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6:18)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10장 43-45)
얼마 전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 동서로 부터 살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된 50대 남성이 가정불화를 겪다 동서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로또 같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로또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첨자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내가 1등 당첨될꺼야 하는 착각의 행복으로 살게 됩니다. 운 좋게도 당첨되었다고 해도 그런 행복은 지속적이지 못한 것을 우리는 복권 당첨자의 통계적인 불행의 사건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살 때 우리는 수많은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평생 반려자인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착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데델라 콤플렉스도 그렇구요. 물건을 살 때도 착각으로 사는 경우도 있구요. 때로는 이런 착각이 잠시의 기쁨과 행복을 가져 줄 수 있지만 영속적으로 착가하게 된다면 이는 정신과적인 질환으로 의심해봐야 하겠지요. 예컨데 내가 이효리 같이 , 장동건 같이 잘생겼다는 동일시 하는 착각이 연속되어지는 것은 착각의 부작용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착각이 사실적과는 다르게 추상적인 착각이 많습니다. 눈에 보지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음과 현실속에 착각이 때로는 믿음으로 신앙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선지자로 하나님의 사자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를 섬기는 것을 당연시 하는 착각도 있습니다. 물론 목사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지만 목사란 직분이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섬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는 성도를 섬기고, 성도의 종이 되어야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정반대의 가치가 지배하고 있으니 예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목사들이므로 하나님의 종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18절에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는 말씀을 믿고 실제 농약을 먹고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착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목사들이 안수를 남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은 좋습니다. 복음의 해석과 적용을 분별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우리가 능력을 받았다고 독사를 잡아도 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믿음의 착각입니다. 농약을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착각의 자유의 선상인 착각된 믿음의 확신입니다. 병든 사람은 병원이나 다른 대체요법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우선인데 안수로 치료를 하는 것도 믿음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탐욕적인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아무리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기도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도깨비 방망이 같이 휘두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불을 받고, 신유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이란 수식어를 가진 부흥사들의 치유 은사집회를 관찰 해 보면 실제 하나님의 능력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가 자기 위주의 인간적 확신과 신념의 마력 차원과 심리학적인 플라세보 현상에서 치유가 되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치료가 되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당시 분위기상 나은 것으로 착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아니면 부흥사의 쇼맨쉽이나 광란적인 예배분위기에 최면효과로 멍한 상태에서 병이 나았다는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필요에 따라 수동적으로 역사하시는 미신적이고 소품적인 신이 아니신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손자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니배는 똥배 내손은 약손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배를 만져 주면 어느새 아프든 배가 아프지 않게 되는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유용한 스킨십적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손자와 할머니와의 관계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정(情)적인 관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치유 프로그램에 속합니다. 가족의 스킨십으로 몸의 생리적 기능을 증진시키는 효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비용의 방법으로 극대화된 치유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무비용의 자연치유 매카니즘의 은혜를 몸속에 프로그램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치유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셨구요. 그래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배를 만져주면 그 에너지가 전달되어 배속의 오장육부를 자연스럽게 마사지효과를 가지게 하여 자연 치유기능의 프로그램이 작동되었던 것이지요. 역시 보통 건강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잉여 에너지를 전달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스트레칭, 괄사, 마사지, 지압 등의 대체요법적인 지식과 수련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 할 때 우리는 착각된 믿음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으로 오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착각된 믿음은 목사일수록 많습니다.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것을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설교와 안수와 치유능력 전매특허를 받은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목회를 하는 모습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대형교회의 목사들일 수록 그런 착각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 목사를 업신여긴 다는 것이지요.
한국교회는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대접을 받는 계급 서열적인 위계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아닌 일반 성도들의 신앙생활 평생소원은 장로, 권사되는게 신앙생활의 종착점이라 생각하여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때로는 로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 권사가 되지 못하면 좌절을 하고 다른 사람은 장로 권사 되는데 나는 되지 못하면 상대적 박탈감으로 믿음과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인간적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바로 믿음과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교회를 인간을 위한 목회 정치로 이용하는 제도가 바로 장로 권사 집사라는 인위적인 조직과 서열적인 계급구조가 고질적인 병폐가 고착화되어 가는 것은 심각한 신앙질병의 현상입니다. 즉 교회의 구성원끼리 너는 목사 하고 나는 장로하고 권사 하고 집사하고 신앙생활을 교회라는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계산이 깔린 것이지요.
