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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
재학생수/신입생수 |
연 도 |
재학생수/신입생수 |
1897 |
150 / 160 |
1907 |
554 / 181 |
1898 |
161 / 2 |
1908 |
702 / 103 |
1899 |
152 / 6 |
1909 |
739 / 147 |
1900 |
141 / 7 |
1910 |
595 / 5 |
1902 |
140 / 12 |
1911 |
449 / 93 |
1903 |
148 / 37 |
1912 |
502 / 58 |
1904 |
102 / 158 |
1913 |
430 / 107 |
1905 |
197 / 252 |
1914 |
450 / 68 |
1906 |
430 / 153 |
1915 |
342 / 미상 |
자료> 필자미상, 「일본유학생사」, 학지광6.
특히 1910년대의 유학생들은 1912년에 결성된 학우회6)라는 단일한 단체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가졌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유학생 단체는 존재했다. 그러나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1895년 4월 결성), 제국청년회(1895년 9월 결성)를 비롯한 각종 유학생 단체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1910년대 이전 시기는 관비유학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학생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단결을 위해 유학생 단체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적인 분파성이나 친목도모적인 성격이 강하여 외압에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부침이 심했다. 비록 이와 같은 한계는 있었으나 이 시기의 유학생단체는 유학생 상호간에 단결과 통합된 단체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1910년대에 유학생이 학우회를 중심으로 결속하는데 토대를 제공했다.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가운데 노동자는 오사카나 큐우슈우 등지에 밀집한데 비해 유학생은 단연 토오쿄오에 몰려 있었다.7) 따라서 유학생 단체도 토오쿄오가 중심지였음은 당연하다.
학우회는 1909년 1월에 결성되어 토오쿄오 유학생의 구심체를 담당했던 대한흥학회를 모태로 한다. 대한흥학회가 강제병합으로 인해 조직이 강제로 해체된 이후 1911년초 삼남친목회, 황평친목회, 청년구락부 등이 결성되었고, 이것이 통합되어 1911년 5월 조선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유학생친목회는 몇 달되지 않아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후 유학생들은 1912년에 들어서 전라도의 호남다화회, 경상도의 낙동동지회, 평안도의 해서친목회, 경기·충청도의 삼한 구락부, 평안도의 동서구락부, 함경도의 철북친목회, 강원도의 연남구락부 등 출신지역별 7개 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별 단체로 만족하지 못하자 통합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유학생들의 내부 논의 과정에서 이들 친목회를 통합해 하나로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1912년 10월 27일, 김병로를 비롯하여 안재홍, 최한기, 서경묵, 신익희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결과 학우회가 창립했다.8) 창립 당시 구성원은 97명이었고, 초대회장에는 정세윤이 선임되었다. 학우회는 연구발표를 통한 민족의식과 역량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1년에 2회씩 잡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학지광을 출간했다.
학우회는 창립되자 유학생의 통합단체로서 조직화를 이루어 나갔다. 특히 학우회는 규정상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유학생이라면 가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장덕수가 토오쿄오에서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학우회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가 유학생들로부터 집단폭행의 위기에 처했던 일화9)는 유학생 사회에서 학우회가 갖는 위치와 학우회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학우회는 유학생 단체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 한인 단체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일상적인 대중사업을 적극적으로 주도·참가했다.
학우회는 결성초기부터 단순한 친목단체로 출발하지 않았으므로 다양한 형태의 모임을 통해 재일본 한인반일투쟁의 중심 장을 열었다. 주요 모임은 졸업생 축하회, 신입생 환영회, 망년회, 신년회, 웅변회 등인데, 이 때 마다 빠지지 않는 웅변과 연설 프로그램을 통해 유학생의 자각과 조선의 독립을 고취했다. 즉 학우회는 다양한 형태의 집회를 통해 조선독립을 대중적으로 선전하고 조직의 강화를 도모하며 나아가 조선독립을 갈망하는 대중적 열기를 모아 나갔던 것이다.
특히 1914년 4월 2일에 창간된 기관지 학지광은 학우회의 기관지로서 뿐만 아니라 1910년대 지식층의 사상조류와 사회관이 반영된 발간물이다. 학지광은 최승구, 이광수 등 당대 최고의 문객이 필진으로 참여했는데, 사회진화론·사회주의 등 신진사조를 소개하고 국제정세의 변화상을 제공함으로써 일본내 조선지식층의 중요한 공개적인 논의의 장으로 기능함과 동시에 유학생의 결속력 강화에도 기여했다.
