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金春洙,1922.11.25.-2004.11.29), 호: 대여(大餘)

#[작가소개]
김춘수(金春洙,1922~2004). 경남 충무 출생. 경기고 졸업하고 니혼(日本)대 예술과 수학.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가 간행한 <날개>지에 <애가>를 발표하고
<온실>.<죽순>(1948),<산악>.<백민>(1949)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우리 시사에서는 보기 드문 인식론적, 철학적 시인으로서 대상의 본질에 대한 추구를 관념이 아닌 이미지로 포착해냈다.
시집으로는 <구름과 장미>(1948), <늪>(1950), <기>(1951),
<제일시집>(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기타>(1969),
<처용단장>(1970)등이 있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년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초기 경향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영향을 받았으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 성격의 시를 써왔다. 그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도 일컬어진다.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과 1959년 자유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문화훈장(은관) 등을 수상하였다
# 김춘수 詩 1.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 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2. -꽃을 위한 서시(序詩)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3.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4. <능금>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5.<처용단장(處容斷章)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한국의 시인 김춘수
1. 시적 순수성의 옹호
김춘수 시인은 가장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불행한 시인이다. 일견 볕 잘 드는 방에서 언어와 놀이에 빠져 자기 유희에만 열중한 시인의 뒷잔등을 먼저 보게 되는 듯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그가 방 밖 세계에 대한 예민한 시선과 자신의 자유 의지 사이에서 긴장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의 삶과 시적 편력은 매우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하지만 그의 시에 드리워진 시인의 생애는 마치 추상적 편린과도 같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시에서 생의 기미를 읽으려는 그런 독법 자체가 가장 무효화되는 시인이 바로 김춘수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시인은 고집스럽게 견지해 온 자신의 시세계가 딛고 있는 자신의 삶과 시에 대해 오해와 편견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해 시키려 해 왔다.
그는 1922. 11. 25. 경남 통영의 부유한'수재집안"에서 태어났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 동경의 예술대학 창작과에 입학했다. 1942년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퇴학당하고 6개월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통영중학과 마산중.고교 교사를 거쳐(1946-1952) 해인대학과 경북대,영남대 교수를 지냈으며(1960-1981),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이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시작 활동으로는 1945년 '통영문화협회(유치환,윤이상,전혁림,김상옥 등)를 결성하면서 문화 계몽 운동을 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동인지 『로만파』(조향, 김수돈,1946),『시연구』(유치환,김현승,송욱,고석규,1956)를 발간한 바 있다. 시인은 초기에는 유치환,서정주,청록파의 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30세가 넘어 비로소 자신의 시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시쓰기와 관련된 몇개의 삽화들이 있다. 통영바다와 더불어 성장한 유년기의 기억, 유치원 선교사를 통해 경험한 이국풍의 세계,일본인 담임 교사와의 마찰 및 자퇴,일본 유학 시절 만난 릴케시집,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데 강한 영향을 준 일본인 시인 교수,사상 혐의로 투옥되어 고운을 당한 일 등이다. 생애의 이런 경험들 가운데 유년과 청년 시절에 겪은 두 경험은 김춘수의 시쓰기와 매우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시를 평가하는 태도는 시 혹은 예술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그는 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발시키고 문학과 삶에 관해 예민한 문제 제기를 하면서 그에 대한 반향과 반감,지향과 지양을 동시에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한 시기는 한국문학에서 모더니즘 시학과 민중문학이 본격화되면서 강하게 양립하던 와중어었기에 논의와 평가는 더욱 쟁점화하였다.
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평형의 힘을 견지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무의미시와 시론은 시적 성취와 획기적인 이론으로 시사적 의의를 크게 부여받은 한편 일부 독자와 연구자들에게는 공감을 얻지 못해 왔던 것도 사실이지만, 모더니즘 미학과 독자적인 현대성에 근거한 시학으로 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한 단계 끌어올린 매혹적인 시와 시론이었음도 사실이다.
시인은 춤의 언어와 보행의 언어 사이에서 단연 춤의 언어에 몰두한 시인이다. 시는 언어의 기호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세계일 뿐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는 의도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시인은 이를 '꽃'에 비유하여 얘기한 바 있다. 우리가 시에서 꽃을 말할 때 그것은 잎과 줄기와 꽃잎과 뿌리를 가진 하나의 생물학적 식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는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세계, 즉 하나의 이데아를 지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사물을 지칭한다기 보다 오히려 그 상투성과 낡음 때문에 사물을 왜곡하거나 사물의 본질을 사라지게 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시는 언어 밖의 세계를 지칭하는 공리적인 언어들의 조직이 아니라 '말의 긴장된 장난'이자 정신적 유희의 산물이라는 의지이다.
시인은'크래프트','트릭','메이크업' 등 기존의 한국시론에서는 다소 낯선 표현들을 즐겨쓰며 이 같은 자신의 시외 시론을 구축해 왔다. 그의 시적 태도는 미학적 예술의 첨병인 반면 문학과 삶은 동궤라는 입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과 실천의 맥락을 담지 않는 시, 일견 진공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절대언어, 시의 순수성을 옹호했다. 그래서 '시는 언어의 예술, 그 이상의 무엇도 담을 수 없다'는 확고한 인식을 지닌 김춘수의 시는 의미에서는 해방되었을지라도 무의미에 유폐되었고, 미학적 예술론을 표명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치달은 실험에 갇힌 격이 되었다.
