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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1박2일 등산을 마치고
등산을 가면서도 왜 굳이 교모를 써야했는지...ㅎㅎ
爲美里
마을약사
○ 설촌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맨처음 함씨가 속칭『세기 모루』인근에 정착하여 한씨, 홍씨와 촌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당초 명칭은
'우미(又美)‘라 하였음.
○ 1416년 (태종 16년) '우미'에서 '뙤미'라 불리워짐.
○ 1915년 제주도제 실시로 '뙤미'는 '위미리'로 개칭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음.
논어의 里仁편에 아래와 같이 爲美라는 말이 나온다. 지명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里仁爲美니 擇不處仁이면 焉得知리오
仁을 갖춘 마을에 사는 것이 아름답도다. 그러므로 어진 마을을 택하여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위미는 고등핵교 때 성훈이를 따라 많이 다녔다.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셨던 성훈이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따뜻한 情을 잊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살던 친척집을 밤중에 뛰쳐나온 나를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성훈이와 같이 지내게 해주셨다. 나는 그래서 늘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하는 빚쟁이로 살아가는 마음이다. 운명처럼 그 동네에서 한 소녀를 만나기도 했었다. 사람이 인연을 맺는 운명이란 별 것도 아닌 일로 엮이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위미는 나에게는 특별한 동네이다.
무엇보다도 위미는 귤재배가 일찍 시작되었고, 마을이 부자동네였다. 빌레만 많고 나무가 거의 없던 가난한 山北 해변이 고향마을인 나는 한라산 남쪽 따뜻한 마을 위미에서 仁情을 느끼며 보낸 추억이 많다. 그래서 논어에 나오는 그런 어진 마을이라고 해도 나에겐 틀린 말이 아니다. 제주올레 5코스가 이 마을을 지나간다.
爲美里는 전형적인 한라산 남쪽의 따뜻한 해안마을로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자연마을로는 앞개, 전포 등이 있다. 전포는 마을 앞에 있는 포구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위미는 귤농사로도 유명하지만, 남쪽으로는 넓은 바다와 면적 0.09㎢의 무인도인 지귀도가 있어 해산물 채취가 유리하며 북쪽으로는 목장이 운영되고 있다. 특산물로는 각종 해산물이 있다.
위미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한 사실은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그 정확한 연대를 밝혀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교적 객관성을 갖는다고 인정되는 구전자료에 의하여 설촌의 역사를 추정하고, 그 이후는 가문별 위미 입도 선묘의 비문과 족보 등을 통하여 위미리 설촌의 역사를 밝혔다. 위미리에 처음 들어와 살았던 사람은 지금부터 약400년 전 고좌수였다. 고좌수는 상위미의 속칭 '큰 터왓'에 터를 정해 살았는데 현재 이곳에는 당시의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오조리터의 토기와 유기 그릇의 파편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고좌수의 후손들은 '좃벤 골총'의 전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절손되어 버림으로써 현재 위미리와는 혈연적 유대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어서 성씨가 현재 위미교회 서북쪽의 속칭 '신세기 모루'에 살았으며(그의 후손인 성대씨는 마을의 노인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동쪽'으로 이주를 해버렸다고 한다) 셋뙤미에는 좌수가 살았다. 또한 '안가름'에는 허씨와 홍씨, 강씨가 살았다.(그들이 살았던 터는 '한비장통', '홍비장터', '강의방터'라는 지명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들도 그 후 다른 마을로 떠났거나 절손됨으로써 현재 위미리와의 혈연적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위미리에 정착하여 그 뿌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약350년 전 위미 2리의 군위오씨(軍威吳氏), 그리고 위미 1리 연안김씨(延安金氏)의 사위가 되어 정착한 고씨가 위미리에 처음으로 터를 정한 사람들이다. 연주 현씨도 이때를 전후해서 위미리에 터를 잡았다.