3. 산업진흥 일반론
산업진흥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는 유학생들의 경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식을 제고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경제와 산업의 부흥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문명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논의가 바탕을 이룬다. 이 시기의 경제문제인식이 갖는 성격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사회진화론을 비롯한 신진 사조와 관련속에서 경제에 관한 인식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조합과 금융기관 등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노자협조주의적 경향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즉 대의라는 명분을 위해서 노동자나 농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번째 인식에서 나타난 경향성은 문명론을 뒷받침하고 나아가 식민론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먼저 첫 번째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10년대에 학지광에 가장 최초로 발표된 유학생의 경제론은 務實生이발표한 「기업론」이다. 이 글은 최초의 경제에 관한 문제제기라는 점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국제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문명론, 사회진화론과 연결짓고 기업의 필요성과 기업의 형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고 있다.
1914년에 발표된 이 글에서 필자는 ‘생산활동의 3요소는 노력, 자본, 토지이지만 이 세가지 요소는 기업이 존재할 때라야만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기업과 경제활동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그는 경제활동을 전쟁에 비유하고, “한번 경제적 경쟁전쟁에 실패한 자는 그가 개인이면 사회의 타락자요 그가 민족이면 민족적 경쟁의 실패자로서 滅亡을 免하지 못한다”10)는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경제진흥이 독립보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 발발하기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을 “文明이 全地에 波及하여 同時에 戰爭이 各處에 波動하야 此 世界는 實로 눈을 回轉시길 무서운 生存欲의 修羅場이 되얏도다”11)라고 하여 문명의 파급이 나은 산물로 이해하고 이 전쟁을 기업의 발달과 관련짓고자 했다. 즉 ‘기업적 정신이 旺盛한 앵글로색슨 민족과 게르만 민족과 같은 나라는 이 전쟁에서 이기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망한다’12)고 하여 기업의 발전과 국망이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필자는 1차 대전의 참전국 가운데 양진영의 대표격인 영국과 독일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선상에서 놓고 인식했다. 이러한 이해는 문명의 핵심을 현실적인 면(무력)과 아울러 정의라는 관념적인 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우승열패를 無情한 鐵則’으로, ‘자연도태를 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생물계의 大勢’로 인정한 필자의 사회진화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써, 단순한 자강론의 입장에서 나아가 기업의 발달여부가 민족생존 문제와 밀접히 연결됨을 지적한 것이다.
1차 대전의 전세에 대한 필자의 인식은 학지광의 다른 필자들의 인식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후에 학지광의 다른 필진들은 1차 대전의 전세 변화에 따라 인식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독일과 영국을 양대세력으로 놓고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을 보인다. 즉 전쟁의 발발기에는 정의의 대변자인 영국이 승리할 것을 예상하여 문명의 요소를 박애, 정의, 평등 등으로 파악하다가 전세가 독일의 우세로 전개되자 ‘정의롭지 못해도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식의 ‘힘 우선주의’가 대두되어 독일이 갖는 무력에 비중을 두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에 비해 務實生은 기업의 발달이라는 점에서 영국과 독일을 같은 우승국 대열에 놓았다.
이 글은 세가지 점에서 특색을 보인다. 첫번째 특색은 기업가의 자격 요건에 ‘어버이같은 마음’을 설정한 것이다. 필자는 기업가의 자격으로서 지식을 구비할 것과 도덕적인 인격, 선견지명과 조직적 활동의 능력을 제시하고, 기업가가 ‘종래의 실업가와는 달리’ 도량이 넓고 품행이 올바르며 세상에 모범이 되는 ‘도덕적 人格의 高尙함’13)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즉 종래의 실업가가 지식을 구비하지 않고 인격도 비천한, 오로지 장삿속만을 챙기는 존재라면 바람직한 기업가는 어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발휘해야 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근대적 의미의 기업론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한 주인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두번째 특징은 최초로 조합조직의 형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務實生은 앞에서 밝힌 전근대적인 기업론과 달리 기업의 형식을 개인적 기업과 단체적 기업으로 구분하고 단체적 기업을 다시 회사조직과 조합조직의 형식으로 구분했다. 또한 조합조직에 신용조합, 구매판매조합, 생산조합 등 다양한 형식을 제시했다.14) 필자가 제기한 조합 조직의 형식은 이후 유학생들의 산업진흥론이나 노동론에서 일관되게 제시된다.
