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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네델란드 화가들이 미술사에 남긴 흔적 중의 하나는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빛을 화폭 위에 펼쳐 놓는
기술 이었습니다. 넓게 열린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시골의 모습을 주로 묘사한 화가가 있습니다.
에버트 피이터스 (Evert Pieters / 1856~1932)의 작품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마술’이 있습니다.
봄볕 Spring Sunshine / 63.5cm x 75.6cm / 1913
햇발 좋은 봄 날, 마당 가득히 빨래를 널고 난 엄마는 창 가에 앉아 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노는 것이
심심했는지 아이도 엄마 흉내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인형을 무릎에 놓고 엄마처럼 이리 저리 꿰맬 곳을 찾아
보는 아이의 몸 짓은 제법 의젓한데 엄마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바늘에 손이 찔려.
바늘에 찔려 봐야 조심하는 것을 배우겠지요. 선험적인 것들보다 체험으로 배웠던 것이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상처가 그만큼 더 늘어납니다. 이제 온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빼곡하게 자리를
잡은 흔적들을 보면서 ‘이제 무슨 상처가 더 생기겠어’ 해보지만, 참 신기하지요 --- 상처는 줄지 않네요.
피이터스는 가난한 집안의 여덟째 아이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도시에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피이티스도 집안의 살림을 돕기 위해 건물벽
도색 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 들 중에는 꿈도 있습니다.
엄마의 행복 A Mother's Bliss / 121.5cm x 161cm
피이터스의 그림 속 여인들은 그냥 있는 법이 없습니다. 아이에게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 준 엄마는 문을
열어 놓고 들어 오는 햇빛에 기대어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아기는 줄에 매단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아이가 앉아 있는 높은 의자를 보니 좀 걱정이 됩니다. 저렇게 놀다가 아이가 있는 통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꽤 아플 것 같은데 엄마는 바느질에 여념이 없습니다. 생각보다 안전한 모양입니다.
고요한 풍경 속에 가끔 아이들의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돌아보니 저렇게 엄마가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 많아지면서부터 엄마의 고생이
시작 되었지요. 물론 아이들이 주는 행복도 늘었지만요.
꿈은 있었지만, 그러나 어려운 형편으로 화가가 되기 위한 공부는 자꾸 늦어졌습니다. 스물 세 살의 늦은 나이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피이터스는 안트워프의 미술 아카데미 야간반에 입학합니다. 학비는 무료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재주는 있지만 돈이 없는 화가 지망생들이 몰려 들었던 곳이 안트워프 아카데미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집안을 돕기 위해 피이터스는 실내장식 일을 계속했습니다. 참 괜찮은 젊은이였지요.
실 잣는 시골 여인 A Peasant Woman Combing Wool / 34.5cm x 51cm
양털을 담아 놓은 포대들이 세워져 있는 헛간, 빛이 들어 오는 창 앞에서 여인이 털실을 뽑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물레 바퀴 아래에서 여인의 얼굴은 그늘 속에 잠겼습니다. 고단한 삶이 얼굴마저 가져
간 걸까요? 문득 한쪽에 있는 들 꽃 더미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여인이 꺾어 온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져다 준 것일까요 ---. 무엇이 되었든 꽃을 꺾어 온 마음이 예쁩니다. 그리고 안타깝습니다. 물레 돌아가는
소리와 여인의 한 숨 소리가 창고 구석구석 그늘을 더 하고 있습니다.
자료에 따라서는 그가 처음 공부한 곳이 암스테르담 아카데미였고 나중에 안트워프로 옮겼다고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 깊숙하게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공부를 어디서 했으면 어떻습니까? 저는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시작했다는 자료를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드로잉을 시작으로 그의 미술 수업은 시작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용히 유화 공부도 병행했습니다.
감자를 까는 아이 A Child Peeling Potatoes / 60.4cm x51.5cm
‘감자를 벗긴다고 할까’ 하다가 ‘깐다’라고 쓰고 보니 어감이 좀 그렇지만, 철들고 지금까지 ‘감자를 깐다’고
듣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녀석 참 대단하군요. 옆에 놓인 광주리에 담긴 감자의 숫자나 무릎에
수북이 쌓인 껍질을 보니 제법 양이 되는데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운데로 모인 눈과
꼭 다문 입술 그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이 오른쪽에 들어 오는 햇빛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가
보입니다. 그 빛 속에서 세상을 일찍 배우는 만큼 잘 컸으면 좋겠습니다.
