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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글 김태훈
책 중간에 있는 글부터 옮겨보았다.
노동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은 많다. 그중에서도 노동의 진정성을 톨스토이만큼 아름답게 묘사한 작가가 또 있을까. 톨스토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레빈이 풀 베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레빈은 영주였지만 지주로 군림하기보다는 농장 경영을 혁신해 농부들과 그 이익을 나누고 싶어 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지주인 레빈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레빈은 진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농부들에게 보여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레빈은 농부들과 함께 풀베기에 몰두했다. 그저 농부들의 노동에 동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레빈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풀베기, 즉 노동에 몰입하면서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아침부터 정오까지 풀을 벴지만 누가 그에게 얼마나 베었는지 묻는다면 30분쯤이라고 대답할 만큼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중략)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갈수록 더욱 자주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됐다. 그런 때에는 이미 손이 낫을 내두르는 게 아니라 마치 낫이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생명에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마치 요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정확하고 정밀하게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노동에 몰입할 때 엄청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일이 그 다음에 이어졌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농민들과의 소통이 바로 그 순간 가능해진 것이다. 레빈은 농부들 곁에 자리를 잡았고, 농부들 또한 그들 주인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레빈은 나이 든 농부의 집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는 형보다 농부 영감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치는 함께 노동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 톨스토이의 작품중 이 부분은 늘 감동적이다.)
포콜라레 운동
포콜라레 운동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북부도시 트렌토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인 무솔라니가 지배하고 있어서 전국토가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마을 주민들은 방공호로 대피하기에 바빴다.
일상은 무너졌고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곳에 20대 초반의 여성 끼아라 루빅이 있었다.
방공호로 대피할 때 끼아라는 작은 성경책을 지니고 갔다. 폭격 아래, 침침한 방공호 안에서 읽는 성경구절은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끼아라를 사로잡는 구절이 있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베푼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오25.39)
끼아라와 친구들은 방공호에서 나왔을 때 이 구절을 즉시 실천하고자 하였다. 가난하고, 병들고, 또 부모를 잃고 공포에 질린 아이들까지, 폐허가 된 도시를 누비며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끼아라와 친구들은 트렌토의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곤 했다. 가장 좋은 식탁보를 깔고, 같은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필요한 물품을 나눴다. 이들의 사랑의 행위는 주위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트렌토 시민들은 이 젊은 여성들을 찾아와 기꺼이 자기 물건을 내놓기 시작했다. 같은 도시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에게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향한 자루와 꾸러미가 끼아라의 집 앞에 놓이기 시작했다. 끼아라와 친구들은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일종의 ‘재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끼아라에게 당시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기에 체험의 농도는 더욱 짙었다.
끼아라는 모든 인류가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상호존중으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했다, 인종과 이념의 우수성을 앞세운 파시즘과 나치즘이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전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끼아라는 ‘차이’가 아닌 ‘일치’에 더 몰입했다. 일치는 용기를 일깨웠고 용기는 연대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삶을 보고,
사람들은 끼아라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집을 포플라레라고 불렀다.
포플라레는 이탈리아 말로 ‘벽난로’라는 뜻으로,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따뜻한 가족공동체를 상징한다. 모임의 규모는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가톨릭 정신에 기반을 뒀지만 종교의 벽을 허물고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
끼아라는 수많은 종교와 이념들이 공통으로 지닌 황금률을 실천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평화와 정의를 지키며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포플라레운동 말은 들어보았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그 뜻을 알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가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함흥까지 밀고 올라오고 다시 중공군에게 밀려 흥남부두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을 내려온 임길순과 가족들!
가톨릭은 일제강점기부터 북한 지역에 제법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지만 분단이후 북한을 장악한 공산주의 정권은 종교를 탄압하고 박해했다. 구사일생으로 흥남부두에서 피난선을 탄 임길순은 다짐했다.
“이번에 살아날 수 있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 고
거제 장승포를 거쳐 진해에 정착한 후 임길순과 가족들은 냉면을 삶아 팔았다. 하루 장사가 끝나면 남은 냉면을 들고 배고픈 이웃들을 찾아가 나눴다. 변변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시대였지만 하루를 살아도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피난길에 그와 가족을 살려 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기차가 고장으로 멈춰선 곳이 대전이었다.
대전역에서 가까운 성당을 찾은 그에게 오기선 신부님은 밀가루 두포대를 선뜻 내주었고 그들은 가족의 식량으로 소비하는 대신 찐빵 장사를 시작했고 대전 성심당의 시작이었다.
성심당은 손님을 불러들이기 위한 광고판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기 위한 신앙고백이었다.
장사를 마친 후 역 주변의 배고픈 이들을 찾아가 남은 빵을 나누기 시작했다. 단순히 장사하고 남은 빵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찐빵 300개를 만들면 100개 정도는 이웃과 나눴다. 그에게는 장사보다는 장사가 끝난 뒤에 빵을 나누는 시간이 훨씬 중요했다.
또한 성당에서의 연령회(장례를 치러 주는 봉사단체)활동과 평생 이웃 사랑과 나눔에 헌신한 임길순.
제빵기술을 익힌 큰 아들 임영진과 미술교육을 전공한 김미진의 결혼으로 인해 성심당은 신상품개발과 새로운 마케팅, 이벤트를 병행하면서 더욱 발전한다. 그리고 나눔도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1990년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등장, 원도심의 쇠퇴, 동생의 무리한 사업확장과 부도 등으로 성심당은 슬럼프에 빠졌다. 힘든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는 중 성심당에 화재까지 덮쳐 잿더미가 되었다.
