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7번 : 도보여행이 가르쳐 준 것-- <부분과 전체>
글쓴이: 박은숙
등록: 2005년 7월 8일 13시 38분 읽음: 64
하이젠베르크의 회고록인 <부분과 전체>는 제가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오래전 김용옥 선생이 TV '논어 강의‘ 시간에 이 책에 대해 잠깐 언급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을 때 원자 분열의 이론을 연구했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깊은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고 몹시 괴로워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말이죠. <부분과 전체>에는 그 이야기뿐 아니라 중요한 것들이 참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하이젠베르크라는 인물에 대해 그저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탔던 과학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뛰어난 과학자일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에도 탁월했던 예술적 감성의 인간이었고 또 문학과 철학에도 대단히 깊은 인문적 지식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참 놀랐습니다. 그런 사실은 하이젠베르크뿐만이 아니고 그가 교유했던 많은 친구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죠. 한마디로 그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의 수준을 잠깐 엿볼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그들이 그렇게 높은 인문학적 지식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독일 교육제도도 한 몫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등학생이었던 하이젠베르크가 학교 지붕위에 누워 빈둥(?)거리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그리스 원전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시의 전시 상황이 가져다 준 느슨한 여가 덕분이긴 했지만, 어쨌든 물질의 최소단위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에 궁금증을 갖고 오랜 세월동안 그 주제를 천착하게 된 것도, 결국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필연적 요인이었다고 느끼게 되는 거지요.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중요한 발견이나 연구 결과는 그렇게, 한 천재가 난 데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가져오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연마되고 축적된 인문과학적 전통과 풍토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도 새삼 느끼게 되구요. 하여간 하이젠베르크는 그 때 플라톤의 사변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물질의 최소부분에서 종국적으로는 수학적 형식에 부닥치게 된다는 사실에 매혹당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자연 현상들의 거의 풀 수 없는, 그리고 통찰할 수 없는 조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수학적 형식을 발견할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요.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일반적인 불안’ 속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플라톤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당시 그들에게서 사라져버린, 또는 접근하기도 어려워진 자연현상의 질서라는 것을 인식했다고 믿었다면, 그 ‘질서’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고 자문합니다. 유럽의 옛 구조가 전쟁(1차)을 통해 파괴되고, 젊은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속에 빠졌으며, 기성세대들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가 가졌던 ‘질서’에 대한 의문은 단지 자연과학이나 학문 분야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고 느껴집니다. 그건 오히려 어떤 철학 또는 에토스의 문제였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런데, <티마이오스>와 관련된 체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가볍게 언급을 하고 넘어가지만 제겐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프룬 성(城)에서 열린 젊은이들의 시국 토론회에 친구의 권유로 참석하게 된 하이젠베르크는 정열적으로 행해지는 젊은이들의 토론과 논쟁을 들으며 또다시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데, 그 때 그에게는 하나의 계시와도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 오랫동안 토론을 듣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게는 중심의 부재가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졌고, 마침내는 생리적인 고통으로까지 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논쟁의 미로에서 중심의 영역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 시간은 흘렀다. 연설은 계속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이 속출하였다. 성곽 뜰 위에 비친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고, 마침내 더운 여름 날씨는 회청색의 황혼으로 변하였으며, 이윽고 달빛이 밝은 밤이 되었다.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속에 바이올린을 가진 한 젊은이가 성의 앞뜰 발코니에 나타났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바하 작곡인 <샤콘느>의 라단조 협화음이 우리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바로 이때를 계기로 하여 중심으로의 재결합이 갑자기 회복되었다.... <샤콘느>의 분명한 音形은 찬바람과 같이 안개를 갈라놓았고, 그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던 예리한 구조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악의 언어로써, 철학의 언어로써, 그리고 종교의 언어로써 중심적인 영역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플라톤과 바하에서도 가능하였고, 지금과 미래에도 가능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체험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그때 느꼈던 ‘중심으로의 재결합’, 혹은 중심으로의 회복, 다시 말해 ‘질서’에 대한 감각은, 어쩌면 예술가의 혼을 강타하는 영감이나 직관과도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었을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 모든 가치의 혼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사회질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 배후엔 어떤 질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고 표현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라는 낙관적인 전망과 비전은 어떤 논리나 이성적 추론으로가 아니라,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영혼을 뚫고 들어온 바하의 샤콘느 음률이 주었던 것이죠. 사실 그런 순간은 누구라도 이따금 경험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체험했던 것만큼 그렇게 극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암울하고 회색빛이고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어두운 상황 속에서, 문득 나뭇잎에 비추이는 햇빛의 고요한그림자를 보는 순간, 또는 우연히 듣게 된 어떤 음악의 한 울림이, 우리에게 신적 질서와 조화를 엿본 듯한 충만감을 주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지요. 일견 온갖 모순과 비참함, 괴로움의 덩어리로 보이고 느껴지는 이 세계의 배후에는 분명 완전하고도 영원한 신의 나라와 질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만큼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역학과 관련된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수학을 계산하다가, 드디어 수학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는 완전한 양자 역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군요.
“처음 순간, 나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원자 현상의 표면 밑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美의 근거를 바라보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자연이 내 눈 앞에 펼쳐 보여준 수학적 구조의 풍요함을 추적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든 현상의 표면 밑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의 근거를 바라보는 느낌은 과연 어땠을까요. 깊숙이 감추어진 신의 질서, 그 신비와 비밀을 알아낸 듯한 순간의 감격은 아마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여간 하이젠베르크는 그 후 양자 역학이론을 더욱 깊이 연구하게 되는데, 양자 역학의 발견이 가져온 정신적, 철학적 혼란과 당혹감 속에서 당시 물리학자들이 얼마나 고민하고 괴로워했던가를 그 책에서 생생히 볼 수 있었던 것도 감동적이더군요. 사실 <부분과 전체>는 다루어지고 있는 대화의 테마라든가 주제가 과학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 상당히 무게있는 철학서라고 해도 될 정돕니다.
