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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가 있는 우리길 걷기' 는 우리길 걷기 모임 대표이신 신정일 선생님이 함께 하십니다.
유배지에서 꽃피운 실학의 집대성자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
강원도 태백에서부터 발원한 남한강이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한자로는 양수두兩水頭라고 쓰는데 두 강줄기가 합수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뒤 양수리 근처에 올라갔던 일본인이 서울 시민의 젖줄인 팔당댐이 위치한 두물머리를 내려다보고 “조선에도 이런 명당이 있었나”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두물머리는 나라의 젖줄로서의 강물뿐만이 아니고 조선 후기 실학사상으로서 한민족을 감싸고자 했던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유서깊은 곳이다.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로 변했지만 다산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읍 마현리 소내였다. 다산의 생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가 1975년 새로 복원하였다. 전통한옥으로 다산이 태어났던 능내리에 지은 ㅁ자 20칸 집에 다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문풍지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있으며 오른쪽에 사당이 왼쪽에는 다산 생전의 유품을 수집 정리한 유물 전시관이 있다.
세월의 때가 묻지 않아 옛 맛을 느낄 수 없는 다산의 집 뒷편 ‘여유당與猶堂’이라 새긴 빗머리돌을 지나 작은 언덕에 오르면 정약용이 그의아내인 ‘숙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합장한 묘가 나타난다.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다산의 묘 앞에서 보면 팔당호의 출렁이는 물결이 어른거리고 이곳 마재에서 영조 38년 1762년 6월 16일 조선 후기 문신이며 실학자였던 정약용이 태어났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羅州였고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과 여유당與猶堂으로 불리었는데 다산은 유배지 다산에서 얻은 호였고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네 이웃을 두려워하라”는 뜻을 지닌 여유당은 유배지에서 돌아와 지은 호였다.
그가 태어나던 그 해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폐세자가 된 뒤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그 후 조정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남인)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노론)로 나뉘었고 시파와 벽파의 싸움은 그 뒤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다산의 생애에도 깊은 그림자를 던지게 된다.
압해정씨押解丁氏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었는데 고조․증조․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정조正祖의 즉위로 남인계에 벼슬길이 트이자 음사蔭仕로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벼슬에 올랐으며 진주목사까지 역임했고 어머니 해남윤씨는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불리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직계후손으로 조선시대 3재三齋의 한 분이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의 손녀였다.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가 되었기에 다산은 글마다, 우리 고산 선생, 우린 공재 선생으로 호칭하며 외가를 자랑 하였다.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문장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일곱 살 무렵에 지은 한 편의 시가 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우니
멀고 가까운 거리가 같지 않음이로다
그의 아버지는 정약용의 시를 읽고 그가 역법曆法과 산수에 능통할 것을 예감하며 기뻐하였다. 그 때 마침 그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한 점의 흉터도 없이 다만 오른편 눈썹 위에 약간의 흔적이 남아 ‘삼미’ 즉 세 눈썹이 되었으므로 삼미자三眉子라 불렀고 그런 연유로 다산은 뒷날 10대 이전의 작품을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엮게 된다.
1776년 2월 열다섯살이된 다산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홍화보洪和輔의 딸이었던 풍산 홍씨와 혼인을 하였다. 그 뒤 다산은 처가를 왕래하기 위해 두미협斗尾峽을 지나 배를 타고 서울출입을 자주하면서 이가환, 이승훈을 통해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게 된다. 그 해 영조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벽파를 멀리하며 시파를 등용한다. 그때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좌랑에 임명된다.
그 무렵부터 다산은 누님의 남편이었던 이승훈李承薰 그리고 큰형수의 동생이었던 광암 이벽曠庵 李檗과 사귀게 된다. 청년시절 다산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8년 연상의 이벽이었다. 그는 뒷날 한국 천주교에서 창립성조로 받드는 인물이며 다산과는 사돈관계인 즉 다산의 큰 형수(정약현)의 동생이었다. 다산의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일찍이 이벽을 따랐다”는 기록을 남겼던 것에서 보듯이 정조에게 중용을 가르치다가도 의문사항이 있으면 이벽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다. 물이 흐르듯 하는 담론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했던 그는 뛰어난 활약으로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한편 중국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조선사람으로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고 최초의 천주교교리 연구회장으로 순교한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윤지충은 외사촌형이다. 이렇듯 다산의 주변 사람들이 한국 천주교의 창립을 주도한 사람들이었다. 정약용은 이가환李家煥․이승훈 등과 교류했는데 이가환은 경세치용학파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李瀷의 종손이었다.
