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984, 흐림
-비장의 무기가 아직 나의 손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나폴레옹
감옥에도 크리스마스는 있는가.
식판을 들고 줄을 서있는 동안 식당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이 끊어질듯 이어진다. 낡았을 테이프 때문이겠지만 내 마음도 그렇다.
오늘부터 포사다(posada)다. 포사다는 스페인어로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여인숙을 뜻하지만, 성탄절 약 일주일 전의 기간, 특히 이 기간 동안 행해지는 축제를 뜻한다.
식민지시절, 스페인인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남미에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성경의 내용을 희곡화했다.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예수를 출산할 장소를 찾는 상황에 관한 것인데, 마리아와 요셉이 집 밖에서 머물 방이 있냐고 묻는 성경의 내용을 오페리따(operita)로 만든 것이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내어줄 방이 없다하고, 그러면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또 거절당하고……. 이렇게 몇 번 반복되다가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다. 뒤풀이로 공중에 매달린 악을 상징하는 큰 박처럼 생긴 일명 피냐타(Piñata)라는 것을 막대기로 부수는데, 묘미는 그것을 높이 매달아 쉽게 깨뜨리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결국 터지면 복을 상징하는 과자, 과일 등이 쏟아져 나오고,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은 밤새 먹고 마시며 춤을 춘다.
식당 안에는 트리며, 노체부에나 꽃장식이며, 제법 크리스마스스피릿이 맴돈다. 그중 층층나무에 매달린 종이 별들의 반짝임이 유난하다.
메누도(menudo)는 주말 음식인데 평일에 나온 걸 보니, 특별식으로 나왔나 보다.
멕시코음식이 비행기에서부터 좋았다. 특히 타꼬를 먹어보곤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 싶었다. 빤시타(pancita)라고도 불리는 메누도는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전통원주민음식인데, 소의 양을 푹 고아 까칠한 껍질을 벗긴 뒤 적당한 크기로 썬다. 다시 물을 붓고 고추 등 야채를 넣은 뒤, 곰국을 만들듯 오래 끓인다. 구린내가 좀 나지만 잘게 썬 양파와 실란트로 등 향신료를 넣어 먹으면 별로 못 느낀다. 거기에 또르티야 한 장 베어 삼키면 그 맛 기가 막히다. 색깔 또한 벌건 게, 우리 육개장과 비슷해 해장국으로도 그만이다.
한 두 숟갈 떠 넣고 있는데 옆의 놈이 손에 움켜쥐고 있던 뭔가를 내 국그릇에다 풀어버린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국물 위에 벌레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놈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자 주위가 술렁대는데…….
-Son jumiles.(후밀이야.)
뻬드로가 흥분한 날 진정시키려는 듯 낮은 목소리를 낸다. 놈은 감옥으로 날아든 그 벌레들을 잡아 플라스틱통 속에다 기른다 한다. 어느 정도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벌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렇지 않다. 놈은 장난삼아 그랬다지만…….
후밀은 노린재처럼 생긴 벌레로 식용으로 쓰인다. 보통 생으로는 잘 안 먹고 주로 고추 등 양념과 함께 갈아먹는데 게레로 주(州), 특히 타쓰코지방에서 즐겨먹는다.
소싯적 캄캄한 다락방에서 깨물어 먹던 벌레가 있었다. 일명 월남 쌀벌레. 몸에 좋다던, 특히 눈에 좋다던……. 학교 앞 문방구에서 그 벌레들을 팔았는데, 파월장병들은 곧장 귀국선물로도 가져오곤 했다. 하지만 후밀은 엄지손톱만 한 게, 월남 쌀벌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배가 고프지만 더 이상 못 먹을 것 같다. 그릇 위에서 서멀거리는 벌레 때문만은 아니다.
식당 저편에서 또 한 놈이 걸어온다. 놈의 방향으로 봐선 나를 향해 오는 것이 분명하다. 시선도 나 있는 쪽이다. 아니 나 있는 쪽으로 모든 시선들이 스팟트 불빛처럼 모여든다. 순간 정적이 깔린다. 놈의 허리가 내 식판 가까이 붙고 있다.
-Vámonos, cabrón(야, 이 새끼야 가자.)
