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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염화미소
초기경전에 나타난 망상(papañca)에 대한 일고찰
윤 희조(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연구소)
Ⅰ. 머리말
1. 연구 의의
오늘날 명상수행(bhāvanā)은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명상수행을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망상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챙김을 놓치는 순간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확산되어 간다. 망상이 발생하는 순간을 놓침으로 인해 생각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발전해 나아간다. 어느 찰나에 망상이 발생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망상을 끊고 다시 명상수행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망상의 발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망상은 인식의 발생과정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서 생긴다. 필자는 이러한 망상은 상호의존적이며 순환적인 증장구조를 가지고 발생한다는 점과 망상이 발생하기 이전의 단계인 접촉, 느낌, 관념, 사유는 분지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망상의 발생에 대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망상의 소멸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망상의 소멸은 열반의 동의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망상을 소멸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망상의 발생을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망상의 소멸은 망상의 발생과정이 가지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분지적인 구조 때문에 망상의 소멸은 가능하다. 또한 초기경전에는 망상의 소멸방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와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선행 연구
망상에 관한 논의는 냐나난다 스님(Bhikkhu Ñāṇananda)의 연구성과를 분기점으로 양분된다. 이후에 쓰여진 망상과 관련된 대부분의 저작물들은 이 책을 참고로 하고 있다. 부제[An Essay on Papañca and Papañaca-Sañña-Sankh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망상(papañca)과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a-sankhā)에 대한 논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저서는 니까야와 빨리주석서를 근거로 한 상세한 텍스트 분석과 망상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중관, 유식, 베단따에서 사용하는 망상의 용례와 현대학자들의 용례까지 정리하고 있다.
냐나난다(Ñāṇananda) 이전의 연구로 사라스찬드라(Sarachchandra)는 니까야에서 아비담마에 이르기까지 지각과정에 관한 이론을 심리학적인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사라스찬드라 이전에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는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ṇi)을 번역하면서 망상을 관념(saññā)과 함께 다루고 있다. 또한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한 슈미트(Schmidt)의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
냐나난다 이후 깔루빠하나(Kalupahana)는 몇몇 저서에서 망상을 심리학적인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망상을 지각과정이 인과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까리야와삼(Kariyawasam)은 ‘개념(concept)’항목에서 개념화(conceptualization)와 관련하여 망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요한슨(Johansson)은 인식과정 전체를 동적 심리학(dynamic psychology)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슈미트하우젠(Schmithausen)은 쁘라빤짜(prapañca)의 원래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현황을 인식한 사쿠라베 하지메(櫻部建)는 망상의 개념을 잘 정리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오온의 하나인 관념과 관련한 해밀턴(Hamilton), 부아스베르(Boisvert), 페터(Vetter)의 연구 성과가 돋보이며,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a)에 대한 연구 성과로는 와따나베 후미마로(渡辺文麿)와 커즌(Cousins)을 꼽을 수 있다.
국내의 연구를 살펴보면 전재성은 初期佛敎의 緣起思想에서 지각현상이 망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특수한 연기형태인 ‘희론연기’로 다루고 있다. 또 정준영은 망상을 느낌과 관련해서 다루고 있으며, 임승택은 일으킨 생각(vitakka)과 지속적인 생각(vicāra)과 관련하여 망상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필자는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면서 망상의 내용을 발생과 소멸의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망상을 발생과 소멸의 측면에서 파악함으로써 망상의 평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망상이 발생하기 이전과 망상이 소멸한 이후까지의 전체적인 과정과 내용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본 연구와 선행 연구의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망상(papañca)의 의미
1. 망상의 사전적 의미
쁘라빤짜(prapañca, Skt) 또는 빠빤짜(papañca, Pāli)의 번역어로서 ‘희론’과 ‘망상’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戱論의 論은 사유(vitakka)와, 妄想의 想은 관념(saññā)과 연관되어 있다. 둘 다 망상의 발생 단계 가운데 하나로 희론은 ‘사유(論)를 즐기는 것(戱)’이라는 의미이고, 망상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헛된(妄) 관념(想)’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
쁘라빤짜(prapañca)의 어근으로는 √pañca(다섯), √pad(발)의 두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PED와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사전을 제외한 대부분 경우는 √pañca를 prapañca의 어근으로 인정한다. PED는 라틴어 ‘장애(impedimentum)’의 어원과 연관이 있는 ‘pada(발)’를 어근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PED가 제시하는 어근해석의 근거가 어느 정도 확실한지 의심스럽고, 산문경전의 용례에서는 이 ‘장애’의 의미가 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기 때문에, ‘장애’를 빠빤짜의 의미의 기초로 놓기는 어렵다. 또한 ‘장애’라는 의미는 대승불교의 술어로서 쁘라빤짜의 의미와 연결시키기 어렵다는 것도 확실하다.
