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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예술인들의 주변엔 항상 귀부인들이 득실거렸다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것이 여성들과 주파수가 맞기 때문인지
음악가 화가 소설가 시인들 주변엔 여성들의 모임이 있어 자기가 선호하는
예술가를 지원하며 들었다 놨다하는데 아마도 여성들의 모성애의 발로인지도 모르겟다
내가 어린시절부터 느껴왔던 것이 내주변엔 항상 여자들로 넘쳐났다
그렇다고 내가 한량기질이 다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여성들과 코드가 맞아
나를 대하는 분들이 부담감이 없고 편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약관의 나이때 난 이미 예감했었다
내 평생 내 주변엔 여인들이 득실거릴거란 사실을...
내가 죽기전에 하고픈 것이 내 인생의 참회록을 통하여
내 여성편력을 고백하고 싶어서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행위이기때문에
상대가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겠지만 또한 나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야하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그저 자신이 느끼는 감정만으로 폄하해주길 바랄뿐이다
물론 지지리도 못난 나를 좋게 평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고백을 그저 영혼이 맑은 한 사람의 넋두리로 받아주었으면하는 마음이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
내가 어린시절 사랑이란 감정이 무언지도 모르고다만 호기심(?)의 발로인지 좋아했던 여인들을 나열해 보자면
기독교의 주체인 사랑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들락날락하며 얻은 지식이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불우한 이웃을 가족처럼 대하고 아끼란 하나님의 말씀과
이웃과 좋은 음식은 나눠먹고 베푸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레
몸에 익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맛난 음식을 먹을때면 항상 떠오르는 울 아버지와 어머니
한보따리 싸서 갖다 드리고 싶어 먹으면서도 심내 마음이 불편했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
특히나 부페식당에서 이국적인 맛난 케익과 과자들을 보면 한웅쿰 쥐고나가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맛을 보여주고 싶을때가 많았지만
가져갈 수없는 식당의 규칙때문에 아쉬움이 많았었지
그런 음식은 슈퍼마켙이나 매장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함께모시고 나가 외식을 해야만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만
그 빵과 과자 먹자고 비싼값을 들여 출입하기엔 비경제적이라 아쉬움만 더해갔지
어릴때 부터 과자와 빵을 좋아하던 나인지라 지금도 밥보단 빵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내가 초딩시절과 중학교 2년까지 다니던 양씨촌의 교회에 다닐 적에
한 소녀를 좋아했었는데 어린 소녀는 코발트색깔의 셔츠를 즐겨입었었는데
그 옷이 예쁜 얼굴과 하얀피부에 너무나 잘 어울려 마치 천사를보는 듯 했었지.
내가 교회를 옮겨 그 교회를 다니지 않게되어 그녀를 다시 볼 수는 없었지만
42년이 지난 어느날 그녀를 만나게 되었지. 그녀를 본 순간 감회가 넘 깊어
그 기쁨어린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지
마을끝 언덕위 하얀교회와 42년 동안의 고독 이란 시도
이소녀 때문에 탄생하게 되었지만 ..
♣ 마을끝 언덕위 하얀교회
마을 끝 언덕위엔 하얀 교회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사계절 눈이오나 비가오나 천둥이 쳐도
한결같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지나가는 구름에 하소연하고
찬연히 빛나는 햇살로 소녀의 머리를 빗껴주길 수없이 반복하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마음 떠나 보내며 간구하더니
강산이 네번도 더 바뀐 어느 날
어느새 귀밑머리 하얗게 새어지니
그제사 소년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소녀의 곁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살아온 날이 다르고 사는 환경이 틀려도
그저 살아만 있어준데 감사드리며
바라는 바 없지만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이
이 모두가 하느님의 보살핌이라 여기며
하늘에 감사드리고 마음의 축복을 받으니
소년의 마음은 이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녀의 생각만으로도 꽉차 넘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을 끝 언덕위 하얀교회는
지금도 소년과 소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과 맞닿는 마을끝 언덕위 하얀 교회는
♣ 42년 동안의 고독
기나긴 여정
끓임없이 이어지는 모진 인연하나
사랑
세월은 가고
청춘도 가버리지만
남는 것 하나
사랑
그 사랑 앞에 42년이란 시간도 가고
짊어진 어깨위로
숙명처럼 파고든 사랑이란 짐 하나가
되돌려 주기만을 기다려
내마음 속박하고 얽히더니
마침내
주인찾아 떠나간다
아!