공리공론空理空論 아닌 현실 문제를 다룬 이익이 남긴 책들을 읽으면서 정약용은 평생을 통해 추구할 학문의 방향과 뜻을 세우게 된다. 16세가 되던 해 1777년 겨울 화순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호남에 간 다산은 화순 적벽과 무등산을 유람하였고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화순읍에서 멀지 않은 동림사에서 ‘얼음을 깨뜨려 세수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다산이 열 여덟살이 되던 1779년 그 당시 최고의 경학자였던 녹암 권철신이 주도한 천진암天眞庵의 강학회에 참여했다. 그때 참석한 사람들이 권일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등 대부분이 남인계 학자들이었다. ‘기해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눈 오는 밤중에 이벽이 이르러 불을 밝히고 경전을 담론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경전이 천주교 경전이 아니고 유학의 경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또 다른 의견은 그해 한국 천주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3년 뒤에는 아버지가 경상도 예천 군수가 되자 영남 지방을 유람했다. 21세(1782)에 서울에 집을 사서 정착한 다산은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다산이 정조와 만나다.
22세(1783)에 소과에 급제한 그는 진사가 되었고 곧 이어 생원이 되어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게 된다. 23세가 된 그 이듬해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中庸의 해석에 관한 의문점 70조를 내려주고 유생들의 답변을 요구했는데 정약용이 제출한 ‘중용강의’가 조선조 최고의 군사郡師로 손꼽히던 정조의 마음에 들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는 ‘약용의 뒤에는 이인異人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는데 그때의 상황이 그의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에 실려있다.
“계묘년 봄에 경의진사經義進士로서 태학에 놀 제 위에서 중용강의 여조를 내리셨는데, 그때 나의 벗 이벽이 박아博雅로서 이름이 높았으므로 그와 함께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조대에 대하여 의논하였던 바 이벽은 퇴계의 설을 주장했으나 나의 조대는 우연히 이율곡의 논한 바와 일치되었다.
퇴계는 오로지 심성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이발․기발을 말했으나 율곡은 도기道器를 통론했으므로 기발은 있으나 이발은 없다는 것이다.”
이듬해에 고향에서 큰형수의 1주기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두미협의 뱃길에서 이벽으로부터 처음으로 서교西敎(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책도 얻어 보았고 그 무렵 요한이라는 이름의 세례 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쓴 글에 따르면, 서교를 접한 후 넓게 알고부터 신기한 것을 좋아하던 성벽으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는 등 한동안 상당히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공부에 바빠지고 또 서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을 접하고부터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1785년(을사년) 이른 봄 이벽의 주재로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의 김범우(역관과 의원을 겸업한 중인) 집에 수십 명이 모여 ‘설법교회’를 열었다. 그때 형조에서 그 집회 현장을 덮쳤다. 집회 참석자들은 정약용과 그 형들인 약전․약종, 그리고 이승훈․권일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핵심 멤버들이 붙잡히게 되는데 그 때의 사건을 을사추조 적발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때 김범우는 독하게 매를 맞고 밀양으로 귀양가서 죽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순교자 제 1호가 되었다. 형조에서는 이벽․이승훈․권일신․정약용 등 명문 양반 출신들에 대해서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문중에서의 추궁은 거세었다. 그 중 문중으로부터 가장 혹독하게 질타를 받은 사람은 이벽이었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李浮萬은 경주이씨의 문중회의에 여러번 호출되어 ‘오랑캐의 법도를 가르치는 사문난적’을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관직에서도 추방되던 시절이었는데 이부만은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이벽의 형과 아우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에 올라 있었다.
이부만이 드디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았다. 이벽은 아버지의 죽음을 건지기 위해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고 한발 물러섰다. 식음을 전폐한 그는 15일간 자신의 방안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탈진해 죽었다. 1785년 음력 6월 14일 그의 나이 32세였다. 다산은 이벽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만사를 썼다.“신선나라 학이 인간들 사이에 내려오니 / 흔연히도 신선의 풍체를 보였네 / 깃과 날개는 희기가 눈 같으니 / 닭과 집오리들이 골내며 샘내네 / 울음소리는 우렁차서 구천을 진동시키고 / 내는 소리 밝고 맑아 풍진에 뛰어났네 / 가을 되어 돌아갈 때 맞아 홀연히 날아가 벌이니 / 하엽없이 슬퍼한 들 무슨 소용 있으랴”
을사박해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다산의 집안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28세(1789) 봄 대과大科 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한 정약용은 바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칭호를 얻은 뒤 한림翰林인 예문관검열藝文館儉閱에 피선되었지만 며칠 뒤에 한림피선 과정의 문제가 야기되어 최초의 유배길에 오른다.
그러나 해미현(충남 서산군 해미면)에서 열흘간의 유배생활을 보내던 그는 곧바로 본직에 복귀되어 본격적인 관직생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다산이 31세가 되던 1771년 부친상을 당해 삼년 동안 관직을 떠나게 되는데 그 무렵 다산은 한강 배다리 역사의 규제를 만들어 올렸다. 한강 주교를 설계한 정약용은 그때부터 정조의 신임을 받게되었다. 정조는 수원에 있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현륭원)에 자주 참배했는데 중국․일본과는 달리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주교를 가설하는 기술을 갖추지 못해 몹시 안타까워하던 참이었다. 정조의 현륭원 능행은 단순한 행차가 아니었다. 노론 벽파의 참소로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신원한다는 것은 당시 정계의 주류를 이루던 노론 벽파의 기를 꺾는 일임과 동시에 정조 자신의 왕권을 세우는 일이었다.