반면 ‘pañca(다섯)’를 어근으로 하는 경우 쁘라빤짜는 구상적으로 다섯 손가락을 쫙 편 모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쁘라빤짜는 기본적으로 확장(expansion), 확산(proliferation), 다양(manifoldness)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쁘라빤짜는 ‘실체가 없는 다양한 현상으로서의 세계 또는 우주’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우주의 확장(expans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의 쁘라빤짜는 어떤 것이 드러난 것(manifestation), 겉모습(appearance), 현상(phenomenon)을 의미한다.
확산(proliferation)은 ‘현상세계에서의 확산’과 ‘개념세계에서의 확산’이 가능하다. 쟈끄메는 이를 ‘현상적 희론’과 ‘개념적, 언어적 희론’으로 구분한다. 현상적 희론은 팽창하는 우주와 같은 현상과 연결하여 해석하려는 희론이고, 개념적, 언어적 희론은 이 생각을 표현하는 말의 희론이다.
쁘라빤짜는 인도철학 일반에서는 현상세계를 의미하는 용어이지만 불교에서는 그 용어에 언어활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일반적으로 희론은 현상적 희론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반면, 불교에서 희론은 주로 ‘개념적인 세계에서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2. 초기경전과 주석서에 나타난 망상
초기불교의 운문경전에서 망상은 18번 정도 사용되고 있으며 게송별로 보면 12개의 게송에서 그 용례가 보인다. 망상은 병의 근원이며 망상을 모으는 것은 괴로움을 가져온다. 따라서 망상은 수행자가 뛰어넘어야 할 것이고, 수행자는 망상의 근원을 끊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붓다는 망상에 머물지 않고 속박과 장애를 넘어선다. 망상을 끊기 위해서는 망상을 즐겨서는 안 되고, 망상없음(nipapañca)을 즐겨야 한다. 망상의 기원과 관련하여 망상에 의한 헤아림(papañca-saṅkhā)은 관념(saññā)에 의존한다.
산문경전에서 망상은 15번 정도 언급되고 있는데 운문경전보다 상세하게 망상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쌍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는 망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있다(asmi)’, ‘이것이야말로 나이다(ayam aham asmi)’, ‘나는 될 것이다(bhavissan)’, ‘나는 되지 않을 것이다(na bhavissan)’, ‘나는 물질을 지닌 존재가 될 것이다(rūpī bhavissan)’, ‘나는 물질을 지닌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이다(arūpī bhavissan)’, ‘나는 관념이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saññī bhavissan)’, ‘나는 관념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asaññī bhavissan)’, ‘나는 관념이 없는 것도 관념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nevasaññīnāsaññī bhavissan)’라는 것이 망상하는 것(papañcita)이다. ‘나는 있다(asmi)’라는 망상은 가장 근원적인 망상으로 ‘나는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나머지 8가지 망상이 성립한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 Nikāya)에서는 또 다른 망상의 내용이 보인다. ‘여래는 죽은 이후에 있는가(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 ‘여래는 죽은 이후에 없는가(na 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 ‘여래는 죽은 이후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가(hoti ca na 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 ‘여래는 죽은 이후에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른바 10무기(無記, avyākata) 가운데 4가지 질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견해에 빠진 것(diṭṭhigata)이고, 갈애에 빠진 것(taṇhāgata)이고, 관념에 빠진 것(saññāgata)이고, 생각에 의한 것(maññita)이고, 망상에 의한 것(papañcita)이고, 집착에 빠진 것(upādānagata)이고, 전도된 것(vippatisāro)이다.