놈이 내 어깨를 툭 친다. 따라오란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발딱 세우곤 팔뚝을 뒤로 젖힌다. 거구다. 나도 작은 편이 아닌데 나보다 10센티는 더 커 보인다.
얼굴엔 털 하나 없다. 면도날 항로가 보이지 않으니 원판이 그럴 것이다. 나처럼 수염이 많은 사람들은 직감으로 안다.
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옆에 있던 뻬드로가 한번 따라가 보라는 듯, 턱 끝을 놈이 오던 방향으로 세운다. 그래 지금까지 잘 참아 왔는데…….
난 죄가 없으니 곧 나가게 될 것이다. 세르히오가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이다. 그래 어디냐, 어디 한 번 가 보자…….
난 숟가락을 식판에다 꽂은 뒤 토르띠야를 한 입 베어 물곤 덩치의 뒤를 따른다.
대여섯 놈이 널찍한 테이블에서 다른 메뉴를 먹고 있다. 얼핏 닭다리도 보인다. 순간 혹시? 했지만, 이내 죄수복으로 교도관도, 미결수도 아님을 눈치 챈다.
놈들 중 뻬뻬가 말하는 대빵이 있을까? 놈들의 비릿한 포스로 봐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차라리 방금 덩치가 범털이라면 범털이다.
-Encantado, Yo soy Jesús. Soy el jefe de todos.
(반갑다. 나, 헤수스. 모든 이들의 대빵이지.)
그중 가장 대빵 같이 안 생긴 놈이 대빵이라 한다.
Mucho gusto. Soy Kyung Joon Kang (반갑습니다. 강경준입니다)
역시 놈들은 웃는다. 역시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말해보라 한다.
차근차근 놈들의 눈을 살핀 뒤 한 자, 한 자, 목구멍에 기를 모아 터뜨린다.
Kyung, Joon, Kang.(경. 준. 강.)
-Ay, cabrón, me espantaste. No estamos sordos, ¡chinito!
(아이 깜짝이야, 야 이 땐놈 새끼야, 우리가 귀머거린 줄 알아!)
그중 가장 삐삐한 놈으로부터 주먹이 날아온다. 거의 동시에 놈의 주먹이 내 손에 쥐어진다.
놈의 팔을 꺾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쓸데없는 짓이야. 난 너희들 하고 다르지. 곧 나가게 될 몸……. 순간, 놈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뱉는 ¡Cálmate!(진정해!)하는 소리를 타고 칼끝이 내 가슴을 스친다. 숟가락을 갈아서 만든 칼이다.
-Sí, eres Bruce Lee(역시 대단한 부르스 리야.)
테이블을 밀어 공간을 만든다. 발길질과 칼질이 몇 번 교차되고 마악 본격적으로 격투가 시작되려는데 ‘조용히 해!’(¡Quietos!)하는 쩡쩡거림이 저 쪽에서 들려온다. 그 한마디에 놈은 칼을 거둔다.
누굴까? 가만 보니 세사르다. 근데 쩡쩡한 그 말을 뱉은 이는 세사르가 아닌 것 같다. 굳은 입술의 그는 침묵을 지킨 지 한참 돼 보인다. 그렇다면? 거리상으로는 옆의 작달막한 녀석 외엔 없는데…….
그가 대빵이다. 아니 대빵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빵이라 부르고 싶다. 160센티 남짓한 몸통이 대포알 같다. 날카로운 눈매…… 몸 전체에 고압전류처럼 흐르는 그 카리스마로 잡범 짓은 안했을 것이다.
자신을 찰리(Charlie)라고 소개한다. 스페인어론 카를로스(Carlos)인 셈이다.
-Hablas bien español. ¿En dónde lo aprendiste?
(스페인어 잘 하네, 어디서 배웠어?)
다른 이들은 마치 한국의 국어가 스페인어인 양 제법 유창한 내 스페인어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데, 그가 처음으로 내 스페인어에 관해 궁금해 한다.
Hum, en la escuela.(음…학교에서.)
-¿Aquí o allá? (여기 아님 저기?)
Aquí.(여기.)
눈조리개를 밝게 열더니 동양인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Practicas Karate?(가라데 하니?)
No. Yo practico el Aikido.(아니, 합기도 해.)
그게 뭐냐고 묻는다. 그것도 총보다 빠르냐며 웃는다.
