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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지 꼭 20년이 된 베를린 한인교회를 회고하고 글을 쓰라는 요청을 받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목회자로 교회를 섬겼던 신흥섭 목사는 하늘나라에 있고, 돌아와 20년 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곳이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내 인생의 황금기인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을 보냈던 그곳이 내게는 어떤 곳이었을까?
1.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장학생으로 괴팅겐에서 공부하던 신흥섭목사에게 베를린 한인교회에서 목회자로 와 달라는 청빙을 받고 우리 부부는 고민했다. 아니 솔직히 내가 반대했다. 첫 번째 목회지로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 내 반대 이유였다. 그런데 신목사는 “이 자리가 좋은 자리였으면 내게 차례가 왔겠는가. 우리가 돈이 있어서, 혹은 자격이 있어서 독일에 왔는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무엇을 겁내고 걱정하는가?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라고 확신하네. 그리고 처음 목회를 힘든 곳에서 하면 다음에는 그보다 조금 나은 곳을 하나님께서 주시겠지.”하면서 부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1985년 5월에 신목사는 교회로 부임을 했고, 아이들과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이사를 했다. 장학금 1300마르크로 그달 그달 살아야 했던 나는 이사비용이 없어서 다른 유학생에게 돈을 꾸어서 이사를 했다. 집도 마련되지 않아 베를린선교부(BMW)의 외지 선교사들의 휴식을 위한 집에서 한달간 살기로 하고 짐은 한국문화원에 두고 몸만 들어갔다. 이사는 왔는데 돈이 없어서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신목사는 원래 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생활은 늘 내 몫이었다. 도착하고 곧 성가대수련회를 뤼벡에서 했는데 식구들도 모두 가야한다고 해서 따라갔다. 참가비를 낼 돈이 없어서 그냥 있었다. 그런데 교우 중 한 사람이 문제를 제기했다. 목사는 참가비를 안 내도 되지만 가족은 왜 안내느냐는 것이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랴 돈이 없으니...... 돌아오는 길에 신목사가 자동차기름 넣을 돈을 달라고 했다. 챙피해서 죽을 지경이었으나 어쩌랴. 주집사님께 돈을 꾸어서 돌아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새로 부임한 목사네가 교인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는 정말 할 수가 없었다. 이사 비용도 갚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괴팅겐에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는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초인종이 울려서 나가보니 검은 옷을 입은 우체부가 서 있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었다. 내게는 그 우체부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내신 까마귀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까마귀로 보였다. 아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보내신 까마귀가 정말 있었군요. 그 까마귀를 우리에게도 보내주셨군요. 너무나 감사했다. 그 돈으로 우리는 고비를 넘겼다. 그 돈은 김균진 교수가 보내신 것이었다. 김교수가 독일로 공부하러 올 때 비행기 요금이 없어서 고민하는 것을 본 신목사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비행기 삯에 보태라고 드렸단다.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은 김교수는 신목사에게 그 빚을 꼭 한번 갚고 싶었는데, 마침 그때가 그 때였단다. 어쨋거나 나는 베를린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은혜의 까마귀를 경험했다.
2. 하나님이 하시는 일
당시 베를린한인교회는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 교인들이 몇 년 간 안과 밖으로 나뉘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목사의 부임을 기화로 교우들도 하나로 합쳐지기를 원했고, 신목사도 두 팀이 합쳐지는 것을 부임의 조건으로 달았다고 했다. 당시 베를린 선교부 동아시아 담당 총무이던 잉고 펠트 목사는 “한국교회들이 수없이 갈라지는 것은 보았어도 다시 합쳐지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후에 내게 말했다. 겉으로는 평화스러워 보였으나 속은 불쑥 불쑥 올라오는 끓는 풀죽 솥 같았다. 작은 문제가 생겨도 생각이 정확하게 두개로 갈렸다. 그리고 양쪽이 모두 신목사가 ‘저쪽을 편든다’고 말했다. 신목사는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아니 순진한 사람이어서 이랬다저랬다 하며 누구 편드는 것을 못한다. 자기편도 못 만드는 사람이다. 어떤 의미로는 약삭빨라야 살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많이 고민했고, 힘들어 했다. 우리는 그 때마다 밤새워 이야기도 했고, 함께 기도했다.