오랜 정말 오랜시간만에
달콤한 꿈에 취해
깊고 푸른 잠을자니
사랑 그 짐은 날개 달아 훨훨날으고
내마음 그대 품속에서
고요히 영면의 세계로 접어든다
물론 그녀 때문은 아니지만 울 옆지기는 그녀와 이름이 동일했고
나이도 같았지요 아마도 은연중에 그런 감정이 이입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나만을 위해 섹스폰으로 연주해주던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격적이었고
내 생일날 멋진 식당에서 맛난 음식을 챙겨주며 이것저것 반찬을 얹어주는 그녀의 섬세함에
새삼 세상살맛이 나고 아뭏튼 그녀와 다시 만난 우리는 한동안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여기저기 다니며 맛난 음식도 함께 먹고 차도 마시며 회포를 풀었지요
골프장에서 함께 동문들과 라운딩을 하며 우정을 쌓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요
그녀는 내 2년 후배이기 때문에 동문들 모임때는 선후배로 호칭을 하지만서도
단둘이 있을때는 친구처럼 자기야로 호칭을 하지요
가끔 연락을 취하며 살고 있는 그녀가 있어 내 인생이 좀더 풍요스럽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커피한잔
그대가 마시는 한잔의 커피가 내마음이라면
태평양과 대서양 오대양을 한잔속에 담아보련다
그대의 눈빛하나 손짓하나 음성 한마디에
하루에도 몇번씩 나는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다오
그대 향한 내마음은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 가슴속에 나의 보금자리 채워질 때까지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계속되련만
그대가 언제나 내마음 알아주고 나와 같아짐을 느낄까
아! 가는 세월 아깝지 않도다!
그대 향한 내 그리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니
온세상을 그리움 사랑 헤아림으로 칠하고 싶다
그대 가슴 깊숙히 한잔의 커피로 남고싶다
그대 나를 가슴속 깊이 품을 때까지
어린 시절 특히나 군대가기전에 만났던 아이들
키가 168cm에 쭉쭉빵빵이었던 문숙이, 어린 나이에 비해 너무나 성숙했던 그아이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밤 함박눈을 맞으며 밤늦게 까지 눈속을 걷던 그아이
내가 너무 좋다며 당장 결혼하자고 졸라댔는데 난 아직 군대도 안갔고 할일이 넘 많다며
깍듯이 거절했는데 그 아이는 그 다음 해 내가 군에 입대한 겨울에 시집을 갔지요
아마도 너무나 성숙한 그녀는 남정네가 그리워 일찍 결혼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외 친구 여동생들 모두가 나를 좋아하고 따랐지만 내 눈엔 들어오지가 않았지요
하루는 사진관을 하는 친구의 집에서 그 여동생과 나만 있을 때 서로가 장난치며 놀다가
장난이 지나쳐 서로가 흥분하여 동생의 브래지어를 걷어 올리니 조그만 몸매에
커다란 유방은 둘째치고 유두가 무슨 포도알처럼 하도커서 나도 모르게 입안에 넣고 말았지요
서로가 흥분한 상태라 하마터면 사고를 칠 뻔 했었지요
보문동에 살던 친구의 여동생이 갑자기 보문동으로 오라고 연락이 와 부랴부랴 가보니
갑자기 내가 너무 보고싶어서 불렀대나 참내! 덕분에 그날은 그아이와 보문동에서 놀았지만
별로 만나 일도 없고 말이없던 수선화꽃을 연상시키던 수옥이란 아이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행복하게 잘사세요 하며 내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곤
눈물을 뿌리며 사라졌는데 그 후 여지껏 보지를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아직도 왜 손수건을 주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고..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묻고 싶건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창들과 초딩동창들이 함께 어울려 서포리해수욕장등을 거쳐
속리산등 1주일간을 캠핑을 떠나 피골이 상접된채 돌아오기도 했었고
(제일좌측이 허명재, 앉아있는 사람이 이정만 그뒤가 초딩동창 황규진,서기수 우측이 본인)
어린 시절 바로 앞집에 살던 아이,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하얗던 아이
나중에 커서 미쓰코리아에 나와도 당당히 입선할 할 그 아이는 군계일학이었다.