그는 언어 유희를 견인한 시인이지만 기교와 실험에 빠진 수인이기도 한, 양가적 위상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의미와 무의미를 선회하는 시 세계
열다섯 권에 이르는 시집에는 머무르지 않는 정신 편력과 거듭되는 회의 정신이 잘 드러난다. 시의 궤적은 의미에서 무의미로 그리고 다시 의미로 선회하는 노정이라고 약술할 수 있다.'왜 지금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시인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독백은 자의식의 환기이자 시적 미로를 향한 그이 부단한 모색과 탐색을 잘 드러낸다.
1)의미에서 무의미로
김춘수 시인이 처음 시를 쓰게 된 계기를 릴케와의 조우이다. 시인은 시적 혜안을 열어 준 존재로 릴케를 꼽는데 이 운명적인 계기가 종국에 그의 시적 방향을 계시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시라는 것을 릴케 시의 '햇살,꽃눈보라, 기도, 날개, 꽃피어 있는 영혼' 등의 표현들로 각인하고 이런 언어에 매혹되어 시쓰기로 들어선다.
그의 초기 시는 이런 인식의 세례 아래 쓰여진 다소 감수성 짙은 시들이 주조를 이룬다. 이후 시인인 '비로소 나만의 시를 쓰게 되었다'고 기억하는 꽃에 관한 일련의 시들은 이른바 대표작이다. 김춘수 만큼 '꽃'이라는 대상에 관념의 무게를 얹은 시인이 드물 정도로 의미가 과부하된 시들이다.
꽃이라는 존재가 인격화되고 극대화된 이 시들은 인식론적 깊이, 존재론적 탐구, 이데아의 세계관으로 해석되는 관념과 비의의 시 세계이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간다. - 「꽃2」중에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꽃을 위한 서시」중에서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 「꽃의 소묘」중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중에서
꽃은 제 존재만으로 충만하고 아름다우며, 실존하는 모든 가치 있는 존재들을 상징한다. 그러면서도 꽃은 소용되는 쓰임새는 없는 무용지용한 존재라는 점에서 시 혹은 예술과 닮았다. 이 시들에서 시인은 꽃이 지녀온 관습적인 언어의 질감을 지우고 관념화된 꽃을 통해 존재의 현현과 실존의 체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이후 시인은 시의 가장 기본적인 질료인 언어의 문제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데, 현재의 언어로는 사물의 절대성과 본질적 의미에 가 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다다른다.
언어의 낡아버린 옷과 상투성으로는 대상의 본질 혹은 순수에 절대적으로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새로운 '기교'로 나아가는데 이것이 묘사주의 이다. 시인은 대상을 의미에 종속시키거나 도구화하지 않으며 시인의 주관적인 의미를 거두어 나가는 방식으로 사물을 극대화하는 묘사주의를 지향한다.
언어를 도구삼아 시인의 감정이나 관념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주관적인 의미나 습관화된 판단을 중지해 대상의 묘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시 밖의 맥락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시 안의 세계만으로 자족적인 세계, 이것이 바로 김춘수 시의 순수성이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인동잎」전문
씨암탉은 씨암탉, 울지 않는다. 네잎토끼풀 없고 바람만 분다.
바람아 불어라,서귀포의 바람아, 봄 서귀포에서 이세상의 제일 큰 쇠불알을 흔들어라 바람아, - 「이중섭1」전문
김춘수의 많은 시들은 그 일상적 맥락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불연속적 이미지의 병치,절제된 표현과 정제된 언어로 이룬 언어의 금욕주의, 너무 많은 공정을 거쳐 깎아지른 듯한 언어, 심상이나 비유에서 환기되는 비일일상적인 정경들이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언어로부터 의미를 거두어 내고 그리하여 삶과 일상,현실과 역사를 거세해 내려는 시인의 의지가 단계적으로 전개되어 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타령조 연작과 이중섭 연작은 그의 시가 극단적인 무의미 시로 막 진입하려는 지점에 씌어진 시들이다. 이 시들에는 육체성이 두르러지는데 그간 시인이 벗어버리지 못한 순결 콤플렉스가 다소 극복되는 양상이 엿보인다. 감상과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거세해 온 그의 무의미 시는 좀더 실험적인 단계로 들어선다.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 여자가 앗아가고 남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여자를 돌려주고 남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돌려다오.
-「처용단장 2-1」중에서
언어의 의미란 본디 끝없이 차연되고 미끄러지는 것이기에 기표가 실로 더 우세하며, 의미는 없으되 음악이나 주문 같은 원초적인 생명력을 지닌 언어만이 완벽하게 순수한 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의 계기성없는 소리의 반복과 리듬의 환기, 또 심리적 박동의 고조만으로 구체적인 현존을 느끼게하며,쓸모와 도구성을 내던져 버린 언어의 몸짓으로 현기증 나는 긴장 상태와 열락을 이루는 것, 이것이 무의미의 절정이라 확신한다.
시인은 이 시들을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 악보같은 시, 추상화 같은 시로 완성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트릭의 정점인 동시에 한계와 맞닥뜨린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몰아 간 무의미 시에서 숨이 차오르는 힘겨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음절도 해체하고 문법마저 깨뜨린 무정부주의적 언어의 세계에서 시인은 또 다른 한계를 느낀다.
