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시원의 집안내력
李是遠의 호는 沙磯로, 그의 나이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의 5대조인 眞伋은 眞儒, 眞儉 등과 형제지간으로, 진유와 진검이 폐했을 때 진급의 가족까지도 연루되어 兩世가 錮廢되었다.
그리고 진급의 손자인 忠翊은 호가 椒園으로, 그는 강화의 椒峯 밑에서 살며 벼슬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의술과 지리에 능통하고 문장에도 기특한 솜씨를 발휘했으므로 세상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 東芚浦에다가 선조의 묘를 쓰고, “우리 자손 중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이곳은 白鷺가 물로 내려오는 형국이므로 백로가 모여들기만 하면 바람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의 아들 李勉伯이 進士試에 합격하여 어떤 사람이 축하를 하자 충익은, “”아직 바람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시원이 과거에 급제하기 2년 전에 백로가 모여들기 시작하자 그는 손가락을 꼽아 보며 “괴상한 일이다. 왜 틀릴까?”라고 하더니, 이시원이 급제하여 왕을 알현했다는 기별이 전해지자 그는 웃음을 지으며 “꼭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이충익은 세상을 떠났다
이시원은 명성과 氣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손자 李建昌은 문장으로 한 시대를 울리고 또 일찍 관직에서 은퇴하여 세상의 名臣이 되었다.
35. 이시원의 강직성
李是遠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여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한 일이 많았지만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泰川 군수로 있을 때 善政을 하였고, 春川으로 부임하였을 때는 國舅 조선왕조 때, 「왕비의 아버지」를 일컫던 말. 편자주 인 趙秉龜가 그의 경내에서 장례를 치른 일이 있었는데, 도내의 守宰들이 뒤질세라 몰려갔으나 이시원은 그곳을 가지 않아 얼마 후 파면되었다.
그는 또 경기도의 암행어사로 있을 때, 그가 書啓를 올려 탄핵한 사람들은 참판 이상이 8명이며 그 이하가 10명이나 되었고, 또 풍채도 늠름하여 한때는 「十駿八軺」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