세번째 특징은 기업의 형식에서 후발 자본국의 특성인 보호주의적인 요소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민족적으로 발전하기를 顧해서는 一민족은 단일적 단체가 되어 외부에 대항”15)해야 한다고 파악하고, 기업의 합동이 한 국가 안에서는 폐해가 많지만 민족적 경쟁에서는 매우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여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을 주장했다.
이러한 세가지 특징은 영국과 독일 등 성공한 국가의 사례를 식민지 조선에 적용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학지광에 가장 많은 경제에 관한 글을 발표한 노익근은 1915년에 발표한 「經濟振興에 對한 余의 意見」에서 ‘유치한 경제계급에서 건전한 계급’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으로 적극주의와 소극주의를 제시한다.16) 제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 = 유치한 단계로, 경제가 발달한 상태 = 건전한 단계로 각각 경제발전상태에 도덕적인 잣대를 적용하여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에서 적극주의는 거시적 안목의 대안이고 소극주의는 단기적 안목의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노익근이 생각하는 소극주의는 ‘財力의 遞減을 防備’하는 검약설이다. 즉 외래품 사용을 방지하고, 혼상제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며, 高等遊民(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중류이상의 계급)을 驅除하고, 분가제도를 타파하여 검약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17). 노익근은 이러한 여러가지 대안 가운데 분가제도의 폐해를 가장 크게 지적한다. 자식들이 아무런 경제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음으로써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적극주의는 생산자 시설을 확대하여 자산의 증가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익근은 먼저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현실을 언급하고 독일과 일본의 예를 들어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이 얻는 실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8)
산업진흥론을 주장한 필자들이 갖는 공통점은 대부분 경제발전과 문명사회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부를 증가함에 대하여」(1916년)도 1차 대전의 전세속에서 문명과 경제발전을 연결지은 노익근의 글이다. 노익근은 경제적 인식이 분명한 존재를 문명인으로 상정한19) 바탕 위에 자본증식을 위한 방안으로 특수교육장려, 종교선교, 자본집적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어떤 종류의 특수교육을 장려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교육 보급을 통해 民智를 증진시키며, 특수한 기술자를 양성한다는 원칙론을 제시했다.
또한 노익근은 영국과 중국을 예로 들어 民智가 국부보다 우선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문화적 가치가 부를 증대시키는 첩경이라고 이해했다.20) 이러한 주장은 필자가 국가라는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경제력을 강조했다거나 물질보다 인간 존재에 비중을 둔 논리를 전개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필자는 “만일 교육이 잇스면 경제상 인격이 완전함으로 타자가 여하한 기민한 지략으로, 경제상 세력을 탈취하려 하야도 도저히 불가능”21)하다는 교육만능론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교육과 경제력이 없는 인격은 외부로부터 지배를 당할 수 있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하며, 나아가 植民의 불가피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노익근은 이 외에도 자본을 증식하고 경제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문명론을 제시한다. 즉 자본증식에 대해서 갖는 필요성과 인식의 정도에 따라 문명인과 열등민족으로 양분하는 논리이다.22) 이러한 기준에 따라 필자가 평가한 식민지 조선은 ‘손익타산이 애매한 열등민족’에 해당한다.