정조 15년(1791) 진산사건으로 윤지충이 효수되고 권일신이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병사하는 신해박해가 있었지만 정약용은 엘리트 관료로서 출세의 길을 달렸다. 진산사건이란 전라도 진산(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살던 진사 윤지충이 그의 모친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가 전라감영에서 참수를 당한 사건이다.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공서파攻西派는 권일신을「천주교의 두목」이라고 지목하여 귀양을 보내 병사케 했다. 신해박해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정조 16년 아버지 정재원이 진주목사 재임 중 병사했지만 정약용은 왕명을 받들어 화성성제華城城制를 지어 올린 다음 수원성의 설계도를 작성했다. 3년 상을 치른 다산은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에 복귀하였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연천지방을 암행하게 된다. 그때 정약용은 헐벗고 굶주린채 수탈당하고 있던 농민들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시냇가에 뚝배기처럼 찌그러진 집이 있어 / 북풍에 이엉 걷히고 서까래만 앙상해라……”로 시작되는 적성촌의 가난한 농가를 그린 시와, “마른 목은 따오기 모양으로 길쭉하고 / 병든 살갗 주름져 닭살같구나”하는 대목을 담은 기민시飢民詩들, 구절구절 백성의 고통에 대한 막막한 슬픔과 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은 시가 이때 씌어졌다. 암행어사를 마치고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에 오른 다산은 화성 축조공사를 시행하면서 거중기를 발명했다. 이어 정조 19년(1795) 그는 34세의 나이로 정 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올랐지만 그해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밀입국사건이 발생하자 공서파의 모함을 받아 7월에는 종 6품의 홍주목 소재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당했고 그 때부터 다산은 천주교 관계자로 몰리게 된다. 품계가 한꺼번에 6등급이나 강등하는 수모를 겪었던 그는 금정도찰방 재직 때 온양의 봉곡사에서 강학회를 주관하여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했는데 그때 성호의 종손從孫인 이삼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 성호 부자夫子는 하늘이 내신 영걸스러우신 인재로서 도가 망하고 교화가 해이해진 뒤에 나셔서 회재晦齋와 퇴계를 사숙하여 심성의 학문으로 경經을 삼고 경제의 사업으로 위緯를 삼아 수백여 편의 저서로서 후학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라고 성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그러한 생활철학이 정약용의 진면목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외직으로 쫓겨난 정약용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그해 연말 내직으로 불러드렸다. 1796년 화성이 준공되었는데 거중기․놀고 등의 이용으로 국고금 4만냥이 절약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 다음해인 36세(1797) 때 정약용은 좌부승지를 제수받았고 그 무렵 어느날의 일화가 여유당 전서에 실려 있다.
“1797년 여름 석류꽃이 처음 필 무렵 내리던 부슬비도 때마침 개었다. 정약용은 고향 소내에서 천렵하던 생각이 간절하였다.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도성을 몰래 빠져나와 고향에 돌아왔다. 친척 친구들과 작은 배에 그물을 서둘러 싣고 나가 잡은 고기를 냇가에 모여 실컷 먹었다. 그러자 문득 중국의 진나라 장한이 고향의 농어와 순채국이 먹고 싶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산나물이 향기로울 때라는 것을 깨닫고 형제․친척들과 함께 앵자산 천진암에 들어가 냉이․고비․고사리․두릅 등 산채들을 실컷 먹으며 사흘이나 놀면서 20여수의 시를 짓고 돌아왔다” 아무런 일이 없을 때라도 조정에서 어슬렁거리기라도 해야 불안하지 않는 조정관리들과 달리 그의 가슴속엔 순진무구한 꿈들이 가득 차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절도 잠시 다산은 또 다시 서교문제로 반대파의 탄핵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신해박해 이후 “마침내 마음을 끊었다”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변방辯訪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했다.
신유교옥이 일어나고
그런 정약용을 정조는 1797년 윤 6월 곡산부사로 기용했다. 2년 가량 곡산부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군포를 감하고 호적을 고치고 교육을 일으키는 등 오랫동안 생각해온 바를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목민관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는 때마침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하자『마과회통』12권을 지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했는데 천연두는 그 당시 공포의 질병이었다. 그는 슬하에 9남매를 두었는데 천연두를 앓다 죽어 2남 1녀만 키웠다. 정조 23년(1799) 그는 또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마지막 벼슬이 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받았으나 반대파의 공세로 3개월만에 물러난 뒤 다음해 봄 가족들과 함께 고향인 마재로 돌아왔다.