주석서의 경우 붓다고사는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āya)의 주석서에서 망상을 갈애(taṇhā), 견해(diṭṭhi), 자만(māna)으로 설명하고 앙굿따라니까의 주석서에서는 망상의 범위를 갈애(taṇhā), 견해(diṭṭhi), 자만(māna)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망상의 전형적인 예로써 외연에 의한 정의의 방식으로 망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주석서의 이러한 설명의 단초는 위의 10무기와 관련하여 망상의 성격을 규정짓는 일곱 가지 특징 중에서 볼 수 있다.
Ⅲ. 망상의 발생과 소멸 과정
1. 망상의 순환적 증장구조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ḍika Sutta)은 망상의 기원과 발생 과정을 주제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경은 단다빠니(Daṇḍapāni)라는 청년의 질문과 붓다의 간략한 대답 그리고 이에 대한 마하까짜나(Mahākaccāna)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하까짜나의 설명에서 망상의 기원과 발생 과정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벗들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겨나고, 세 가지가 모인 것이 접촉(phassa, 觸)으로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vedanā, 受)이 있다. 그가 느낀 것에 대하여 관념을 만들고(sañjanati), 관념을 만든 것에 대하여 사유하고(vitakketi), 사유한 것에 대하여 망상한다(papañceti). 이것을 원인으로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은 과거, 미래, 현재의 시각의 대상인 색(rūpa, 色)에 대하여 그 사람에게 생겨난다.
이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망상은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 + 色ㆍ聲ㆍ香ㆍ味ㆍ觸ㆍ法 → 眼識ㆍ耳識ㆍ鼻識ㆍ舌識ㆍ身識ㆍ意識 → 접촉(phassa) → 느낌(vedanā) → 관념(saññā) → 사유(vitakka) → 망상(papañca) →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의 순서에 따라 발생한다.
또 다른 경전인 삭카빵하경(Sakkapañha Sutta)은 신들의 왕인 삭카(Sakka)의 여섯 가지 질문과 이에 대한 붓다의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에서 망상의 발생에 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에서 삭카는 천신, 인간, 아수라, 나가, 간답바와 같은 무리들은 원망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를 붓다에게 묻는다. 붓다는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은 궁극적으로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이를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
ṅkhā) → 사유(vitakka) → 의욕(chanda) → 좋아함과 싫어함(piyāppiya) → 질투와 인색(issā-macchariya)의 발생순서가 된다.
마두삔디까경의 사유(vitakka) → 망상(papañca) →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의 순서는 삭카빵하경의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 → 사유(vitakka)의 순서와 서로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냐나난다에 의하면 이러한 모순은 실제적인 모순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모순인 것처럼 보이며, 망상의 산물이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경우 사유는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즉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은 다시 사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마두삔디까경의 마지막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과 삭카빵하경의 처음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을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다.
