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련 동문 이광재 법우 글 소개) 풍요 속에 물든 승가사회의 결핍
인간사회에서 결핍이 속박이라면 풍요는 아편이다결핍이 단순성을 강요한다면 풍요는 복잡성을 방종한다 다소의 결핍이 신경을 팽팽히 긴장시킴으로써 자기보존의 길을 열어간다면 과도한 풍요는 신경을 느슨히 이완시켜서 파멸의 늪지로 빠뜨린다. 결핍이 기본이라면 풍요는 덤이다. 인간은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의 생산을 지향하지만 결핍을 면하지 못한다. 결핍은 삶을 규정하는 기본적 조건이다. 결핍이 진화의 토대요 씨앗인 것이다. 결핍은 인간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을 있게 하는 창조주다. 결핍은 자기 절제와 자원 절약과 잉여의 저축과 이웃과의 나눔과 기술의 전수와 후세의 교육 등 인간에게 아주 유익한 것들을 제공한다. 결핍은 나눔, 베품, 약자에 대한 보살핌, 자비, 애정, 정서적 유대와 같은 인간사회의 건강성과 윤리성을 진작케 하는 에너지다. 전쟁이 없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소박하지만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나눔에 인색하지 않고 인간적인 것은 바로 결핍이 주는 건강성 때문이다. 행복지수는 풍요의 만끽이나 가짐의 만족에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결핍은 행복의 필요조건이란 걸 느끼게 된다.
조선 오백년 승가사회는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 결핍의 시대였다. 일제치하 땐 말할 것도 없었다. 산업화가 급진전된 1980년대까지도 결핍의 시대였다. 不耕不織의 탁발로는 사원경제를 지탱하기 어려웠기에 一日不作 一日不食하면서 땅의 개간과 작물의 재배 등으로 사찰경제를 운영했다. 이를 위해 노동은 필수였다.노동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노동물 속에 의식을 붙박아 놓으며 학문할 짬을 주지 않는다. 반면에 노동은 또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노동대상(작물 등)과의 일체감 형성, 작물의 성장과정에 참여를 통해 자족감과 성취감을 얻는다. 공부를 하는 스님에게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공부의 재료인가. 그랬던 승가에 보시금이 늘고 사찰입장료와 정부지원금이 제공되면서 사찰경제는 결핍에서 이내 잉여와 풍요로 바뀌었다. 결핍이 사라진 승가에서 노동의 내면화에 의한 자기절제와 대중공사에 의한 상호규율과 계율정신에 의한 청규가 힘을 잃었다. 결핍이 줄어 들수록 승가사회에서 원로들도 힘을 상실해 갔고 수행가풍은 형해화해 갔다. 청정승가를 표방하던 사찰에 돈이 흘러들자 돈을 쥐고 있는 스님이 권력층이 되었다. 스님들의 위계질서가 변화했고 이판 위에 사판이 군림하게 되었다. 걸망을 메고 산천을 주유하던 수행납자들을 어느 때 부터인가 볼 수 없게 되었다.
이판승(수행승)들의 위엄이 살아있을 때의 사원 인심과 사판승(경제행정승)들에 의해 장악된 사원 인심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사찰 권력의 변화가 도시화와 교통 통신의 급발전과 맞물려 승가사회의 수행정신의 퇴보를 가져왔다고 보여진다.
자본주의의 퇴행적 단면은 돈이 곧 종교요 권력이 되는 체제라는 것이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은 자기 통제적 윤리의식이나 인간에 대한 연민, 자비심 같은 면이 약화되어 있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자기들이 쥐고 있다는 자만심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특정부분에 가해지는 차별이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지배논리를 가지고 있다.
승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을 가진 스님들은 자기 통제적 윤리의식이나 인간에 대한 연민, 자비심 같은 면이 약화되어 있다. 이판이 사판을 리드하던 시대가 끝나고 사판의 시대가 열리자 사판에게 이판은 타인일 수 밖에 없는 동전의 다른 한면과 같은 이들이 되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승들에게는 하루 몇끼 공양과 잠자리와 약간의 노잣돈, 그 외 무엇이 필요하랴. 잉여의 자원은 사판들의 몫이 되었다. 깨달음을 향한 투지와 자기를 완성하고자 하는 투철한 가치관이 없는 스님들은 남아 도는 시간을 사판들과 어울리며 욕락에 맛을 들였다. 감각이 의식을 붙들어 매었다. 한번 역행하기 시작한 수레는 굴러갈수록 업력이 가해져 승가사회를 퇴행시켰다.젊은 스님들의 70~80%가 미래의 꿈이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같은 원력이 아니고 주지가 되는 것이라고 하니 돈과 권력이 얼마나 스님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다.