Depende de dónde se filma la película.
(영화를 어디서 찍느냐에 달렸겠지.)
합기도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게다. 단지 너스레를 떨고 있을 뿐. 내가 그 너스레에 진지한 답을 붙인다면 그는 더 크게 웃을 것이다.
릴렉스해진 내 모습을 보곤 껄껄거리며 자기도 태권도 5단이라 한다. 내가 ‘태권도 5단?’하고 놀라 되물으니, 무하마드 알리의 스승이며 이소룡의 친구였던 준리(이준구)의 도장에서 배웠다한다.
-¿Cuántos años tienes?(몇 살이야?)
낮춤말을 쓰니 내 나이가 궁금한가 보다.
Veintisiete.(스물일곱.)
그가 내 또래이거나 손아래일거라 생각해 힘줘 말했더니, 마흔이란다.
-¿Por qué estás aquí?(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Um……. Compré un cohe robado.(음……도난차량을 샀어.)
순간, 상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다. 왼쪽 팔뚝에 난 상처가 인상적이다. 얼핏 문신 같지만 깊이 파인 걸로 봐 상처일 것 같다.
-¿Ya terminaste de comer?(밥은 다 먹은 거야?)
No…….(아니…….)
Vete a comer y…… nos vemos al rato.(그럼 가서 밥 먹고…… 있다 보자.)
있다 보자? 그가 싫진 않지만…….
뻬드로와 뻬뻬가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있다. 식판도 그대로다. 둥둥 떠다니던 벌레들은 사라져버렸다. 날아가 버렸나? 김이 모락거리는 게 국이 더 뜨거워져 있다. 어리둥절해하니 뻬뻬가 웃으며 뻬드로가 새 국으로 바꿔왔다 한다. 고맙다는 표시로 뻬드로의 어깨를 쳐준다.
Pues, ¿Qué es Charlie?(찰리, 뭐하는 사람이야?)
과묵한 성격과는 달리 뻬드로의 설명이 장황하다.:
사복경찰 셋이 영장도 없이 찰리의 집을 수색하려들자, 명문 UNAM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찰리, 저항을 한다.
경찰들은 옆에서 끼어드는 찰리의 처 안헬리카를 진압봉으로 폭행한 뒤, 머리에 한 방을 얻어맞아 고꾸라져 있던 찰리에게 수갑을 채우려들지만, 그때까지 고분하던 그가 갑자기 이단 옆차기를 날린다. 순간 옆에 있던 또 다른 경찰, 권총을 뽑아 찰리를 겨누어보지만 이번엔 그의 처, 안헬리카가 팥이 든 항아리를 던져버리니 결국 발사된 총알은 고꾸라져있던 또 다른 경찰의 등을 관통해버린다. 이에 경찰들은 이판사판 찰리를 죽이려들고…….
부엌 쪽으로 달아나려던 찰리를 향해 총알 두 발이 발사되는데, 그중 한 발이 찰리의 왼쪽 팔뚝에 꽂혀버린다. 침착한 찰리는 부엌싱크대에서 칼을 집어 들고 마치 거미처럼 부엌 벽에 달라붙는다.
10인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놓인 부엌 찬장엔 거울이 달려있다. 꽃무늬가 그려진 그 거울에는 부엌입구 밖, 즉 거실 쪽의 풍경이 한들거린다. 잠시 흐르는 정적아래 찰리의 세 살 박이 아들, 오시엘의 칭얼거림만 늘어진 한여름 매미소리처럼 들려오고…….
‘찰리, 아무 소용없어 자수해……’ 거실 소파쯤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렇다면 또 하나는? 찰리, 부엌창문을 올려본다. 그 순간 번쩍번쩍, 창틀에서 총이 난사되고 두 발 중 하나가 그의 귓밥을 스쳐간다. 그러나 넘어지면서 날린 칼이 열린 창문사이를 뚫고 상대의 눈알에 박혀버린다.
찰리는 마약법 위반으로 길어야 이삼년 살 것을 특급살인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만든 카리베(Caribe)는 큰 마약조직이 되었다. 멕시코중앙부를 장악하고 있는 마초(Macho)보단 규모가 작지만, 카리베는 멕시코북동부를 잡고 있어 텍사스 등 미국 서남부까지 그 세를 확장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