ㆍㆍㆍ→사유(vitakka) → 망상(papañca)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 → 사유(vitakka) → 망상(papañca)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 ㆍㆍㆍ → 의욕(chanda) → 좋아함과 싫어함(piyāppiya) → 질투와 인색(issā-macchariya)
각각의 경전에서 단선적이고 단방향적이던 구조는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이 다시 사유와 망상의 대상이 되는 순환구조로 발전하게 된다. 순서가 바뀐 것을 외관상 모순이라는 정도로 축소 해석하는 것보다 순환적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순환구조 속에서 사유, 망상,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유와 망상은 순환하면 할수록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은 더욱 실체화되고, 더욱 확산적인 경향성을 띄며, 더욱더 세속에 압도당하게 된다. 즉 망상은 ‘망상’과 그에 따른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의 악순환적인 증장구조를 통해서 계속적인 자기 생산을 하게 된다.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은 ‘나는 있다’라는 견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는 있다’라는 견해는 사실에 충실하지 않은 개념 영역에서의 확장이다. 이는 ‘나의(my)’ ‘나의 것(mine)’이라는 견해를 수반한 채로 ‘갈애’로 발전한다. ‘나’라는 견해와 이와 함께 생겨나는 ‘나-아님(not-I)’이라는 견해를 비교함으로써 이는 ‘아만’으로 발전한다. 즉 일단 자아의식(ego-consciousness)이 주어지면 끝없는 개념화의 확산과정은 시작되고 이러한 개념화의 확산과정은 ‘나’의 본성이고, 개념의 조작은 ‘나’의 사변적인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망상은 이러한 악순환적 증장구조를 통하여 개인적으로는 탐욕(rāga), 성냄(paṭigha), 견해(diṭṭhi), 의심(vicikicchā), 아만(māna), 존재에 대한 욕망(bhavarāga), 무지(avijjā)의 잠재적 성향의 원인이 된다. 또한 망상은 사회적으로는 몽둥이를 드는 것(daṇḍādāna), 칼을 잡는 것(satthādāna), 투쟁(kalaha), 싸움(viggaha), 논쟁(vivāda), 언쟁(tuvantuva), 이간(pesuñña), 거짓말(musāvāda)의 원인이 된다. 여기에 삭까빵하경에 나오는 것까지 더하면 의욕(chanda), 좋아함과 싫어함(piyāppiya), 질투와 인색(issāmacchariya)의 원인이 된다. 한마디로 망상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악하고 좋지 않은 상태들(pāpakā akusalā dhammā)의 원인이 된다.
2. 접촉, 느낌, 관념, 사유의 분지적 구조
1) 접촉
마두삔디까경은 망상의 기원을 삼사화합(三事化合)에 의한 접촉에서 찾고 있다. 또한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사리뿟따(Sāriputta)는 마하꼿티따(Mahā Koṭṭhita)와의 대화에서 “망상의 범위는 접촉영역(phassāyatana)의 범위이고, 접촉의 범위는 망상의 범위이다.”라고 한다.
망상뿐만 아니라 접촉 이후의 인식단계는 모두 접촉에 의존한다. 이때의 접촉은 주관적 경향성을 배제시킨 순수한 감각경험으로서의 순수한 지각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것(conscious event)이다. 접촉의 정의 가운데 이미 의식(viññāṇa)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촉은 공간적인 부딪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이라는 주관적 세계와 대상이라는 객관적 세계가 만나는 순간(moment of contact)을 가리키는 것이다. 접촉을 주체와 객체 사이의 접촉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접촉에서 ‘나’, ‘나의 것’이라는 환상이 생기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접촉은 이미 망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범부의 입장에서 접촉은 ‘자아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즉 개인이 윤회를 계속하는 동안 주관적 세계는 대상세계와 관련하여 ‘나’라는 환상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기능으로서의 눈(眼)은 범부와 성자 모두에게 똑같지만 주관적인 세계에서의 안식(眼識)은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생리학적인 기능으로서의 접촉은 아라한의 상태에게도 계속되지만, 아라한은 그것을 더 이상 ‘나의’ 접촉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성자에게 있어서 접촉은 망상의 가능성을 소멸한 것이다.