부임 후 첫 제직 선출을 하는 날이 되었다. 그 이전부터 제직임명이 아닌 제직선출을 했던 교회의 전통을 따라 제직선출 투표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그 결과가 두려웠다. 그런데 개표를 해 보니 양편에서 꼭 같은 수의 집사가 선출되었다. 어느 편이 더 많고 적음이 아니라 동수의 집사가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아,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로구나’하고 깨달았다. ‘그래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아주 공평해. 하나님이 여기에 함께 계셔. 사람이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우리는 걱정을 놓았다. 누가 뭐래도 목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새로 선출된 제직들과 첫 제직회를 하던 날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신목사를 기다리며 무슨 사고가 난 것이 아닐까 가슴을 졸였다. 동틀 녘에 돌아온 신 목사는 걱정하는 내게 말했다. “앞으로도 제직회는 오래 걸릴거야. 그동안의 묵은 감정들을 풀어내려면 많은 대화가 필요해. 그래서 나는 제직회에서 사무적인 안건토의 뿐 아니라 모든 이야기들을 할 수 있도록 할거야. 오늘 회의도 오래했지만, 끝나고 모두 함께 김치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헤어졌지.” 그 후 제직회를 하는 날이면 나는 신목사를 기다리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점차 함께 힘을 합쳐 일하는 분위기로 교회는 바뀌어 갔다. 한국 민주화운동 후원을 위한 자금마련을 위해 만두를 만들던 날, 휴가를 내어 30여명이 모였다. 아이들은 한국문화원을 이리 저리 뛰고, 남자들은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 국수기계를 돌리고, 여자들 한 팀은 만두 속을 넣고, 한 팀을 삶아서 식히고, 한 팀은 포장하여 냉동시키고, 하하 호호 웃음이 넘쳤다. 첫 만두 작업은 1300여개를 만들고 마쳤다. 아이들과 만두 일꾼들, 그리고 하우스 마이스터까지 배부르게 만두를 먹었음은 물론이다. 6년 후 내가 한국에 돌아올 즈음에는 하루에 만두를 3000개까지 만들 정도로 발전했다. 만두 만들기, 바자회 등 몸을 쓰는 일들을 함께 하면서, 그 이익금으로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교우들은 하나가 되어갔다. 후에는 이익금의 일부를 노후 함께 살아갈 “우리 집”을 만들기 위한 기금의 종자돈으로 삼기 시작했다.
3. 2세들의 잔치마당
교회 부임 후 얼마 안 된 저녁에 신목사가 내게 말했다. “그동안 말을 안했는데, 당신은 교회 일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이 청빙 조건 중의 하나였어. 목사 사모가 끼어서 좋을 일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 교회 일에는 당신이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괴팅겐에서 공부하는 동안 재독한인교회들에게서 교사교육 요청을 받고 거의 다 돌아 본 후여서 2세들의 교회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나는 교회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랴! 교인들이 원하지 않는다는데...... “그래. 잘 되었네. 그럼 나는 마음 놓고 학교 다니고 공부하면 되겠네.”
그렇게 말하고도 마음이 쓰였던 나는 매 주일, 예배당 맨 뒷줄에 앉아 예배를 드리다가, 주일학교 선생님이 오시지 않는 반에 아이들이 뛰고 떠들면 슬쩍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분반공부를 하기를 2년. 드디어 주일학교 교사들로부터 교사회의에 참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김옥환집사, 윤희섭집사, 김영관집사, 장진국집사, 이웅희 집사, 김성곤선생 등이 중심이 되었던 교사팀은 열정이 넘쳤다. 매달 교사회의를 하면서 아주 열심히 주일학교를 섬겼다. 교사회의에 들어가서도 말 그대로 참관 했을 뿐 나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신목사도 주일학교를 열심히 섬기는 그들을 격려하고 도울 뿐 간섭하지 않았다.