○ 웃동네와 알동네
오늘날의 명륜동은 일주도로를 중심으로 웃동네와 알동네로 나뉘어 졌는데 제일 먼저 이곳에 정착한 사람은 120여년전 고대현의 증조부였다(현재 오광조의 집 뒤에 살았다.). 그 후 양성찬의 조부, 오경진의 조부, 현평순의 조부 등이 잇달아 정착했다. 한편 이곳은 일찍부터 바로 앞에 있는'황하소주공장'과 앞개에 드나드는 제주→일본간의 연락선들로 해서 여관과 상점들이 생겨났는데 여관은 현재 고승의 집 바로 서쪽에서 정난향(김영태의 조모)이 운영했고, 상점(점방)은 현재 신협 위치와 그 동쪽에 황하소주공장의 주인인 황순하의 사촌 황지하 상점과 조천 출신 김재방의 상점이 있었다. 그리고 대정출신 고은표가 운영하던 이발소도 있어서 당시에는 위미리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약55년 전 위미 1리를 휩쓴 대홍수('웃친내'가 크게 넘쳐 이 일대 집들은 물론 마소, 돼지까지 쓸렸으며 어린이 2명이 죽었다)로 말미암아 여관, 상점도 물에 잠겨 버리고 운영자도 떠나버렸다.
위미3리 마을약사
○ 1833년 위미리 374번지에 고영훈씨가 정착 설촌하여 동쪽으로 연디뱅디, 서쪽으로 팽도루마루, 남쪽으로 오로콤(굴), 북쪽으로 알종정굴 사이에 30호 가량이 모여 부락을 형성하였으나 4.3 사건으로 전가구가 전소되고 6.25 전쟁이 끝나면서 흩어졌던 토착민들이 전거주지와 농경지를 찾아 한가구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종정동'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음.
○ 1989년 4월 6일 위미 2리 종정동에서 위미 3리로 행정구역을 변경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음.
<고좌수와 ‘좃벤골총’ 설화>
최초로 상위미에 들어와 살았다는 고좌수에 관한 설화는 그의 사람됨과 그의 무덤인 위미2리 대성동의 '좃벤골총'에 관한 것이 있다.
고좌수는 현재 상위미의 속칭 '큰터왓'에 고대광실을 짓고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현재 '큰터왓'의 '쥐두리터'에서는 기와와 각종 질그릇의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바로 이 유물들이 당시 고좌수의 집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라 한다)
그는 당시 위미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쳤는데,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마을 사람들이 상위미 쪽 밭에 일을 가노라면 고좌수가 불러서 자신의 집일을 시켜도 감히 불만을 말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잡혀서 일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힘이 세고 욕심이 많아서 다른 사람의 물건도 제 마음에 들면 어떠한 억지를 써서라도 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고좌수의 재력과 위세는 정의현청에도 알려져, 정의현 안에서는 고좌수의 집에 가면 없는 것이 없다는 식의 말이 돌았다. 이에 현감은 고좌수의 재력 규모를 확인하고, 또 고좌수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일부러 너의 집에 탕건(갓을 쓰기 전에 쓰는 건)이 100개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고좌수는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다른 물건은 몰라도 탕건은 갓을 쓸 때만 사용했으니만치 한 집에 남자용으로 1∼2개만 필요한 물건이다.) 이에 현감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확인하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에도 고좌수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직접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정의현 관리와 함께 상위미로 출발했다. 그런데 한남리 지경인 '사령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고좌수는 '감히 현청의 높으신 관리를 땅을 밟게 모실 수는 없다. 지금 이곳에서부터 저의 집 앞까지 베와 무명을 깔아 놓을테니 그걸 밟고 오십시오. 저가 즉시 집에 가서 지시하고 올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하고는 혼자 집으로 돌아와 하인들에게 즉시 베와 무명을 깔도록 지시를 했다. 그래서 상위메에서 '별진밭'까지 베와 무명을 길에 깔아 현청의 관리를 모셨다. 물론 이 시간에 고좌수는 다른 하인들을 시켜서 마을안의 모든 탕건을 수거하여 창고에 가지런히 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한참 후에 정의현의 관리가 고좌수의 집에 도착했고, 고좌수가 정색을 하고 맞이하여 창고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100여개의 탕건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보관되어 있었다. 이일이 현청에 보고되자 고좌수의 재력과 위세는 더욱 더 정의현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였다. 이처럼 재력과 위세를 떨치던 고좌수였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하고 비극적이었다. 어느날 정의현청에 다녀오다가 혼자 술에 취해, 한남리 지경 '사령굴'에서 얼어 죽은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길을 가던 청년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 청년이 자세히 그 주검을 보니 이때까지 자신들을 못살게 굴었던 바로 그 고좌수가 아닌가? 분노와 심술이 난 그청년은 고좌수의 주검에서 성기를 자르고 그것을 주검의 입에다가 물려 버린 것이다.