문명론에 입각한 유학생의 경제문제인식은 노익근의 글 외에도 다수이다. 학지광12호에 실린 「부의 필요를 논하야 상공업 발흥의 급무에 급함」에서 필자는 “생활의 풍요는 문명발달의 제1원임임을 단언할 수 있도다”라고 하여 경제발달을 문명발달의 가장 큰 원인으로 규정했다.23) 그는 “오늘날은 부가 곳 力이오 금전이 곧 권세인 시대”라고 파악하고 “조석의 호구가 難한 무리들의게 문명이 무엇이며 교육이 무엇이냐”24)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통해 문명의 조건이 부의 증진임을 강조했다. 필자는 상공업 진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농촌의 잉여노동력(농촌인구의 2/3)을 상공업으로 돌릴 것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요건으로 자본(물적 요건)과 기술(인적 요건)을 제시했다.25)
이광수의 「졸업생 제군에게 들이는 懇告」도 경제발달이 문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파악한 글이다. 이광수는 졸업생들이 귀국하여 산업진흥의 필요성을 동포들에게 고취한다면 ‘수천명의 동포를 文明으로 이끌 수 있을 것’26)이라는 생각아래 졸업생들에게 사명감을 주지시켰다. 이 글에서도 역시 필자는 교육과 산업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다른 필자들과의 차이점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산업을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강조했다는 점이다.27) 그 내용은 보통교육, 전문교육, 중등교육, 초등교육 등 각종의 교육으로써, 교육의 내용보다는 교육 자체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전반적인 民智의 향상을 통해 문명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필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金喆壽는 「국민경제상 농업의 지위」에서 제1차대전 발발의 원인을 경제적인 면에서 찾고, 경제력과 화학력의 우위로 인해 독일이 러시아를 이겼다고 이해했다.28) 이러한 이해는 경제력과 문명론의 관련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농업인구가 감소하고, 상공업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문명국의 현상으로 파악하고 일본의 예를 들어 경제 진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29)
김엽은 「조선광업을 논함」(1917년)에서 충분한 자본과 확실한 예산, 완전한 설비, 전문적 지식을 갖춘 기사의 고용, 자본가가 합자한 기초가 든든한 경영, 경제법에 주의하여 예산에 의거한 경영, 발견된 광산을 외국인에 팔지 말고 조선인의 손으로 유지할 것, 전문지식가의 양성을 위한 유학생의 파견 등30) 광업발달을 위한 대안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대안을 “헛말 잘하고 밋기 잘하는 조선인의 특성”31)으로 인해 조선의 광업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전제 아래 제시함으로써 조선광업이 직면한 문제를 민족성의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1917년에 발표된 유만겸의 「九年星霜」도 조선에 대한 자기비하를 바탕으로 문명국 수립에 성공한 일본을 비롯하여 제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 등과 식민지 조선을 비교하면서 산업진흥을 주장한 글이다. 필자는 당시 세계정세를 인종간의 투쟁으로 보고, 동양인의 분투를 주장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필자는 조선의 나아갈 방향으로 국부증진과 산업진흥을 거론했다.32) 이 글은 식민지 조선의 경제상황에 대해 자기비하적인 입장을 강하게 한 나머지 일본에 傾倒하는 한계를 드러낸 글이다. 필자는 1차 대전을 ‘인종간의 전쟁’이라는 일본이 주장하는 논리대로 파악하여 그 주장을 소개했으며, 식민지 조선이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발전국가의 모델을 일본으로 상정하여 제국주의의 논리를 대변한 결과를 낳았다.
양원모는 앞의 필자와 달리 구조적인 모순이라는 점에 서서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양원모는 「조선청년의 경제적 각성」에서 “사회만물의 진화난 인류의 진화발전에 在고 인류이 진화발전은 각인의 예절영욕을 知함에 在하며 예절영욕의 念은 의식이 足함에 在하나니 국민의 창고를 충실히하고 의식을 풍족케함은 경국제민의 근본義로다”33)라고 하여 사회진화와 경제진흥과의 관련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이 글은 농민·농촌문제에 대해 논의를 집중하고, 농촌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경제론을 발표한 다른 필자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필자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경제상황을 상업과 공업의 천시로 파악하고 그 대안으로 ‘합자하여 내외물산무역회사나 운수회사 등을 설립하여 수출무역을 발달’시키는 것과 ‘有爲한 청년으로 공학을 연구하게 함과 동시에 공장을 세워 일용품을 자급자족’하게 하는 두가지로 설정했다.
그러나 필자는 식민지 조선의 농촌이 황폐하게 된 원인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와 가치 비참한 상태에 이름은 다못 彼等(농민*)이 태만하기 따문이 아니오 사회의 조직이 불완전한 소치며 피등의 노력이 부족하기 따문이 아니라 산업자본이 결핍하고 경작법은 依前히 진보치 아니하난 일정한 토지에 대하여 생활을 의지할 인구가 더욱 더욱 조밀케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 생각노라”34) 이 점은 당시 신진사조를 수용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현실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민족내부에 반성을 촉구한 것과는 크게 다른 경향이다.