1800년 6월 28일 정약용을「미래의 재상감」으로 지목하며 총애했던 정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시파(남인)를 옹호했던 정조의 죽음을 두고 최근까지도「독살설」이 거론되고 있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조정의 주도권은 벽파(노론)에게 넘어갔다. 곧바로 영조의 계비이며 골수 벽파 가문 출신인 정순대비貞純大妃 김씨가 12세의 순조純祖를 섭정하면서 수렴첨정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 벽파와 연합인 남인 공서파攻西派가 같은 남인의 신서파信西派를 몰아부친다. 한해 전(1799)에 병사한 남인 시파의 영수 채제공의蔡濟恭(채제공의 서자 채홍근은 다산의 매형임) 관직(영의정)을 추탈하자느니 신서파는 모두 천주교 신자라느니 그들이 모두 역모를 꾸미고 있다하며 그들을 모두 목 베이자는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순조 원년이었던 1801년 대비 김씨는 드디어 천주교 탄압을 위한 사학금령邪學禁令을 선포하였다. 이른바 300여명이 죽어간 신유사옥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음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요, 나라가 나라일 수 있음은 교화敎化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학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짐승이나 이적夷狄(오랑캐)에 돌아가 버린다. 엄하게 금지한 이후에도 개전의 정이 없는 무리들은 마땅히 역률逆律에 의거하여 처리하고, 각 지방의 수령들은 5가작통五家作統의 법률을 밝혀서 그 통 안에 만약 사학의 무리가 있다면 통장은 관에 고하여 처벌하도록 하는데 마땅히 코를 베어 죽여서 종자도 남지 않도록 해라”
정약용의 셋째형 약종이 신유(1801) 1월 19일 교시서․성구 그리고 신부와 교환했던 서찰 등을 담은 책롱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다가 한성부의 포교에 의해 압수당하는 사건이 빚어졌다. 2월 9일 이가환(전 공조판서)․이승훈(전 천안현감)․정약용(전 승지)를 국문하라는 사헌부의 대계(요즘의 공소장)가 올라간다.
“오호 애통하도다. 이가환․이승훈․정약용의 죄악은 죽이기만 하고 말겠습니까. 이들 세 사람이 사학의 와굴窩窟인 까닭입니다. 이가환은 흉추의 핏줄로 화심禍心을 가슴에 감추고 뭇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유인하여서 자신이 교주敎主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그의 아버지가 사가지고 온 요서妖書를 전파하고 감심甘心으로 천주교 법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가계家計를 삼았습니다. 정약용은 본래 두 추물(가환․승훈)과 한 뱃속이 되어 협력하는 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자취가 이미 탄로되었을 때에는 상소하여 사실대로 자백하여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입이 닳도록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몰래 요물을 맞아들이며 예전보다 더 심해졌으니 임금을 속였으며, 사리에 어둡고 완고하여 두려운 줄을 모릅니다. 금번 법부法府에서 압수한 그의 형제․숙질들이 주고받은 서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것을 낭자하게 드러내 보여주니 그 요흉妖凶한 정상은 만 사람의 눈인들 가리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이 세 흉인凶人들은 모두 사학의 근저가 되오니 청컨대 전판서 이가환, 전현감, 이승훈, 전 승지 정약용을 곧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여 나라의 형벌을 쾌하게 바르소서”
결국 2월 16일,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최필공崔必恭, 홍교만洪敎萬,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등 천주교의 주축들은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었고,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은 고문을 못이겨 옥사하고 말았다. 죽음을 모면하고 귀양을 가야했던그 때의 상황이 순조실록에 실려있다.
“죄인 정약전․정약용은 바로 정약종의 형과 아우이다. 당초에 사서사書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읽어보고는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잔, 중년에 스스로 깨닫고 다시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는 뜻이 예전에 올린 상소문과 이번 국문받을 때에 상세히 드러나 있다. 차마 형을 증거할 수 없다고는 했지만 정약종의 문서 중에 그들 서로간에 주고받았던 글 속에서 정약용이 알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니 평소에 집안에서도 금지하고 경계했던 것을 증험할 수 있다. 다만 최초에 더러움에 물들었던 것으로 세상에서 지목을 받게 되었으니 약전․약용은 사형의 다음 형벌을 적용하여 죽음은 면해주어 약전은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약용은 장기현長기縣으로 정배定配한다.”