한편 상가에서는 뒤늦게 고좌수의 사망소식을 듣고, 비참한 죽음이지만 체면 때문에 성대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일부러 육지에서 지관을 청해다가 명당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육지 지관이 현지에 와서 보니 고좌수가 비록 생전에 재력과 위세가 대단했지만 워낙 인심을 잃고 있어서 좋은 묘터를 보아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집 부인은 지관이 하는 일없이 빈둥거렸지만 지관에 대한 정성이 지극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10여일이 지났지만 부인의 정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그 지관은 망인은 비록 달갑지 않았지만 그 부인의 마음씨에 탄복하여 부인과 자손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명당자리를 골라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서 정의현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바로 지금의 우미2리 대성동 지경인 '좃벤골총'터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장사를 지낼 묘터가 정해지자 지관은 어느 날 조용히 부인을 불러서 이상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곳은 '황년지지'라는 명당터인데 단, 관을 묻을 때는 누구도 접근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충직한 종놈 한명만 거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은 시신의 위아래가 바뀌도록 엎어서 매장하고, 일이 끝난 후는 앞으로 3년간 무슨 일이 있어도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지관은 부인에게 신신당부를 하고는 떠나가 버렸다. 이래서 임시 토롱을 했던 고좌수의 시신은 제대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하관시에 부인은 일가 어른들에게 "지관이 특별한 부탁이 있어서 그러니, 하관은 저와 저 종놈 둘이서만 하겠으니 제발 이해하여 주십시요"라고 부탁을 드렸다. 이 말을 들은 일가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지관의 특별한 부탁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해를 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며느리와 그 종놈은 밖에 사람이 하관하는 것을 볼 수 없도록 주위에 장막을 둘러치고 하관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놈이 보니 관을 엎어서 묻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 부인에게 관을 잘못 모시고 있다고 지적하자 부인은 '다 지관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앞으로 이 일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좌수의 이상한 장례는 모두 끝났다. 그런데 장례를 치룬 1-2년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좌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19살 정도, 작은 아들은 그보다 조금 어렸다. 바로 이 두 아들의 힘이 자신들도 모를만치 점점 강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 아들들 스스로 자신들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자꾸 밖에 나가 힘내기 하거나, 괜히 싸움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이 두 아들의 힘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이 소문은 어느 사이에 정의현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에 그 부인은 생각하기를 '바로 고좌수의 묘자리가 장수가 날 자리였구나' 하고는 어느 날 두 아들을 불러 조신하게 살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고좌수는 살아생전 고약한 인심을 남겼으나, 아들 두 형제만은 힘이 장사가 되어 정의지방에서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큰 아들은 자신을 당할 자가 없는 듯 하며, 제힘만을 믿고 행패가 도를 지나쳤다. 고좌수의 하관시 며느리를 도왔던 충직한 늙은 종에게까지 함부로 대하니 어느 날 그 종은 불쑥 한마디 하기를, "저의 할애비 시신을 뒤집어 묻은 주제에 웬 방종이냐?" 둘째 아들은 그 걸음에 어머니를 다그쳤다. 며느리는 지관이 그리해야만 후손이 대성하리라 했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줬으나 둘째 아들은 조상의 시신을 바로 놔야한다고 무덤을 파헤쳤다. 개판을 열자마자 막 날아오를 자세로 앉아있던 큰 황새 한 마리가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후 곧바로 큰아들은 역적으로 몰렸다고 소식이 전해지고 집안은 한날한시에 망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지관은 고좌수의 탐욕을 다스리되 크게 대성할 기운만을 모아 후손에게 물려줄 길을 찾은 건데 성급한 후손들이 경망스러우니 결국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마매기큰당(안카름당)
소재 : 위미2리 위미중학교를 지나 길을 따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가에 있다.
