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봄 기운이 느껴져 가는 발 길마다 봄 꽃이 한참인 요즘 벚꽃은 만개하여 휘날리고, 노오란 개나리와 진달래, 온갖 종류의 색색들이 꽃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년고도 경주에는 지금 봄 기운마저 감돌아 가까운 시내지역을 답사하기에 그지없다. 3시간 정도 걸어 다니고 쉬었다가, 하면서 보아도 몇 몇 중요한 유적지는 다 볼 수 있다. 별도의 교통편 없이 도보로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 첨성대(국보 제31호)
먼저 경주지역 중심가에 위치한 많은 유적지 중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첨성대를 찾았다. 국보 제31호로 국내에서 가장 오랜 천문대(天文臺)이며 현존하는 천문대 중에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랜 것이 바로 경주에 첨성대(瞻星臺)이다. 흔히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되었다고 말하는 이 것은 우선 형태는 지대석과 기단은 4각형으로 8석과 12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27단의 아래가 넓은 원통형 주체부가 있는데, 여기에 쓰여진 돌은 365개이고,(책자마다 차이가 조금씩 난다) 제13단에 출입구가 나있는데, 그 아랫부분 양쪽에 사다리를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내부 구조는 제12단까지 흙이 꽉 차 있고, 제19, 20단과 제25, 26단 두 곳에 정자형으로 길고 큰 돌이 걸쳐져 있는데, 그 양쪽 끝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꼭대기에도 정자석(井字石) 2단이 놓여 있다. 꼭대기의 정자석 위에도 관측에 필요한 어떤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일부 책에는 도로의 차량 통행으로 인해서 더욱 가중되어 그렇다고 한다. 기울어짐이 해를 더 할수록 심해지는 듯 하다. 첨성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다양하며 분분하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우리와 오늘도 함께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첨성대에서 도로변을 따라 걸으면 바로 임해전지(안압지)가 나오고 옆 길로 접어들면 계림, 반월성, 경주향교, 월정교지, 사마소, 재매정지 등이 나온다. 우선 길가에서 계림을 보면 숲이 이제 막 우거져 넓은 공간에 늙은 고목들이 함께 어우려져 신비감이 감돈다. 특히 이른 시간 새벽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곳은 경주 김씨의 시조이신 김알지(金閼智)공이 태어난 곳으로 삼국유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김알지 탄강 신화는 다음과 같다. '탈해왕 4년(60)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 궤에서 나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라 이름하였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계림 경내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가 서 있으며, 내물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 월성 전경
이제 월성 흔히 반월성이라 불리는 것으로 간다. 사적 제16호인 이 곳은 신라시대의 왕성(王城)으로 추정되며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고, 성내(城內)에 건물지가 있다.
북쪽 냇가에 있는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함으로써 모양이 반달 같이 생겼다 하여 반월성(半月城) 혹은 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발굴할 때 주변에서 재성이라 새겨진 기와도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반월성을 다 도는데 짚신이 한짝 다 달아 없어졌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 월성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023보라고 되어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벽의 외곽으로 자연적인 해자와 인공을 가하여 안벽을 정연히 축조한 해자가 존재하고, 다시 외곽으로 건물지가 조밀하게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해자는 성벽 바깥쪽으로 깊은 웅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궁궐의 방어 시설인 셈이다.
월성내에는 4월 6일 활쏘기와 말타기 체험장이 조성되어 관광객들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경주 관광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내에는 보물 제66호인 경주석빙고가 있다. 석빙고는 현재 경북 안동과 현풍, 경남 창녕, 영산 등지에 남아 있는데 그 중 경주 석빙고가 상태가 가장 좋고 잘 남아있다.
→ 석빙고 외부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의 빙고(氷庫) 즉 얼음창고이다. 출입구는 남쪽에 마련되었으며, 너비 2.01m, 높이 1.78m의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 석빙고 머리돌(위)과 명문(아래)
→ 석빙고 내부
→ 석빙고 환기공
내부는 5개의 홍예(虹霓)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천장에는 환기공을 3군데에 시설하여 외부와 통하게 하였다.
→ 석빙고 옛터(왼쪽)과 석비(오른쪽)
이 석빙고(石氷庫) 옆에는 마멸이 심하게 된 석비(石碑)가 있는데 餘於今年春任問一府之弊則氷庫之年年以木修理者爲最라 있고, 계속하여…… 崇禎紀元後再戊午六月上澣府尹趙明鎌紀라 있어, 이 석빙고의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다.
