帝)의 질환 때문에 삼산(三山)에 기도하였다. 十二月大雪以帝疾禱三山
白牛四月自春大旱帝且不寧諸王子皆以荒淫爲事帝乃遣一同仇里迺等于麗贈錦帛眞珠而請還馬兒杜氏亦爲馬兒說談德曰馬兒之於吾國九牛一毛也不如歸王其國以傳兗仲則大王之骨其王南方不亦好乎談德然之乃以宝貨七車載馬兒杜氏以精騎三百護送之
백우(白牛:신축401) 4월, 봄부터 큰 가뭄이 들고 제(帝) 또한 (몸이) 편치 못한데 여러 왕자들은 모두 황음(荒淫)으로 일을 삼았다. 제(帝)가 이에 일동(一同)과 구리내(仇里迺)등을 고구려에 보내 비단과 진주등을 선사하고 마아(馬兒)의 귀환을 청하였다. 두씨(杜氏) 또한 마아(馬兒)를 위하여 담덕(談德)을 설득했다.
“마아(馬兒)는 우리나라에게는 구우일모(九牛一毛)입니다. 돌아가 그 나라에 왕 노릇함만 못합니다. 연중(兗中)으로써 전한다면 대왕(大王)의 골육이 남방에서 왕 노릇함이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담덕(談德)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화를 7수레에 싣고 마아(馬兒)와 두씨(杜氏)를 정기(精騎) 3백으로 호송하여 보냈다.
호물(好勿)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介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好勿伊伐湌芥臣稟主
5월, 초리(初利)가 호동(好童)의 딸 식호리(息胡利)를 낳았다. 五月初利生好童女息胡利
6월, 두씨(杜氏)가 혼문령(渾門岺)에 이르러 태가 동하여 수레 안에서 딸을 낳으니 그대로 이름을 혼씨(渾氏)라 했다. 마아(馬兒)가 (그를) 위해 혼문(渾門)에 머물렀다. 六月杜氏至渾門岺胎動生女于車中仍名渾氏馬兒爲留渾門
7월, 마아(馬兒)가 입경(入京)하여 제(帝)를 뵈옵자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제(帝)가 말하기를 “너를 보니 병이 없겠노라.”하였다.
마침내 보반(保反)에게 명하여 두을(豆乙)에서 길례를 행함으로써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종자를 심을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이 이를 부군우(副君雨)라 하였다. 제(帝)가 부군(副君)에게 명하여 대궁(大宮)에서 대정(大政)을 시행하도록 했다. 七月馬兒入京見帝相扶而泣帝曰汝可無病矣乃命保反行吉于豆乙以爲副君天大雨得以種植人以爲副君雨帝命副君行大政于大宮
도령(道寧)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술호(述戶)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道寧伊伐湌述戶稟主
8월, 제(帝)는 질환이 점점 깊어지자 성산(聖山)에 나가 기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八月帝疾漸好出居聖山
영술(英述)이 호동(好童)의 아들 정숙(丁叔)을 낳았다. 英述生好童子丁叔
9월, 두씨(杜氏)가 그 세 아들과 더불어 성산(聖山)에서 제(帝)를 알현하였다. 제(帝)가 두씨(杜氏)에게 골품(骨品)과 자의(紫衣)를 내렸다. 九月杜氏與其三子謁帝于聖山賜斗氏骨品紫衣
十月 保反生河期女下淵帝自聖山還大宮
10월, 보반(保反)이 하기(河期)의 딸 하연(河淵)을 낳았다. 제(帝)가 성산(聖山)으로부터 대궁(大宮)으로 돌아왔다.
十二月 大雪 聖母祠不通二日 以房期爲阿湌 妻以帝女發有
12월, 성모사(聖母祠)에 큰 눈이 내려 이틀간 불통되었다. 방기(房期)를 아찬(阿湌)으로 삼고 제(帝)의 딸 발유(發有)로 처를 삼았다.
水虎 正月 保反后與副君受朝 世閏伊伐湌良兌稟主
수호(水虎:임인402) 정월, 보반후(保反后)가 부군(副君)과 더불어 조례를 받았다. 세윤(世閏)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양태(良兌)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宇花生好童女廉
우화(宇花)가 호동(好童)의 딸 염(廉)을 낳았다.
二月帝復病劇求藥于神山帝曰天命自在藥能何爲晏然而崩帝性寬仁好德能於武事能禦其侮晩年好神仙委政於內初年唯以奉順神后爲旨無所創新然臣民莫不感其德而痛如考妣亦賢哉卽日副君行祥于保反宮卽宝位是爲實聖帝實聖在麗思歸累請代質不得內懷不平及卽位雖以保反爲后而陰有報復之意分質宝海美海逐出訥祇好勿等乃擁訥祇靖之尊父帝爲奈勿大聖神帝其譜曰阿孝聖母生阿好聖母阿好生勢漢勢漢生首留首留生郁甫郁甫生仇道葛文王娶骨正太子女綠帽骨母生末昕世神取味鄒大聖太帝之母述禮聖母生末仇世神是爲帝父故帝於太帝內外重親寵愛極深遂爲眞骨中興之祖其天命乎
2월, 제(帝)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신산(神山)에 약(藥)을 구하였는데 제(帝)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자재(自在)하거늘 약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하였다. 제(帝)는 성품이 관인호덕(寬仁好德)하며 무사(武事)에 능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능히 제어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정사를 내궁에 위임하였고, 초년에는 오직 신후(神后)에게 순종해서 받들 뿐 (자신의)뜻을 위해 새로 창출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은 그 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으니 또한 현(賢)이었더라.
즉일로 부군(副君)이 보반궁(保反宮)에서 상례(祥)를 행하고 보위(寶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實聖帝)이다. 실성(實聖)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차례 볼모를 바꿔 줄 것(代質)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안으로 불평을 품었었다. 급기야 즉위함에 이르자 비록 보반(保反)으로 후(后)를 삼았으나 음(陰)으로는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서 볼모로 보내고 눌기(訥祇)를 내쫓았는데 호물(好勿)등이 이에 눌기(訥祇)를 옹위하여 그를 안돈시켰다.
부제(父帝)를 추존하여 나물대성신제(奈勿大聖神帝)라 하였다. 그 보록(譜)에서 말한다.
“아효성모(阿孝聖母)가 아호성모(阿好聖母)를 낳고 아호(阿好)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을 낳았고, 구도갈문왕이 골정태자(骨正太子)의 딸 녹모골모(綠帽骨母)를 취하여 말흔세신(末昕世神)을 낳았고, 말흔세신이 미추대성태제(味鄒大聖太帝)의 어머니 술례성모(述禮聖母)를 취하여 말구세신(末仇世神)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제(帝)의 아버지가 된다. (미추)태제(太帝)에게서 제(帝)인 까닭에 내외(內外)가 중시하고 총애가 지극히 깊어 진골(眞骨) 중흥(中興)의 조상이 되었다. 그 천명(天命)이었음 이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