신명 : 큰도한집
제일 : 1,2(당 굿) 1, 2, 3월과 9월중
형태 : 신목형, 위패형, 석원형, 제단형
신체 : 신목(후박나무)
계보 : 한라산계 산신
이곳의 지형지세가 마치 말잔등[馬脈〕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마매기」는 마맥(馬脈)의 변형이다. 이 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본향인 「마매기(매매기)큰당」이며, 당신은 ‘마매기큰도한집’이라는 남신이다.
마을홈피에 의하면 원래 위미리 큰당은 고망물 머리에 있었는데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 되면 마을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곤 했다. 수복이는 이 당지기로 종의 신분이었는데 어느 해 6월 아들이 '큰한집' 즉 마마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다.
큰한집 귀신은 심술이 사납고 고약하여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병든 이의 생명을 빼앗는 무서운 존재였다. 수복의 아들 몸에 들어간 큰한집 귀신은 한 여름인데도 당유자를 청하였다. "이 깊은 여름에 당유자가 어디 있느냐"고 사정하고 달래어도 막무가내로 우기면서 "큰댁 김훈장 집 고팡 항아리 속에 있으니 당장 가져오라"고 불호령을 쳐댔다. 수복이 각시는 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세도가 당당하여 평소에 상것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김훈장을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추석명절에 제수로 마련해 둔 것을 감히 종놈 자식에게 준단 말이냐" 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수복이 각시는 신세를 한탄하며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다 말하니, 좋다 두고 보자라고 한마디 돌아눕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이레쯤 지나서였다. 김훈장네 두 아들이 한꺼번에 큰한집에 불을 질렀다. 활활 타는 불길 속에서 하얀 비들기 세 마리가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 올랐다. 그 비둘기들은 위미리 마을 위를 몇 바퀴 돌다가 한 마리는 마매기동산으로, 또 한 마리는 예촌망으로, 나머지 한 마리는 보목리로 각각 날아가 앉았다. 세 아이는 크게 될 인물이었는데 김훈장이 세도를 잘 못 부린 때문에 일찍 죽고 만 것이다. 그 후 이들 세 영혼이 비둘기로 환생하여 날아가 앉은 곳에 당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돌담을 높이 쌓고 감귤과수원 쪽으로 철문을 달았다. 몇년 전에 불이 나서 당집과 주변나무들이 타버렸다고 한다. 당안에는 소나무, 아웨나무, 사스레피나무들이 자라고 이 당은 실력있는 당으로 심방들도 두려워한다고 했다. 10여년 전 남자 심방이 굿을 잘못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한다. 이후 서귀포에서 온 여자 심방이 굿을 하다가 지금은 딸이 물려받아서 한다. 특히 예전에는 초등학교 체육대회가 있을 때 이 당에 와서 성화를 발화하여 운동회를 개최하였다는 성소로서 최근에는 매인심방 신대인씨가 굿청을 따로 마련하였다. <출처: 고영철의 역사교실>
<빛 그리미 갤러리>
빛 그리미 갤러리 -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3070 (고망물이 있는 위미 포구를 지나면 있습니다.)
<사진 : 후나후나님>
<고망물>
위미1리에 있는 샘물이다. 마을사람들이 먹을 물로 사용했고, 한때는 소주를 만드는 물로도 사용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