접촉은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 상태이다. 접촉은 범부의 의식과 성자의 의식이 머무는 근거가 된다. 일반적으로 행(saṅkhāra)을 분류할 때 접촉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요소이다. 이때의 접촉은 순수한 접촉이 아니라 행의 영향을 받은 접촉이다. 이러한 접촉에는 긍정적인(kusala) 행의 영향을 받은 접촉과 부정적인(akusala) 행의 영향을 받은 접촉이 있을 수 있다. 즉 접촉에는 망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접촉을 단순히 부정적인 가능성으로만 파악하기보다는 긍정적인 가능성과 부정적인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접촉에 무명촉(無明觸)과 명촉(明觸)이 있는 것은 이러한 구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모든 망상이 생기는 곳도 접촉이고, 모든 망상이 사라짐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곳도 궁극적으로는 접촉이라고 할 수 있다.
망상의 기원인 접촉은 이와 같이 분지적(分枝的)인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분지적 구조의 가능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범부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성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접촉이 오로지 부정적인 가능성만을 가진다면 성자의 길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지적 구조는 이후의 단계에서도 발견된다.
2) 느낌
느낌(vedanā)의 어근인 √vid는 ‘알다’ 또는 ‘경험하다’의 두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적으로는 아는 것을 의미하고 경험적으로는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느낌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있다. 느낌은 감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지적인 측면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즉 느낌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뜻으로 인식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느낌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즉 인식에는 경험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은 각각 정신적인 느낌과 육체적인 느낌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느낌은 불행을 증장시키는 길과 불행을 소멸시키는 길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다. 느낌 자체는 갈애가 생기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분기점의 가능태로 있던 접촉은 느낌으로 발전하면서 분기점이 된다.
각각의 느낌에 대하여 해로운 법들(akusalā dhammā)을 증장시키고 유익한 법들(kusalā dhammā)을 제거하는 느낌이 있는 반면,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고 유익한 법들을 증장시키는 느낌도 있다. 즉 느낌은 긍정적인 느낌과 부정적인 느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느낌 자체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 궁극의 목표와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삭카빵하경에서도 볼 수 있다. 삭까는 세 번째 질문에서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을 소멸하는 방법을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붓다는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평온한 느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sevitabha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asevitabhaṃ)이다.”라고 대답한다. 각각의 느낌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면, 이러한 각각의 느낌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각각의 느낌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면, 이러한 각각의 느낌은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다. 삭카가 천신인 것을 감안한다면 욕계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다섯 가지 느낌에 대해서 모두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sevitabha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asevitabhaṃ)’의 구분을 적용할 수 있다.
또한 느낌은 ‘감각적 욕망과 연관되어서’(gehasita) 갈애로 발전할 수 있는 느낌과 ‘감각적 욕망을 벗어난’(nekkhamma) 느낌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감각적 욕망과 연관된 것은 감각적으로 좋아하고, 욕망하고, 애착하고 즐기는 것이고, 감각적 욕망을 벗어난 것은 모든 것들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서 보는 것이다.
유익한 법을 증장시키고 해로운 법을 제거하고 감각적 욕망을 벗어난 느낌으로 나아갈 때 망상의 소멸로 나아갈 수 있다. 부정적인 느낌(akusala vedanā)은 궁극적으로는 갈애와 망상으로 발전하는 반면, 긍정적인 느낌(kusala vedanā)은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느낌이다. 느낌의 이러한 분지적 구조는 관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 관념
관념(saññā)은 단순한 감각지각(sense perception) 이상의 것으로서 다른 것과 구별하는 기능과 동일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기능과 동일화의 기능은 개념화(conceptualization)에 의해서 행해진다. 관념은 이미 느낌이 생긴 어떤 것에 대하여 범주(category)를 적용하여 인식하고 해석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범주를 적용한다고 해서 마음에 알려지지 않은 초월적인 범주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관념은 단순한 지각을 넘어서 ‘관념만들기(ideation)’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관념은 어원적으로 볼 때 산스크리트어 ‘상즈냐(saṁ-√jñā)’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선이해와 관련하여(saṁ) 현재의 감각지각을 아는(jñā)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하여 구별화와 동일화의 작용이 발생하고, 개념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개념화는 기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기억을 포함한 과거의 마음의 기능(mental faculty)이 현재의 감각지각과 연관되어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관념은 기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상상, 기억, 기존의 관념, 행(行)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낸 마음의 활동의 복합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도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관념(kusala saññā)과 도움이 되지 않는 부정적인 관념(akusala saññā)으로 구분된다. 긍정적인 관념은 열반으로 이끄는 관념으로 ‘긍정적인 상상(constructive imagination)’인 반면, 부정적인 관념은 실재에 대한 통찰로 이끌지 않고 망상을 발생시킨다.
