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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주 신비의 세계 스크랩 태극기의 모든 것
강변친구 추천 0 조회 47 08.08.16 22: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한민국의 국기-태극기의 모든것

seo2702 2006.08.16 00:55

조회 18,894

대한민국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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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 독립기념관 소장.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1981년 기증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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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라고 한다. 1883년(고종 20)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국기 제정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다.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측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가하였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조정의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使) 겸 수신사(使)인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배를 타고 도일할 때, 그 동안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사괘()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으고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때 메이지마루에는 후일 개화당의 주역이었던 서광범(김옥균() 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베[]에 도착, 니시무라야[西]에 숙소를 정하고, 이 건물 옥상에다 태극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하였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이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태극문양과 건곤감리()의 4괘로 이루어져 있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태극문양은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우주만물이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발전하는 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발전하는 모습을 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화한 것이다. 그 중 건은 우주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은 땅을, 감은 물을, 이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태극기는 그 후 널리 보급되었으나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서 사괘와 태극양의()의 위치를 혼동하여 사용해오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의 도안과 규격이 통일되었다. 국기의 제작·게양·관리 등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에 의거, 시행되고 있다.

① 국기의 게양일과 시간: 국경일·한글날·국군의 날·현충일·국장기간·국민장일, 기타 정부가 지정하는 날, 지방자치단체·공공단체·각급학교 등은 연중 국기를 게양한다.

② 경축할 때: 깃봉과 기폭 사이를 떼지 않고 단다. 대문에 세울 때는 문 밖에서 보아 왼쪽에 곧게 세운다. 아파트에서는 밖을 향하여 베란다 오른쪽에 세운다.

③ 조의를 표할 때: 깃봉에서 기폭만큼 내려서 반기()를 단다. 깃대가 짧을 때는 깃대의 한중간에 단다.

④ 외국기와 같이 달 때: 태극기를 최우선의 위치에 단다. 태극기와 외국기 하나를 같이 세울 때는 좌우에 따로 세우거나 서로 엇갈리게 한다. 좌우에 따로 세울 때 태극기는 단상을 향하여 왼쪽에 세우고, 서로 엇갈리게 할 때는 태극기의 기폭은 단상을 향하여 왼쪽에 오게 하고 깃대는 밖으로 가게 한다. 세 나라 이상의 외국기와 함께 세울 때, 홀수인 경우는 태극기를 중앙에 달고, 외국기는 국명의 알파벳 순에 따라, 단상을 향해서 왼편이 둘째, 오른편이 셋째, 그 밖으로 왼편이 넷째, 오른편이 다섯째의 차례로 달며, 짝수인 경우는 태극기를 왼편 첫째로 하고, 외국기는 국명의 알파벳 순에 따라 오른쪽으로 차례차례 단다.

⑤ 기폭만 달 때: 바로 달 때는 건(≤)을 왼쪽 위로, 감(℃)을 오른쪽 위로 오게 한다. 늘여서 달 때는 건(≤)을 오른쪽 위로, 이(∞)를 왼쪽 위로 오게 한다. 확대해서 늘여달 때는 길이와 나비를 3:2의 비율로 하고, 실내 벽면이나 건물 정면 등에 깃면을 길이로만 늘여서 달 때는 늘인 부분을 깃면과 같은 흰색으로 한다. 

태극기 유래

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태극기라는 말의 유래
한국 태극문양과 중국의 태극문양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태극문양
태극기와 유관순
8.5특집 태극기 이해

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당시 조선왕조를 나타내는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2년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나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전까지 27여년 동안은 '조선국기'로 불리어져왔었다.

태극기라는 말의 유래
 '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채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본 경찰은 탑골공원이며 종로거리이며 동대문 성벽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그렇게도 많은 태극기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당혹한 나머지 태극기를 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팔뚝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왼쪽 사진은 일본 경찰이 태극기를 든 여학생의 팔을 칼로 자르는 장면이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나라를 되찾겟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을 맺을 때 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호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군함을 허락없이  정박했다 하더라도 국가를 표시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하게된 이유를 따지자, 우리 정부는 속시원하게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기라는  말 조차도 없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1875년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문호를 요구하면서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무단  정박시켰다. 이에 격분한 강화도의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우리 수비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몇 차례 불꽃튀는 교전이  벌어졌으나, 우리 수비병대는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 한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우리 수비병대가 가지고 있는 대포의 사정거리는  멀리 나가봐야 칠백여 미터 정도였지만, 일본이 무장한 대포는 그 보다  몇배 멀리 나갈 뿐만아니라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피해는 당연한  우리 수비병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는 35명이 죽었지만  일본군은 겨우 2명 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보상 요구 조차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더 피해 요구를  많이 해왔다.