유배길에 오른 다산
이유인 즉 한 천주교도가 정약용의 셋째형 약종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의 아우(약용)가 알지 못하게 하게』라는 문구가 있었고 약종 자신이 쓴 글 중에도『형(약전)․제(약용)와 더불어 천주를 믿을 수 없음은 나의 죄악이다”는 구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위로는 임금도 속일 수 없지만 아래로는 아우가 형을 증거할 수 없다고 형(정약종)이 그러하니 오직 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잘못된 형님이 한 분 있지만 형님이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댈 수 없다만, 형제의 사이란 천륜이 애초에 무거운 것이니 어떻게 혼자만 착하다고 말하겠습니까 함께 죽여주기를 바랍니다”고 하였지만 정약종은 그의 장남 철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청국인 신부 주문모도 3월 11일 의금부에 자수하여 사형을 당했다.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탄압사건은 신유사옥辛酉사獄 또는 신유교옥辛酉敎獄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다산은 이 사건을 분명히 ‘신유사화辛酉士禍’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공소장에 의해 묻고 답변했던 신유추안辛酉推案에서 이가환은 그 자신이 교주가 아님을 극구 변명했다.
이승훈 역시 을사사건乙巳事件(1785) 이후에는 모든 책을 불살랐고 신해사옥 이후 예산에 가서 회오문을 지어 정학正學으로 돌아온 뒤엔 다시는 믿지 않았다고 했으며 다산 또한 1797년 6월 정조에게 올린 상소장에서처럼 오래 전에 손떼었음을 분명하게 밝혔지만 유배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장기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용은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이理다, 기氣다“라고 떠드는 공리․공론의 성리학을 풍자했던 시를 여러편 지었다.
요즈음 선비들 성리학설만 즐겨 말하나
통치술과는 얼음과 숯이라네
산림山林에 숨어서 나오지도 못하고
나와 본들 남들의 웃음거리 된다네
마침내 경박한 사람들로 하여금
공무公務의 중심일을 멋대로 맡긴다네
- 고시 27 수 -
아옹다옹 싸움질 제 각기 자기 외고집
객지에서 생각하니 눈물 울컥 솟는구나
산하山河는 옹색하여 3천리인데
비바람 섞어치듯 다툰 지 200년
영웅들 그 얼마나 슬프게 꺾였는고
동포 형제 어느 때쯤 전답 싸움 부끄러워하리
넓디 넓은 은하수로 깨끗이 씻어내어
상서로운 햇빛을 온 천하에 비추리라.
하지만 신유교옥은 그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백서사건이란 제천堤川의 배론 토굴에 도피중이던 황사영이 중국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편지가 발견되어 빚어진 옥사였다. 편지의 내용은 청국황제가 조선국왕에게 천주교도 박해 중지의 압력을 가하도록 선교사들이 개입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황사영은 즉각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은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로서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즉 정양용의 큰형인 약현의 딸이 황사영의 부인이다. 이때 황사영의 어머니․부인은 거제도․재주도로 쫓겨가 여종살이를 해야했고 세 살 짜리 아들까지 추자도에 버려졌다.
정약용, 정약전은 그해 10월 20일 저녁 또 다시 체포된 채 올라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공서파에서는 “천 명을 죽이더라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억지로라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위반한 범죄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죽일 것인가”라는 반론이 뒤따랐다. 두 번째 죽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다산은 11월 5일 아무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유배지 장소를 바꾸어 강진으로 또 다시 유배길을 떠나게 되었다. 정약전도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어, 두 형제는 오랏줄에 함께 묶인 채 남도로 유배길을 떠나게 되었다.
율정점에서 헤어진 두 형제
검푸르게 흐르는 한강을 건너고 금강錦江과 갈재를 넘어선 형제는 이별의 지점인 나주의 율정점栗亭店에 닿았다. 나주읍에서 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던 율정점에서 11월 21일 밤을 지낸 두 형제는 11월 22일 아침에 헤어졌다. 그날 살아서 헤어졌던 두형제는 생존시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따로 이은 가게집 새벽 등잔불이 푸르스름 꺼지려 해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사람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이 터지네.....” 그때 지은 시가 율정별이었다.
흑산도로 유배되었던 정약전은 1816년 6월 6일 흑산도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는데 1907년 다산은 강진에서 정약전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살아서는 증오한 율정점이여!
문 앞에는 갈림길이 놓여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간 꽃잎 같다오.....
나주 들목인 율정점에서 정약전과 헤어진 다산은 나주 영산강을 건너 누릿재와 성전 삼거리를 지나 강진에 도착한 뒤 강진읍 동문 밖의 할머니 집에다 거처를 정한다.
오두막집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은 그는 그 집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기식하였다.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하면서,『사상례士喪禮』3편과『상복喪服』1편 및 그 주석註釋을 꺼내다가 정밀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라고『상례사전』서문에서 기록하였던 것처럼 본격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이곳에서「상례사전喪禮四箋」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증하게 해야하니 후중하지 못함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한다. 이런 때문에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할 방’이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고 하는 것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 둔 사업은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嘉慶 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강진읍 뒤에 위치한 보은산에 있는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주로 주역 공부에 전념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로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던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인들『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소”라고 썼던 시절이었다. 그 다음해 가을에 강진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자는 鶴來)의 집에서 기거했다. 다산이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생활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시인 곽재구는 다산초당 아래 마을에서 다산을 생각하는 시 한편을 남겼다.