줄글로띄어쓰기와구두점을무시하고동사를명사보다앞에놓고잭슨플록을 앞질러포스트모더니즘으로존케이시를앞질러소리내지않는악기처럼미국의 한병사가갖다준내쓸개한쪽서럽고도서럽던
-「처용단장 3-28」중에서
ㅜㅉ ㅣ ㅅ ㅏ ㄹ ㄲ ㅗ ㅂ ㅏ ㅂ ㅗ ㅑ ㅣ 바보야, 역사가 ㅕ ㄱ ㅅ ㅏ ㄱ ㅏ 하면서 ㅣ ㅂ ㅏ ㅂ ㅗ ㅑ
- 「처용단장 3-39」중에서
통사적 질서를 와해해 정연한 문장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시인의 심리적 억압과 고통의 자취를 드러낸 시들이다. 의미의 세계보다 소리의 세계를 더 믿는 시인의 태도는 여전하지만, 시를 통해 의미의 본질을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만큼, 언어를 통해 무의미를 실현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임을 자인하게 된다.
'무의미 시를 30년이나 고집해 왔지만 결국 이처럼 허사였다'는 시인의 고백에 이르러 마침내 의의와 한계에 동시에 다다른 격이 되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세운 의미의 거세에서 놓여나 시인은 자기 시를 패러디하거나 의미의 음영을 드리우는 방식으로 시세계를 선회해 나간다.
시인이 무의미 시를 회의하게 된 것은 탈수된 언어와 소리의 소용돌이가 공소하게 느껴진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은 시인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이상 사실 완벽하게 도피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 또한 부정하고 배제한다고 해서 비워 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관념이나 의미의 부재는 이미 또 다른 관념이나 의미를 배태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2)무의미에서 의미로
무의미 시는 부단히 실험적인 시도 끝에 이루어 낸 절대 언어의 세계였지만 어느 사이 의미를 끝내 버리지 못한 앙상한 골격의 언어들로 남게 되었다. 시인은 자기 모순을 거치고 또다시 언어에 길항하면서 무의미의 세계로부터 의미의 세계로 선회한다. 긴장된 끈을 놓고 의미 혹은 관념을 노출하게 되는데, 의미의 질곡을 다스리는 것만큼이나 의미를 놓아 버린 언어의 자유를 다스리는 일 또한 지난한 것을 아는 그는 설명적 해석이나 감상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인간과 역사, 인간과 세계의 갈등에 대한 촉수만큼은 날을 세우고 있다.
의식도 영혼도 다 비우고 나는 돼지가 될 수 있다. 밥 달라고 꿀꿀거리며 간들간들 나는 꼬리를 칠 수도 있다.
성서에 적힌 그대로 무리를 이끌고 나는 바다로 몸 던질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죽음을 이길 수 잇따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내 눈에는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데,썰렁하구나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1872년 3월 1일
-「사족」전문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내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
- 산보길」전문
시인은 여전히 역사에서 악의 의지를 먼저 읽고 개인과 역사 간의 갈등에 고민한다. 그러나 한결 느려진 박동수로 완급을 조절해 가며 산문의어법으로 삶의 풍경과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다. 시인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들려' 있는 이유는 그의 주인공들이 인간의 죄의식과 갈등을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인물들에게 자신의 삶의 역정을 투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체험이 상기될 때마다 자존을 버리지 못해 평생을 괴로워했던 시인은 이제 '밥 달라고 꿀꿀거리는 돼지가 되어 간들간들 꼬리를 칠 수도 있겠다고 말하며,안쓰러운 내 그림자를 '혼신의 힘을 다해'받쳐 주는 '늦여름 지는 해'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얻는다.
나의 시를 고급장식품이라고 누가 말했다고 한다. 잘한 말이다. 오스카와이드는 장식품을 <어떠한 의미에 의하여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했느데 그렇다. 의롱에 앉은 백동나비는 술어가 없다. 하늘에 뜬 해와 달이 그렇듯 나의 시는<어떠한 의미에 의하여도 손상되지 않는다>섭씨 39도에도 나의 시는 옷깃을 여민다. -「바꿈노래-나의시」전문
3할은 알아듣게 아니 7할은 알아듣게 그렇게 말을 해가다가 어딘가 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 살짝 묶어두게
살짝이란 말 알지 펠레가 하는 몸짓 있잖아 뒤꼭지에도 눈이 있는 듯 귀뚜라미 수염같은
그리고 절대로 잊지말 것 넌 지금 거울 앞에 있다는 인식 거울이 널 보고 있다는 그인식 -「시인」중에서
이는 무의미에서 의미로 선회한 김춘수의 인식을 잘 드러내는 메타적 성격의 최근 시들이다. 그의 시를 두고 '고급장식품'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어쩌면 비난 섞인 평가였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어떤의미에 의해서도 손상되지 않는다'는 가치 때문에 그 평가를 선뜻 받아들인다. 의미의 세계로 선회했을 지라도 그 의미 때문에 자신의 시가 손상되는 것은 여전히 거부하는 의지이다.