 

<운요호 교전 장면. 그 당시  일본은 국기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국기?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은 수비병대 35명의 목숨을 잃은 것 보다 더  분노에 차 있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데 대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정식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측이 일본기  하나 잘 못 건드려 낭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 보다 큰 망신이 어디있겠는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한국 태극문양과 중국의 태극문양

전형적인 중국 태극문양

 

<전형적인 중국 태극문양>

 


 
태극문양하면 우선 중국의 주역에 나타나는 태극도안이 떠오르게 되어 모든 태극문양을 중국의 것으로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중국의 태극문양과 한국의 태극문양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중국의 태극문양은 음방을 검정색으로 칠했고 양방을 백색으로 칠했으며, 반드시 좌우로 대칭된 음방과 양방의 머리에는 어김없이 눈이 있는가하면 둘레에는 8괘가 배치되어 있다. 그런 반면에 한국의 태극문양은 음방을 청색으로 칠했고 양방을 홍색으로 칠했으며, 눈이 없는 음방과 양방은 좌우 또는 상하로 대칭되고 네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가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문화와 의식은 서로 모방하고 응용하는 가운데 창조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먼저냐를 따지기보다는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태극문양을 놓고 국적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태극문양

 

 회암사터의 돌계단 태극문양
회암사터의 돌계단에 태극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태조 이l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자마자 때마침 마땅히 사용할 종묘가 없어 개국공신 무학대사가 불사를 일으키고 있던 회암사를 임시종묘로 정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현재 회암사터에 남아 있는 태극문양들은 적어도 600 여년이 넘는다.

 

 

 청평사터의 돌계단 태극문양
 
옛청평사의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소맷돌에 연꽃잎 속에 쌓인 음양태극이 돋보임


 


 

 

 

태극문양은 궁궐,종묘,왕릉외에도 조선왕조를 거치는 동안 여기저기서 많이 나타는데 특히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깃발
  <해군사관학교보관중인 임진왜란당시작전도>

태극기와 유관순(柳寬順, 1904-1920)
 
조선일보에서 태극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누굴까하고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많은 응답자들이 유관순이라고 대답했다.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 때 상징 인물이자 태극기 때문에 희생된 인물이 유관순이다. 충청남도 천안 출신.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916년 기독교 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靑新)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 김구응 등의 마을 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1일(4월 2일) 아오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 날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 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서울] 복심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 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며 일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체를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글정리 송 명>
 

 1882년 9월 20일부터 1997년 8월 15일까지
115년만에 발견한 최초의  태극기
 

동아일보기사  시사신보   최초의 태극기 모습 시사신보 기사 원문  
최초의 태극기발굴 머리말   발견개요  자료발견의 의미  시사신보요지
시사신보 기사내용  기사내용분석  최초태극기의 4괘 의미
최초 태극기 제작배경 최초 태극기와 고종 한국일보도내용 태극도형의 설명
115년만에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최초 태극기의 역사 수정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야겠다고 발벗고 나선지 근 20여년만에 일본의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냈다
"
 1997.8.15.kbs tv밤9시 뉴스 인터뷰에서

   □최초의 태극기그림 발견-1997년 8월 15일 동아일보
              -
서울시직원 송명호씨가 도쿄도서관에서 찾아-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시사신보』 (1936년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되고 있다. 1882년 10월2일자 이 신문은 「조선의 유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의 국기는 옥색 바탕에 태극의 그림을 적홍색으로그렸다고 적혀있다. 이신문 자료는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47세)씨가 최근 일본 도쿄 시부야구히로오에 있는 도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 낸 것. 태극기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교수 (단국대학교)「과거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편년사나 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있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당시 시사신보의 끝부분으로 고종의 애국심이 엿보이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코 청국의 용기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그림을 그리고 네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최초의 태극기의 건곤감이 4괘의 배치는 지금과 크게 달라 좌측 상단에 양효 2개를 그린뒤 음효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 2개를 먼저, 음효2개를 나중에 배치했다. 태극기를 사용한 박영효는 1882년 8월(음력) 일본방문 수신사로 떠나기에 앞서 고종에게 일본에서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태원기자)처음으로 돌아감

최초의 태극기 발굴 발굴자 송 명 (본명 宋明鎬)


