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안향(安珦)
1243년(고종 30) - 1306년(충렬왕 32) / 향년 64세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 학자이다. 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초명은 안유(安裕)였으나 뒤에 안향(安珦)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글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안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 안부(安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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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4권 / 행장(行狀)
선수고려국유학제거 도첨의중찬 수문전대제학 증시 문성공 회헌 안선생 명행기
(宣授高麗國儒學提擧都僉議中贊修文殿大提學贈諡文成公晦軒安先生名行記)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멀리 대대로 이어져 왔다. 고려 매헌(晦軒) 선생에 이르러 유학으로 세상에 크게 명성을 떨쳐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존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고향에서 전사(專祠)를 세워 신주(神主)를 받들고 있다.
그 후손 응창(應昌)이 세보(世譜)를 만들어 친족의 친소(親疎)를 나누고 소목(昭穆)의 차례를 짓고는, 선생의 공과 덕이 종족을 빛내고 후손을 보살핀다고 여겨 선생의 행적을 모아 책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익성(翊聖)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마침내 가첩(家牒)에 의거하고 국사(國史)를 참고하며 여러 사람들의 설을 두루 채집하여 큰 일 만을 기록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의의를 취하여 후세들이 상고하여 믿을 수 있도록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향(珦)이며, 초명은 유(裕)이다. 본조 현릉(顯陵 문종(文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다시 이름을 유(裕)라 하였다. 처음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원종(元宗)을 섬기며 교서랑(校書郞)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억류되었다가, 계책을 써서 탈출하자 왕이 특별히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내외의 관직을 오가며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명성도 함께 드러났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가서는 귀신을 빙자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여자 무당을 잡아다 다스렸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있다가 합포(合浦 마산)로 나가 진무(鎭撫)하니 군민이 편안하게 여겼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고 나서는 참지기무 행 동경유수 집현전태학사 계림 부윤이 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하자 이르러서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하루는 황제가 승상에게 뜻을 전하게 하여 이르기를, “그대의 왕은 어찌하여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인가?”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규방의 일은 외신(外臣)이 알바가 아니며, 또한 물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니, 어찌 먼 나라의 사람으로 그를 대하겠는가.”하였다. 찬성사(贊成事)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선생이 건의하기를, “재상의 직무 가운데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급선무는 없는데, 지금 양현고(養賢庫)가 텅텅 비어서 선비를 기를 수 없습니다.
마땅히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각각 차등 있게 은폐(銀幣)를 각출한 다음 이자를 불려 섬학전(贍學錢)으로 삼아야 합니다.”하였다. 양부가 이 안건을 보고하자 왕은 내탕고의 돈과 곡식을 내어 기금의 조성을 도왔다. 밀직(密直) 고세(高世)가 자신은 무인(武人)이라 하여 기금을 내는 것을 꺼렸는데, 공이 교조(敎條)를 내세워 말하자 고세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기금을 내놓았다.
또 남는 돈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에게 주어 공자와 그 칠십 제자의 초상을 사오도록 하고 아울러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6경(六經) 및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 등을 중국에서 사오게 하였다. 게다가 밀직 부사 이산(李㦃)과 전법 판서(典法判書) 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자,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책을 끼고 수업을 받았는데, 성대한 청아(菁莪)의 교화가 있었다.
선생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자상하였으며, 모든 행동을 예법에 따르고, 학교 진흥과 인재 양성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일찍이 학교가 쇠퇴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개연히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곳곳마다 향등 모두 부처에게 기원하고 / 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퉁소소리 모두 신을 섬기네 / 簫管家家盡事神
두어 칸 남아 있는 공자의 사당엔 / 獨有數間夫子廟
봄풀만 뜰에 가득하고 찾는 이 없어라 / 滿庭春草寂無人
선생의 가르침은 반드시 효제충신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써 실천하여 고명하고 정대한 영역에 이르게 하였다. 후생들을 가르치고 인도 할 때에는 관대하면서도 절도가 있었으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마다 차근차근 깨우쳐주어 잘못을 고치고 나서야 그만 두었는데, 생도들이 이 때문에 더욱 선생을 따랐다.
선생의 덕과 명성이 날마다 높아져서 원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에 임명하고 곧이어 해동유학제거(海東儒學提擧)를 더하여 표창하였다. 승상부에 있을 때에는 일을 잘 도모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게다가 감식안이 있어 사람의 귀천과 수명에 대해 말한 것 중에 징험된 것이 많았는데, 김이(金怡), 백원항(白元恒), 이제현(李齊賢)은 모두 선생의 감식안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는 회암(晦菴 주자(朱子))의 영정을 항상 걸어놓고 사모하였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하였다. 오래된 거문고 한 벌을 간직해 두고서 가르칠 만한 선비를 만나면 그 거문고를 타게 하였다. 만년에는 한가롭게 살며 토지와 노비를 바쳐 학도들에게 공급해 주었는데, 성균관이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충렬왕 32년 병오년(1306) 9월 12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4세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도덕이 깊고 학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우는 것을 성(成)이라 한다.