교사회의 참석 후 첫 주일학교 수련회에 함께 가줄 것을 요청받고, 하르츠로 아이들과 함께 떠났다. 그런데 참석해 보니 온통 노는 프로그램뿐이었다. 물론 아이들은 놀면서 자란다.
나도 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하는 수련회는 꼭 있어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나는 오전 타임(9-12시)은 공부시간을 갖자고 주장했다. “놀러 와서 왜 우리들을 구속하느냐”고 아이들도 입이 나왔고, 교사들도 불평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래도 이것은 밀릴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강하게 주장하니 ‘사모님이 해 보라’고 했다. 아이들과 성경공부하고, 노래하고.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아이들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수영장에 가서도 “누구든지 알지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를 합창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노래들을 부르다보니, 교회 앞 주차장에서 자녀들을 기다리는 부모들 앞에서도 노래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안덕희 집사와 이영희 집사가 “아니 어쩐 일이지요? 그동안 아이들이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는데요?”하고 물었다.
그 다음 수련회부터는 아침밥을 먹으면 아이들이 스스로 모여들었다. 오전시간은 의례 공부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 같았다. 물론 교사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그 시간을 아주 재미있게 이끌었다.
교사들의 꿈은 베를린한인교회 주일학교가 교회 아이들 뿐 아니라 베를린에 있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모임터와 나눔터가 되는 것이었다. 다른 교회를 다니거나, 천주교 성당을 다니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신나게 노는 터를 마련해 주어 2세들의 중심에 베를린한인교회가 잔치마당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붓글씨도 가르치고, 함께 하는 프로그램들로 교회를 개방하면서 아이들은 친구들을 데려왔고, 그 안에서 그룹 다이내믹이 생겨났다. 주일이 아닌 날에도 서로 연락하고 만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털어 놓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가 아이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신이 났다.
신목사는 노동이나 유학으로 독일에 와 살면서 한국을 그리워하는 부모들과는 달리, 독일사회에서 살아갈 2세들이 독일사회를 겉도는 사람들이 아니라 독일 사회 속 중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 첫 번째를 교회교육 중 견신례 교육을 독일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잡았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일란드교회와 손을 잡고, 견신례 교육을 함께 하기로 제직회의 결정을 거쳐 실행에 옮겼다. 1년 반이 걸리는 견신례 교육은 독일교회가 가진 교회교육의 중심이다. 독일의 교회, 신앙, 사회, 문화를 알기에는 최고의 방법이다. 파우셔트목사와 휘00목사(목사님 이름 잊음)의 진행아래 신목사도 한 부분을 맡아 함께 했다. 우리 아이들은 독일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고, 견신례교육 여행을 떠나면서 한 건물을 쓰는 두 교회 아이들 사이에 친밀감이 형성되었고, 한 지붕 두 교회가 함께하는 프로그램들도 생겨나 어른들의 교류도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독일교회의 행사에 도 가급적이면 참가하고, 베를린 선교부 행사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몇 해 후 독일교회여성 모임에 한국교회여성 대표로 발제를 하러 간 일이 있었다. 프랑크프르트 근교에서 열린 모임에서 참가자로 온 하일란드교회의 파우셔트목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신목사 부인임을 알아보자마자 “나는 신목사를 너무 그리워해요.”라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해 하는 나에게 그는 “신목사 이임 후에 한인교회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어요. 장소를 사용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하일란드 교회와 하는 공동 프로그램들이 줄어들고, 관계도 거의 없다”라고 말하며 신목사와 함께 일하던 때가 그립다고 말했다.
다른 쪽으로 흘러간 이야기를 되돌려 보자. 두 번째는 한글학교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독일인으로 살더라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건강하고, 그것을 위하여 한글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매주 토요일 한국문화원에서 한글학교를 계속했다. 정혜경선생, 김성곤선생, 곽선생(?)등이 수고했고, 아이들은 한글공부보다는 모여서 노는 재미에 계속 참여했다.