 
그림1.최초의 태극기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동경발행 「시사신보」에 소개한 최초의 태극기모
습과. 맨위에 「조서국기」라는 캡션과 함께 4괘 안에 음(청) 양(적)의 위치를 지정한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최초의 태극기 4괘는 현재의 태극기와는 달리 「손」「간」「진」「이」가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2. 최초의 태극기를 칼러 그래픽한 그림 
    
                 
머리말

    115년만에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태극기에 대한 유래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전해 왔다. 첫째는 1882년 9월 朴泳孝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선상에서 그렸으며, 둘째는 朴泳孝 수신사에 의해 그려진 최초의 태극기와 현재의 태극기 모양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유래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최초로 만들었다는 태극기의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은 채 115년이 흘러왔다. 애써 이유를 변명하자면 조선 왕조 몰락, 일본 36년의 침략과 탄압 등이 태극기의 유래를 그토록 어지럽게 했을 것이다.
 내가 태극기의 그러한 유래에 관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최초의 태극기를 찾겠다고 나선 것은 1978년 부터였다. 틈나는 대로 태극기의 각종 문헌과 자료를 열심히 수집하였으나 최초의 태극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에 대한 실물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림마저 나타나지 않은데 대해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일단 국내에는 최초의 태극기 그림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일본에서 찾기로 하였다. 1993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 나섰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몇 군데의 도서관과 박물관을 방문하여 나름대로 유익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1882년 당시에 발행되었던 신문과 잡지 목록을 수집한 것은 아주 큰 수확이었다.  그 동안 수집해 온 자료들을 토대로 정리한 「태극기 변천 5단계」를 국민일보(1995년 4월 5일자)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끈질긴 집념과 오기를 발동한 끝에 드디어 1997년 8월 8일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이 실린 시사신보(1882년 10월 2일자)를 찾아냈다. 이 기사속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은 고종황제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했다는 점이다. 박영효는 단순히 고종황제의 지시대로 그렸을뿐이다. 이러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이상 과거의 태극기 관련 기록들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자료는 곧 태극기 관련 기록을 수정해줄 유일한 근거 자료로써 그 소명을 다 하리라 믿는다.

                         1997년 10월  일   송 명 호

 1. 태극기 유래

 여러 문헌에 의하면 태극기가 우리 나라의 국기로 처음 상징된 것은 1882년이었으며, 당시 수신사 박영효(1861∼1939)가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종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일제 침략 36년 동안 처절한 압박과 함께 천태만상의 변형을 거치다가 1949년 10월 정부에서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유래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1882년에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아 태극기의 역사가 단절되어 왔었다. 그 동안 역사학계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소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마침내 1997년 8월 8일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관련 기사가 게재된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를 발견하여 52주년 광복절날 공개하므로 써 115년만에 그 실체를 역사의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

2. 발견개요

 1)발견자 인적사항

   성 명 : 송명호(宋明鎬.1950. 10. 2일생. 필명 宋 明)
   직 업 : 공무원(서울시청). 한국문인협회 회원

  2)발견자료

   자료명 : 시사신보(일본발행.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제179호)
   자료형태 : 4면 신문 축쇄판
   발견일자 : 1997년 8월 8일(1997년 8월 15일 공개)
   발견장소 : 동경도립중앙도서관

 3. 자료 발견의 의

 1882년 10월 2일자 제179호 시사신보 발견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사실상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국내의 어떠한 문헌에도 언급되지 않은 태극기 제작 경위를 최초로 소상하게 알아냈다는 점과 특히 주목할만한 일은 고종황제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도안하였다는 사실이다. 셋째로는 이 시사신보를 통해서 최초로 태극기가 우리 나라 국기임을 세계만방에 알렸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큰 의미를 전제로 하여 시사신보의 요약과 기사 내용을 분석해보고 국내 문헌에 나타난 태극기의 기록들도 곁들여서 살펴보도록 한다.

 4. 시사신보 요지

 시사신보는 1882년 3월, 동경에서 창간하여 1936년에 폐간한 일간지(일요일 휴간) 신문이었다. 이 신문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자 제179호에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 관련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이 신문을 발견하므로 써 그 동안 추측과 자의적인 상상 속에 온갖 형태로 떠올려 왔던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비로소 역사의 사실적인 기록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는「잡보」난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제정 배경과 설명을 명확하게 밝혀두었다.

   5.기사 내용

 시사신보는 4면 발행 일간지신문이었다. 관심의 대상이 된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자 시사신보의 2면은 5단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그중 3단에는「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관련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러면 이해를 돕기 위해 시사신보에 실린 태극기 관련 기사의 원문을 옮긴 다음 알기 쉽게 번역하여 그 내용을 토대로 최초의 태극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배경과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보충해보기로 한다.