이제는 그들을 비판하는 모든 정견(正見)도 정사유(正思惟)도 정어(正語)도...... 정(正)을 말하는 자는 바로 사(邪)된 자로 폄훼되었다. 바른 말을 하는 자, 쓴 말을 하는 자, 비리를 알리는 자, 대항하는 자는 모두 삿된 무리로 표방되고 낙원에서 추방되었다.승려들은 정혜쌍수의 선맥을 진작한 보조국사 지눌을 종조로 한 한국의 선불교 유산을 한껏 소비하면서 타락해 갔다. 사판승들은 빼앗은 남의 땅위에 동물농장을 세우고 풍부한 단백질을 섭취하며 욕망의 곳간을 채워갔다. 얼굴엔 삶의 흔적 주름하나 보이지 않고 나이 값 검버섯도 보이지 않으며 강파른 성질조차 내보이지 않는 완결된 위장술로 불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타락의 진화다. 아니 그것은 너무나 슬픈 승가의 퇴보다.우리는 지금 돈의 위력앞에 처절히 굴복한 승가사회를 목도하고 있다. 너무 아프다. 수백년을 쌓아서 만든 위대한 승가의 수행풍이 돈의 위력 앞에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단 말인가. 무아를 밥먹듯이 말하고 무소유를 차마시듯 내뱉는 승가에서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돈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깔려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마치 거대한 해양판이 대륙판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소멸해 가는 느낌이다. 엿가락이 휘어지고 흐물흐물 녹아서 흔적없이 사라져는 느낌이다. 막강한 자본시스템에 섬처럼 남아있던 봉건체제가 하루아침에 괴멸하는 느낌이다.
이런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단은 부처님 승단이라 말하기가 부끄럽다. 데와닷다의 교단보다 훨씬 못한 삿된 교단이 되었다. 데와닷다는 교조주의적 극단적 수행집단으로서 一團의 무리를 거느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적하는 교조가 되려고 했던 문제의 수행자였지만, 한국의 一團의 승려들은 수행을 멀리하고 불타는 욕망에 몸을 맡긴 자들이니 훨씬 질이 안좋다.
한국불교의 명맥을 이어 온 근현대 선승들이 그립다.그분들은 우리 곁을 떠났다. 스쳐 지나듯 와서는 눈물 흠뻑 흘리고 가버렸다. 거친 기행조차 무색무취했던 경허선사의 보살행은 신화의 소재가 되어 버렸고, 보이는 대로 말하는 데도 사람들 의식에 돌을 던졌던 성철스님의 위세는 종정스님의 잠꼬대 같은 말씀 속에 묻혀 버렸다. 법정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무소유 정신은 그 아랫대의 전횡에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청정승가의 수행풍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어린이에게 들려 줄 자비롭고 고고한 스님 이야기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할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가 따르고 추앙하는 지도자 스님을 만날 수 없을 지 모른다. 긴 긴 수행으로 파랗게 날이 선 스님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사판승에 얹혀 생명을 부지하고 사는 수좌승들의 비루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살지 모른다. 이것이 어찌 돈의 파괴성 때문에 온 佛家의 참변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나약한 존재성에 함몰된 인간의 탐진치에 대한 성찰의 부재에서 온 것이다.
급변하는 인간사회에서 승가사회는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적응하려는 삶의 지혜의 부족에서 온 것이다. 구래의 좋은 관행을 진작시키고,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제도화하고, 제도를 실행한 후엔 정착시키고, 교육시켜서 이익되게 하는 일련의 시스템화 과정을 소홀히 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출가승을 부려만 먹고 교육시키지 않고 방치해서,바루와 가사와 교육과 의료와 노후를 책임지지 않아서,불자대중을 교화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포교하지 않아서,끼리끼리 해먹으려고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공의제를 멀리해서, 스님들이 돈을 집행하면서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지 않으며 감리감찰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조계종 승가사회를 보면 그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몸이 마음의 주인이다. 마음은 단 한번도 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이 사회가 증명한다.승가사회에선 몸을 버리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얽매여 버린 마음들이 도처에서 나뒹굴고 있다.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마음이 몸의 사슬에 묶인 곳이 승가다. 몸이 가둔 감옥살이가 어디 속가 범부들만의 일이겠는가! 승가사회가 이렇게 변질된 것은 풍요라는 님 때문이다. 실상 풍요가 무슨 죄 있으랴만 죄인을 찾지 못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풍요'라는 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본다. '결핍'이라는 놈이 빚은 참극을 고상한 '풍요'라는 님에게 뒤집어 씌우는 자도 참 웃긴 놈이다. 조계종단을 망친 자는 돈으로 승려들의 마음을 붙들어 맨 자였으나, 아무튼 조계종단의 평화와 승려들의 복리를 이끌 자도 돈을 이롭게 잘 쓰는 자일 것이다.
그런 사부대중이 공생하는 미래의 승가집단에선 풍요가 기본이고 결핍이 덤인 집단이 되길, 풍요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원동력이 되길, 풍요가 나눔, 베품, 약자에 대한 보살핌, 자비, 애정, 정서적 유대와 같은 인간의 건강성과 윤리성을 진작케 하는 에너지가 되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