세 번째는 동독 속의 섬 베를린에 사는 청소년들과 서독에 사는 청소년들의 교류를 위하여 연합수련회, 운동대회 등에 참석하는 기회를 넓혔다. 사는 지역은 다르나 같은 문제와 고민을 가지고 있던 청소년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익숙해지면서 후에 함브르크 처녀와 베를린 총각의 결혼으로도 이어졌다.
4. 남북교회의 만남(1989년 독일교회의 날 - 베를린)
독일 통일 이전이던 1988년 9월, 재독한인교회들의 공동수양회를 겸한 ‘한인교회의 날’ 행사가 서독의 한 수양관에서 열렸다. 그 때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1989년 동독 가운데 섬 서베를린에서 열리는 독일 “교회의 날(Kirchen Tag)”에 서독이 같은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남북한 기독교인들을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사람들이 독일교회의 날에 손님으로 온다는데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모른척하기에는 독일교회 앞에 체면이 안서는 일이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자니 한국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불안앴다(20년 전 한국의 상황은 반공법, 보안법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 나라에서 교육받고 살아온 우리 모두가 갖는 문제였다. 밤을 새는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만나야 하는 이유와 만날 수 없는 이유가 교차되고, 억양이 고조되고, 이런 토론을 밤 새워해야하는 한인교포들의 현실과 조국의 분단이 가슴 깊은 곳에 아픔으로 남았다. 그러나 2박 3일간의 공동토론과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재독한인교회들이 북한의 대표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함께 만나며, 독일교회의 손님으로 두지 않고 우리의 손님으로 맞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불안한 마음으로 손님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신흥섭목사가 재독한인교회 회장이었기에 베를린한인교회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1989년 6월 7일,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에서 멀지 않는 거리에서 음식바자를 하느라 여신도회원들은 정신없이 바빳다. 한편에서는 밀가루 빈대떡을 부치고, 만두를 튀기고, 잡채를 접시에 담고, 길게 늘어선 독일 사람들에게 음식을 넘겨주고, 돈을 받고...... 그래도 우리 판매대 앞에 선 줄은 줄어들 줄 몰랐다.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서독으로부터 와서 참여하는 ‘독일의 날’ 행사이기에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함께 온 동양 사람들을 소개했다. “이분들이 북한에서 오신 손님들입니다.”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누구도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렇다고 달려 나가 악수하려고 손을 내미는 사람도 없었다. 어색한 몇 초가 흐른 후 한 사람이 소리쳤다. “어머나, 우리하고 똑같이 생겼잖아!” 그랬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았다. 머리에 뿔도 달리지 않았고, 엉덩이에 꼬리도 없었다. 얼굴이 빨갛지도 않았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한국 남정네들이었다. 가슴에 달린 김일성휘장만 없다면 길거리 지나다 마주쳐도 같은 교포거니 눈인사하며 지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눈물이 쏙 빠지게 허리를 쥐고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끝에 진짜 눈물이 어렸다. 그리고 어색해졌다. 우리를 가르고 있던, 남과 북을 가르고 있던 간국이 얼마나 큰가를 극명하게 나타내 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뒤를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몰라 우리는 공연히 바쁜 체 했고, 북한에서 온 4명의 손님들도 독일 목사님들을 채근하여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베를린 한인교회 친교실(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인의 밤”을 열었다. 교인들 뿐 아니라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한인회보에 광고도 내고, 대사관에도 알리고 했지만, 재독한인교회협의회에 소속된 교인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서독 각지에서 온 한인교회교인들도 퍽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여신도회가 준비한 국밥 한 그릇씩을 앞에 놓고 남한에서 오신 분들, 북한에서 오신 분들, 독일에 사는 한인교회 식구들 사이에 공식적 인사를 건네기까지 분위기는 얼어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여흥 시간에 우리는 떼어낼 수 없는 하나임을 실감하였다. 함께 부른 아리랑, 도라지 노래에 맞추어 나오는 어깨 짓, 모두 같았다. 손에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 맞잡은 것은 손이 아니요, 모두의 마음이었다. 첫날은 무서워서(?) 손도 잡지 못했는데 그날은 모두 끌어안고, 얼굴을 마주대고, 흔들고.....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서로 주소를 교환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애쓰고, 내일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6월 10일 남북교회 대표들과 재독한인교회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어울려 드린 “남․북․재독 한인 기독자 합동예배”는 감동적이었다. 남과 북에서 오신 목사님들의 설교, 함께 나눈 그리스도의 몸과 피, 한 목소리로 읽은 성경말씀, 한 소리로 한 신앙고백, 같은 찬송. 어디서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임과 동시에 한 민족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배드린 성 카니시우스 교회에서 박람회장까지 이어진 통일 길놀이, 박람회장 야외전시장에서 벌어진 통일제는 독일인들 앞에서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희열의 순간들이었다. 아니, 남과 북이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사는 땅임을 확인하는 자기 확인의 순간들이었다. 그래, 우리는 하나다!
