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타신 나귀새끼
<마21:6~10/17>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들)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본문은 사람의 영이 거듭나서 하늘의 예루살렘 성에 앉혀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을 역사로 보는 사람들은 주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예언의 성취(슥9:9)로 보고 덮으려고 한다.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의 메시야 되심만을 고집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의 관계성을 설정하지 못하기에 구원 또한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계시)는 살리는 것’이라 한다.
본문에 대한 설교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나귀새끼를 타고 성에 들어가시는 것이야말로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이 마치 돈키호테라도 되는가? 아니 문자적으로 본다면 돈키호테보다 더 괴팍한 행동을 한 것이 된다. 나귀새끼를 타고 이동한다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몇 미터도 못가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주님이시니까 나귀새끼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야 할 말이 없다만...)
먼저 나귀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한다. 율법에 의하면, 나귀의 첫새끼는 목을 꺾어 죽이든지, 살리려면 어린양으로 대속해야 했다(출13:13). 첫새끼는 장자로서 모든 사람의 겉사람을(첫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살아 움직이는 모든 나귀는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 안에 들어온 사람을 비유한다. 바로의 장자로 비유되는 일반 짐승과는 차별이 된다. 바로의 장자는 지금도 살아 있기에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애굽에서 사는 이방이들이다.
나귀는 타는 짐승이라기보다, 짐을 싣고 이동하는 수단으로 애용된다. 아무리 무거운 짐도 묵묵히 나르는 나귀는 순종과 섬김과 평화의 상징이다. 반면에 육체를 의미(사31)하는 말은 전쟁과 승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나귀새끼란 또 무엇일까? 나귀새끼는 어린아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에서, 어린아이란 겉 사람이 깨어져서 심령이 겸비해진 자를 일컫는다. 바로 나귀새끼가 그런 자를 암시한다. 일종의 중복계시이다.
주님은 두 제자들을 보내시며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신다. 우리는 세 종류의 나귀를 알아야 한다. 들나귀- 나귀- 새끼나귀이다. 영의 상태가 다른 세 사람을 예표한다. 들나귀는 야생나귀이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만, 전혀 거기에 매이지 않는 자다. 하나님의 의(거룩)에 대하여 자유한 자라고 바울은 꼬집는다. 죄의 종이라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잡족들이다. 이것이 바로 방종이요 죄인이다.
들나귀의 대표자가 이스마엘이다. 땅의 예루살렘의 생명을 가진 하갈의 소생이다. 죄의 종된 자들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이 열심이 특심이나, 천연적인 자기의가 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그들의 신은 자기 배다. 그들은 건물을 크게 세우고 거기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호도하며 비즈니스의 목적을 위해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
(어른) 나귀는 들나귀의 코뚜레를 뚫고 자갈을 물리며 멍에를 메워 율법의 엄중함을 배운 자이다. 인생이라는 버거운 짐을 싣고 뼈마디가 부서지도록 호구지책을 위해 살아가다가, 여기서 해방을 얻을까하여 귀의한 유대교(기독교)가 더 큰 짐을 지워서 자아가 으깨져버린 자들이다. 도망가자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고, 그냥 남아 있자니 날이면 날마다 두드리는 몽학선생의 몽둥이에 맞아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다.
율법은 무법한 자를 묶어두고 무식을 밝혀 죄를 알게한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로 가두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끝이 없는 어둠의 터널로 사람을 이끈다. 사람들은 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목표를 세워서 달려가지만, 상처투성이가 되어 그곳에 당도해보면 다시 다른 법이 저 앞에서 ‘날 잡아봐라’하고 손짓한다.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에 속아서 계속 방황하듯이, 사람들은 율법을 준수해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헛수고에 그치게 된다. 하나를 정복하면 다른 또 다른 죄의 매여서 몸부림친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자아가 산산히 부서진 자가 바로 자기 의에 대하여 바닥을 친자이다. 자신의 본질이 죄라는 자아의 본체를 인식한 자이다. 그 자가 바로 몽학선생에게서 졸업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가 찬자’이다. 육신의 때(크로노스)가 마치고 영의 때(카이로스)로 승화되는 때이다. 구약이 종결되고 새언약으로 싹나는 때이다.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풀풀나는 바로 그 때이다.
주님은 그런 자에게 제자를 보내서 말씀하신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리고 이르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율법의 조항들이다. 돌을 치워야 나사로가 걸어 나온다. 매어 있는 나귀를 풀어서 주님께 데리고 와야 한다(물론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해야 한다.) 나사로는 이제 부활의 몸이다. 사망을 딛고 새생명을 얻어 살아난 새로운 창조물이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본문은 나귀가 그 죄로 얼룩진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된 것을 나귀새끼로 표현했다. 들나귀에서 율법에 매여 죄를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는 나귀를 거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바로 새끼나귀이다. 이 자가 바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이다. 그래서 임금(하나님)의 은혜가 동력이 되어 살아가는 자이다. 이런 사람의 삶을 ‘은혜가 왕노릇’ 한다고 표현한다.
히12장에서는 이런 자의 영적인 상태를 ‘시온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온산은 아무나 올라가지 못한다. 옛사람의 여부스 족속기질이 끝장난 자만 정복하는 높은 처소이다. 거기가 하늘의 예루살렘이기도 하다. 또한 주님과 함께 앉혀진 하늘(엡2:6)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제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지식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 아무 실제도 없는데 자신이 부활한 자라고 떠든다고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한 자는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요구 받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 안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 때문에 분투하며 산다. 이제나 저제나 성령의 소욕을 동원하여 육신의 소욕을 거스리는 힘겨운 싸움을 하는 자이다. 때로는 넘어질지라도 아니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을 일어서는 자이다. 사망에서 일으킴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자신 안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다. 그가 주님을 등에 태우고 영원한 본향인 거룩한 성을 향해 걷고 있는 나귀새끼이며,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이다.
첫댓글 아멘~
들나귀 나귀 나귀새끼 영의상태 새사람을 의미하는데 난 어느상태에 속하는지
생각해봐야할것이다 첫사람 즉 옛사람이 죽고 부활한새생으로 심령이가난하고 겸비해진자
주여뜻대로 하시옵소서 모든것을 순종으로 주께맡긴자 어린아이와 같은자
이런자가 나귀새끼가아니던가 주님은 이런자를 기뻐하시기에 등에타시고
거룩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것을~
반대로 율법은 어두운끝이없는 터널과같고 그안에는 정죄만있을뿐
그래서 주님은 무릇율법아래있는자는 저주아래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옛사람은죽고 부활한 새생명이기에 주뜻에맡기고 하루하루를
주님에 은혜로 사는것을~
귀한말씀 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