피이터스가 그린 작품 한 점이 한 화가의 눈에 띄었습니다. 화가의 이름은 Theodoor Verstraete였습니다. 이름을
한글로 옮겨 볼까 했는데 잘 안 되는군요. 다음 달 방문 예정인 네델란드 동료에게 발음을 물어 볼 생각입니다.
그는 밀레와 코로와 같은 바르비종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풍경화가였는데 피이터스에게 자신에게 배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합니다. 밀레와 코로의 영향을 받았던 Verstraete는 풍경화에 역점을 두고 잠시 피이터스를
지도 하는데, 밀레와 코로의 영향이 피이터스에게도 전달 되었습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 Children at Play / 63cm x 76cm / c.1900
아무리 봐도 일하는 모습인데 제목은 노는 아이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이 놀러 가자고 찾아 온 친구를
감자를 ‘까던’ 아이가 붙들어 앉혔습니다.
마침 너 잘 왔다. 나하고 남은 감자 같이 까자.
싫은데 ---
그럼 관 둬, 난 이 것 다 하고 나가서 놀아야 되거든. 먼저 가.
알았어, 같이 하지 뭐
키가 작다 뿐이지 하는 일은 어엿한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역시 정면을 보고 앉은 아이가 훨씬 고수 같습니다.
대견스럽군요.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는 Charles Verlat 밑에서 공부를 합니다. Verlat는 전통적인 역사화와 초상화, 풍속화에서
Verstraete보다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곧 피이터스는 두 스승의 영향과 기법을 묶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무협지를 읽다 보면 고수들의 기술을 묶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주인공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군요.
오후 식사 The Afternoon Meal / 1892
참 이상한 식사 장면입니다. 사람은 셋인데 식탁에는 그릇이 두 사람의 것만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빵을
들고 점심을 시작했는데 아이 앞에는 아무 것도 놓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보니 아이 입이 벌어졌군요.
녀석, 바깥에서 너무 놀다가 밥 때를 놓친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번 기회에 버릇을 잡을 심산인 것 같습니다.
왜 나는 점심을 안 주는 건데요?
식탁에 앉을 시간 지났어.
놓치고 우는 것이 식사 시간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다가 놓친 것들 중에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 많았는데요.
아마 아빠가 식사를 끝낼 쯤 엄마가 점심을 주겠지요?
7년 동안의 안트워프 생활을 끝내고 브라리쿰으로 떠납니다. 이후 피이터스는 바다풍경과 자연의 모습 그리고
초상화와 실내 풍경을 그립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해변가의 모습과 어부들의 모습이 풍부한 색상 속에
있는 인상적인 장면들이었습니다. 피이터스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보헤미안 같은 생활 스타일을 즐겼다고
하는데 한 곳에 머무르기 보다는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닌 그의 행적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과수원에서 In The Orchard / 138.5cm x 113cm / 1912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젖을 먹이는 것을 꺼리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만, 그 것만큼 숭고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과수원 꽃 그늘에 앉아 젖을
물렸느니 아이는 엄마 젖과 함께 꽃 향기도 함께 마시는 것이겠지요.
언니는 동생이 많이 부러운가 봅니다.
저도 지금이라도 엄마 젖을 먹고 나면 한 뼘쯤 몸도, 마음도 커질 것 같습니다.
1895년, 서른 아홉의 나이에 피이터스는 고국 네덜란드로 귀국합니다. 나름대로 바깥에서 성공을 했다고 생각한
그는 국내에서도 성공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흘러갔습니다. 헤이그 미술가 협회에 등록을 하려고
했지만 오랜 동안 벨기에서 공부를 하고 활동한 그를 네덜란드 화가로 봐주지 않았습니다. 등록이 거절된 것이죠.
마리라는 여자와 결혼을 한 피이터스는 파리로 자리를 옮깁니다. 혹시 한 성질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엄마와 아이들 Mother and Children / 76.2cm x 91.5cm
아이를 담는 통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두 번째 보았다고 불안감이 조금 덜 합니다. 요즘 유모차처럼 아이 앞에
장난감을 올려 놓을 공간도 있고 생각보다 튼튼해 보입니다. 동생과 놀아주는 누나의 모습이 예쁘군요. 그런데
동생의 영양 상태가 좋아서 그런가요, 통 속의 동생이 누나보다 더 커 보입니다. 밀레와 코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만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을 보면서 베르메르가 자꾸 떠 올랐습니다.