석비에는 또한 경주 부윤 조명겸이 돌로 얼음창고를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석빙고 남쪽의 입구 미석(楣石) 머릿돌에는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란 음기가 있어, 축조한지 3년(영조 14년(1738))만에 현 위치에 옮겨 개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약 100여미터 떨어진 위치에 옛 석빙고의 터인 구덩이가 남아 있다. 또한 여기서 소나무 숲이 많은 곳으로 접어들면 옛 숭신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아직도 석주와 주춧돌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 숭신전 옛터
→ 숭신전 옛터
숭신전은 1980년 월성 안의 민가 철거와 함께 지금은 동천동으로 옮겨져 있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곳이 바로 남천인데 신라시대에는 이 곳을 문천이라 하였다.
→ 문천
신라 삼기 팔괴의 하나인 문천도사(蚊川倒沙)가 여기서 유래되었는데 즉 남천의 모래는 부드러워 물위에 떠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이 남천에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문디바위’란 바위가 있고, 여름이면 이 곳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 월성 주변의 해자
월성에서 이제 안압지로 내려가다 보면 도로변에 긴 해자가 보인다. 이 곳이 바로 월성 해자인데 인공적인 일종의 방어시설인 셈이다. 인왕파출소에서 건널목 횡단보도를 건너면 안압지이다.
→ 안압지 전경
안압지(雁鴨池)는 대궐에서 잔치하던 전당인 임해전의 정원에 파놓은 못으로 주위에는 높고 낮은 산을 만들고 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을 꾸몄는데, 물 위에는 언제나 부평초(浮萍草)가 떠 있어 바람이 불면 풀무더기들이 구름처럼 떠다니기에 그 정경을 가리켜 ‘압지부평’이라 한 삼기 팔괴 중의 한 역사의 장소이다. 안압지를 사실상 들러기 전에 국립경주박물관에 안압지관에 들러서 미리 사전 지식을 알고 오는 것도 또 다른 안목으로 안압지를 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 안압지 입수부
사적 제18호인 안압지는 임해전(雁鴨池)지라고도 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군신(君臣)이 모여 잔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문무왕 14년(674) 기록에 보면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와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하였고 문무왕 19년(679) 기록에 "동궁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경순왕 5년(931)에는 고려 태조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곳도 바로 임해전이다.
안압지 서쪽의 건물지는 신라 동궁의 건물터임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고, 안압지와 동궁지의 발굴조사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에 걸쳐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하였다.
→ 안압지 모형
그 결과 안압지의 모습이 거의 확인되었고, 각종 와전류와 신라의 생활용기, 불상, 건축부재, 목선, 산양, 사슴, 말, 돼지 등의 동물 뼈 등이 출토되었다. 예전에는 중간에 일제시대에 세운 호림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현재는 황성공원으로 옮겨져 활궁터로 활용되고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이름은 월지(달못)이다. 임해전은 동궁속에 있는 건물이며 잔치하는 건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을 지나서 뒷길로 내려가면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가 있다. 이 곳에서 다리를 건너보면 각종 석재들을 쌓아 놓은 곳을 볼 수 있다. 이 곳이 바로 효불효교지(孝不孝橋址 : 경상북도 기념물 제35호)이다.
→ 효불효교 발굴당시
이 곳이 효불효교(孝不孝橋)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시대 아버지 없는 일곱 형제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하루는 모두가 잠든 밤중에 어머니가 차가운 내를 맨발로 건너 외간 남자를 만나 정을 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들이 합심하여 어머니가 편히 내를 건너다닐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리가 어머니에게는 효도의 다리이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의 다리이므로 후세사람들이 효불효교(孝不孝橋)라고 불렀다는 것이며, 아울러 일곱 형제가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칠성교(七星橋)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 발굴조사후 효불효교
예전에는 무너진 다리의 각종 석재들만 있었으나 2002부터 2003년 3월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한 결과 다리는 교대 및 교각을 모두 대규모의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든 석교(石橋)로서 규모는 길이 최소 55m, 상판 너비 최소 12m, 교각높이가 약 5m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신라 석조 교량의 실체가 확인됨 셈이다.
→ 칠형제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효불효교 옆 공덕암
현재 옆에는 칠 형제를 기리기 위한 작은 암자인 공덕암이 있고, 칠 형제를 기리기 위해 만든 암자라서 있지 칠성교라고 적혀 있다. 이 곳 반달마을에는 주변이 다들 매운탕 집으로 유명하다. 그 중 반월 매운탕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집이다.