지금은 그 아이 이름도 잊혀졌고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꽤나 귀여워 해주고
얼마나 나를 따르고 좋아했었는지..그리웁다 말은 못해도란 시의 주인공이다.
♣그리웁다 말은 못해도
한 여름 매미소리가 시원함을 갈망하며 자지러지면
풀밭에 벌러덩 누워 세상 근심 떨쳐버려라
하늘가에 수십가지 모양의 작태를 뽐내는 뭉게구름
서너마리의 양들도 보이고 상상속의 용모습도 그려 보지만
어릴적 함께 뛰놀던 뒷집아이 순이와 옆집아이 얼굴은 그릴 수 없네
너무나도 멀리 왔던가 멀어져간 사람아
언제나 내마음속에 살아 뛰놀던 그대이기에
오늘도 하늘 저편 구름에 실어
메아리 조차 없는 망망대해에 띄어 보낸다
보고싶다 그리웁다 말은 못해도
언젠가는 어디서건 한번은 만나겠지
옆집에 살던 아이도 내가 군제대한지 얼마 안되어서 갑자기 우리집에 와 놀러나가자고 해
비원에 가서 창경궁으로 그리고 종묘로 고궁을 산책하며 많은 담소를 나눴지만
내눈엔 그저 동생으로만 보이고 여인으로서는 뵈질 않으니 소가 닭 쳐다보는 꼴이다...
작은형이 군에 입대하던 날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을지로 거리를 배회하던 중
어느 꽃집에서 만난 꽃집의 아가씨 나보단 3살이나 연상이던 그 여인과는
처음 대화부터가 철학을 논하고 에릭프롬이나 프로이드의 이론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형이상학적인 대화로 일관되어졌는데
그 당시 내가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때라 버스에서도 가끔 함께
출근한 적도 있었는데 시종일관 우리의 대화는 문학과 철학뿐이었다.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그녀집에서 차를 함께 마실때도 평범한 대화는 단 한번도 없어
내 마음 한량없이 즐거웠고 영혼이 살찌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한계점인지 어느 날 갑자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그녀를 보곤
그여자를 멀리하게 되었다. 난 그저 함께 토론하고 철학과 문학에 대한 관심사만
보일뿐 그녀가 여인이란 것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이후 그녀와 같은 여자는 단 한명도 보지를 못했다.
치과병원에 다니던 내 초등학교 동창생
옆동네 사는 아이니 그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치과병원에 근무할때 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모를리 없다
가끔가다 그 아이집에 놀려가면 부모님들도 반겨주지만 그 친구 동생들이 더 난리친다.
오빠 왔다며 반가와서 이것 저것 집에 있는 먹을 것은 모두 꺼내온다.
바로 밑의 동생이 나하고는 2년 후배이지만 동갑이다
왜냐면 그 친구가 나보다 2살이나 연상이다
그 친구하고도 한동안 출근시 함께 버스를 타는 기회가 많았다.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초딩 2학년때인가 내가 뒷자리에 앉아서
30cm 자로 툭하면 자기 옆구리를 찔렀었다고 한다.
왜 그랬냐고 묻지만 난 기억에도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서로가 심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적에
난 니가 나보다 2살이나 나이가 많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다고 하니까
내가 싫지도 않아 프로포즈만 했으면 당연히 받아줄려고 했단다.
후일 그녀는 경기도 이천의 한 농가로 시집을 갔는데 결혼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 고생이 심하다는 얘기를 듣곤 내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었다.