  (원문)「又此흘朝鮮には國旗と云べきものなきに今度支那より來りさる馬建忠が朝鮮の國旗は支那に從ひ三角形の靑地に龍を書くべし本國支那は黃色を用るども朝鮮は支那の東方に當る邦たるを以て東は靑色を貴ぶの意により靑地を用ふべしと指示したるに國王は大に之を憤み決して支那の國旗に倣ふべからぬとして四角形の玉色地に太極の圖(二つ巴繪)を靑赤にて書き旗の四隅に東西南北の易卦を附けたるを自今朝鮮の國旗と定むる旨沙汰せられたりとあり」

 (번역)「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상의 기사 내용은 지금까지 국내의 어떠한 기록이나 문헌에도 언급된 바가 없고 오직 본 자료를 통해서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6.기사 내용 분석

 얼핏보기에는 기사의 분량이 짧은 듯하나 그 의미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는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나라 국기의 역사, 국기 제정의 배경, 국기의 도안을 태극기로 정하게된 경위, 국기의 재질, 4괘의 설명 등이었다. 지금까지 잘못 인식해 온 태극기에 대한 관념들을 정상적으로 교정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사의 기록으로 가치가 크다 하겠다.

 1)기사의 신뢰성

 먼저 시사신보에서 다루었던 태극기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성부터 언급해 두고자 한다. 그 이유로는 우리 국민과 일본간에 쌓여진 감정이 만약의 경우 시사신보에 실린 그 기사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오해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이다.  時事新報 2쪽 1단은 「잡보」난으로  수신사 일행 일본 방문 사실을 극진한 예우로 취급하면서 기사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지난 달 28일 하나부사(花房)공사와 함께 동경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최근 조선에는 정치상 대개혁이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을 보충하자면 「지난 달」이란 1882년 9월 28일을 말한 것이며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란 시사신보에서 임의대로 기사를 작성하지 아니하고 인터뷰를 통해서 기사를 작성했음을 의미한다. 기사 첫머리에 그러한 전제를 하고서 태극기에 관한 기사를 언급했기 때문에 태극기의 그림과 설명에 대해서는 그 신뢰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2)태극기 제작 배경

 태극기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우리 나라에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라고 시작된 기사가 그 사실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다.

 수신사 朴泳孝의 일본 방문에 가장 큰 업적은 독립국가의 상징인 국기를 최초로 제작 사용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면 최초의 태극기 제작 배경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국내 문헌 중에 이 분야를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한국사」(진단학회. 1961)의 한 부분을 간추려서 인용해 보기로 한다.

 국기 문제가 논의된 것은 병자수호조약(1876년)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되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정박하자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포격을 가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일본 국기를 게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포격한데 대한 책임을 속시원하게 해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챈 중국은 먼저 황준헌을 통하여 「중국의 龍旗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襲用中國龍旗 爲全國徽章)」는 간섭을 하였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하였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때 박영효는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승한 수신사 일행,영국 영사관 아스톤(W.G Aston), 선장 제임스(James)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하였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의 출발에 앞서 고종 황제가 지시한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태극기는 고베에 도착하였을 때 숙소 니시무라야(西村屋)의 옥상에 게양하였으며 이 사실을 기무처로 보고하였다. 고베 체류중 수신사 朴泳孝가 본국에 보낸 「송기무처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略)이미 각국과 더불어 통상수호한 후에는 사절을 파견할 때마다 예의상 국기가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리하여 각국의 항구에서 각국의 군함을 만나게 될 경우라면 육문 이상의 함재포를 가진 자는 반드시 축포의 예로 대하는 것이라, 이러할 때에는 각국의 사절들이 제각기 국기를 게양하여 서로 분별하는 법이요, 각국의 여러 가지 경축이 있을 때에도 국기를 달아서 서로 축하한 것이며 각국의 사절들이 회합을 할 때에도 국기로써 좌석의 차례를 표시하는 법이니 어느 나라든지 국기를 만들어 휴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영국, 미국, 중국, 일본의 각국도 우리 국기를 그려 갔으니 이로써 널리 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박영효는 수신사 일행 활동 보고서와 일본 방문중 선상에서 만든 태극기 3개(대, 중, 소)중 그중 작은 태극기를 동래부사를 통해 고종황제께 보고하였고 10월 3일에는 동경에 도착하여 왕비(坤殿) 생신 축하 연회 장소에서 다른 나라 국기와 함께 게양하기도 하였다.  박영효가 이렇게 수신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로 고종황제는 1883년 음력 1월 27일(양력 3. 6.화요일)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사용토록 전국에 공표 하였다.  이상의 문헌 소개를 참고로 하면서 이번에 발견한 시사신보의 최초 태극기 관련 기사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3)고종의 태극기 창안