귤동리 일박 곽재구
아흐레 강진장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
황건 두른 의적 천만이 진을 친 듯
바다갈대의 두런거림은 끝이 없고
후두둑 바다오리들이 날아가는 하늘에서
그날의 창검 부딪는 소리 들린다
적폐의 땅 풍찬노숙의 길을
그 역시 맨발로 살 찢기며 걸어왔을까
스러져가는 국운, 해소 기침 쿨럭이며
바라본 산천에 찍힌 소금 빛깔의
허름한 불빛 부릅뜬 눈 초근목피
어느덧 귤동 삼거리 주막에 이르면
얼굴 탄 주모는 생굴 안주와 막걸리를 내오고
그래 한잔 들게나 다산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바라본
벽 위에 빛 바랜 지명수배자 전단 하나
가까이 보면 낯익은 얼굴 몇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하나 더듬어가는데
누군가가 거기 맨 나중에 덧붙여 적은 뜨거운 인적사항 하나
丁茶山 1762년 경기 광주산
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
전직 암행어사 목민관
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괴수
바람은 차고 바람새에
톰날 같은 눈발 섞여 치는데
일박 사천원 뜨겁게 군불이 지펴진
주막방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시대를 사랑하고
스스로의 양심과 지식을 사랑하여
끝내는 쇠사슬에 묶이고 찢긴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문풍지에 부딪혔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정약용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가 윤씨였고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은 정약용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 되었다. 유배생활이 몇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정약용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尹文擧 세 형제가 있어서 정약용을 다산 초당으로 모셔갔던 것이다. 다산초당 시절각별하게 지냈던 사람이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였다.
혜장惠藏선사(1772~1811)는 해남 대둔사 승려였다. 30세쯤 되었던 그는 두륜회(두륜산 대둔사의 불교학술대회)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학승으로 백련사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읍내 사의재에 살던 1805년 봄에 서로 알게 되어 그후 깊이 교류하였다. 정약용이 한때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역을 공부하고 아들을 데려다 공부시켰던 것도 혜장선사가 주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혜장은 다산보다 나이는 어리고 승려였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재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1811년에 혜장선사가 죽자 비명을 쓰면서 “<논어> 또는 율려律呂,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고 하였다.
다산초당에서 저술에 몰두하다
정약용이 사의재에서 지내던 때에는 혼자 책을 읽고 쓰면서 읍내 아전의 아이들이나 가끔 가르쳤을 뿐 터놓고 대화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정약용은 혜장과의 만남을 통해 막혔던 숨통을 틔울 수 있었고 그와 토론하는 가운데 학문적 자극을 받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혜장을 통해 차를 알게 되었으며, 초의草衣선사 의순意恂과 교류가 시작되었다. 1812년 다산은 강진의 대부호였으며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윤광택尹光宅의 손자인 윤창모尹昌模에게 외동딸을 시집보냈다.
그 무렵 고향에 있는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다음과 같다.
“폐족의 자제로서 학문마저 게을리 한다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 과거를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참으로 독서할 기회를 얻었다 할 것이다.”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가 쓸데없이 될 테고,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만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 기록만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또 ‘시詩는 나라를 걱정해야‘ 라는 글에서는 “임금(오늘날은 민중으로 해석함)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지 않는 내용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내용의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실르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하였고,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 연연하면 그 시를 시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유배지에서 피로 써 보낸 듯한 편지는 바로 그 자신의 그 날 그날의 삶의 자세이자 다짐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편지 중에 오늘날의 상황과 그 때의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이 ,서울에서 살도록 하라>라는 글이다.
“중국의 문명이나 풍ㅅ고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서 살더라도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이 되는데 방해받을 일이 없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서울의 문밖에 몇 십리만 떨어져도 태고처럼 원시사회가 되어 있으니, 하물며 멀고 먼 외딴 집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이 한창 위로 올라 권세를 날ㄹ리 때에는 반드시 산비탈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處士로써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벼슬길이 끊어져 버린다면 당연히 서울의 번화가에 의탁해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넓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요즘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만 사람이 살 곳은 오로지 서울의 십리 안팎 뿐이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동안 서울 근교에서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으며 삶을 유지하다가 자금이 점점 불어나면 서둘러 도시의 ㅂ고판으로 들어간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서울 경기그 중 강남으로의 인구집중현상과 그다지 궤를 달리하지는 않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 살아야 정치. 경제. 문화의 혜택을 고루 받을 수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글이다.
다산초당으로 온 후 정약용은 비로소 마음 놓고 사색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여건을 갖게 되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산책길과 귤동마을 앞 구강포 바다, 스스로 가꾼 초당의 조촐한 정원 속에서 유배객의 울분과 초조함을 달랠 수 있었다. 또한 유배 초기에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해남 연동리의 외가에서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큰 도움은 윤선도에서 윤두서에 이르는 동안에 모아졌던 외가의 책을 가져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이 땅과 그 병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느냐의 여부는 오직 나 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일 뿐이지만, 지금 만백성이 다 죽게 되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으냐”(『여김공후』) 그는 실학과 애민愛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그 당시 백성들이 직면했던 실상을 시로 적었다.
