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 ~ 286년(고이왕 53년) 백제 제8대 왕
재위 기간은 234~286년, 제5대 초고왕의 동생이다. 제6대 수구왕이 죽은 뒤 장자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바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고이왕의 출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주서 및 수서의 백제전기에 나오는 "백제시조구태"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해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제적 건국자로서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이왕을 "초고왕모제"라고 한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해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신찬성씨록에는 고이가 "구이" 또는 "고모"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 체제의 정비와 집권력의 강화에 주력해 고대국가로서 백제의 기반을 다져 놓은 인물이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해 좌장을 설치, 내외 병마권을 관장헤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걱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지배 체제의 정비를 위해 중앙 관등제를 마련하였다. 고이왕때의 중앙 관제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이른바 '6좌평 16관등제'가 고이왕 27~28년에 완비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백제 16관등제의 완성 시기를 고이왕 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도로 정비된 이 관등제는 주서 및 구당서와 비교할 때 고이왕때 완성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다만 이때 좌평급, 솔급 등의 관등이 설치되어 뒷날 16관등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중 좌평은 솔급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구족회의 의장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서의 이와 같은 관등제의 설치는 백제의 지배충에 편입된 대소 족장 세려들을 체계화 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만큼 집권적인 지배 체제와 권력 장치가 마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이왕은 또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접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3배로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케 함으로써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백제의 대외 관계는 두 방면에서 커다란 전환을 하였다. 하나는 마한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군현과의 관계이다. 마한과의 관계에서는 직산에 자리잡은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해 이전의 부용 관계를 청산하고 한강 유억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낙랑군. 대방군과의 관계에서는 이전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자세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백제와 중국 군현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음의 예가 있다.
유주지사로 있는 관구검과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이왕은 그 틈을 타서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 공격해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한 사건 등의 배후에는 고이왕 때의 백제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고이왕 때는 안으로는 지배 체제를 정비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중국 군현의 이이제이적인 기미책에서 벗어나 중국 군현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고이왕은 고대의 정청으로서 왕위와 신위가 뚜렷하게 구분된 남당을 설치해 국정을 듣고 결정함으로써 지배력과 권위를 더욱 과시할 수 있었다.
근초고왕
? ~ 375년(근초고왕 30년) 백제 제13대 왕
재위기간은 346~375년으로 비류왕의 아들이다. 일본 고사기에는 "조고왕"으로 일본서기에는 "초고왕"으로, 간문제기에는 "여구"로 표기되어 있다. 즉위 후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 계승에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의 왕명이 각각 초고왕. 구수왕 앞에 "근"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진씨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 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왕군 확립을 바탕으로 해 사방으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하게 함으로써 백제의 영향권 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 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뒤에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 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지금의 홍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기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 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왕은 정복 활동과 더불어 대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형제와 같은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백제 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고대 상업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한족의 동방 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에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새상 교통로와 상럽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 자리잡은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해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근초고왕 대에 백제는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 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대방 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해 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 좋은 예로는 왕인과 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지배 영역의 확대와 통치 조직의 정비를 통해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왕은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 정리와 더불어 왕실 전통의 유구성.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돋보이게 하려는 데에서 취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근초고왕의 업적
1) 왕권강화에 힘쓰다
국가의 영역을 나누어 별도의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그곳에 책임자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 또한 왕권의 부자상속 이 확립 되었으며 전재화 된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역사편찬을 단행, 375년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 [서기]를 편찬케 했다.
2) 주변국가를 복속시키다
① 366년 : 남쪽 마한의 잔여세력 정벌후 전남 해안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연맹 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 하게 된다.
② 369년 :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황해도 배천군) 지역으로 쳐들어오자 근초고왕은 태자인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공격해오자, 근초고왕은 예성강변에 군사를 숨겨두고 기다리는 작전을 펼쳤다. 매복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다시금 고구려 군을 격퇴시켰다.
근초고왕은 그해 겨울 마침내 정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맞혔다. 비록 고구려의 평양성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백제는 고구려왕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에 큰 수모를 안기며, 강성함을 과시할 수 있었다.
3) 요서지방, 산둥지역, 남조와 교류 등 대외활동 활발
고구려와의 평양성 전투와 마한 복속으로 인해 황해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고 무역 중계지로서 중요한 가야지역을 자기 세력권으로 둠으로써 동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손쉽게 차지하게 된다. 그로인해 중국의 동진과 외교 관계를 수립해 동진으로부터‘진동장군영낙랑태수’ 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 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을 설치, 양자. 황하의 하류지방으로부터 산둥. 발해만 일대의 화북지방과 요서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대시켜 이 일대의 상업을 독점하여 활발히 교섭하였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4) 일본으로의 문화 전파 및 전달
① 아직기: 일본에 한자를 전파했으며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② 왕인: [논어] [천자문] 을 가져가 한자 전수하여 왜왕의 두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45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전문기술 전수에도 힘써서 일본의 아스카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③ 칠지도: 근초고왕이 일본 왜왕에게 칠지도 하사 하였는데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중이다. 길이는 75㎝이며 검신의 양면에 금상감으로 총 6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예전부터 이칼이 없었던 바 백제의 왕세자 기생성음(寄生聖音)이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라고 적혀있다
④ 불교. 유학. 회화. 천문. 역법 등을 왜에 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