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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건물 되살려 작품 걸다…‘24년 검사’의 욕먹을 결심
카드 발행 일시2024.07.04
에디터
이은주
더 컬렉터스
관심
대전 '헤레디움' 설립한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
지난해 9월 대전에서 안젤름 키퍼(79·Anselm Kiefer) 전시가 열린다고 했을 때 미술계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키퍼가 누구인가.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으로, 세계 도시 곳곳에서 큰 전시가 이어지고 있는 작가다. 2022년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두칼레 궁전 전시는 그해 미술계 최고의 전시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런데 그의 한국 첫 미술관 전시가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열린다니 놀랄 만했다.
헤레디움과는 별도로 CNCITY에너지 본사에서도 항상 미술 전시가 열린다. 사옥에서 이경미 작가 설치작품 앞에 선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시가 열리는 ‘헤레디움’(관장 함선재)이란 곳도 관심을 끌었다. 헤레디움은 1922년에 지어진 구(舊)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복원한 건물에 새로 조성된 복합문화공간. 2004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물은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뀐 끝에 2020년 대전시의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CNCITY에너지가 인수했다고 했다.
가장 궁금증을 자아낸 것은 이 옛 건물에 새 숨결을 불어넣은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63·CNCITY마음에너지재단 이사장)이었다. 24년간 검찰에서 검사로 일하고 10년 전부터 이 기업을 이끌어왔다.
대전의 ‘헤레디움’과 ‘안젤름 키퍼’ 전시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지만, 취재해 보니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 뒤엔 황 회장의 검사 시절부터 시작돼 차곡차곡 쌓인 역사가 있었다. 검사 시절에 직업적 호기심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회사를 경영하며 본격적으로 미술 작품을 수집해 왔다.
황 회장은 민간 사업자로서는 최초로 대한도시가스를 설립해 국내 도시가스 업계 발전에 기여한 고(故) 황순필 회장의 장남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1년 서울지검 검사로 시작해 2014년 인천지검 부천지청장으로 퇴임했다. 그는 왜 굳이 일제강점기 건물을 인수해 이곳을 전시·클래식 공연 공간으로 바꾼 것일까. 헤레디움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황 회장을 CNCITY에너지 대전 사옥과 헤레디움에서 만났다.
헤레디움에서 전시장에 선 황인규 회장. 레이코 이케무라 전시는 8월 4일까지 열린다. 사진 헤레디움
대전 헤레디움에서 열리고 있는 레이코 이케무라 개인전 전시장 전경. 사진 헤레디움
본래 미술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큰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어요. 예전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었어요. 1960년대에 러시아 니키타 후르쇼프 공산당 서기장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는 데 합의 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술관에 함께 가서 의견이 일치했대요. 두 사람 모두 현대미술 작품을 보고 ‘도대체 이게 예술이냐’고 했다는 거죠(웃음). 저는 그런 농담을 더 즐기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바뀌는 데 계기가 있었습니다.
검사로 일하실 때 일인가요.
네. 2005년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파견 근무를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시간의 여유가 생겼죠.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 주변을 좀 돌아보게 되잖아요. 마침 그 시기에 박수근 화백 위작 사건이 터집니다. 그때 불현듯 ‘이제는 검사가 그림도 좀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그때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가나아트 포럼이라는 게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고요. 미술을 주제로 한 강연 프로그램인데, 당시 광화문으로 출근하던 때라 강의가 있는 날엔 아침에 그걸 듣고 출근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거죠.
강좌는 어땠나요.
우연히 첫 강의가 박수근 화백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뭐랄까, 모르던 것을 알게 되니 머리도 시원해지는 느낌이고. ‘아, 미술 작품이 이런 거구나’ 했죠.
예를 들면, 전엔 그림을 보면 ‘이게 박수근 그림이구나’ 하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그런 그림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작품에 당시 피폐해진 시대상과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박수근 그림을 자세히 보면 화면에 젊은 남자는 하나도 없잖아요. 여자와 남자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만 많이 보여요. 모든 나무엔 잎사귀가 없고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피하고 있고. 그의 그림에 6·25 이후 1950~60년대 시대 풍경이, 그리고 그때 정서가 담겨 있는 거죠. 그 정서를 아는 사람들이 나중에 돈 벌어서 그의 그림을 많이 산 거고요. 미술에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마음에 드는 것을 직접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첫 컬렉션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전부터 첫 작품이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회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친한 갤러리 대표께 좋은 작품이 나오면 알려 달라고 부탁해 뒀는데, 어느 날 그분한테 연락이 왔죠. 가보니 거기 그림 두 점이 딱 놓여 있더라고요. 둘 다 김환기 그림이어서 놀라고, 두 작품이 가격 차가 상당히 커서 한 번 더 놀랐죠.