사회진화론과 문명론에 입각하여 식민지 조선의 경제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에서 유학생들이 빠지는 함정의 하나는 지나친 자기비하이다. 물론 집필 당시에는 국내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나 결과적으로는 자기반성이 지나치게 되어 자기비하를 넘어선 허무주의적 경향성 마저 배태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제시하는 대안도 구조적인 차원의 개혁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나 수양 등 개인적 해결방안에 머물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강한 자기반성을 넘어서 자기비하의 경향성으로 치닫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이라는 공간적 배경속에서 이들이 갖게된 지나친 상대주의적 인식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즉 유학생들은 신문과 저서를 통해 접하는 세계정세를 통해 독일과 영국, 미국 등 강대국의 힘을 절감하게 되고 나아가 여기에 일본도 같은 위치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식민지의 처지가 된 조선의 상황과 대비되면서 자조론을 낳게 되었다. 즉 조선은 자체적인 노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일본을 너무나 큰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을 상대로 하는 활동을 무모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침략국인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조선의 자체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는 제국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몰이해와 서양문명국가에 대한 치우친 인식에서 나온 결과이다.
산업진흥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의 두번째 특징은 조합과 금융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필자들이 나름대로 파악한 식민지 조선의 경제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학생들이 문명국이라 상정한 국가들의 사례를 국내에 적용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무실생이 1914년에 기업의 형식으로 신용조합, 구매판매조합, 생산조합 등 각종 조합을 제시한 이후 조합론은 여러 논의 속에서 간간히 제시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김철수의 「노동자에 관하야」(1916년)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자를 위해 신용조합, 구매조합, 판매조합을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35) 그러나 본격적으로 조합이 갖는 유용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논급한 글은 1917년에 발표된 「조선인의 생활과 산업조합의 필요」이다. 최원호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상황을 직종별로 분석하여 피폐한 원인을 찾고 그 대안으로 각종 조합의 조직과 운영을 제시했다. 먼저 농촌 피폐와 농민층 분해의 원인으로 지식의 부족을 들고, 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은 자본과 기술자의 부족에서, 어업가의 피폐 원인은 기술의 無에서, 봉급생활자의 곤경 원인은 물가등귀에서 각각 찾았다.36)
필자는 조선인 구제를 위한 대안으로 신용조합, 판매조합, 구매조합, 생산조합 등 각종 조합의 조직과 운영을 제시37)하고 있다. 그는 산업조합의 기원을 독일 색스니아주에 있는 마을에서 신용조합을 운영한데서 찾으면서 “빈한 자가 합동하야 부한 자가 되게 하는 극히 합리적인 산업제도”38)로 규정하고, 이러한 각종 조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 전래의 契를 거론하기도 했다.
산업조합론이 산업진흥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대표적이라면, 금융론도 마찬가지의 비중을 갖는 대안이 될 것이다. 금융론의 주창자는 노익근이다. 노익근은 금융론과 자본증식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글은 1915년과 1917년에 발표한 산업진흥 및 경제진흥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와 맥을 같이한다.
필자는 자본증식이나 금융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시기가 지나면서 점점 구체적인 금융기관의 종류를 제시하는데까지 이르고 있다. 1915년에 발표한 「半島今後의 金融과 生活改新의 急務」는 “現今의 文明한 사람들은 모도다 儉約生活의 着手者”39)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만능론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제1차세계대전의 전세와 경제변동을 연결지어서 이해한 글이다.
필자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경제문제를 세금증가와 수입초과로 파악하고, 바람직한 경제정책으로 보호주의를 들고 있다. 필자가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검약주의와 창고 설립의 필요성이다.40) 물론 필자는 검약주의라는 방법이 적극적인 대안이 아님은 알고 있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이 적극적인 대안을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함을 지적한다. 검약주의의 주장은 경제문제를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파악한데 특징이 있다.