기차비가 없어서 이웃 도시에서 열리는 과학 세미나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하이젠베르크의 지도 교수가 여비를 대주었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가 즐겨 떠나곤 했었던 도보여행이 말해주듯 물질의 궁핍이 오히려 더 풍요로운 정신을 연마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과 상품의 논리가 되어버린 요즘의 '관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정한 여행인 ‘도보여행’을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었던 풍토가 참 부럽더군요. 그는 가끔 그렇게 친구들과, 때로는 혼자서 도보여행을 떠나서 연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깊은 성찰에 잠깁니다. 어쩌면 그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가끔씩 여행을 떠나며 얻을 수 있었던 깊은 사색과 성찰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예술가의 혼 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예술적 영감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귀중한 통찰은 한 사람의 치열하고도 고요한 내적 기다림 속에서 마치 깨달음처럼 오는가 봅니다.
또 인상깊었던 것은 과학자들이 자주 세미나와 학술대회를 열어 서로간의 연구 결과를 교환하고 토론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학술대회에서 유명한 아인슈타인과도 만나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지요. 그 자신,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뒤집어엎는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불확정성의 원리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하던 모습은 아이러니하더군요. 외계의 시공간 안에서, 확고한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물리학적 현상들의 객관적 세계를 연구하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아온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발이 디디고 서 있는 발판을 제거해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양자 이론이 이미 물리학의 확고한 구성요소가 되어 버린 지 오랜 후까지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지 못했다는데, 그런 아인슈타인에게 닐스 보어는 “신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군요.
양자역학에 동의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뿐 아니라, 양자물리학을 이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던 닐스 보어와 파동역학의 슈뢰딩거까지도 서로 간에 어찌나 치열한 토론을 했던지, 둘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책 속에 재현해 낸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보어의 초청으로 보어 집에 머물며 대화를 진행했던 슈뢰딩거는 그만 발병을 하고 맙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토론이 극도의 긴장을 몰고 온 탓이었으리라 하이젠베르크는 생각하죠. 고열과 감기로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하는 슈뢰딩거를 보어 부인이 간호하는 와중에도, 보어는 병상 모서리에 앉아 “그러나 역시 당신은 ... 을 아셔야 할 겁니다”라며 되풀이했다는군요. 이 일화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현상의 시공적 서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훌륭한 물리학자에게조차 확신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또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한번은 하이젠베르크가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그가 양자 역학의 원리에 대해 강연을 하고 났을 때 그는 미국인들이 그 양자 역학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나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양자 역학이라는 것이 지금껏 상식적으로 알아왔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는, 또는 포기하게끔 만드는 충격적인 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의구심을 얘기하자 미국인들은 우린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이론이든 수용할 수 있다는 식의 답변을 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실용주의적이고 도구적인 사고방식에 다시 한 번 놀랍니다. 그에게는 과학이나 철학은 그런 실용주의적인 사고와는 양립할 수 없는, 최소한 도구적 사고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었죠. 미국인은 진보에 이념에 투철한 나머지, 상대성이론은 뉴턴역학의 개량으로,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의 개량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과학은 점차적인 ‘개량’으로 진보해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에서 ‘개량’이란 있을 수 없는 개념이라고 반박하고 나섭니다. 뉴턴역학은 뉴턴역학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개량될 수 없는 하나의 엄정한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이론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는 경험영역이 존재하고 따라서 그에 맞는 새로운 개념구조가 필요하기에 등장한 새로운 개념체계라는 것을 역설하지요.
그러니까 ‘개량’이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두고 그것을 보충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의 것이고, 지금까지의 개념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종류와 범위의 변화에 접근하는 실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깁니다. 연속적인 진보라는 개념은 과학에서 모든 힘과 엄정성을 빼앗고 마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렇게 순수한 실용주의적 방법으로 추구해나가려 한다면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영역만을 개량할 뿐이고, ‘위대한 연관성’ 같은 물음은 아예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이미 그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으며, 분명히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하나의 연관성”의 존재, 그것의 발견과 이해야말로 과학의 영역이고 사명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하는군요.
그리고 나치가 극성을 부리는 독일에서 외국으로 망명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가 결국 망명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부분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나치의 탄압과 이민을 권유하는 친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민을 간다는 것은 독일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광신적인 무리들에게 아무 투쟁없이 넘겨주는 격이 되는 것이라며,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일정한 주위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영역에 태어나서 매우 어릴 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가장 적절하게 성장할 수 있고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일로 귀국하죠. 그건 지식인의 강한 책임감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 여겨집니다. 자신의 안전만을 바라보는 ‘부분’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를 생각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책 어디에서도 ‘부분과 전체’에 관한 설명이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회고록의 제목을 ‘부분과 전체’로 삼은 이유를 책 전체를 통독하고 난 후에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분과 전체의 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지나치게 부분에만 몰두하거나 전체만을 바라보는 식의 편향된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이니까요. 세분화된 전문성에 파묻혀 전체성을 보지 못하는 오늘날 전문가들의 행태를 보면, 부분과 전체에 관한 균형잡힌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뛰어난 과학자이면서도 ‘부분’ 속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제 보기엔 그가 인문적 교양과 철학이 철저히 몸에 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과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지만, 가까이 하려 들지 않았지만,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