옷장의 나비 장식이나 하늘의 해와 달처럼 그의 시는 존재하는 는것 자체로도 의미를 지니는 '고급장식품' 같은 언어로 남길 희구한다. 시인의 꼿꼿함은 섭씨 39도의 더위에도 '옷깃을 여미는 자세로 다시 강조된다. 이전의 무의미시가 3할은 알아듣게 말하는 시였다면 이제 그의 시는 7할은 알아듣게 말하는 시,그러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어딘가 살짝 묶어두어 끝내 다 풀어 내려 놓지는 않는 시이다. 이 시에 이르면 시인의 자의식이 마치 맨 처음 시를 쓰던 무렵과 겹쳐지는 듯하다.
의자를 응시하고 딸기를 바라보고 꽃을 인식하고 온몸이 눈인 천사에 눈부셔하던 그때처럼, 시인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의 모습을 보면서 거울 또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시선의 응시를 그대로 기억하고 또 체현한다.
3. 절대시, 신기루와 인공 낙원 사이
고도로 세련되었다는 말에는 벌써 '인간적으로 훈훈한'의 의미는 거세되어 있다. 김춘수의 시가 그러하다. 시를 읽는 독법은 여느시를 읽는 독법과는 다르다. 정서를 넣어 읽기도 삶을 넣어 읽기도 쉽지 않다. 암호를 풀거나 퍼즐을 맞추듯 읽어야 하는 시도 있다.
너무 많은 생략과 돌연한 시구에 한참을 주저하게 되기도 한다. 시인이 모차르트 음악을 두고 모차르트 음악은 너무나 음악적이다 라고 하듯이 김춘수의 시는 너무나 시적 이기 때문이다. 그는 장인으로서의 시인이고 무위의 시인이고자 하지 성인으로서의 시인이길 원하지 않았다.
진정한 시는 시인 자신의 인간성을 드러내거나 감정을 전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 삶의 역력한 자취를 지워내고 잘 만드는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시인은 적극적인 고립과 소외를 감당하면서도 여느 차원과는 다른 시를 지향해 왔으며, 현실을 당위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공리적인 효용성을 갖지 않는 절대 언어의 시, 무용지용의 시 세계를 추구해 왔다.
고군분투하여 이루어 온 김춘수의 절대 언어와 무의미 시는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신기루와 정신적 유희의 인공낙원 사이에서 위태롭게 존재해 왔다. 낭만적 토로나 인간적 체취를 거부하고 일상적 언어나 감각으로는 잡을 수 없는 그 어떤 '안타까운'것들을 시로 포착하려는 인공낙원의 의지는 바로 그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한다는 이유 때문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이 아닌 언어가 말하는 것이고 시는 인격이 아닌 인식으로 쓰는 것 이라고 주장하며 시의 향유는 삶의 모방이 아니라 춤이나 놀이와 유희정신과 같다는 자신의 시학을 올곧게 지켜왔다. 무용한 시를 통한 무상의 감동, 삶의 구속에서 벗어난 정신적 해방의 유희 공간- 이것이 바로 언어가 이루는 시의 세계라는 것이다.
시인은 무의미와 의미의 세계를 선회하면서 시적 주체로서의 개인의식과 실존을 강조하고 존재론적 문제,내면 탐구, 언어의 딜레마,의미와 무의미의 문제들에 천착해 시를 한층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문학과 삶의 본질적 관계를 재조명하여 삶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삶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 시의 존재 의의를 극대화한 것, 이것이 김춘수 시인이 지닌 시사적 의의이다.
그의 절대적 예술관은 한국시가 지닌 인식의 넓이와 깊이를 더없이 확장시켜지만 역사와 삶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온 한국 시의 현실에서 그의 유희정신은 부침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4. 꽃의 시인 일생 마감
김춘수 시인은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사화집에 시 "애가"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초기의 시경향은 라이너마리어 릴케의 영향을 받았고, 1950년경부터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성격의 시를 써왔다. 그는 사물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고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 일컫어 졌다. 2004년 11월 29일 82세의 나이로 성남시 분당구 삼성 서울병원에서 지병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작고하였다. 영결식은 2004.12.1.10시경 위 서울병원에서 시인 김종길,정진규,조영서, 김종해,심언주,류기봉 제씨 등 생전의 절친한 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인장으로 치러졌다. 시인은 부인 명숙경이 묻혀있는 경기 광주공원묘지에 영면하였다.
5. 주요저서
구름과 장미(1948년)/ 늪(1950)/ 기(1951)/ 인인(隣人)(1953)/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기타(1969)/처용(1974)/김춘수시선(1976)/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김춘수전집(1982)/ 처용이후(1982)/ 김순수시집(1986)/ 꽃을 위한 서시(1987)/ 너를 향하여 나는(1988).