출판사에 알바를 다닐때 사귄 여자들은
제본소에서 일하던 키가 매우작고 귀엽고 예쁘게 생긴 아이가 있었다
몇번을 만나 저녁도 함께먹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고 산책도 하고
그녀와 비원에서 창경원쪽으로 산보하다 비원 돌담길에서 지나던 남자 3명과 시비가 붙어
세남자를 무자비하게 패버린 나를 보고선 그녀는 깡패같다며 그 이후론 나를 회피하게 되었지만..
종로서적에서 근무중이던 한 아가씨, 이 아가씨와는 햇수로는 3년을 만났었는데도
성만 알지 이름은 몰랐었다. 군대에서 외박을 나온 나는 당시 비원쪽에서 살던
친구와 그녀와 그녀의 친구 4명이서 고궁을 산책하며 즐겁게 하루를 잘 놀고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을 하고선 헤어진 후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면회를 와
나에게 묻는다. 자기네 가족이 포루투갈로 이민을 가는데 나 때문에 고민이란다
나를 두고 이민을 갈 수가 없어 고심중이란다 내가 가지 말라면 가지를 않겠다 하니
내가 이 여인에게 이토록 깊은 존재가 되었나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저 친구라 생각하고 재미있게 잘 지내왔는데 그렇다고 깊은 관계를 맺은 사이도 아닌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어 멍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 이름이 뭐냐며 묻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른다 하니 이젠 갈길이 정해졌다며 쌩 돌아서 나가버린다
그 당시 종로서적엔 내 타입의 여자가 한명 있었는데 정작 그여인과는 말한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훗날 옆지기가 된 애인이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지방에서 올라오는데 고속터미널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터미널로 마중을 나갔는데 한무리의 연인들이 떼거지로 버스에서 내리는데 그 중 한
여인이 내가 찜했던 종로서적의 여인이 아니던가? 새삼 세상이 좁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그 여인은 지금도 울 옆지기와 친하게 지내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물론 미국에서 거의 살고 있지만-
무교동에서 저녁을 먹고 다방에 들어가 뷔엔나 커피를 마시다 혀와 입천장을 다 데었다.
멍한 상태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커피위에 얹은 아이스크림이 차가와 그냥 마셨는데
그 밑엔 용암이라도 녹일정도로 뜨거운 커피가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철없던 시절 종로3가와 비원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우리의 아지트를 세웠다
주로 자주가는 음악다방이 비원쪽에 있는 민들레란 아뜨리트를 겸한 찻집인데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무엇보다 커피맛이 좋았다.
매일 저녁무렵이면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우리는 음악에 취해서 개똥철학을 논하고
앞날이 불투명한 속에서 불확실한 희망을 얘기했고 절망뿐인 희망을 논했다.
어차피 얼마남지 않은 청춘의 세월은 군대라는 자물쇠가 억죄고 있었으니까..
매일을 한잔술에 취하고 종로2가부터 5가까지 배회하다가 종착역은 비원쪽이었다.
난 그 당시 스카라극장 건너편에서 봉선여관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집을 자주 갔었다
그 뒤가 초동인데 바로 충무로 거리이다.
하얀 싱글양복을 쫘~악 빼입고 하얀 백구두를 신고 다니던 장동휘는 너무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외 내가 좋아하던 박노식,최무룡,황해,허장강등 일류 영화배우들이 죽치는 스타다방에서
나도 함게 죽돌이가 되어 하루의 시간을 다방에서 소모하였다.
할일이 없으니 배우들 담배 심부름도 하고 시도 써보고 되지도 않는 수필을 쓰기도 하였다.
물론 스카라 극장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몇개의 극장을 지나 결국은 비원으로 가게된다.
이 시절 내 아버지 보다 더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과 항상 술자리를 함께하였다.
일을 핑계삼아 마시기도 하였고 죽이 맞아 마시기도 하였지만 술을 마실적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어른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다보니 자연스레 조심하게 되어서인지 내 평생 술로 인하여 실수를 한적은 한번도 없다. 심지어는 담배를 권하는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들 때문에 내가 어색해지기도 했었지만..