관념을 주의하라는 충고는 빨리경전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때의 관념은 부정적인 관념이다. 지혜(paññā)를 성취한 자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관념에 집착하는 자는 윤회의 세계에서 방황한다. 관념에서 떠나면 속박이 없어지고, 지혜로서 해탈하면 어리석음(mohā)이 없어지지만, 관념(saññā)과 견해(diṭṭhi)를 고집하면 그들은 남과 충돌하면서 세상을 방황하게 된다. 또한 관념에 의해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즉 관념에 의해서는 편견 또는 상대적인 진리에 이를 수밖에 없다.
반면 관념은 우리에게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인식과정에서 관념은 망상으로 나아가지만, 관념이 자동적으로 망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관념의 예로는 아픈 기리마난다(Girimānanda) 비구에게 들려준 단지 암송만으로도 그 병이 완화되는 10가지 관념,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10가지 관념, 지혜에 도움이 되는 6가지 관념,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parinibbāna Sutta, 大般涅槃經)의 수행해야 할 7가지 긍정적인 관념, 상기띠경(Samgīti Sutta, 衆集經)의 해탈을 돕는 5가지 관념 등이 있다. 특히 상기띠경의 해탈을 돕는 5가지 관념, 지혜에 도움이 되는 6가지 관념,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10가지 관념 중에는 삼법인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의 긍정적인 관념은 명상의 주제 또는 방법이며 이때의 관념은 명상(contemplation)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관념의 개념화작용은 구별과 동일화를 통해서 원래 주어진 것을 분명하게 하는(clarify) 동시에 그 만큼 주어진 것을 왜곡시킨다(distort).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관념이 극단적인 왜곡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관념의 분지적 구조가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관념의 방향에 따라서 우리는 망상(papañca)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지혜(paññā)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이 개념화작용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따라서 긍정적인 관념과 부정적인 관념이 구분된다. 느낌이 긍정적인 관념에 의해서 해석된다면, 이는 갈애와 전도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고, 느낌이 망상으로 나아가는 부정적인 관념에 의해서 해석된다면, 이는 갈애와 전도로 나아갈 것이다.
4) 사유
위따까(vitakka)는 위짜라(vicāra)와 함께 사유작용을 나타내는 말로써 초기불교 이래 대부분 한쌍으로 서술된다. 아비담마에서 위따까는 대상을 향하여 마음을 ‘처음 적용(initial application)’하는 것이고, 위짜라(vicāra)는 마음을 대상에 ‘지속적으로 적용(sustained application)’하는 것이다. 또한 위따까와 위짜라는 ‘사유(reasoning)’와 ‘숙고(reflection)’를 의미한다. 위따까와 위짜라는 개념의 영역에서 사유를 지속하면서 계속적으로 무엇인가를 궁리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의 영역에서 질서의 측면과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언어의 행(vacīsaṅkhāra, 口行)의 일종인 ‘사유’와 ‘숙고’는 언어의 작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언어로 말해지지는 않더라도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사유와 숙고가 행해진다고 할 수 있다. 사유와 숙고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넓은 의미의 ‘생각(thought)’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은 정형구처럼 위따까의 부정적인 의미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kāmavitakko)’, ‘분노에 대한 사유(byāpādavitakko)’, ‘폭력에 대한 사유(vihiṃsāvitakko)’로 설명한다. 반면 ‘감각적 욕망을 여윈 사유(nekkhammavitakka)’, ‘분노를 여읜 사유(abyāpādavitakka)’, ‘폭력을 여윈 사유( avihiṃsāvitakka)’는 긍정적인 사유이다.