<도서:한국시인론(백년글사랑,2003)>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44> 시인 김춘수
- 신군부에 이용당한 선연했던 '꽃' 3·15 의거 증언… 민정당 발기인 참여 오점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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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는 생전에 부산시절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아픈 기억이 오래 가고 그것은 세월에 바래지면 전설처럼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1954년 무렵 부산대 강사로 출강했다. 이때는 물론 그 특유의 체머리를 떠는 버릇이 살아 있을 때다. 그것이 오래 되다 보니 별로 어색해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부산대에서 '신문학사' '시론' 등의 강좌를 맡아 2, 3년 출강하는 동안 매주 3일 정도는 부산에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부산 시인들과 허물없이 어울릴 수 없었다. 생활근거는 여전히 마산이므로 집을 옮길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강사료 받아 가지고 여관생활을 할 처지도 못 되었다. 후배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지금은 일본에 귀화한 시인 강상구가 있었고 고석규가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통영의 친구 동생인 영화 평론가 허창이 있었다. 고석규나 허창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때 강상구는 대신동 부산대학 곁에 좁고 채광이 잘 안 드는 방을 얻어 놓고 시를 습작하고 있었다. 김춘수를 데려다 이 방에 재워주곤 했다. 허창에겐 서면에 얻어 놓은 다락방에서 잠자리 신세를 졌다. 문학과 영화에 대한 토론이 밤늦게까지 계속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은 김춘수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은 문학 평론가 고석규였다. 좌천동에 있는 부친이 운영한 병원 2층 방이 그의 거실이자 서재였다. 앞의 두 사람의 경우와는 사정이 판이하다. 침상에 잠자리를 제공받을 뿐 아니라 식사 대접까지 받았다. 그러나 김춘수는 오히려 그런 대접 때문에 자주 드나들기가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석규와는 문학과 철학담으로 지새우는 일이 잦았다. 1957년께는 부산대 출강을 그만 두고 해군사관학교의 조교수로 전직한다. 이 무렵에 '시연구' 제1집이 탄생되었다. 그러다 대학에 갓 출강하기 시작한 고석규가 요절하자 부산 더부살이는 끝이 난다. 앞으로 전임될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을 때다.
3·15마산의거가 일어났다. 많은 학생들과 시민이 희생되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순수 국민적 항거 운동인데 당초에는 당국이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몰아가려던 참이었다. 국제신문에는 '신작품' 동인으로 활동한 시인 조영서가 있었다. 김춘수는 마산에 있으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태를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 시를 보낸다고 했다.
이 시가 널리 알려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이다. 마산의거를 다룬 1960년 3월 28일자 2면 중간 박스물로 편집되어 나갔다. 나중에 3·15마산의거 기념시비에 새겨졌다.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 … 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 1960년 3월 15일/ 너는 보았는가 … 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서/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서/ 이었다 끊어졌다 밀물치던 … / 그 아우성의 노도를 …/ 너는 보았는가 … 그들의 애띤 얼굴 모습을/ 뿌린 핏방울은/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3.15 마산사건에 희생된 소년들의 영전에' 전문)
3·15 마산의거의 역사적 의미를 시의 언어로 증언한 용기와 양심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김춘수는 1960년대 경북대 국문과 교수로 옮긴다. 그의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대구시절이 막을 열었다. 그는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이른바 전두환 쿠데타 정권의 발판인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등장한다. 경북대에서 영남대로 옮겨 문과대학장을 맡고 있을 때다. 막 출범한 전두환 정권이 정치적 기반이 될 정당 창당을 서두르면서 이른바 소수 정예 멤버 속에 발기인으로서 명단에 그를 끼워 넣었다.
측근의 말에 따르면 합천 출신의 매일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신부가 거중 역할을 했다. 본인에 대한 직접적 회유로 매듭이 풀리지 않으니까 정치학 교수 출신의 현직 총장을 동원했다. 게다가 사위가 모 은행 지점장으로 있었는데 그에게도 회유책을 강권했다니 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압박을 가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 정당의 전국구 국회비례대표로 선발된다는 전언을 듣고 적어도 그 자리만은 사양하고자 상경 길에 올랐다. 그러나 열차 내의 뉴스는 전국구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려지고 있었다. 한국의 대시인이 졸지에 가장 부도덕한 군사 패거리의 전위부대로 등장한 것이다.
1980년대 초 부산에서 한국시인협회의 모임이 있었다. 태종대 자갈밭 선착장에서 점심시간이 되어 삼삼오오 둘러 앉아 술과 밥을 함께 나눠먹는데 김춘수가 있는 주면만 비어 그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의 추천으로 등단한 양왕용 시인과 필자, 그리고 시인 박재호가 그와 자리를 함께 하여 '면피'를 시킨 기억이 새롭다.
그는 1922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을 중퇴하고 일본 니혼대(日本大) 예술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앞두고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했다는 사상범으로 퇴학당하고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46년 해방 1주년기념 사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함으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 이후 김춘수 전집이 발간되는 등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시를 통해 독자의 사랑을 받아 온 김춘수는 2004년 영욕이 엇갈리는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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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 시'란 무엇인가―김춘수 시인을 애도하며
산수유꽃님, 원로 김춘수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오늘 아침 매스컴을 통해 크게 보도되고 있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향년 82세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고, 생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림과 추앙을 얻었으니 천복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복된 한 생애를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은 그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그가 거의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던 소위 '무의미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무의미 시라고 하면 마치 의미가 없는 시인 것처럼 이해되기 쉬운데 그렇진 않습니다. 그림과 비교하면서 시를 설명하는 다음의 내 글을 우선 읽고 이해해 보도록 하십시다.