이런 생활을 할때 배우쪽에도 관심이 깊었고 또한 제의도 들어왔었지만 조만간 군대에 가야하는 입장이라 모든 것에서 손해를 보고 말았다. 군대란 것만 없었다면 난 아마도 지금쯤 배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숙명여고를 졸업한 친구가 자기 여동생과 동생친구를 데리고 캐핑을 가랜다.
여자아이들이다 보니 캠핑에 대한 선망감이 꽤나 있었나 보다.
텐트를 배낭에 집어넣고 아이들을(고등학생도 아이들이라고 해야하나?) 데리고
강촌 등선폭포옆에다 텐트를 치고 야영생활을 했다.
이틑날 철다리 밑에서 수영을 즐기는데 한 여자들의 무리가 공놀이를 하다가
한 여자애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재빨리 곁에 다가가 잠수하여 여자를 목에 걸치고
뭍에서 가까운 쪽으로 헤엄쳐 여자애를 구했다. 한데 이 여자 웃긴다. 이쁘게 생긴 얼굴에
겉옷만 걸치고 속옷을 입지않아 유두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이 꽤나 선정적이고 고혹적인 모습이다.
친구들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한번 만나자고 한다.
난 오늘 떠나는데 지들은 내일 떠난다고 하길래 모레 만나자고 하여
스카라극장 건너편의 한 다방을 알려주며 저녁 5시에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한날 5시경 다방에 도착하여 1시간 동안 담배만 피우다 돌아왔다.
결국은 바람맞은 것이다. 하기사 지들집은 석관동이라고 하더만! 하하하하
내가 신학공부를 할 때 사귀던 절친이 있었다. 물론 그 아이는 내 2년 정도 후배이다.
숙명여고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고등학교 후배이다.
안면을 튼지는 숙명여고를 다닐 때지만 후배다 보니 항상 동생취급을 하였는데
이 아이가 서울교대 1학년때 울 친구들이 여름 바캉스겸 캠핑을 떠났는데
당초 남자3명에 여자 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여자 1명이 급한일로 불참하게 되어
남자 3명 여자 2명으로 1주일 예정으로 캠핑을 떠났다.
덕유산 무주구천동100리길을 걸어서 다녔고 대천 해수욕장까지 1주일간 함께 여행을 하니
개인의 성품 인격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자연스레 내가 리더가 되고 리더는 일행의 안전과 편안함을 제공해주어야 하니
항상 긴장감을 풀 수가 없었다. 여행중 일어나는 다른 일행들과의 마찰, 혹은 시비거리등
내가 나서서 제재하고 해결해야 하고 할일은 많았었다.
그러다 보니 심한 여름 몸살감기로 고생을 했는데 이 아이가 옆에 붙어 앉아
시종일관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보살폈다. 텐트속이나 민박집에서도
항상 내옆에서 붙어자는 이아이, 우리 일행들중 특별존재로 되어 버렸다.
아무런 사고없이 1주일의 기나긴 캠핑생활을 마치고 무사귀환한 지 며칠이 안되어
갑자기 우리집으로 찾아온 이 아이. 내가 보고싶어 왔다며 화사하게 웃는다.
그 때부터 우리 둘만의 러브스토리가 진행되었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하루낮도 부족하여 우리의 헤어짐은 통금직전까지
계속되어졌다. 매일을 점심무렵만나 점심부터 밤늦게까지 우리의 시간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지나갔다.
이때 내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왜 이리도 햇살은 찬란하고
밤하늘의 별들은 왜이리도 찬연한지를 느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달빛과 별빛이 나뭇잎새에
머물러 반짝이는 모습에서도 행복을 느꼈다.
아!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루 하루가 행복의 연속이었고 서로를 알아감에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익어가고 섹스만 안했지 할 짓은 다해봤다.
