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원! 人間 문현길이 지켜온 행보
“봉사는 영역이 없는 무한이다”
“적십자는 박애정신이 몸소 배어있어야 한다”
“이임사의 눈물은 적십자 바보였기 때문이다”
“가자!~ 산이 나에게 올 수 없다면 내가 가야한다”
지난 20년을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 열정을 바쳐온 적십자의 미치광이가 바로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협의회 문현길 직전회장이다.
어려운 일, 힘든 일, 마다않고 찾아나서 지도자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 꼭 그런 간절한 마음의 길섶이 이 시대에 진정한 봉사원이다.
할 일 많은 적십자, 일복도 많다. 그가 가장 안쓰럽게 생각하는 일을 꼽으면 ‘조류독감과 구제역’으로 인해 행사와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이다. 가슴 아픈 현실보다 희망의 씨앗을 심어보고 싶은 작은 욕심으로 표현하고 그럴 때마다 무엇에 쫒기는 듯 보인다.
여주, 이천 등지에 태풍과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 망연자실한 농부를 달래는 일은 진창을 밟는 수렁과 같다. 등줄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내는 겨를도 없는데 강행군하는 모습에 숨고를 틈이 없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월호가 남긴 아픔을 추스르는 일보단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 일에 앞장섰다. 국민과 유가족 아비규환에 아수라장의 현장을 지키며 찢어지는 가슴을 조여 끝까지 여물며 사랑을 남긴 단체가 적십자다.
가슴은 응어리진 아픔인데 지체 할 여유도 없이 비상체제로 돌입해 눈 더미가 지붕 꼭대기까지 덮친 강원도 설해지구에 봉사원이 투입돼 너 나할 것 없이 동네 구석구석 정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회장과 함께하는 일도 숨차다.
그는 재해 재난 시 이를 관장하고 책임지는 일은 물론 불철주야를 가리지 않고 국민의 권익을 위하고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대들보 역할을 다할 수 있음은 봉사원의 뒷받침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였다고 짚어본다.
‘제12회 경기도 적십자 봉사원대회’는 성공사업으로 빚어내기 위해 6개월을 애태웠다. 결과는 노력의 결실을 당연히 탁월한 지휘능력을 예감했듯이 환희도 맛볼 수 있어 최고지도자임을 확인하고 격려와 예찬이 얻어냈다. 마음을 열고 진실만을 말할 수 있고 봉사에 대한 소중함을 통달한 사람에 봉사에 대한 달인을 찾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아마도 그 대상자는 적십자에 다 몰려있다고 장담한다.
지역사회 평택·송탄·안성에서 평가하는 문현길 회장은 이렇다.
지역사회에서 문현길 회장이 걸어온 뒤안길은 송탄지구협의회 원년의 결성멤버로 총무직 5년 8개월 회장직을 4년을 마치고 경기도에 입성해 감사직 4년과 부회장직을 2년을 마치고 경기도지사협의회 회장 임기를 마쳤다.
숱한 세월 속에 그가 경험한 모진 풍파를 감히 물어 열거해 보지만 적시적소에 어렵고 힘든 일들이 끊임없이 그와 맞닿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적 없는 지도가가 있을까? 누구나 지도자라하면 자신이 남기는 업적은 분명 있지만 문 회장이 적십자에 남긴 업적은 더 이상 누군가 흉내 낼 수 없다는 역사다.
‘움직이는 봉사제조기라고 평가하는 그는 1999년 미적십자와 결연을 맺고 매년 진위천 환경개선 사업에 앞장섰고 충북 음성군에 있는 혈장분획센터에 산업방문 연수회를 추진하여 적십자 봉사원에게 산교육을 실시했다.
임진각과 제3땅굴 견학으로 분단된 남북의 실체를 알리고 적십자의 사명을 고취시키는데 리더십을 발휘해 송탄지구협의회 회장 당시 송탄지역에 4개의 봉사회를 만들어 적십자를 전파했고 그가 지나가는 흔적은 무엇이든 ‘첫 번째’ 펼치는 봉사다.
대한적십자가 처음으로 나섰던 소록도 ‘한센인’을 위한 자원봉사는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지역사회 절대 빈곤층의 아픔은 아무리 채워도 꽉 차지를 않듯이 ‘겨울나기 김장나누기’ 행사의 에피소드는 지금도 생생하단다.
당시 매일유업과 미적십자와 함께 어우러진 행사는 인종의 벽을 넘어 환상의 봉사현장으로 ‘한미동맹 영상홍보물’로 제작되어 전군에 배포 됐다. 우리나라 영상홍보물 제작팀의 기록 1978년에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그때 ‘봉사의 미치광이’라는 애칭이 생겨난 것이다.
그때도 요즘처럼 배추와 양념값이 천정으로 치솟던 때다. 1,500만원으로 3,000포기 김장은 무리였는데 배추를 모종하던 때부터 송탄 안성 일대를 배추밭을 다 둘러본 후 배추를 사두었고 고춧가루가 비싸다고 건 고추를 사다가 고추 분을 만드는 모습이 가장 슬겁다는 생각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원감을 떠다가 봉사원이 직접 재봉질로 앞치마를 100벌을 만들었고 배추절임에 동분서주하면서 다니다가 결국 이틀을 앓아 누었던 일은 추억이다. 왜 그래야만 되느냐는 반문에 단 한마디 “나는 봉사를 멈추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좀 더 고생해서 한 포기라도 더 만드는 일이다.”며 추억을 새겼다.
아마도 옆에서 대충 일하는 임원과 지도자는 생고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보였다. 실수 없고 빈틈없는 그의 인고의 세월을 보답이라도 하듯 5년마다 개최되는 ‘제7차 전국 봉사원 대축제’의 자리에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전국 도처에서 참석한 봉사원의 박수와 함성이 그를 더욱 흥분하게 했을 것이다.
봉사의 달인, 무슨 일이든 만들어내는 봉사 제조기인 그에게 앞으로 적십자가 지역사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남들은 그를 보고 너무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그를 겪어보면 굉장히 유하고 부드러운 남자다. 누구나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인간성보다 겉으로 드러난 외풍의 평가가 십상이고 보면 그럴 때마다 당사자는 속상함은 일부분, 때로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일에 대한 가치보다는 수혜 받은 자들의 생활이 윤택하고 안락한 삶이어야 한다. 허기진 대지엔 태양의 힘도 필요하고 희망의 싹이 틔우기엔 적당한 빗줄기도 필요하듯 우리에겐 마침표 없는 봉사만이 나보다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다가서는 것이다.”라는 그의 입가엔 의지의 미소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