 시사신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박영효가 최초의 태극기를 도안하고 그린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새로운 사실로 밝혀진 것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한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라 고종황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朴泳孝는 高宗황제가 창안한 태극기를 일본 방문 도중에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황제의 명령대로 옮겨 그린 인물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시사신보의 태극기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태극기 도안에 대하여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얼굴과 고종이 입은 태극문양이 새겨진 의상>  周易의 태극도를 그대로 그렸다느니, 중국의 압력에 의해 태극도를 그려 국기로 만들었다느니,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박영효가 단독으로 그렸다는 것은 왕권시대의 논리와는 맞지 않다는 등 별의별 억측들이 난무했었다. 이제 그러한 의구심도 이번에 발견한 시사신보에 의해 말끔히 해소하게 되었다.   이 기사에서 확인했듯이 고종황제는 마건충이 제의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였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오히려 고종황제는 국기 도안에 대하여 독창성을 발휘하여 도안의 방향에서부터 재질의 선택에까지 상세하게 지시하였다.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 하여,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홍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易掛)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

  이러한 高宗황제의 명령이야말로 태극기 도안의 독창성을 분명하게 설명해준 것이라 하겠다.

  7.태극기 도안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도안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화두의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황제가 직접 창안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 高宗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朴泳孝의 일기 使和記略(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에도 기록되어 있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時事新報에 게재된 최초의 태극기 그림.
115년만에 발견하여 1997년 8월 15일 공개하였음>








 즉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부분 5분지 2를 중심 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 숙소(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리므로 써 국왕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1)태극기 도형 설명

 태극기란 태극 무늬를 응용하여 국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렇다면 「태극 무늬」란 무엇으로 설명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이 없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태극기를 한마디로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태극 무늬를 일반적인 도형으로 표현하지 않고 사상과 철학적인 측면에서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 무늬란 둥근 원을 오직 나선형(∼, S)으로 나눈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써 마치 원 안에서 회오리가 치는 것 처럼 보이며 일명 태극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무늬 역시 네모꼴, 세모꼴, 별표 따위처럼 태극 무늬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 도형이기도 하다. 태극 무늬는 독특하게도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국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한 서민적인 생활 무늬였다.  이런 설명이 전제되지 않고 태극기를 설명한다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태극 사상과 철학만을 나열하게 되어 그 이해가 매우 어렵다. 태극사상 또는 태극도 설명을 태극기 설명으로 가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최초 태극기의 형태와 재질은 사각형의 옥색 바탕이었다. 이것 역시 앞의 기사에서 읽었듯이 고종황제가 직접 지시하였다.  태극 도형은 원을 수직으로 나누어 머리 부분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회전을 시도한 부분을 홍색 칠하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회전을 시도한 부분을 청색 칠하여 두 극이 좌우 대칭 되도록 하였다. 이 모습은 마치 팔짱을 깊게 끼고 돌아가는 형상과도 같아 보인다. 두 극의 머리는 굵고 반면에 몸통은 짧으나 회전을 시도하는 모습이 역동적이어서 마치 힘찬 회오리를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주역 등 어떠한 태극 도형과도 차별되도록 도안되었음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가 있다.

  2)4괘의 설명

 최초 태극기의 4괘는 현재처럼 건(乾). 곤(坤). 감(坎). 이(離)가 아니고 그림에서 보았듯이 손(巽), 간(艮), 진(震), 이(離)였다. 그러나 괘의 의미는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고종황제는 최초의 태극기를 그릴 때 4괘의 의미를 동서남북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라는 부분이다. 역괘중에 태극기의 네 귀퉁이에 그려진 4괘의 설명을 평범하게 동서남북이라고 강조한 것은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4괘가 동서남북을 의미하였다면 태극원은 주역의 음양으로 해석되는 해와 달이 아니라 우주 천체를 으뜸으로 상징하는 하늘과 땅 또는 태양과 지구로 설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현재의 태극기 설명은 주역에 근거하여 무궁한 사상을 주입시키고 온갖 형용사로 상상을 유도하고 있어 4괘와 태극의 문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국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8.최초의 태극기 그림 확인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진 것은 데니(Denny)씨 소장 태극기로써 현재 독립기념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이른바 데니 소장 태극기로써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 시사신보에서 태극기 그림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를 데니씨 소장 태극기가 아니면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듯 했다.  그러나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정확한 사실과 기록에 의해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확인하게 되었음은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 관한 일이자 태극기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史料的 가치로 써 매우 귀중하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時事新報의 기사와 국내의 문헌들을 종합해 볼 때 최초의 태극기가 완성된 날은 1882년 9월 25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수신사 일행이 고베에 도착한 9월 25일 바로 그날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서 태극기가 처음 으로 휘날렸다라는 기록이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일 뒤에 수신사 일행이 동경을 방문하자 시사신보는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태극기 관련 기사와 함께 태극기의 그림을 소개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 모습이 세상 밖으로 나타난 9월 25일에서부터 이 사실이 외국의 신문에 의해 대외적으로 알려진 10월 2일까지는 불과 일주일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박영효가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그렸다는 당시의 태극기 실물 3개에 대한 존재의 기대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한 시사신보에 실린 태극기 그림이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이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최종적으로 취재· 확인하여 국민들에게 감격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와 힌국일보의 기사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최초의 태극기 그림 발견

