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자격증 열풍'이란 기사를 잘 읽었다. 우리 어린이들
을 정신과 육체가 튼튼한 사람, 참된 사람으로 키우기 보다 시
험 기계로 말들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도대체 한자 검정시험, 영어 토익 시험이 어린이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어른도 다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
아도 입학시험 공부에 애들이 죽을 맛인데 사는 데 절실하지도
않은 자격시험에 시달리고 돈을 날리고 사회까지 병들게 하는
이 풍토 그대로 두어선 안 된다.
나는 자격증 시험은 꼭 필요한 것만 국가에서 돈을 받지 않고
실시하고 그 시험만 인정했으면 좋겠고, 취직이나 입학시험 때 자격
증을 요구하던가 특별히 인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순전히 돈
벌이로 시험제도를 만들고 사람을 잡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
초등학교 3년 아들을 1년간 집 근처 컴퓨터학원에 보냈던 김모(36)씨는 아들의 실력이 ‘1분에 200타’를 치는 속타와 간단한 문서작성법 정도에 머물자 방문교육 위주의 컴퓨터교육업체를 찾았다가 낭패감을 맛봤다. 학원측이 대뜸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과정에 등록할 것을 권해온 것이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이 무슨 필요가 있냐”는 김씨의 질문에 학원측은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 대입시험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며 “국가공인 자격증이기 때문에 평생 써 먹을 수 있는데다 장래 취업할 때 이력서에도 기재할 수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초등학생 사이에 ‘자격증 따기’, ‘급수 따기’ 열기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초등 5년생인 박모(11)양은 자격증만 5개다. 국가공인이라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은 기본이고 모 신문사가 주관하는 컴퓨터인증시험에서도 3급을 땄다.
한자능력검정시험에서 2급을 딴 그는 독서지도학원에서 글쓰기 자격증도 땄고 앞으로는 특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 요리사자격증도 가질 작정이다. ‘자격증이 경쟁력’이라는 어머니의 소신에 따라 박양은 학원도 주로 ‘자격증 대비반’을 골라 듣고 그의 책장에는 취업준비생들이나 볼 만한 시험 관련서적들이 꽂혀있다.
수학과 영어도 일종의 자격시험인 ‘학력평가’시험에 대비해 공부한다. 수학은 매달 학교에서 치루는 경시대회 말고도 한국수학인증시험을 치뤘고 초등학생 영어능력평가시험인 ‘EEPA’를 치렀다. 올해는 토익시험의 어린이판인 ‘토익브릿지’에서 180점 만점에 140점을 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양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 응시자 가운데 초등학생이 15~20%에 이르며, 한자급수시험에는 유치원생부터 도전한다. 2001년에 초중급자용 토익시험으로 첫 실시된 ‘토익브릿지’에 2632명에 응시했는데 지난 해에는 6048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응시자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합쳐 80%를 넘는다.
‘학교밖 시험’인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열기는 성과 지상주의 혹은 결과만을 중시하는 교육풍토의 산물이다. 영어 컴퓨터 한자 등 사교육이 보편화하면서 단기 성과를 측정할 필요가 대두한 것이다. 당연히 합격여부의 결과가 중시되면서 학원수업도 원래 배워야 할 내용보다 시험대비용 수업이 돼 버리기 쉽다.
컴퓨터교육기관인 한컴아이컴퓨터교실의 강사 윤모씨는 “아무래도 필기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외우기식 교육이 되기 쉽다”며 “시험을 많이 치다 보면 요령이 생겨 자격증과 실력은 별개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차 필기시험의 내용이 주로 컴퓨터의 발달역사, 부품명칭, 운영체계 등이어서 교육도 마우스를 쥐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교재를 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컴퓨터나 영어교육이 생활 속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격증을 따기 위한 교육으로 변질된 셈이다.
또 외국어고나 과학고 등 특목고 진학이나 대학 전형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수단으로도 자격증이 선호된다. 일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입시전형에 ‘동점자가 나오는 경우 자격증이 있으면 가산점을 준다’는 조항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학부모공동체 ‘마음에 드는 학교’ 회원인 박모(35)씨는 “입시전형이 매년 바뀌는 풍토에서 현재의 가산점 혜택을 보고 자격증을 따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며 “요즘같이 정보와 기술이 빨리 발전하는 시대에 초등학교 때 딴 자격증이 사회에 나왔을 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꼬집는다.
이제는 워드프로세서자격증이 별 의미가 없어진 것처럼 지금 따 둔 자격증이 시간이 지나면 효용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격증 자체가 새로운 교육상품으로 등장해 열기를 부추기는 측면도 적지 않다. 한자급수시험으로만 한국어문회가 주관하는 한자능력검정시험에, 대한민국한자급수자격검정회가 주관하는 한자급수자격검정시험, 한국한문교육진흥회가 주최하는 한문능력검정시험, 한국외국어평가원이 주관하는 실용한자/초등한자시험 등 5~6종에 이른다.
수학은 한국수학인증시험, 한국수학경시대회, 한국수학올림피아드 등이 있다. 시험일정이나 어떤 자격증이 어떻게 유용한지 정보를 얻는 것 조차 쉽지않을 정도다.
자격증이 어린이들의 학습능력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토익브릿지’의 경우 듣기ㆍ이해부문으로 구성돼 있는 토익시험의 구성을 그대로 따르면서 문제의 난이도만 낮춰 말하기ㆍ쓰기 능력을 측정하지 못한다.
자격증시험은 암기위주의 교육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암기에 의존해 반짝 점수를 올리는 단기성과 중시의 자격증 취득은 두뇌발달이나 지식의 축적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맹점이 숨겨져 있다.
한국인지과학회장인 서울대 서유헌(약리학교실) 교수는 “암기는 학습의 일부일 뿐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지 않는다”며 “요즘의 자격증 열기로 자칫 초등 학령기 시기에 익혀야 할 학습능력을 놓치기 쉽다”고 우려했다.
<사진설명> 자격증ㆍ급수따기 열풍은 사교육 분위기도 바꿔놓았다. 영어도 말하기, 듣기보다 급수 올리기가 급선무다. 학원에서 ‘토익’강의를 듣고 있는 초등학생들./이종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