무의미(無意味)의 시
세상 만물이 다 그렇지만 시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간다. 신라의 향가와 오늘의 현대시는 그야말로 천양의 차이가 있다. 아니 1920년대의 시와 1930년대의 시가 같지 않다. 동일한 시대에서도 또한 지역에 따라 한결 같지 않다. 동양의 시와 서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서구라도 영국의 시와 독일의 시가 또한 다르다. 같은 종의 생명체도 풍토에 따라서 그 생김새와 성질이 서로 다르듯 시도 그것이 뿌리박고 자라난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며 또한 끊임없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미술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애초 그림은 사물의 모방에서 출발한 것이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실물처럼 그럴 듯하게 그린 그림이 훌륭한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솔거(率居)의 「노송도(老松圖)」가 그렇고, 미켈란젤로나 L.다빈치의 그림들이 또한 그렇다. 그런데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성을 화가의 사생력(寫生力)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감성과 개성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인상파가 등장하고 세잔, 고흐, 고갱 등의 거장들을 낳게 된다. 그 뒤 미술은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하려는 추상화, 평면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입체화, 지상적(地上的) 질서와 일상적(日常的) 논리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 그림 등을 거쳐 드디어는 대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구상화(非具象畵)에 이르게 된다. 비구상화는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그리고 싶은 선을 그리고,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무엇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그렸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비구상화가들은 자기들의 작업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창조라고 말한다.
우리의 시문학도 미술과 비슷한 경로를 밟으면서 발전해 왔다. 이성(理性)이 주도한 고전주의로부터 감성(感性)과 개성(個性)을 존중한 낭만주의,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던 상징주의 등을 거쳐 초현실주의에 이른다. 한 마디로 초현실주의란 심층심리를 대상으로 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뒤엉켜 있는 심층심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똥(A. Breton)은 시 쓰는 방법으로 '자동기술법'을 제시했다. 아무런 구상(構想)과 퇴고(推敲)도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언어로 옮겨 놓는 기법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지상적 논리도 일상적 질서도, 어법도 무시된다.
현대시에서도 미술의 비구상화와 같은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시도 비구상화처럼 대상을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언어 구조를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에서의 선이나 색채와는 달리 시의 매체인 언어는 원초적으로 의미를 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의미를 벗어난 언어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독일의 구체시(具體詩, konkrete poesie)가 시도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얀들(E. Jandle)은 언어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서 알파벳을 무의미하게 흩어놓는다든지, 하나의 동일한 단어만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든지, 의미가 없는 전치사들만을 이어놓는다든지 등등의 실험을 한 바 있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작품에서도 문자를 뒤집어 놓는 등 이와 유사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의 이러한 시도들은 비구상화와 같은 순수한 무의미 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낼 수는 없었다. 여기에 언어 예술의 한계가 있다.
시가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대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대상 깨뜨리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해서 시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이것이 곧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다. 무의미 시의 대부(代父)인 김춘수(金春洙)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연상의 기법을 원용한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늘어놓는데 그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일상적 의미를 형성하려고 하면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처단한다. 다음 「처용단장(處容斷章)」의 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軍艦(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죽은 다음에도 물새는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이 시에 나타난 시간적인 배경은 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 속의 겨울은 눈이 내리는 일상적 겨울이 아니라 비가 오는 겨울로 설정되어 있다. 즉 '겨울+눈'이라는 일상성을 '겨울+비'라는 낯선 정황으로 바꾸어 놓는다. 바다 역시 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물인데 여기서의 바다는 물이 없는 바다다. 즉 일상적 바다에서 물을 제거한 낯선 공간이다. 거기 물 없는 바다에 주저앉은 군함과 죽은 물새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죽은 물새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다시 살리고 있다. 죽음과 삶의 간격을 뭉개버린 즉 생사(生死)가 공존하는 곳이다. 더더욱 기상천외의 구조는 죽은 바다가 한 사나이의 한쪽 손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대상의 파괴와 대상들의 낯선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이 작품 속에서만 존재한다. 순수한 창조적인 세계다. 그러니까 무의미의 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가 아니라 일상적인 논리와 의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다. 시를 무의미한 말놀이로 생각한다.
시는 계속 변모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의 틀을 거부하는 해체시 혹은 포스트모던의 시들이 여러 가지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도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건실하고 긍정적인 것일 때 그것은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요소로 기여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폐습을 조장하는 공해물(公害物)로 남게 되고 만다. ―『엄살의 시학』pp.105-108
진달래님,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의미의 시란 '자유를 추구한 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부터의 자유, 이념으로부터의 자유, 세계로부터의 자유… 내 개인적으로는 '무의미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지나쳐서 '방종'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사물과 세계를 만신창이로 파괴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낯선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자유'는 세계에 대한 부정―곧 허무정신에 닿아 있습니다. 내 개인적인 기호와는 상관없이 김춘수 시인이 시도했던 무의미 시의 작업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시사(詩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무의미 시가 마치 시의 전범(典範)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일입니다. 무의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김춘수 시인만을 맹종한 나머지 그의 시풍을 잘못 모방하는 아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시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써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가 우리 시단에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해체시의 시도는 이상(李箱) 한 사람으로 충분하듯이 무의미 시 역시 김춘수 한 사람만으로 족합니다. 그를 흉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님의 향기님, 누구의 모방이 아닌 자신만의 시풍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운을 빕니다.
<문인오솔길 / 청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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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인생을 통해 터득해 가는 것” |
‘토요 문학이야기’ 마지막 강연 - 김춘수 시인 |
2002-10-28 오후 2:4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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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걱정이 앞섰다. 반(半)백년 교편을 잡았다고는 하나 어느새 팔순을 넘긴 노(老) 시인에게 아무래도 대중 강연은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허나 괜한 걱정이었다. 논리는 간명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변함없는 힘이 느껴졌다.