  (동아일보 1997. 8. 15 금요일 1면)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1936년 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882년 10월 2일자 이 신문은 「조선의 유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의 국기(태극기)는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형을 적, 청색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이 신문 자료는 서울시 총무과 송명호(47)씨가 최근 동경 시부야구 히로오에 있는 도립도서관에서 찾아낸 것.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단국대사학과) 교수는 「과거 신문의 주요 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평년사나 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 동안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 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당시 기사의 끝 부분으로 高宗의 애국심이 엿보이는 대목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하였으나 국왕(高宗)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의 용기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형을 홍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최초 태극기의 건곤감이 4괘의 배치는 지금과 크게 달라 좌측 상단에는 양효 2개를 그린 뒤 음효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를 먼저, 음효 2개를 나중에 그렸다.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는 1882년 8월(음력) 일본 수신사로 떠나기에 앞서 高宗에게 일본에서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태원기자)

 

최고 태극기 그림 발견

(한국일보 1997. 8. 15 금요일 31면)

  현존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가 새로 발견되었다. 태극기 역사를 추적해 온 송명호(47. 서울시청 총무과)씨는 14일 일본 1882년 10월 2일자에 실린 태극기를 공개했다.  이 태극기는 옥색바탕에 태극 무늬가 상하가 아닌 좌우로 갈라져 있고, 4괘의 모습이 손, 간, 진, 이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돼 있어 현재 태극기의 건, 곤, 감,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 신문은 4면짜리 타브로이드판으로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 경제 전문지. 해당 기사에 따르면 1882년 9월 20일 인천항을 떠난 수신사 일행이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이 태극기를 그린 뒤 25일 고베항에 도착해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이를 게양하였다. 박영효는 이미 조정이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데다 당시 일본이 본격 외교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어서 출발전 高宗으로부터 국기 제작을 허락 받고 물감 등 재료를 챙겨 배에 올랐다. 이 배에는 김옥균과 서광범 등 개혁파 지식인들이 동승한 것으로 이 신문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는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 태극기는 4괘의 순서는 현행 태극기와 같지만 태극에 회오리가 많아져 가늘고 길다. 이어 1896년 독립신문의 제호에 태극기가 등장했으며 당시 이화학당 교장 페리씨의 사택에서 또 다른 태극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현행 태극기는 49년 이승만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42인 태극기제정위원회」에서 확정, 법제화한 것이다. 서울대 사학과 신용하 교수는 「이 같은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1882년 가 쓴 사화기략에 태극기를 이미 만들어 섰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물로 확인된 것으로써는 최고의 것으로 추정된다고」말했다(장병욱 기자)  

 9.최초의 태극기 관련 기록 수정

 앞에서 제시하고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진 1882년 10월 2일자 時事新報를 통해 그동안 미확인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제작 배경 및 경위를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전해오거나 잘못 기록되었던 태극기의 역사를 올바르게 수정할 근거 자료를 발굴한 셈이 되었다.  가장 시급하게 수정해야 할 사항은 「최초의 태극기 도안자 박영효」로 전해 온 과거의 기록들을 「최초의 태극기 창안 고종 황제」로 수정해야 하고, 이를 전제로하여 박영효가 수신사 임무를 받고 일본을 가던중 황제의 지시에 따라 최초의 태극기를 그렸다라고 기록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최초의 태극기가 그려지기까지 중국의 간섭을 단호히 배격하고 독자적으로 태극기의 도형을 창안한 고종 황제의 고심과 자주성을 설명하므로써 우리의 주권이 당당했음을 밝혀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본인의 주장에 대하여 서울신문은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작품」(1997년 10월 1일)이라는 제하로, 주간지 뉴스피플은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황제 작품이었다」라는 제하로 여러 역사 학자들의 경이로운 반응과 함께 대서특필 보도하였다.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황제 작품이었다