그중에서 작품을 고르셨나요.
문제는 한눈에 봐도 좋아 보이는 게 가격이 훨씬 높다는 거였죠. 그때 제가 깨달은 게 있어요. 그림은 같이 놓고 비교해 보면 더 잘 알게 된다!(웃음). 보통 크기에 따라 호당 얼마다, 식으로 가격을 따지잖아요. 정말 좋은 작품은 크기가 중요하지 않아요. 무리는 했지만, 결국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결정했죠. 그래서 제 컬렉션 1호가 김환기 선생님 그림입니다. 2006년 일이에요.
첫 컬렉션이 김환기 작품이라니요.
무슨 뜻인지 압니다(웃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그래도 ‘이 작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컸어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때 제 생각은 그랬어요. 컬렉션은 이것으로 끝낸다!
한 작품으로 수집을 마치려고 하셨군요.
네. 정말이에요. 실제로 그다음에는 컬렉션이 없었어요. 아니, 나중에 딱 한 점 더 있었네요. 그건 이대원(1921~2005) 선생님 그림입니다. 실제로 거의 10년 동안 이 두 점만 가지고 있었어요.
‘농원’ 그림으로 유명한 이대원은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황 회장이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니, 그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이 화백은 대학 졸업 후 심산 노수현에게 사군자를 배우며 미술에 입문해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이뤘다. 1967~86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 1972~74년 홍익대 초대 미술대학장, 1980~82년 홍익대 총장을 역임했다.
“내 컬렉션? 꾸준하게 방황했다”
대전 CNCITY에너지 본사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 앞에 앉은 황인규 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CICITY에너지 사옥 곳곳에서도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왼쪽에 이경미 작가의 회화가 보이고 정면 끝으로 코헤이 나와의 설치 작품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레이코 이케무라 작가의 작품. 현재 헤레디움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황 회장은 선친이 이끌던 기업을 2014년부터 이끌며 컬렉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주로 미술 경매를 통해 블루칩 작품을 샀다. 주변의 미술 애호가들과 모여 함께 미술 시장 관련 공부도 했다.
“지인들과 함께 공부 삼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도 처음 가봤어요. 그때 비로소 미술의 세계가 정말 넓고 작품이 다채롭다는 것을 알게 됐죠. 작가도 다양하고, 사람들 취향도 각각 너무 다르고요.”
그는 이어 “작품을 볼수록 구상보다 추상 그림이 더 좋아졌고, 그림이 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본인 컬렉션을 짧게 표현하신다면요.
제 컬렉션은 한 단어로 ‘방황’이에요(웃음). 처음부터 어떤 길을 잡아서 간 게 아니라 새로운 걸 만나면 그 길로 가보고, 나중에 또 다른 길을 접하면 거기에 빠지고. 돌아보니 정말 꾸준하게 방황했어요.
방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게 진짜 새로운 것이 계속 나오거든요. 새로운 작가가 나오고, 옛 작가의 새 작품을 보게 되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 세계에선 새로운 것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가격 오를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
대전 헤레디움 전시장 1층 계단 앞에 서 있는 CNCITY에너지 황인규 회장.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소장품을 내놓으신 적도 있으세요?
두 번 정도 해봤는데,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사람들은 미술품을 쉽게 사고파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는 것보다 파는 게 훨씬 더 어렵죠.
그리고 세컨더리 마켓(2차 시장)을 보면 그림 값이 뛸 때 비로소 좋은 작품들이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만약 좋은 것을 사고 싶으면 이때 사야 해요. 전보다 가격이 올랐다고 해서 ‘왜 이렇게 올랐어?’ 할 게 아니라, 작품이 좋으면 그때라도 사야 하죠. 좋은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그 가치를 인정받으니까요.
투자 개념으로 수집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 가격은 그렇게 기대하는 만큼 단기간에 오르지 않아요. 설령 가격이 올라도 물가상승률이나 수수료 등을 고려하면 이익 남기기가 어렵고요. 그래서 컬렉션을 한다면 오래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정말로 내가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 경제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에서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컬렉션 작품은 지금도 소장하고 계세요?
물론이죠. 저뿐만 아니라 아내도 함께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김환기 화백 작품이 좋아서 이후에 다른 작품도 더 들였습니다.