애절양哀絶陽 다산 정약용
갈밭 마을 젊은 여인 서러워라
현문懸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벗도 한 일이나
예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 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의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잠실궁형蠶室宮刑이 또한 지나친 형벌이고
민悶 땅 자식 거세함도 가엾은 일이거든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이치
하늘 땅 어울려서 아들 되고 딸 되는 것
말․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 있어서랴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알 쌀, 한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한고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읊노라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이땅의 민중들이 겪는 고통을 보다 못한 정약용은 ‘애절양’이라는 시를 쓰며 그들의 질곡의 세월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 유민流民들이 길을 메우자 마음이 쓰라리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마저 없어졌다. 생각건대 나야 뭐 죄지은 사람으로 귀양와서 엎드려 있으며 인류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여 아무런 계책이 없지만 하는 수 없어 참상을 기록으로 남긴다”
유배에 풀려 고향 마재에 돌아가다
1818년 9월 18일 이태순李泰淳의 간곡한 진정으로 드디어 유배가 풀린 다산은 ‘사람과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유배지’에서 고향인 마재로 돌아갔다. 그 무렵 다산이 남긴 기록은 아래와 같다.
“나는 가경 신유(1801)년의 겨울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의 주막집에 우접寓接하였다. 을축(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기식하였고, 병인(1806)년 가을에는 학래鶴來의 집에 이사가 살았다. 무진(1808)년 봄에야 다산茶山에서 살았으니 통계하여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며 안접安接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곁에서 보살펴주던 사람은 손孫, 황黃 등 네 사람이었다. 이로써 말하면, 읍내 사람들은 더불어 근심과 걱정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다산의 여러 사람들은 조금 평온해진 뒤에야 알게 된 사람들이었으니, 읍내 사람들을 어떻게 잊겠는가……(『茶信契案』)”
그러나 강진에서 보낸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는『목민심서』『흠흠심서』『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와 사상을 민족의 유산을 가지게 되었다(『목민심서』는 다 써 갈 무렵인 1818년에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 완성했고『흠흠신서』는 그 다음해에 완성했다).
정약용은 44권의 15책으로 된『목민심서』서문에 “:군자가 학문하는 것의 절반은 수신修身하기 위함이요 절반은 목민牧民, 즉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요즘 지방 장관이라는 자들은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데 바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해져 떠돌다가 굶어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하건만 지방 장관 된 자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다”고 지적하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여러 책에서 목민에 관한 사적을 가려뽑고 직접 듣고 여러 가지 폐단과 소견을 적었음을 밝혔다. 경세유표의 저작동기를 다산은 “우리의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흠흠신서는 30권 10책으로 된 형법서이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심리하고 재판하여 처형하는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가하고 또한 다산의 생명존중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저술이다. 그리고 다산은『목민심서』서문을 이렇게 끝맺었다.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지만(유배지에 있는 몸으로) 몸소 실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다산초당(사적 제107호)을 떠난 다산이 고향인 마재에 돌아온 것을 1818년 10월이었다. 서학이라고 통칭되던 천주교에 연루되어 공직에서의 파면과 다른 당파로부터 끊임없는 모함과 질시로 점철되었던 그의 생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고 있는 곳이 앵자산 중턱의 천진암이다.
마재에서 천진임까지는 지척이다.
대성당 부지 동쪽의 앵자산 기슭에는 「조선교구 설립자 모역」이 있는데 흡사 정약용집안의 가족묘지를 방불케 한다. 그곳에는 조선교구의 설립자이자 조카인 정하상丁夏祥(1795~1839)의 묘가 있다.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아들이며, 정약용의 조카이다. 어려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던 정하상은 1801년 아버지와 그의 형 철상이 일곱 살 때 서울 서소문에서 손교하자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낙향하였다.
20세에 서울에 올라온 정하상은 여신도 조중이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구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을 현석문, 유진길과 함께 추진하였다. 그뒤 1816년 동지사 통역관의 하인으로 북경으로 들어간 정하상은 그곳에서 주교를 만나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북경교구를 사정으로 선교사가 파견되지 못하자 아홉 차례에 걸쳐 북경을 내왕하면서 청원을 계속하였다. 1825년에는 유진길과 함께 연명으로 로마교황에게 직접 청원문을 올려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렸고 1827년에는 교황청에 접수되엇으며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교구의 설정이 선포되면서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다. 1835년에는 변방 신부, 1936년에는 샤스탑 신부, 그리고 1937년에는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인 앰베르가 주교로 임명되었고 정하상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인 최초의 신부로 예정되었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며 앰버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도 가족과 함께 7월에 체포 9월 22일 순교하고 말았다.