(서울신문발행 뉴스피플 1997년 10월 9일자 제288호 특종)

 지금까지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 도안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다. 1882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일행과 숙의해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태극기의 유래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박영효가 주도한 작품이 아니라 고종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삼 밝혀졌기 때문이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중 한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에서 고종은 청나라 마건충의 강요에 분노하며 독창성을 발휘, 도안과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국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세를 단호히 배격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청나라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임오군란을 이용,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자국군의 서울 주둔을 강요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열강의 틈사이에서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시기였음을  볼 때 고조의 이같은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송씨는 설명했다. 태극기 연구가이기도 한 그는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역의 태극도를 그렸다는 등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별의별 억측이 많았으나 이젠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이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숭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사」도 고종이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고종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태극 무늬의 모양과 색, 4괘, 바탕색까지 지정하는 등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김철호기자)  

  이번에 시사신보에서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역사연표의 숱한 오류였다.  즉, 年 표기는 양력인 서기로 하고 달과 날짜를 음력으로 표기하므로써 우리 역사의 기록을 탐구하는데 심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가령 우리 나라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수신사 일행이 고베에 도착한 달을 1882년 8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1882년 9월이었다.  이런 아이러니 때문에 115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기로 표기한 것은 모두 양력으로 환산해야만 한다. 우리는 왜 캐캐 묵은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르나 그 질문 자체가 우둔할 뿐이다. 현재의 태극기가 제정되기 전에 최초의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 한 그 실체를 찾지 않는다면 스스로 역사의 단절을 자행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진지하지 못했거나 방관하였다. 그 동안 잘못 알려진 태극기의 변천사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은 발굴자의 즐거운 소명이 될 것이다.
<글작성  송 명>

태극기의 변천 단계

머리말   운요호사건과 국기제정의 역사적  배경   중국의 국기간섭  
도형의 난해 일제와 태극기 변천 태극기의 변천5단계 태극기 제작법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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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PUT size=40 value="초의 태극기를 찾아내기까지 115년 동안 실종되었다 1987년 8월 15일, 최" name=scrolltex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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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기는 1882년 최초로 만들어진 이후 숱한 시련과 수난 속에서도 그  뿌리와 정신만은 굳건히 지켜왔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이라는 잔인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육신은 비참하게 찢기었어도 '태극기' 그 이름만은 고이 간직해왔다. 이런 과정속에 존재 하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 변천단계들은 변천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태극기가 굳건히 지켜지기까지의 우여곡절속에 나타난 수 많은 종류들을 분류해 본 결과 시대와 지역에따라 주로 많이 사용된 유사 종류들중에 특징적인 것 하나씩을 이해 본위로 내세운 것이다.

 
□1단계태극기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1882년에 수신사 박영효일행이 일본을 방문 할 때 고종황제로부터 허락받은대로 배안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렸다는 태극기모습이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웠으나 태극기연구가 송명호(시인. 필명 송명)씨가 115년만에 일본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조선에 처음으로 국기가 만들어졌다는 기사와 함게 태극기 그림이 실린 시사신보(1882.10.2.월요일)를 발견,이사실을 1997년 8월 15일 언론에 공개하므로써 115년만에 그 발자취를 찾아내게 되었다. 괘의 모습은 현재의 태극기와 상당히 다르고 음방과 양방의 배치도 좌우 대칭되어 있다.

□2단계태극기
   1885년 고종황제가 당시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시사신보가 발견되기전까지만해도 이 태극기가 최초의 태극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하였다.현재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3단계태극기    

 1896년에 발행한 독립신문 제호에 도안된 태극기.독립신문의 제호 태극기는 발행될때마다 그 모양이 다르게 되어 혼란을 초래했다.