헤레디움, 100년 후를 생각했다
지난해 안젤름 키퍼 개인전이 열릴 때 헤레디움 전시장에 선 황인규 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헤레디움에서 열린 독일 예술가 안젤름 키퍼 전시장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00년 된 건물에 헤레디움을 개관했습니다. 굳이 옛 건물을 택한 이유는요.
우리 회사가 대전 지역 기반이니 대전에 기여하고, 이왕이면 도시의 역사가 담긴 공간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전은 도시로서의 역사가 120년이 채 안 돼요. 우리나라 여러 도시 중 신생 도시죠.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깔면서 만주와 일본 사이에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할 곳으로 이곳을 정하면서 발전했거든요. 그때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 많았는데 6·25 때 폭격으로 많이 소실되고 남은 게 몇 개 안 됩니다.
황 회장은 “검사들은 지역 근무 경험이 많아 국내 각 도시에 관해 비교하며 얘기할 기회가 특히 많았다”며 “지역 고유의 특색을 살리는 게 도시 발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그에게 오래된 건물은 단지 낡은 건물이 아니라 역사가 스며 있고, 도시의 새로운 이야기와 미래를 새로 채울 그릇이었다.
하지만 복원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으셨다고요.
그렇죠. 다른 역사가 아니라 우리에겐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니까요. 이것을 복원하는 게 맞을까? 과연 잘하는 것일까? 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죠. 솔직히 현재 사회 인식으로는 제가 욕먹을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민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00년 후에도 사람들이 그렇게(부정적으로) 생각할까’ 하는 질문이었어요.
미래 세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은 사실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당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전해 봐도 좋겠더라고요.
기업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문화 예술을 택하셨습니다.
문화야말로 미래에 기여할 여지가 많으니까요. 제가 서산지청장으로 근무할 때 연탄 배달 봉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보니 연탄을 배달해 주러 가보니 거기에 연탄은 이미 많이 쌓여 있더라고요. 이웃의 기초 생활을 돕는 것은 국가나 지자체 사업으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좀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는 게 낫겠다 했죠. 우리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 그게 미술과 클래식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황 회장은 “예술은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에서 나온다”며 “예술 안에 미래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학 발전도, 사회 변화도 상상력과 연결돼 있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줄 다양한 문화적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그에게 헤레디움은 100년 후 미래 동력을 만들어내는 발전소의 의미란 얘기로 들렸다.
헤레디움은 키퍼 전시를 통해 존재감을 널리 알린 데 이어 지난 4월부터는 현재 독일을 기반으로 작업하고 있는 일본 출신의 작가 레이코 이케무라 개인전(8월 4일까지)을 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에서 열리는 일본 태생 작가의 전시이지만, 황 회장은 이번에도 미래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에 무게를 두고 전시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개막 당시 한국을 찾은 이케무라는 “이곳의 역사를 전해 들어 알고 있다. 과거의 뼈아픈 이야기가 있지만, 오히려 역사를 딛고 문화로 미래를 풍성하게 만들겠다는 황 회장의 비전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다채로운 경험이 취향을 발견하게 하고 취향이 발전하면 안목이 된다”면서 “대상의 가치를 알아보는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그게 안목이다. 이곳이 먼저 대전 시민에게 사랑받는 곳이 되고, 미래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CNCITY에너지 황인규 회장의 컬렉션 6
김환기, Untitled, 연도 미상, oil on canvas, 51.5x41cm
사진 헤레디움
황인규 회장의 첫 컬렉션 작품이다. 김환기는 항아리, 매화, 새, 산월 등의 소재를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에선 그의 작업 세계가 이미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며 변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 첫 컬렉션 작품입니다. 18년 전부터 지금까지 저와 아내가 함께 좋아해서 우리 부부가 가장 아끼는 작품 1호죠.
미술 작품을 많이 접할수록 저는 구상 회화에서 추상 회화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울어 가더군요. 한국 예술가 중에서 수화 선생이야말로 구상에서 추상으로 뚜렷하게 변화해 가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대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안젤름 키퍼, 가을 정원의 낙엽(Die Blätter fallen, fallen wie von weit, als welkten in den ferne Himmelm Gärten), 1995/2021.
캔버스에 오일, 납과 숯 등, 185 x 380 cm.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헤레디움에서 지난해 9월 3일부터 지난 1월 31일까지 열린 전시 ‘안젤름 키퍼:Herbst(가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늦가을의 대지를 닮은 대형 캔버스 표면 가운데 낙엽 하나가 붙어 있다. 낙엽은 납에 금박을 한 것이다.