창고설립은 금융기관의 前 단계를 의미한다. 즉 필자는 농민의 저축을 바탕으로 한 창고운영을 통해 자본가와 중매인이 장악하고 있는 농촌경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했다.41)
이 글에서도 역시 식민지 조선의 낙후성과 열악함을 지적함과 아울러 조선인의 사치성을 비판하는 자괴적이고 자기비하적인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노익근이 1918년에 발표한 「은행당국자 諸公의게 告함」에도 역시 「半島今後의 金融과 生活改新의 急務」(1915년)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낙후성이 지적되어 있다. 그러나 앞의 글이 경제문제의 해결책으로 주로 금융기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차원이었다면, 여기에서는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겸업은행이라는 형식의 은행제도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익근은 낙후성의 원인을 조상들이 실업에 대한 욕구가 없었음에서 찾는다.42) 필자는 조선인이 갖는 부에 대한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나 조선인이 은행과 공업의 관계를 몰각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양자의 관계를 통해 부를 증식할 것을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드는 것이 독일에서 운영하는 대륙식 겸업은행이다. 노익근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 개설된 조선은행(화폐발행은행)의 내용이나 규모로 볼 때 조선의 중앙은행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중앙은행으로서 자격과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산업진흥을 위한 은행으로 겸업식 은행을 제안한다. 노익근은 독일식 겸업은행43) 외에 영국식 은행제도(正則은행)가 있으나 영국식 은행은 개인의 이익을 중시한 결과 실업 진흥에는 기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유치한 단계에 있는 조선에는 적당하지 않은 제도’라고 평가했다.44) 즉 노익근의 은행론은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분리하고 그 가운데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인식이 중심을 이룬다.
겸업은행에 대한 노익근의 신념은 이듬해에도 계속된다. 「실업진흥에 대한 근본방침(其一, 四大겸업은행論)」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은행정책이 비판되고 독일의 예가 강조되었다.45)
노익근이 지적하는 당시 국내의 은행정책은 은행분업제도에 입각하여 두 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조선은행과 일반보통은행은 일반적 단기간의 금융융통을 담당하고 식산은행과 동척회사는 農工비례적 장기간의 융통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조선의 은행정책은 민간은행의 진흥에 저해가 되고 조선의 경제사회 상황과는 거리가 먼 정책이라고 인식하여 겸업은행제도를 제안했다.46)
즉 ‘은행제도상으로 볼 때는 보통은행이 이상적이지만 외적 관계(경제사회)를 무시하는 단점이 있어서 인위적으로 조직하면 그 나라의 경제사회와 무관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독일의 국민경제생활이 발전하게 된 사실을 은행제도가 그 나라의 국민경제상 견해에서 은행경제적 실제를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겸업은행의 운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다.47) 이와 같은 겸업은행의 효용성과 적정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당시 국내의 4대은행이 겸업은행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함을 입증48)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논의 외에 식민지 조선의 낙후한 경제를 국산품 애용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논의도 제시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국내 경제가 낙후한 원인을 조선 민족 자체에 두고 다른 나라의 제도를 차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존 필자들의 대안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李康賢은 경제발전의 대안으로 조선산직장려계를 들고 장려계의 목적을 “朝鮮의 原料로 朝鮮에서 朝鮮人이 紡績하야 朝鮮人이 制織하야 朝鮮人이 着用하고자 함”49)이라 설정했다. 특히 필자는 장려계를 조선의 청년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50) 그런데 필자가 제시한 장려계도 역시 독일의 예가 참조되고, 내용에서 국가보호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어서51) 다른 필자들이 갖는 일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농촌문제를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한 글은 작자와 제목 미상의 글(학지광6, 1915년)과 양원모의 「조선청년의 경제적 각성」 정도이다. 양원모는 농민구제방법의 구체적인 대안으로 농촌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농민구제방법으로 경작법 개량, 금융기관 설립, 신용조합 및 판매조합 설립을 제안하고 있다.52) 여기에서는 농민의 게으름을 농촌문제의 요인으로 인식하거나 지주중심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주장한 다른 필자와는 달리 농촌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좀더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점이 특징이다.
산업진흥론의 세번째 특징은 노자협조적인 경향성이다.