1895년부터 피이터스의 작품 활동은 왕성해졌습니다. 1896년, 만국박람회에서 피이터스는 3등 메달을 수상
합니다. 그리고 샹델리제 전시회에서는 금메달을 수상합니다. 고국인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대접을 못 받았지만 파리에서는 확실한 인정을 받은 것이죠. 그리고 1897년, 피이터스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
갑니다. 이제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었겠지요.
맘마 먹자 Feeding The Baby / 80cm x 92.4cm
맘마 먹자
엄마의 말에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아이들을 정신 없이 키우다 보니 막상 제 아이들의
어렸을 때 모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런 그림을 보다 보면 조각 장면들로 순간이 떠 오릅니다. 그런데 혹시 기억
하시는지요 아이를 어를 때나 음식을 줄 때 저렇게 아이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아이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
간다고 어르신들은 기겁을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르신들은 정말 현명하셨습니다.
피이터스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구이(Gooi) 지역의 풍경과 시골의 모습은 그에게
농부들의 모습과 엄마와 아이들이 실내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모습을 그리게 만드는 영감을 주었습니다. 다른
화가들도 구이 지역의 풍경을 많이 그렸지만 밝고 풍부한 색채를 이용했던 그에게, 나중에 구이 지역을 묘사한
가장 중요한 화가라는 명예가 주어졌습니다.
인형 밥 먹이는 시간 The Doll's Supper / 62.2cm x 50cm
자, 밥 먹자.
자신도 아직 한 참 자라야 할 나이인데 의자에 앉아 엄마처럼 인형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고 있습니다.
인형들에게 밥을 먹이는 어린 아이를 묘사한 작품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이전에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것 중에는 18세기 작품도 있으니까 역사도 오래된 주제이고 화가도 다양합니다.
문학이 모방에서 시작하듯 사람도 결국은 모방으로부터 역할을 배우는 것이겠지요.
아이의 표정이 보이시는지요?
얼마나 즐거우면 저렇게 밝고 자연스러운 웃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걸까요?
1900년, 피이터스는 만국박람회에서 다시 은메달을 수상합니다. 그는 유럽 전역에 걸쳐 명성을 날리게 되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피이터스는 미국의 미술가 윌리엄 싱어와 그의 아내 안나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싱어는 화가이자 아주 열정적인 미술품 수집가였죠. 1910년 미국의 밀워키에서 개최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들’ 전에 피이터스는 초대를 받아 작품을 출품하는데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바느질 수업 The Sewing Lesson /61.6cm x 53cm
엄마가 뜯어진 인형을 꿰매는 모습을 아이가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아직 바느질 할 나이는 아니지만 아이는
엄마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손에 든 빵도 그대로 입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엄마처럼 저렇게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그 아이의 아이가 또 서 있겠지요. 저는 그림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의자의 주인이 바뀐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자, 이제 다 됐다. 이제 조심해서 가자고 놀아야지
엄마의 따뜻한 말이 창 밖 풍경만큼이나 따사롭습니다.
이제 그의 이름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건물벽에 칠을
하면서도 화가의 꿈을 놓지 않았던 피이터스가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이죠. 그래서 인생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죠.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피이터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피신을 합니다.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전장에 나갈
것도 아니데,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개잡이 The Shell Fisher / 50.5cm x 36cm
조개 잡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는 석양은 세상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바닷바람에 지친
어부는 마차에 앉아 조는 듯합니다. 바닷가를 지나는 말을 향해 잔 파도들이 몰려 들고 있습니다. 지친 하루가
또 그렇게 저무는 것이죠.
퇴근 길 차 안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흐르는 일상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길에게 길을 묻는다고 들을 수 있는 대답도 아닌데 말이죠.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라렌에 정착한 피이터스는 이후 인상파 화가들의 초상화와 누드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립니다. 그러나 76세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명성은 사라지고 곧 ‘잊혀진 화가’가 됩니다. 입체파와 추상주의 같은 혁명적이고 혁신적인 화풍의 시대를
거치면서 잊혀진 그의 동료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죠.
어망을 든 어부 A Fisherman with his net / 53cm x 38cm
‘살짝 감상적이면서도 사실주의가 반짝이는 그의 작품에는 평화 고요의 느낌이 가득하다’는 평론가들의 평은
그의 그림을 보는 내내 유효했습니다. 미술사에 기록된 화가들의 작품만이 보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첫댓글 빛을 아름답게 표현한 따뜻한 그림과 설명, 감상까지 . 미술관에 있는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행복한 그림들 감사하며 잘 보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활동해주세요
저희도 분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