그 때 처음 만났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대표 강영섭 목사님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일하면서 외국에서 열린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만남’에서 다섯 차례 쯤 더 만났다. 그 때마다 첫 만남을 생각하며 반가웠다. 강목사님도 내게 막내딸 안부를 물을 만큼 친근해졌다. 그런데 아직도 통일은 멀다.
5. 떠날 때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있을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다.
유학을 목표로 독일에 왔던 신목사와 나는 한인교회 목회를 떠날 때가 언제일까를 많이 생각했다. 교회 부임을 결정했을 때 내가 신목사에게 물었다. “갈 때가 있으면, 떠날 때도 있는데 언제를 떠날 때로 잡는가?” 신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갈라졌던 교인들의 아픔이 치유되고, 후임 목회자가 와서 어려움 없이 목회를 할 만하면 언제든지 떠난다.”
목회 3년째, 교회에서 사택 전화비와 자동차 벤진비용을 부담하기 시작했다. 신목사와 나는 마주보고 웃었다. 교인들의 관심이 목회자의 생활로 돌려졌다는 것은 교인들끼리의 갈등관계가 서서히 정리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아졌기 때문이다. 교우들이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교회 일들이 정리되면서 우리는 공부하는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신목사는 첫 임기를 마치면 연임하지 않고 학생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문제는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있는 우리가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생활 때문에 그대로 머물 생각은 없었다. 정말 아무런 대책 없이 한인교회 목회를 그만두었다.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교회를 떠났다. 교인들은 막연하게 뭔가 대책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굶기시지는 않을 것이고,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목회 할 때도 가끔 쌀이 떨어졌을 때가 있었는데, 목회를 그만 두고 나서는 쌀이 떨어진 때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렙다 과부의 가루 항아리와 기름병을 채워주신 하나님께서는 교우들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채워주셨다. 은혜가 넘쳤다.
U-Bahn Krankenhaus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 다니던 내게 기장 여신도회에서 일하러 오라는 요청이 와서 효성이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자리가 잡히면 아이들도 데려오고 신목사는 남은 공부를 마치기로 했다. 사실 돌아올 여비 마련도 어려웠는데, 그만둔 목회자 사모의 귀국비용을 교우들이 마련해 주었다. 고마웠다. 은혜 가운데 살았다.
이글을 쓰며 하늘나라에 간 신목사 생각이 많이 났다. 사람을 좋아하는 신목사는 누구든지 보면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자’는 것이 그의 인사였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밥을 차리라고 하면 어떤 때는 난감했다. 쌀이 없을 때는 칼국수를 해서라도 상을 차렸다. 교단을 망라해서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아 대접할 것이 없어서 속이 상한 때도 있었다. 그 때의 부족은 뒤늦게 하나님께서 주신 효성이가 메꾸어 주었다. Kindergeld와 출산장려 양육비가 우리의 뚫어진 지갑을 막아 주었다. 은혜 가운데 정말 잘 살았다.
6. 마치며
이글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 교회이야기라기 보다는 내 이야기이다. 무슨 이야기든지 써도 좋다는 이영일목사님의 부추김이 이 글을 가능하게 했다. 혹여 다른 이들에게 누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한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신목사와 베를린한인교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조종식 집사님, 김옥환 집사님, 한용익 집사님, 안정자 권사님, 옹켈 칼레, 김광정 집사님 등 모두를 함께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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