그렇다고 평생을 살 것을 계획하기엔 내가 너무나 어렸고
남자들이 남자 구실을 하려면 군필을 해야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면에서 난 너무나 부족하였다.
군대도 안갔지. 돈도 없지, 공부도 해야지, 취직도 해야지 무엇보다 나이도 어리지
모든 면에서 미숙한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는 이별뿐이었다.
군 입대 일주일전 그녀에게 통보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별할 때라고..
그렇게 일방적인 이별통고를 보내고 쉽지는 않지만 이것이 현실이니 너의 생을 찾아 가라고
울먹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떠나는 내가 너무나 초라하고 한없이 작게만 느껴쪘다.
그러나 그 다음 다음날 그녀는 또 다시 나를 찾아왔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련가?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또 다시 진행되었다.
집결지가 충북 제천이었다. 송별식이 끝나고 쓸쓸히 나홀로 제천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가려하는데 청량리역까지 배웅나온 이 아이가 갑자기 함께가겠다며 따라오겠다는 것이다.
다음역에서 내리겠다 또 다시 다음역에서 내리겠다 하다보니 결국은 제천역까지 와버렸다.
헤어지자고 서로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남이 되어버린 사이였는데 ..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위엔 또다시 황금 물결.... 콧 노래를 부르며 그녀의 강의실로 향한다. 때마침 강의가 끝나 다음 강의를 위해 노트를 정리하던 그녀를 발견하고 독수리가 병아리 가로채듯 덮친다. 놀라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감옥(?)탈출을 시도해 남한산성의 은고개로 향한다. 차창에 비춰지는 노랗고 붉은 단풍들이 얼마나 곱고 아름답게 빛나던지 실로 자연만이 연출하는 황홀경에 빠져 은고개 개울가에 두발을 담그고 그녀의 도시락을 까 먹는다. (땡땡이 학생과 주동자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재밌게 놀고) 군입대 사흘전까지의 일이었다.
이 덕분에 학점이 부족한 그녀는 6개월 늦게 졸업했다고 한다. - 물론 1학기때도 나땜시
덕유산으로, 대천해수욕장으로 놀러다니다 학점미달이 됐었지만 -
그 당시 서울교대는 화양리를 지나 살곳이 다리를 건너 한양대 가기전에 있었다.
제천역에 내려 늦은 저녁을 먹고 여관에 투숙한 우리는 이별의 아픔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철없던 그녀는 학교 미술 과제물을 어찌하냐고 묻고 난 미술에 대해 강의하는 등
슬픈 속내를 서로 감추려고 허접한 얘기로 마음을 달래며 아침을 맞았다.
수용소연대 입구에서 아침을 먹고 쓸쓸히 돌아서는 그녀를 배웅하고
이발소로 들어가 머리를 빡빡밀고 부대로 들어갔다.
이렇게 그녀와의 철없던 청춘시절은 막을 내렸다.
그후 그녀는 내가 남한산성 헌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을때 면회를 왔었으나
내가 늦게 전달 받은 덕분에 면회소에 갔었으나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수도경비사에 복무하면서 첫외박 나갔었을때 그녀의 집을 찾아갔었지만
그녀의 올케언니가 하는 말 오늘은 오후 수업이라 늦게 귀가한다고 하여
보지도 못하고 나는 부대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이후 군대를 제대하고 조선공사 기획실에 근무할 적에 그녀를 딱 한번 본일이 있었다.
그녀의 숙명여고 선배이자 내 친구였던 아이가 시집갈 때다.
결혼식장에서 피아노를 치던 여자의 뒷태가 그아이 모습이다.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돌아서다 언뜻 나를 봤는지 시선을 자꾸만 뒷쪽으로 보낸다.
신랑신부 행진을 할적에 뒷쪽에서 웨딩드레스를 잡고 나오는 그녀와 나의 시선이
딱 부딪혔다. 순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솟을 것 같던 그아이의 눈을 회피하고
식장을 빠져나와 애꿎은 두꺼비 2마리를 잡아버렸다.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
이상으로 나의 군입대전 여성들과의 추억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