마치 어릴 때 소꿉놀이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는 것이 현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한국교회는 모양만 신앙조직이지 이런 옷을 벗기고 나면 세상 권력 조직, 친목회, 동호회 조직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권력의 힘으로, 학력과 명예의 힘으로, 맘몬의 힘으로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사인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장로가 된 것, 권사가 된 것이 다른 사람 보다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신 결과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치원 시절 아이들이 선생님의 관심이 집중되면 나만 사랑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와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형편에 맞게 컨셉을 설정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입니다. 이는 마치 나는 대통령을 잘 아는데 대통령은 나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목사들이 이에 해당이 되는 경우입니다. 주여! 주여! 부를 때 주님께서 나는 너를 전혀 모른다고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고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는 역설적인 메시지는 바로 이런 착각의 믿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다 낫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로 해석해야 합니다. 문자그대로 해석하여서 강한 믿음의 확신 결과 농약을 마시게 되고 독사를 집으면 당장 죽을 것은 뻔한 결과입니다. 산위에 떨어지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의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그런 장난적인 시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으니까 총알이 나를 피해 갈꺼야 라고 믿음의 확신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암세포가, 슈퍼 박테리아가, 조류독감바이러스가 믿음이 강한 나에게는 피해 갈꺼야 확신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된 믿음이 한국교회안에는 너무도 많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딜레마입니다.
한국교회의 착각은 믿음의 공동체를 관료적인 공동체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조직에 있어서 서열피라미드의 꼭지점은 목사입니다. 그 아래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입신양명적인 의식구조의 영향으로 이런 서열적이고 계급적인 직분이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 처럼 관심이 집중하여 신앙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이거나 성도이거나 간에 사람들은 누구나 대접받기를 원하며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러기에 총회장, 감독회장이 되려고 아웅다웅 하고 있으며 장로 권사 되기 위해 거액의 금품으로 매관 매직을 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임직식이라는 통과의례로 만천하에 자신의 직분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댓가 없이 은혜로 조용히 하면 다행이겠지만 신문 전면 광고를 하고 일가 친척을 불러 모아 잔치집같이 무슨 과거 급제 한 것인냔 꽃다발 잔치를 하는 것은 인간들만 위한 유희적인 소꼽놀이에 불과 한 것입니다.
교회직분은 교회를 유기적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효과적이고 기능적인 종을 세움을 의미할 것인데 여기에 돈을 주고 사고 파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오죽했으면 불신자들이 교회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간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교회는 돈이 없어도 부담없이 나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필자가 출석하고 있는 작은 교회는 장로 권사 임직식 때 일체의 돈이 매개되지 않고 임직식 모든 경비는 교회가 부담하여 일군을 세운 것을 보고 참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3-45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모든 착각에서 되돌리려면 지금과 같은 정반대의 신앙구조여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들이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목사는 장로의 발을 씻 겨주고 장로권사는 집사들의 발을, 집사는 성도들의 발을 씻겨 주는 모범을 부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으뜸이라는 인간적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의 사열적인 의식구조를 탈피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결과 서로가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되지 않으려는 믿음의 싸움을 하여야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성을 실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신 삶은 명예스런 삶,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고 왕으로서의 권력을 누린 관료의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속물의 재물로 바쳐진 삶, 섬김의 삶의 모범을 우리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도 행 할 수 있어야만 한국교회가 교회로서 존재감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착각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우리 성도들은 착각의 자유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복음이해와 실천으로 각종 망상적인 착각을 벗어나는 것이 시급합니다.
교회의 모든 헌금을 나의 돈으로 착각하지 말고 총회장 감독회장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댓가로 착각하지 말고, 000교회 전체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되어지는 무슨 무슨 복지대단, 기업의 조직구조와 재정, 수익단체의 돈이 나의 것으로, 내 돈 인냥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단지 청지기로서의 관리만 잘 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고 머리는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소유권은 하나님이십니다. 중간에서 횡령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 두아들 흡니와 비느하스 같이 말입니다.
현 한국교회가 이런 종합적인 착각의 늪에서 빠져 나온다면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질적인 수준으로 되돌아와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사역을 담당할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병들고 내가 아파한다면 무슨 여력으로 남으로 고치고 남을 걱정하겠습니까? 의사인 내가 아픈데 남을 치료해줄 염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나를 먼저 고치고 남을 치유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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