장례를 치를 때에는 칠관(七管)과 십이도(十二徒)의 생도들이 모두 소복을 입었으며, 왕명으로 선생의 영정을 그려 문묘(文廟)에 봉안하였다. 충숙왕 6년 기미년(1319)에 동무(東廡)에 배향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문종대왕(文宗大王)이 하교하기를, “안모의 자손은 영구히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그 조상의 공로를 표창하라.”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선생이 강학했던 곳에 나아가 서원을 창건하였고. 그 후 퇴계(退溪) 선생이 군수를 맡았을 때에는 학제(學制)를 보충하고 사액(賜額)을 주청하자, 소수(紹修)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였다. 또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경적(經籍)과 노비를 하사하여 우대하였다.
아! 우리나라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찬술한 기자(箕子)의 교화를 입어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어졌으나 기자의 덕이 쇠해지자 역적 위만(衛滿)이 국권을 찬탈하였고, 삼국이 투쟁하여 국토가 분열되었다.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하여 비록 호걸스런 선비가 있어도 모두 이단에 빠져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몰라 세상의 도의(道義)가 암흑에 가려지고 막혀진 지 거의 천여 년이 되었다.
선생이 이러한 말세에 태어나 실추된 실마리를 찾아 예전의 폐단을 씻어내고 올바른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를 추존하여 동방 성리학의 조종이라 일컫는 것은 과분한 말이 아니다. 왕조가 바뀐 뒤에도 포장(褒獎)하는 은혜를 더욱 보여주어 자손들까지 길이 그 혜택을 입었으니, 여기에서 열성조가 문(文)을 숭상하는 뜻을 엿볼 수 있다. 아! 성대한 일이다.
선생의 세계(世系)와 후손에 관해서는 비문과 보첩(譜牒)에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덧붙이지 않는다.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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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宣授高麗國儒學提擧都僉議中贊,修文殿大提學。贈諡文成公晦軒安先生名行記。
順興之安。遠有代序。至高麗晦軒先生。以儒術大鳴於世。推爲東方理學之祖。配食孔廡。專祠鄕邦。其裔孫應昌。譜其世而收其族。以先生之功之德。能亢宗燾后。爰摭遺事而冠其籍。屬筆於翊聖。辭而不獲。遂据家牒。參以國乘。旁采諸家之說。書其大者。竊取述而不作之義。俾後之攷信焉。謹按先生諱珦。初名裕。避本朝顯陵御諱。復以裕行。初以賢科釋褐。事元宗補校書郞。遷直翰林院。陷于三別抄之亂。以計脫免。王特加奬賞。自是歷敭內外。俱著廉直之名。忠烈王元年倅尙州。捕治女巫之挾神惑衆者。自密直司使出鎭合浦。軍民安之。忠宣卽位。拜參知機務集賢殿學士。尹鷄林。及忠烈復位。從忠宣入元。一日帝令丞相傳旨曰。汝王何不近公主。先生曰。閨闥之內。非外臣所知。亦非所宜問。帝曰此人知大體者。庸可以遠人視之耶。轉贊成事。先生謂宰相之職。莫先於敎育人材。今養賢庫貯殫竭。無以廩士。宜令大小官僚各出銀幣有差。子毋取息。以贍學錢。兩府以聞。王出內帑錢穀以助之。密直高世。自以武弁。不肯捐錢。公喩以敎條。世乃媿服輸貨。又以餘貲付博士金文鼎等。購先聖若七十二子遺像。幷購祭器樂器六經子史于中國。且薦密直副使李㦃,典法判書李瑱爲經史敎授都監使。於是願學之士雲集。橫經受業。蔚有菁莪之化。先生爲人。莊重安詳。動遵禮法。以興學養士爲己任。嘗憂學校政衰。慨然有詩曰。香燈處處皆祈佛。簫管家家盡事神。獨有數間夫子廟。滿庭春草寂無人。其爲敎必先以孝悌忠信。精思力踐。以至高明正大之域。訓迪後生。寬以有制。人有過。輒諄諄譬曉。改之乃已。士以此益附之。德譽日隆。達于元朝。宣授征東行省員外郞。尋加海東儒學提擧以褒之。在相府。能謀善斷。且有鑑識。言人貴賤壽夭多驗。金怡,白元恒,李齊賢皆其所識拔也。晩年休致。掛晦菴眞以寓慕。仍自號晦軒。蓄古琴一張遇士之可敎者必勸之晩年就閒納其土田臧獲。供給學徒。泮中至今賴之。以都僉議中贊致仕。忠烈王三十二年丙午九月十有二日易簀。春秋六十四。諡法道德博聞曰文。安民立政曰成。及葬。七管十二生徒皆服素。王命寫眞置文廟中。忠肅王六年己未。從祀東廡。入本朝。文宗大王下敎曰。安某子孫永勿屬軍役。以表乃祖之功。周愼齋世鵬守豐基。卽先生講學之地創書院。退溪先生爲郡。增定學式。請賜額紹修。命大提學申光漢爲記。幷錫經籍田民以優之。噫。吾東方被箕疇父師之敎。號稱小華。而箕氏德衰。逆滿阻命。三國鬪爭。區域自別。羅麗之際。竺敎大行。雖有豪傑之士。胥淪於異端。不知有周孔之道。晦盲否塞。殆千餘年矣。先生生於衰季。能尋墜緖。一洗蓁蕪。廓開正路。其爲東方理學之祖者。非溢辭也。易世之後。益示褒嘉之典。枝庶永賴。可見列聖右文之意。嗚呼盛哉。先生世系雲仍。有碑有譜。茲不贅焉。<끝>
ⓒ한국문집총간 |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