정하상은 1925년 로마교황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시성이 되었다. 정하상 묘 바로 밑에는 정약용의 조부모와․부모의 묘가 있고 1981년에는 충주에서 발견되어 옮겨진 정약전의 묘 그리고 이벽의 부모․동생부부․누이의 묘가 있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묘들을 천주교 측에서 찾아내 이장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 측에서 보면 배반자였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는 한국천주교의 은인이었다. 정약용과 그의 가문이 없었다면 어떻게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알 수 있었을까.
다산이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함께 활동했거나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남겨진 재산 또한 별로 없었다. 회갑을 맞은 다산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자찬묘지명」에서, “내가 서술한 육경사서로 자기 몸을 닦고 일표이서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으니 본말을 갖춘 것이다”라고 자부하였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자가 많으니 만약 천명天命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횃불로 태워버려도 좋다”고 하며 그의 삶과 사상이 수용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더욱 학문을 연마하면서 때로 청평산, 용문산 등지로 유람을 다니며 보신保身에 철저하였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쓸쓸한 적막과 고적감 뿐이었다.
“유락流落된 7년이래 문을 닫고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노라니 머슴종과 밥짓는 계집종조차도 함께 말도 걸어주지 않더이다. 낮 동안 보이는 거라고는 구름과 파란 하늘 뿐이요, 밤새도록 들리는 거라고는 벌레의 울음이나 댓잎 스치는 소리뿐이라오...”라고 정약용은 친구에게 토로했으며 “책을 안고 돌아온지 3년이나 되었지만 함께 읽어줄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하고 가슴에 사무친 외로움을 토해냈다. 특히 “우리 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오지 않는 거야 이미 정해진 관례이오니 원망하지 않으나 천하에서의 괴로움은 남은 기쁜데 나는 슬퍼함이며 가장 한스러움이란 나는 그를 생각하지만 그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경우랍니다...”라고 다산이 썼던 글처럼 그 당시 내노라하던 사람들은 다산의 집을 지나치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갔다. 그는 깊고도 깊은 고독 속에서 『흠흠신서』30권과 『아언각비』 3권을 저술했다.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 마재로 돌아온지 17년만인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에 다산은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뒷산에 묻혔다. 그의 유배지였던 강진과 그의 고향인 마재 그리고 다산이 그러한 시대상황을 굳굳하게 헤쳐나가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시대를 뛰어 넘는 나라의 스승인 그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광대한 저술을 남겨서 완성된 다산학을 매천 황현은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유용한 학문으로 모두가 후세의 법”이라고 평하였고 국문학자였던 정인보는 “선생 1인에 대한 연구는 곧 한국사의 연구요, 한국 근대사상의 연구요, 조선의 심혼心魂의 연구이며 전 조선의 성쇠존멸盛衰存滅에 관한 연구이다”라고 하여 그의 사상이 한국의 근대사상형성의 기초임을 지적하고 있다.
“흥이 나면 뜻을 움직이고 興시 卽運意
뜻이 나타나자 바로 쓴다. 意 卽寫之
나는 조선 사람이어서 我是朝鮮人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 甘作朝鮮詩
(한국문학통사 3권 143)라는 글을 남긴 정약용은 무엇보다 그는 그 당시 헐벗고 굶주린 이 땅의 민중들과 이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그러한 애국심이 다산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었음을 우리는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그의 학문은 현재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관심이 되고 있으며 그 자취가 서린 현장은 후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천진암과 정약용,
1986년부터 시작된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역화 작업의 현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강학로에 접어들면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2백5자의 한문이 음각되어 있다. 즉 다산이 지은 권철신과 정약전의 묘지명을 발췌․인용하여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산길소로를 20분쯤 오르면 옛 천진암 터가 있다. 천진암터는 현재 이벽․이승훈․권철신․권일신․정약종 등「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5인의 묘역이 되어 있다. 천진암 터 아래로는 1789년 강학회 멤버들이 아침마다 세수를 했다는「빙천」이 있다. 바로 다산의 기록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 기록이 없었다면 한국 천주교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곳 앵자봉 산기슭에 주춧돌의 흔적만남은 천진암에서 이 나라 천주교의 선구자였던 광암 이벽과 권철신, 권일신 형제 정약전, 정약용 형제 그리고 이승훈, 김원성, 이용억, 권상학과 같은 젊은 실학자들이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던 곳이다. 그래서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곳을 성지로 가꾸어야 한다는 천주교 측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모여져 마침내 1979년 천주교에서 문화관광부에 사적지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뒤를 이어 1785년 6월 14일 만 31세로 순절한 이벽의 무덤을 포천의 공동묘지에서 찾아내어 이곳 천진암으로 옮겼고 1981년에는 화성에서 정약종의 묘와 인천 만수동에 있던 이승훈의 묘를 이장하였으며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 창업선조 5위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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