사유와 숙고도 또한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분류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동일한 사유와 숙고가 갈애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사용되는가, 갈애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유도 또한 긍정적인(kusala) 사유와 부정적인(akusala) 사유로 구분되는 분지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유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는 망상적인 사유가 되고,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는 올바른 추리, 올바른 추론이 전개된다.
3. 망상의 소멸
붓다는 망상을 없애는 방법으로 망상을 기뻐하지(abhinanditabbaṃ) 않고, 환영하지(abhivaditabbaṃ) 않고, 집착하지(ajjhosetabbaṃ) 않을 것을 주문한다. 모든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잘 아는(anuvidito) 자’는 ‘망상이 없는(nippapañco) 자’, ‘망상을 기뻐하지 않는(nippapañcarato) 자’이고, ‘망상을 끊은(chinnapapañco) 자’이고, ‘망상을 소멸한(papañcavūpasama) 자’이고, ‘망상을 중지한(papañcanirodha) 자’이고, ‘망상에 의한 헤아림을 버린(papañcasaṅkhāpahāna) 자’이다. 즉 망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열반의 표시가 된다. 이때에 붓다는 자신은 어떤 자와도 논쟁을 하지 않고, 어떤 관념도 잠재되어 있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러한 망상의 소멸가능성은 이제까지 살펴 본 인식의 단계가 분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계가 분지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하나의 방향으로 이전의 단계와 일대일로만 대응한다면, 접촉에서부터 망상까지 자동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는 우리에게 열반이라는 구제는 불가능하게 된다.
마두삔디까경은 망상을 소멸하기 위하여 ‘접촉이라는 명칭(phassapaññatti)’의 소멸이라는 근원적인 처방을 내리고 있다.
벗이여, 참으로 눈과 형상과 안식이 없을 때 접촉이라는 명칭(phassapaññatti)이 알려지지 않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접촉이라는 명칭이 없을 때 느낌이라는 명칭(vedanāpaññatti)이 알려지지 않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느낌이라는 명칭이 없을 때 관념이라는 명칭(saññāpaññatti)이 알려지지 않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관념이라는 명칭이 없을 때 사유라는 명칭(vitakkapaññatti)이 알려지지 않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사유라는 명칭이 없을 때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에서 생겨나는 명칭(papañcasaññāsaṅkhāsamudācaraṇapaññatti)이 알려지지 않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접촉이라는 명칭의 소멸은 그 이전 단계인 ‘감각기능을 수호’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접촉 이전의 단계에서 ‘감각기능을 수호’하는 것은 탐욕, 근심, 악하고 좋지 않은 상태 등과 같은 행(saṅkhāra)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감각기능들은 개인들이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수단이며, 이후의 인식 과정에 의해서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윤회의 길에 남을 수도 있다.
초기경전에서 감각기능을 수호하는 것은 하나의 정형구로서 ‘대상의 인상(nimitta)과 특징(anubyañjana)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대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인 ‘인상’과 인상 다음으로 주의를 끄는 세부적인 특성인 ‘특징’에 사로잡힐 때, 탐욕, 근심,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일어나게 된다. 이 때 수호해야 할 감각기능은 생리학적인 메카니즘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 경험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다. 우리의 인식은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능이 작용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행(saṅkhāra)이 개입하면서 시작된다.
인식발생의 과정은 접촉으로 시작해서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으로 끝나지만,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은 다시 행(saṅkhāra)으로서 접촉에 영향을 끼치는 순환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순환구조 속에서 탐욕, 근심, 악하고 좋지 않은 행(saṅkhāra)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감각기능을 수호하는 것이고, 이것이 망상의 소멸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것이 망상을 기뻐하지(abhinanditabbaṃ) 않고, 환영하지(abhivaditabbaṃ) 않고, 집착하지(ajjhosetabbaṃ) 않는 것이다.