한국 전시를 앞두고 촬영한 인터뷰 영상에서 키퍼는 “(‘가을’) 작품들은 볕이 좋았던 어느 가을날 런던 하이드 공원의 풍경에서 시작됐다”며 “가을 낙엽을 비추는 빛과 폭발적으로 강렬한 색감에 압도돼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키퍼 작품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헤레디움에서 키퍼 전시를 열고, 그중 한 작품을 갖게 될 줄은 저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른 작품입니다.
키퍼 전시 ‘가을(Herbst)’은 작가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詩)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로 구성됐죠. 키퍼는 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데, 제 생각엔 키퍼가 시인 같습니다. 작품에 철학적 깊이가 담겨 있고, 표현이 과감하고, 스케일도 압도적이라서 좋습니다.
게오르그 바셀리츠, Remix(windrad), 2006
oil on canvas, 300 x 250 cm. 사진 헤레디움
안젤름 키퍼와 더불어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으로 불리는 게오르그 바셀리츠의 회화다. 바셀리츠는 특히 1969년부터 거꾸로 그려온 그림으로 유명하다. 미술계의 관습에 저항하고 매체에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의 하나로 대상의 윤곽만 그리고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 왔다.
독일 현대미술관 전시에서 바셀리츠의 대작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거꾸로 그린 것만으로 구상이 추상으로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독수리는 고대 로마 시대 이래로 용맹스러움과 권력을 상징하지요. 이 작품의 화면엔 독수리 네 마리가 상하좌우로 배치되어 있는데, 처음 이 그림을 본 순간 아무리 강한 권력이라도 상승과 하락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은 거꾸로 놓아도 옆으로 눕혀도 바로 놓아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 바셀리츠의 여느 거꾸로 그린 그림과 달라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레이코 이케무라, Baby Hare(아기 토끼), 2002/15.
브론즈에 페인트, 36x19x19cm. 현재 헤레디움에서 열리는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사진 헤레디움
토끼의 귀를 한 사람이 기도를 올리듯 합장하고 있는 형상이다. 4월 3일부터 헤레디움에서 개인전 ‘수평선 위의 빛’을 열고 있는 레이코 이케무라의 소형 작품. 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에선 같은 형상으로 높이 3.4m로 제작된 ‘토끼 관음’을 볼 수 있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한 이케무라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귀 없이 태어난 토끼들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케무라는 일본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이어 스위스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현재 파리 퐁피두 센터, 스위스 바젤 미술관, 일본 도쿄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이케무라의 전시를 처음 본 것은 2018년 스위스 바젤현대미술관에서 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연약한 토끼가 모든 아픔을 껴안고 그럼에도 위안을 주고자 하는 모습에 마음을 끌렸습니다.
코헤이 나와, Ether#72, 2021
Mixed media. 17.9x17.9x127.3 cm. CNCITY에너지 사옥에 전시돼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본 예술가 코헤이 나와의 작품이다. 나와는 사슴 등 박제된 동물이나 라디오·TV 등 사물을 유리구슬로 뒤덮은 ‘픽셀(PixCell)’ 연작으로 유명하지만, 이것은 액체 방울의 탄성을 시각화한 ‘에테르(Ether)’ 연작 중 하나다. 나와는 지난해 6월, 프랑스 세갱 섬에 높이 25m의 조각 ‘에테르’를 영구 설치했다.
나와는 교토 시립대학에서 미술 조각을 전공했으며 스티로폼, 크리스털 등 독창적 소재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작품은 도쿄현대미술관, 모리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물방울이 호수에 들어가기 위해 처음에는 일부가 튕겨 나간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나요? 세상에 모든 것이 변화의 처음에는 무언가가 튕겨 나갔다가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자연적 현상을 표현해서 그런지 이 작품은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Pictures at an Exhibition, 2018
Photographic drawing printed on paper, mounted on Dibond, 83 x 266 cm.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벽면에 멀티 캔버스로 이뤄진 네 점의 풍경화 앞에서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각도, 다른 시간에 촬영된 수백 장의 사진을 디지털 작업으로 결합해 만든 이 작품은 한순간의 광경으로 고정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함축해 보여준다.
호크니는 누구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지요. 화면 안에 보이는 그가 9개의 캔버스로 그리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네 점이 걸려 있습니다. 제가 다 소장하기 어려운 호크니의 여러 작품이 한 작품 안에 함께 들어 있는 사진 작품이라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이 사진 작품으로 마치 그의 대표작 네 점을 함께 소장한 기분이 듭니다.