화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화재현장에 모인 직원들은 팔을 걷어붙였고 불과 6일 만에 빵을 구워내었다. 직원 모두가 한 가족이 된 것이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부부는 이 구절을 사훈으로 정하고 직원들에게 발표했다.
흔히 서비스업계에서 ‘모든 이’는 손님으로 치완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부부는 ‘모든 이’가 남녀노소는 물론 부자와 가난한자, 손님과 직원, 거래처와 협력업체, 심지어 경쟁업체와 퇴사 후 개인 창업자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이 모두에게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을 성심당의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것이다.
빵 크기를 다시 키웠고 시식도 넉넉하게 준비하여 배가 출출한 청소년들이 시식시간에 맞춰 매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배를 채울 수 있게 했다.
빵 봉투도 환경을 생각하여 재생용지를 활용하고 투명한 경영을 위해 매출을 전 직원에게 공개했다. 정직한 납세와 회사수익이 발생하면 그중 15%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돌려주고 인센티브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EoC(포콜라레) 기금으로 내었다.
영진은 경영뿐 아니라 빵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도 EoC(포콜라레)의 관점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성심당 내부 직원은 물론 외부 고객도 행복해야 했고 되도록 친환경 영농법으로 키원 대전 인근지역의 식재료를 쓰려고 노력하고 환경문제를 고려해 과대포장도 크게 줄였다.
사업의 결과 이상으로 그 진행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이 EoC(포콜라레)의 기본 정신이다.
따라서 수익을 많이 남겨 후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사업 과정에서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무지개 프로젝트의 완성
빨강(Red)
재화를 통해 올바른 경제활동을 한다. EoC(포콜라레)기업으로 사랑과 나눔의 문화를 이룬다. 투명경영을 통해 정직한 납세와 재화를 올바르게 사용한다.
주황(Orange)
우리는 성심인이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회사의 비전과 나의 비전을 함께 한다.
노랑(Yellow)
법률과 윤리 기준을 지킨다. 기업경영에 있어 책임감과 정직성을 지닌다.
(식품위생법, 유통기한법, 원산지표시, 소방법, 근로기준법, 도로교통법, 조세법등)
초록(Green)
정직한 재료와 환경보호로 인간의 존엄성을 갖는다. 정직한 식자재 사용으로 건강한 제품을 생산한다. 지역농산물을 이용한 로컬 푸드개발에 주력한다.
일회용품사용을 최소화하고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하여 쓰레기를 줄인다.
건강한 생각과 건강한 체력으로 건강한 제품을 만든다.
파랑(Blue)
조화롭고 따뜻한 가정 같은 환경을 조성한다. 정리정돈을 통해 쾌적한 근무 환경이 되도록 한다. 성심인의 미소는 성심당의 유니폼이다.
남색(Navy)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자신의 직무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
자기 업무 능력은 회사, 후배, 동료에게 도움이 되도록 한다.
사내외 직무교육과 각종 대회 참여로 업계의 흐름파악과 자기 개발에 힘쓴다.
남색은 직원의 자기 개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다짐이다.
보라(Violet)
성심가족으로 생각의 일치와 공유를 이룬다. 한가족 신문을 통해 회사와 동료의 소식을 소통하고 공유한다. 가족의 마음으로 눈 맞으면 인사하고 존칭어를 사용한다.
SNS를 활용하여 소식을 더 빠르게 공유하며 외부에 회사를 알린다.
2007년 채택된 무지개 프로젝트는 매년 한 가지 색깔을 지정하거나 심화 목표를 제시하는 등 근무 환경에 구체화하고 있다.
재기에 성공한 성심당의 새로운 도전이 연일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 서울 뿐 아니라 중국 등 각지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러나 성심당은 대전의 빵집을 고집했다. 성심당 덕분에 사람들이 대전에 찾아오고, 그렇게 대전 경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 대전 시민에게 진 빚을 갚은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빵집, 대전의 자부심으로 남고 싶었다.
수요일 저녁, 꼬미씨움 단장님께서 평의원들에게 한권씩 선물로 주신 책!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글이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술술 넘어갈 겁니다.”
손 주교님의 추천도서라면서 꼭 읽어보길 권하신 책이라 바로 읽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업가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처음엔 흥미롭지 않았는데 계속 읽어 가면서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에 살아날 수 있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 고 다짐한 후 평생 실천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과 며느리는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성경구절을 사훈으로 정하고
고객뿐만이 아닌 직원들과, 협력업체, 거래처와 심지어 주변 포장마차를 하시는 분들에게도 수돗물을 개방하여 모든 이가 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읽으면서 우리가 꿈꾸는 그런 세상을 생활속에서 매일 매순간 실천하는 모습에 나는 무한 감동을 받았다.
몇 해 전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회장님께서 직원들은 머슴일뿐이다고 말씀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인식속에서 우리들은 생활한다.
고객은 우대하지만 직원은 홀대하는 사회이며
거래처는 우대하지만 매입처는 홀대하는 사회속에서
신앙심을 실천하는 경영자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업을 안하기 때문에 성심당 처럼 못하는 것이 아닌 내 가정의 주인으로써 나는 어떻게 경영을 해왔었나, 나의 신앙심과 나의 사회속에서의 관계는 어떠했었나 하는 생각을 곰곰이 해본다.
성심당의 부부가 실천했던 것처럼 나도 지금 나의 위치에서 사랑을, 신앙을 실천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