Ⅳ. 맺음말
필자는 본 논문에서 망상은 상호의존적이고 순환적인 증장구조를 가지고 발생한다는 점과 망상이 발생하기 이전의 각각의 단계는 분지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망상은 현상세계에서의 확산과 개념세계에서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개념세계에서의 확산 가운데 ‘나는 있다’라는 견해는 가장 근본적인 망상이다. ‘나는 있다’라는 ‘견해’로 인해서 나에 대한 ‘갈애’와 ‘자만’이 생기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악하고 좋지 않은 상태의 근원이 된다.
마두삔디까경과 삭까팡하경을 함께 보면 망상은 단선적이고 단방향적으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증장구조를 가지고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망상은 순환적인 증장구조를 통하여 더욱 실체화되고, 더욱 확산적인 경향성을 가진 채 더욱 세속에 압도당하게 된다. 행(saṅkhāra)의 일종인 망상은 순환구조 안에서 계속적인 확대재생산을 통하여 자기발전을 계속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망상의 발생 이전 단계가 분지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망상의 발생은 망상의 소멸의 가능성을 함축하게 된다. 접촉, 느낌, 관념, 사유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성의 가능성과 동시에 소멸의 가능성을 가진다. 만약 접촉에서 망상까지 단방향적이고 단선적인 가능성만을 가졌다면, 망상의 소멸은 불가능할 것이다.
망상의 소멸을 위한 가장 근원적인 진단은 접촉에서 감각기능을 수호하는 것이다. 이는 탐욕, 근심, 악하고 좋지 않은 상태와 같은 행(saṅkhāra)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더 이상 ‘나는 있다’라는 견해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망상을 기뻐하지(abhinanditabbaṃ) 않고, 환영하지(abhivaditabbaṃ) 않고, 집착하지(ajjhosetabbaṃ) 않음으로 우리는 망상으로부터 해방되고, 명상수행에서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주제어
망상(papañca), 희론(prapañca), 확산(proliferation), 망상에 의한 관념과 헤아림(papañcasaññāsaṅkhā), 접촉(phassa), 느낌(vedanā), 관념(saññā), 사유 (vitakka), 개념화(conceptualization)
A Study on Papañca in Early Buddhism
Yoon, Hee-Cho
In this paper, I proposed that in its generation and disappearance, papañca has circular
and ramified structure. Because of this structure, papañca is able to generate and disappear.
This structure can be shown in Madhupiṇḍika Sutta and Sakkapañha Sutta. In Madhupiṇḍika Sutta,
"When there is the manifestation of thinking(vitakka), it is possible to point out the manifestation of besetment by perception
and notion [born of] mental proliferation(papañcasaññāsaṅkhā)", in Sakkapañha Sutta, "thinking arises from perception and notion
[born of] mental proliferation". Connecting Madhupiṇḍika Sutta and Sakkapañha Sutta,
we can gain circular structure in generation of papañca. By vicious circular structure,
papañcasaññāsaṅkhā is more substantialized and becomes fundamental of all evil state in private and public.
Substantializing tendency arises from the ideation(saññā). sense perception is conceptualized by saññā and conception is ratiocinated by thinking(vitakka) and ratiocination is proliferated by proliferation(papañca). All this process is mediated by language.
After all arises papañcasaññāsaṅkhā in the end. Papañcasaññāsaṅk-
hā act as catalyst to amplify the process. In the basis of the proliferation lies concept-I. Proposition 'I am(asmi)' is the most fundamental papañca.
Ramified structure can cut off the vicious circle. If the structure is non-ramified, there is no nibbana. Phassa, vedanā, saññā and vitakka have two perspective, negative and positive.
Therefore in negative perspective, we get to generate and diffuse the papañca, but in positive perspective,
we can cease to the papañca. To eliminate the papañca, above all must we protect our sensual fun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