26일 원주 토지문화관 주최 ‘토요 문학이야기’의 마지막 순서는 시단(詩壇)의 원로 김춘수 시인이 장식했다. 김 시인은 이날 ‘시의 두가지 유형’이라는 주제로 ‘시 읽기’의 방법론을 정돈된 언어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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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토지문화관 주최로 열린 '토요 문학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시의 두가지 유형'이라는 주제로 김춘수 시인의 강연이 열렸다. ⓒ프레시안 |
강연을 통해 김 시인은 소위 ‘민중문학’이라고 하는 참여시 경향과 모든 가치판단을 유보한 이미지즘 계열의 시 경향을 소개했다. 그저 두 가지 흐름을 소개했을 뿐, 어느 편에도 개인적 호불호를 개입시키지 않은 짧은 강연이었으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온 노 시인의 탐구열만큼은 좌중에게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짤막한 강연에 이은 독자들과의 대화. 김 시인이 청중들에게 얘기하고자 했던 바는 그 안에서 더욱 풍성했다. 제도의 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주입식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일선 교사의 고충을 함께 이해했고, 시인으로서의 삶과 현실을 사는 생활인으로서의 자기괴리를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 뒤에 던진 한마디.
“시는 지식이 아닙니다. 인생을 통해 터득해 가는 것이 시입니다.”
실로 모처럼 대중 앞에 선 김 시인의 이날 강연을 소개한다.
시의 두가지 유형
이런 자리는 거북해지기 쉽습니다. 어떤 내용을 어느정도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학교를 선택해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다든가 같은 학생들이라도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얘기하기가 수월합니다. 내용이나 방법을 수월하게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여러 관심을 가지고 있고 여러 직종을 가진 분들이 계신 자리에서는 가늠하기가 거북해서 얘기하기가 조금 어려울 때가 있어요. 오늘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제 나름대로 짐작한 대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여러분들이 알고 왔겠습니다만 얘기할 제목은 ‘시의 두가지 유형’ 입니다. 그런 제목으로 평소 내 생각을 나름대로 가능하면 알기 쉽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러분과 문학과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원주까지 와서 같이 문학을 얘기하게 돼서 대단히 기쁩니다.
2천5백년 전 공자가 엮은 ‘서경’이라는 책에 ‘시는 뜻을 말한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뜻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에 해당하겠지요. 사상을 말한다는 뜻인데요, 사상과 같은 현학적인 말을 피하고 하면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메시지에 해당합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시도 메시지 전달을 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벌써 2천5백년 전 공자가 엮었다고 하는 서경에 나와있다고 합니다. 나는 서경을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일은 있습니다.
이것은 2천5백년 전의 중국에서만 시를 대한 방식이 아니고 서양사람들도 오래전부터 시를 그렇게 대해왔던 것 같아요. 시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써 내려온 시를 보면, 생각을 토로하고 있거나 철학이나 사상을 진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학교에서도 시를 얘기할 때는 어떤 구절을 떼 가지고 이 구절은 어떤 내용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선생이 묻기도 하고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시라고 하면 으레 그런 것으로 서양에서도 생각해 왔고 그렇게 써 온 것 같습니다. 지금도 물론 시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경향이 많이 있죠. 그것이 시의 한 경향이고 유형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간 얘기를 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뜻을 얘기하고 남에게 알릴 적에는 그 속에 은연중에 강요하려는 의지가 깃들여있습니다. 내 생각을 남에게 알림으로서 내 생각에 대해서 공감을 얻고 싶다, 남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싶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생각을 강요하고 동의를 강요하는 뜻이 메시지 전달 속에 은연중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지라고 할 수 없어요. 전달할 때에는 전달하는 내용에 대해서 남의 공감을 얻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얘기를 한다면 남의 생각을 강요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남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남의 생각과 자유를 구속하고 내 생각 쪽으로 남의 생각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학의 유파, 한 경향에 빗대어 얘기한다면 우리식으로는 20년대-30년대의 카프라는 유파와 비슷합니다. 카프는 단체의 약칭인데, 우리말로는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 동맹으로 옮겨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년대 일본에서 생긴 문학단체인 나프 즉, 일본의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동맹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그 문학의 경향은 무산계급의 혁명에 도움이 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이었죠. 나프나 카프 모두 문학적 입지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시로 쓰는 겁니다. 그것의 공감을 얻으려고 했죠. 심지어 이 사람들은 극단적으로는 ‘문학은 선전이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알리고 공감을 얻는 것이라는 말이죠. 문학은 그렇게 돼도 좋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돼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더라도 최근의 문학 중에는 70년대, 80년대, 혹은 군사정권 시절의 민중문학의 성향들이 유행한 일이 있습니다. 민중문학의 이름으로 유행한 것이 대체로 이런 경향입니다.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자기사상을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그래서 남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남의 자유를 구속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질의 문학이 있습니다. 좋은 경우에는 유익하고 훌륭한 사상을 남에게 알린다는 면에서 좋은 일입니다. 인간에게 도움이되는 사상, 생활에 보탬이 되는 사상 말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뒤로 미루더라도 그런 유형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2천5백년 전 서경에 그런 말이 나온다 하니 서경이 나오기 이전부터 그랬다는 말입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학의 한 경향입니다.