→ 왕정골사지 옥개석
주변에는 인용사지, 천관사지 등이 있으나, 왕정골에 있는 무너진 석탑의 옥개석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았다. 이 곳은 일반인들이 거의 찾지 않는 장소이다. 옥개석이 얼마전 까지는 2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하나만 남아 나 뒹굴고 있는데 하나는 아마도 어느 순간 도난 당한 듯 하며 지붕돌은 규모가 크고 잘 남아있다. 멀리 반월성 바로 앞에 보이는 계곡으로 경주박물관이 보이고 주변으로는 경부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위치이다.
최치원 선생과 관련 있는 상서장에서 조금 더 반대편으로 떨어진 장소이다. 이 곳에서는 등신대 석불입상 1구가 현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고 전한다. 이제 걸음을 내딛어 사마소로 향했다.
→ 사마소(위)와 사마소 현판(아래)
경주 사마소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 현재 교동 최씨 가옥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 주변에는 요석궁, 재매정 등이 위치해 있다. 도로변 바로 옆에 있어 찾기는 쉬운 편이다.
사마소(司馬所)는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이 조직하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장소이다. 연산군 때에는 생원, 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며 또한 백성들에게 양식을 빌려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창건 연대가 확실치는 않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영조 17년(1741)에 다시 세워 '풍영정'이라 하였으며 건물 측면의 사마소란 현판은 영조 38년(1762) 당시의 부윤(府尹) 홍양한(洪良漢)이 써서 건 것이다. 함께 있는 병촉헌(炳燭軒)은 순조 32년(1832) 생원 최기영이 세운 것이다.
원래 이 건물들은 이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지의 북쪽 교대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으로 옮겼다. 내부에는 현판들이 걸려 있어 이 건물의 내력을 알 수 있다.
→ 석탑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
→ 경찰서내 파손된 석탑
이제 경주 시내 중심가의 경주 경찰서내에 있는 탑을 찾아간다. 경주역에서 터미널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조흥은행 사거리에서 경주여중 쪽으로 가면 경찰서가 있다.
경찰서 내에 있는 이 탑은 온전한 탑은 아니고 파손된 탑을 부분적으로 쌓아 올린 것인데 특이한 것은 탑 몸돌에 사방으로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사방불의 형태이다. 외동 인근에서 옮겨졌다는 설과 현곡면 어디에서 옮겨졌다는 등 정확히 어디에서 언제 옮겨다 놓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 집경전지(왼쪽)와 집경전구기(오른쪽)
현재 경주여중 일대는 집경전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집경전(集慶殿)의 이름은 조선 세종(世宗) 24년(1442)에 붙여졌으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태조진전(太祖眞殿) 또는 수용전이라 하였고, 태조 7년(1398) 이 곳에 건물을 지어 태조의 진영을 봉안했다고 하나 지리지(地理志)에는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 영전(影殿)이라 하였다. 세종 24년 부윤(府尹) 김익생(金益生)이 개건(改建) 하였다고 한다. <동경잡기>에는 태종 때 지었으며,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릉 강원부 이안의 집으로 영정을 옮겼다고 한다. 조선 예종(睿宗) 1년(1469)에 누각일영(漏刻日影)을 두게 하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 후 인조 9년(1631)에 불타 버린 것을 그 해에 다시 세웠다. 비(碑)는 현재 경주여자중학교 교정 동편에 있다. 전면에는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 음각되었고 뒷면에는 “崇禎紀元後 三戊午 四月”, 즉 영조(英祖) 14년(1738)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정조 22년(1798) 4월에 집경전지라고 쓴 오금석의 비문만 세워 두었는데 글씨는 정조의 어필이라 설명하고 있다. 현재 계림 초등학교로 가는 주택가 소방도로 가장 자리에 위치하는 석구조물은 사각형의 터널모양으로 축조하여 남북으로 관통된 내부공간을 마련하였다. 지금은 그 자리만 유지되어 오고 있는 인근의 집경전지와 관련이 있는 보관고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자세히 석조물을 살펴보면 당간지주의 윗 부분과 아래 부분들도 볼 수 있다. 주변에는 또한 경주읍성, 경주 동헌 등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경주의 중심지에도 천년의 역사를 말하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 유적지들을 먼저 돌아보는 것도 또 다른 묘미가 있을 것이다.
늘 주변에 가까이 있어 소홀히 지나가는 유적들인 만큼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며 또 다시 답사의 길을 주변으로 옮겨 나아간다. 아직도 도심 속에는 미처 우리에게 잊혀져 가는 유적지들이 남아 우리의 발길을 오늘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