학지광6집에 실린 작자와 제목이 알려져 있지 않은 글에서도 경쟁시대에 국부를 증진할 필요성에서 산업진흥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졸업생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안하는 대안은 지주의 합동이다. 이는 농업의 기초로서 토지를 들고 토지의 보존을 위해서는 지주의 합동이 필요하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필자는 지주의 합동으로 인해 토지가 보존되고 금융기관이 장악되며, 산출물가가 조절되고 토지개량이 이루어지며 농학지식이 보급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53)
여기에서는 소작인의 입장이 부차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필자는 지주와 소작인간의 충돌은 농업발달에 역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필자는 소작인의 조합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면서 소작인 조합의 결과 얻을 수 있는 산물로 기술개량, 친선도모, 노동상호보충, 저축장려, 생활향상, 금융제도 연대이용, 기계공동구매, 농업지식보급 등을 들었다.54)
이러한 이해는 농업경영에서 농업의 발달이라는 대의를 위해 지주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보장한다는 입장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소작인의 희생이 요구된다. 아울러 현실인식의 중심이 지식인 위주, 지주 위주라는 점과 조선 농촌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에 연원한다. 따라서 소작료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작료에 대해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국내에서도 192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상업에서도 역시 대안으로 드는 것은 기업가의 합동과 소비자의 연합이다. 필자는 당시 조선 상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상업계가 외국인(일본인)의 손에 장악되고 있음을 들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자본가, 기업가의 합동과 소비자의 연합을 주장했다. “輸出輸入으로부터 至於 日用品의 賣買까지라도 朝鮮사람손에 하나도 잇지 안이하니 有無相通하는 그 사이에 莫大한 利益을 남의게 빼앗기는 것은 勿論이어니와 이와 갓치하야 엇지 結局 우리生活의 安全을 期할 수 잇으리오‘55). 이러한 주장은 민족기업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의 양보를 유도하는 논의로서 앞에서 언급한 이강현의 산직장려계나 이후에 국내에서 전개되는 물산장려운동과 맥을 함께 한다.
4. 노동 및 노동자론
1910년대에 발표된 유학생의 노동 및 노동자론 가운데 최초이자 유일한글은 金錣洙의 「노동자에 관하야」(1916년)이다. 이 글은 당시 유학생들이 부국이나 문명화의 수단으로서 산업진흥을 주장하면서 그 주체를 지식층으로 한정한 데 비해 최초로 산업진흥의 구성원인 노동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유학생들의 산업진흥론이 지식인 입장에 선 대안으로 일관한 것과 비교해볼 때, 구조적인 면에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 시도로서 의미를 갖는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노동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이다.56) 필자는 먼저 노동문제에 대해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불평문제와 노동자의 자각이라는 두가지 범주를 설정한다. 또한 노동자를 세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는 정신적 노동과 신체적 노동을 병합한 것으로서 모든 이들이 노동자라는 가장 넓은 개념이다. 둘째는 광의로서 신체적 노동만을 이름이다. 세째는 노동자 가운데에서 공장노동자만을 이름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두번째 정의에 따른다. 당시 많은 지식층이 농업노동자와 도시노동자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의는 매우 선구성을 갖는다.
필자는 “조선에는 노동자가 아닌 자가 적으나 노동문제는 已存하였으나 未覺 혼동중에 있다”57)고 지적하면서 조선노동자의 상태를 네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생계의 곤란과 불안이다. 특히 조선 노동자는 보호기관이 없으므로 곤란과 불안이 더욱 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두번째는 위생의 불가능이다. 여기서는 노동현장과 노동조건의 열악함을 지적하고 있다. 세번째는 求職의 곤란함과 임금의 저렴함이다. 필자는 노동소개소가 한군데도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임금 또한 1일 40-50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지적한다. 네째는 자녀교육의 불가능이다. 저렴한 임금과 불안한 직업현실은 자녀교육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필자는 두번째로 노동자와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시한다. 먼저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대개 문명한 나라에서는 노동자 보호가 점점 착실히 되며 노동자 대우가 차차 정중하여 가거늘 조선에 들어가보면 지금도 오히려 태고의 상태58)”라고 지적하면서 사회 진화에 노동자는 필수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또한 필자는 “노동자는 우매하란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진화함을 따라 노동자도 역시 진화를 맛볼 것”59)이라고 하여 노동자 자신의 노력을 촉구한다.
이러한 문제인식 아래 필자는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두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는 정신적인 구제를 할 것이다. 즉 상식과 도덕을 갖추게 하기 위해 ‘간이 야학교’를 세울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물질적 구제가 뒤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구제를 위해서는 노동자소개소를 두어서 실업자가 없게 하고, 신용조합을 지어서 금전의 貸借를 편리하게 하며 구매조합, 판매조합 등을 지어서 조합원의 수요 공급을 편리하게 하고 공동기숙사를 설치하여 음식과 거주를 임의로 하며 청결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60)을 폈다.