“현대, ‘회의의 시대’에 나타난 시 경향
여기에 대비해서 극히 최근에 생긴 문학, 시가 있습니다. 정 반대되는 경향입니다. 이 경향은 그 이전에도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극히 드문 예였고 자각적으로 이런 경향이 생긴 것은 현대에 와서입니다. 20세기, 극히 최근에 일어난 경향의 시입니다. 시에서 생각을 배제하고 메시지를 없애는 경향입니다.
내가 무엇을 말한다는 뜻과 철학, 사상, 메시지를 없앤다는 얘기입니다. 자각적으로 생긴 것은 서양 쪽에서였습니다. 서양에서는 20세기 초기에 이런 경향의 문학을 스스로 이름붙여 이미지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사상파라고 하겠죠.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사물의 모양을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코멘트를 말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현학적인 말을 쓰면 리얼리스틱하다고 볼 수 있죠. 극도의 리얼리즘입니다. 사실을 그대로 옮기는 극도의 리얼리즘입니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가치판단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풀어주고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판단 중지’라는 말을 씁니다. 대단히 회의적이죠. 사물을 회의하고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않습니다.
훗설이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철학하는 방법론을 말했습니다. 훗설의 현상학이라는 철학에서 이런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든 것을 일단 판단하지 말아라 하는 판단 중지상태에 두라고 말이죠. 모든 것을 괄호안에 넣고 예쁘다, 추하다, 아름답다 하는 판단을 보류하라는 얘기입니다. 메시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물의 모양을 자기가 본 각도대로, 자기 개성에 비친대로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문학으로서 이미지즘을 얘기했는데, 이미지즘 계통으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반드시 훗설의 현상학을 염두에 두거나 의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을 하자니 그렇다는 말이죠.
이 계통에 속하는 시인들은 30년대 이후의 현대시에 들어선 이후, 세계적인 경향으로서의 모더니즘 경향 이후에 우리 시단에도 나타나게 됐습니다. 가장 처음 이런 경향을 쓴 사람들 중에서 지금까지 있어서도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시를 쓴 사람이라면 역시 정지용을 들 수 있습니다. 이미지즘으로 볼 수 있죠 이 사람도.
또 전형적인 한 사람이자 그 사람 시 중에서 전형적인 시라고 하면 박목월의 불국사라는 시가 있습니다. 불국사라는 시는 모두 명사로 이어져있습니다. 설명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설명어를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용어라고 합니다만 동사나 부사, 형용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사나 형용사는 판단입니다. 이를테면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아름답다고 하는 판단인데 그런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불국사라는 시는 그렇게 돼 있어요. 명사로 끝나지요. 판단이 없습니다. 그냥 제시만 하고 있습니다. 구름, 안개, 바람… 이런 식입니다. 바람이 분다든가 산이 아름답다던가 하는 말이 일체 없어요. 한때 우리 청년시절, 그러니까 30년대, 내가 학생 때 유행했던 것 중의 하나가 시네포엠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풀어말하자면 시네마 포엠이라는 것인데 영화 시나리오 쓰듯이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시나리오라는 것은 촬영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아닙니까. 시나리오는 설명이라기보다는 제시뿐입니다. 카메라가 찍는 것이니까 거기에 맡기는 것이고 감독이 자기의 콘티로서 조절을 하는 것이죠. 미리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하는 말이 없어요. 장면 제시에 그칠 뿐입니다. 이미지즘 시와 비슷해서 시네포엠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그것이 없어졌습니다만 이미지즘이라는 시가 극단적으로 가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좋다 안좋다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자유롭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향의 시가 나타난 것은 현대가 회의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훗설의 시대, 현상학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판단을 잘하는 사람을 대단히 지적이라고 말하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지적이지 않은 사람이 가장 빨리 판단해버립니다. 쉽고 단순하게 생각해버리니까 판단이 빨리나오는 겁니다. 조금 사태를 복잡하게, 조금 더 예리하고 섬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판단을 못합니다. 사물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책 한번 읽으면 세상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좋다 안좋다, 나쁘다 그르다하는 흑백논리로 금방 판단을 해버립니다. 세상에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리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적인 사람일수록 회의적입니다. 철학은 의심하고 회의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쉽게 판단하는 사람은 철학이 대단히 빈곤한 사람입니다. 철학 능력이 풍부한 사람은 쉽게 판단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햄릿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지성인을 햄릿형으로 불렀습니다. 반대는 동키호테형이겠죠. 그러니까 이런 경향의 시는 햄릿형의 시죠. 제가볼 때 이런 경향은 매우 현대적입니다.
20세기에 여러가지를 겪어오는 동안에도 쉽게 판단이 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이 참 어렵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죠. 뭐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나타난 문학이 그런 경향입니다. 얼핏보면 단순하고 아무런 철학도 없는 것 같죠. 사물의 껍데기만 나타내고 감각 세계만 나타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뜯어보면 지금 말씀드린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유행에 따라서 하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자각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입니다. 서양에서도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은 대개 이미지즘에서 출발합니다. T.S. 엘리엇이 그렇습니다. 20세기 초에 그런 경향으로부터 시를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판단을 하고 있는 시중에서도 아주 복잡하고 심각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시들이 분명히 있고 두 경향을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의 시를 찬동하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해서 오늘 자리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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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노트/ 임경구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