황인규 회장이 주목한 한국 작가, 이경미
CNCITY에너지 사옥에서 이경미 작가의 작품 앞에 선 황인규 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은 헤레디움 개관 전, 대전 소제동에서 미술품 전시를 두 차례 기획해 열었다. 당시 전시를 통해 이경미 작가를 알게 된 황 회장은 대전 CNCITY에너지 사옥에서 이경미 작가의 전시(2023년 4월 17일~2024년 1월 31일)를 열었으며, 이 작가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Rainbow and One Day At A Time on the Table 2022 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105x105 x11cm. 사진 헤레디움
이경미, The Planet-Dive to the Core28x72cm x 4planel.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황 회장은 “이 작가는 반려 고양이 나나를 소재로 다수의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었다”며 “어느 날 이 고양이를 우주묘로 만들어 태양계 밖으로 보내 나나가 우주에서 실종된 이야기로 미디어 아트 작품도 제작하고, NFT 작품으로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황 회장은 이어 “우주가 미지의 세계 아닌가. 과거에 대항해 시대가 있었다면 우리에게 남은 도전은 우주 탐험이다. 작가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런 이야기를 과감하게 작품에 녹이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1977년생인 이경미는 홍익대 판화과와 회화과를 졸업하고, 2006년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10여 년간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고양이 나나가 등장하는 ‘스트리트(Street)’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그는 2023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요한의 묵시록’을 모티브로 한 ‘뉴 버티컬 페인팅’ 시리즈를 선보였다. ‘뉴 버티컬 페인팅’이란 고전 회화를 바탕으로 잡지 또는 만화 캐릭터 이미지, 타이포그래피 등 시대별 다양한 예술 양식을 겹치며 전통과 현대의 요소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말한다.
2019년 제24회 석주미술상을 받았으며, 국립현대미술관과 경기문화재단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은 헤레디움뿐만 아니라 대전 중촌동 사옥에서도 미술 전시를 열고 있다. 헤레디움이 국내에 덜 알려진 해외 거장 또는 중견 작가들을 소개한다면, 사옥에서는 국내 젊은 작가들을 소개한다. 지난해 이경미 개인전을 열었고, 현재는 꽃을 모티프로 채색화를 그려온 화가 안진의 개인전 ‘인터스텔라 인터플라워’를 열고 있다. 전시는 1, 2층 총 7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헤레디움(HEREDIUM)’은 어떤 곳?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회사 대전 지점 건물에 조성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 사진 헤레디움
지난해 헤레디움에서 열린 안젤름 키퍼 개인전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관람객.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8월 4일까지 대전 헤레디움에서 열리는 레이코 이케무라 전시. 사진 헤레디움
1922년 대전시 인동 지역에 지어진 구(舊) 동양척식회사 대전 지점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당시 9개 지역 지점으로 운영되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현재 부산, 목포, 대전 지점 등 세 곳만 남아 있다.
해방 이후 대전 체신청과 대전 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다 1984년 민간에 매각돼 상업 시설로 사용됐다. 이를 2018년 창립된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인수해 2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보수·복원 작업을 통해 2022년 12월 문화복합기관으로 재탄생시켰다.
건물을 인수하고 복원하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다.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근대건축 전문가인 이상희 목원대 교수에게 연구를 의뢰했고, 고증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했다. 복원 과정에서 세운 원칙도 있었다.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에는 최대한 본래의 모습을 되살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현대적으로 창조한다는 것. 다행히 타일 가게로 사용됐던 건물에 붙어 있던 타일을 뜯어냈을 때 그동안 감춰져 있던 지붕 천장과 유리창 등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 1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헤레디움(HEREDIUM)’은 라틴어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이다. 역사적 가치가 숨 쉬는 공간에서 문화 예술을 통해 새로운 미래 유산을 만들어가겠다는 비전을 담았다. 현재 이곳에선 클래식 음악 공연과 미술품 전시 등의 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헤레디움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황 회장은 “처음엔 청년들의 다양한 예술 작업이 일어나는 곳으로 하려 했다. 마음과 마음의 공간이란 뜻에서 ‘심심 공간’이라고 이름도 짓고. 로고까지 다 만들었는데 반대에 부닥쳐 처음부터 콘셉트를 다시 고민했다.
이곳의 미술품 전시는 파리 1대학 소르본에서 미학(석사)을 전공한 함선재 관장이 총괄한다. 함 관장은 “헤레디움은 대전역에서 가깝다”며 “주말에 전시회를 보러 대전을 찾을 수 있도록 헤레디움만의 색깔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에디터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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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