이러한 주장 등은 모두 당시 일본의 노동현실을 바탕으로 선진국이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이룩한 성과물을 조선의 현실에 적용해보고자 하는 주장이다. 노동소개소, 노동야학은 당시 일본의 노동총동맹이 운영하던 제도였다. 두번째의 주장(물질적 구제)는 1920년대에 나경석이 공제에서 제시한 대안과 거의 흡사한 내용을 이룬다. 특히 신용조합, 구매조합, 판매조합을 설치하자는 주장은 1920년에 발표한 나경석의 주장보다 상세하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노동운동이나 노동자의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최초의 노동자론이라는 점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하나의 사회계층으로서 거론하고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 노동현실에 대한 지적을 통해 주의를 환기했다는 점, 노동자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여전히 지식인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첫번째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노동자를 대우하고 시혜를 베푸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온정주의적이고61) 노자협조주의적인 입장62)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노동자가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을 통해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보다는 기업가나 사회가 노동자의 불만을 완화할 수 있는 배려를 하는 쪽이 우선된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 지식층이 갖고 있는 공통점으로서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극복된다.
이 글에서 필자가 보이는 한계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노동자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수준의 노력을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가 사회진화의 필수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면서도 ‘脫 노동자의 길이 교육’임을 주장하여 노동자를 교육을 받지 못한 하층으로 규정하는 한계도 나타내고 있다.
김철수는 1920년대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이끈 주역으로서 실제로 노동현장이나 운동에 참여한 적은 없다. 이러한 그가 노동자론을 펼치게 된 데에는 유학중이던 일본지역의 노동운동 상황이 한 요인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필자는 노동자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의 현실을 체득할 수 없었고, 국내 노동사정에 대한 이해가 미약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같은 시기에 오사카에서 노동단체를 결성하여 노동자와 직접 교감을 한 나경석이나 정태신63)은 1920년대초 공제에 실린 글에서 노자타협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주체적인 계급으로서 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하고자 했다. 또한 나경석은 공제1호에 실린 「세계사조와 조선농촌」에서 지식인이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지도에 반대하고 있다.64) 정태신도 또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냉철한 인식아래 노동자를 위한 신문명, 신생활을 제시했다.65) 이러한 이들의 인식은 김철수와 시기적인 차이는 있으나 조선인노동자 대중속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일정하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5. 맺음말 - 1910년대 재일유학생 경제 인식
1910년대 재일유학생들은 일본이라는 국내에 비해 열린 공간에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세계관과 국가 및 사회관을 심화해 나갔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을 통해 유학생의 자질함양과 사회적 사명감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다. 학지광은 유학생들의 세계관과 사회관을 망라한 잡지였는데, 이 가운데에 경제에 관한 논의는 비교적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10년대 유학생의 경제문제인식이 갖는 가장 큰 특성은 경제논의가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차용되었다는 점이다. 이 특성은 한계로 이어지기도 한다. 1910년대 이전 시기의 유학생들이 경제학을 法·政·經을 겸하여 전공한 인물로서 1860년대에 일본에 상륙한 서구경제학을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한데66) 비해 1910년대 유학생들은 문명국을 이루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경제학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본고에서 소개한 노익근(6편), 이강현, 최원호, 金喆洙, 金錣洙, 김엽, 務實生, 양원모(이상 1편씩) 가운데 노익근을 제외한 필자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67) 따라서 경제학 이론 자체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이론을 적용하고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경향성으로 인해 이들의 논의는 성공한 국가의 사례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논의로 일관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산업진흥에 성공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찬양으로 이어져 富國을 모든 가치에 우선하여 절대시하는 편향성을 낳기도 했다.
유학생들의 경제논의는 유학생들의 경제문제인식을 각성시키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갖는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 못지 않은 한계도 내포하고 있다.
1910년대 유학생들의 경제논의에서 볼 수 있는 첫번째 한계는 식민지조선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필자들은 고학생으로서 직접 노동현장을 경험하거나 노동자와 생활을 함께 하지 않았으며, 국내사정에도 어두웠으므로 노동자 대중의 상황이나 식민지 조선의 경제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들이 갖는 지식 역시 서적이나 신문보도를 통해서 습득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실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대안도 조선의 상황에서 실천가능성이 희박하거나 이상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한계는 경제논의를 발표한 필자들의 한계이자 유학생 자체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들의 경제논의가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기체념적 사조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국제현실에 대한 이해속에서 영국과 독일 등 서양강대국이 갖는 힘의 논리에 압도되어 개혁해야 할 대상을 내적인 것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 서양의 강대국에는 일본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자괴감, 자조심, 지나친 자기비하 등은 유학생들이 갖는 가장 큰 한계로서 이후 이들이 귀국하여 국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전체 민족운동선상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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