□4단계태극기
  
 1900년 파리 박람회 장소에 게양하였던 태극기. 특징으로는 유연한 곡선의 음방(청색)과 양방(홍색)이 좌우로 배치된 것과 4괘가 귀퉁이에 있지 않고 열십자 방향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5단계태극기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 지금의 태극기 도안이 되기까지에는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의 수차례 의논과 우여곡절을 겪고나서 결정되었다. 당시 이왕에 해방과 함께 새로룬 국가가 탄생하였으니 국기도 새로운 도안으로 만든 것이 어떻겠는가는 논란이 가장 두드러졌으나 ,일제 36년동안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묻고  조국의 광복을 빌었으니 그분의 넋을 달래고 또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의견이 수렴된 국기를 만들 기회가 있으니 도안과 4괘의 이치가 다소 논란이 있드라도 일제 36년.동안 가장 많이 그려지고 사랑하였던 현재의 태극 도안대로 국기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국기게양 백과사전  

             국기게양, 알면 쉽고 모르면 머리 아프죠.
             여기에 국기 게양의 모든 것을 수록해 놓았습니다. 

태극기 구성과 원리와 의미
국기는 왜 게양해야 하는가
국기게양일
국기 강하식
게양대 1개의 기본게양
게양대 2개에 국기만 게양
게양대 2개에 다른기와 함께 게양
게양대 3개에 국기만 게양
게양대 3개에 다른기 1개와 함께 게양
게양대 3개에 다른기 2개와 함께 게양
게양대 4개에 국기만 게양
게양대 4개에 다른기 1개와 함께 게양
게양대 4개에 다른기 2개와 함께 게양
게양대 4개에 다른기 3개와 함께 게양
게양대 2개에 국기와 외국기 게양
홀수 게양대에 외국기 게양
짝수 게양대에 외국기 게양
국제 연합기, 국기, 외국기를 게양할 때
국기를 교차하여 게양
차량에 게양
 

 

조기 게양
국기로 관을 덮을 때
건물에 국기 게양
길가(가로)에 게양할 때
벽면부착 행사용 대형 국기 게양
사무실.회의장.식장에 게양
국제회의 테이블 국기 위치
게양대 설치와 깃봉
국기에 금실 부착
국기의 검정색 사용
국기의 크기
애드벌룬 태극기
국기를 전국적으로 게양하는 닐
연중 국기를 게양하는 기관
조의를 표하여 국기를 게양하는 날
국기를 게양하는 경축일
게양대 설치 간격


   국기결정 5가지와 관련법규

구 황궁소장 태극기   미군정 문교부 제시안  우리국기보양회안
이정혁 도안 제시안   독립문 태극기문양    국기 제작법 고시(1949)     
국기채택 속기록   현행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국기에 관한 지침

                        국기결정 5가지안
1949년 10월 15일 현재의 국기 모양을 결정하기까지에는 42인으로 구성된 국기시정위원회의 15차례에 걸친 회의를 거듭한 뒤였다.
 이왕에 새로운 정부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니 과거의 전례를 모두 무시하고 새로운 도안의 국기를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위원들은 그 의견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일본 강점기 36동안 조국과 통치자를 잃었을 때 이를 건져내려는 애국지사들이 일본에 항거하다가 붙잡혀 최후를 맞이할 때 오로지 '태극기' 한 장만을 손에 쥐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순국선열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자고 했다.
 이때 어떤 모양의 태극기를 국기로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다가 최종 5가지 도안을 내놓고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최종 결정된 국기 모양은 우리국기보양회에서 제시한 제3안이었는데, 결정 당시 4괘와 음양 배치가 주역의 이론에 맞지 않아 논란이 있었으나 그런 것에 구애받기 보다는 1882년 최초의 태극문양 국기를 만들었을 때나, 상해임시정부에서나 순국선열 애국지사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태극기 모양들을 종합해볼 때 주역에 치우지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으로 태극문양을 응용하였다고 보아 제3안의 도안을 국기로 삼자고 했다.

   
  제1안 -구 황궁소장 태극기       제2안-미군정 문교부 제시안
     구 황궁소장 태극기안    미군정 문교부안

      
3안-우리국기보양회 제시안    제4안-이정혁 도안 제시안
       우리국기보양회 제시안    이정혁 도안제시안

        
제5안 - 독립문 태극기문양
         독립문 태극기문양
 
   
국기채택 국회속기록 (1948. 7. 12일 )
[국회속기록] 태극기 국기채택 `재적과반수' 가결 ....제헌국회가 개원된 것은 1948년 5월31일. 제헌의회는 헌법기초위 원회(위원장·서승일)를 설치, 헌법을 만들어나갔다. 기초위원 30명, 전문위원 10명으로 구성됐다. 기초위는 6월3일부터 유진오의 초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안으로 토의해 헌법안을 마련한 후 6월23일 국회 제16차 본회의에 상정했다. 본회의에서는 독회 방식 으로 심의했으며 심의 과정에서 의원들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서는 7월1일 오전 10시부터 벌어진 제2 독회와 7월12일 제3 독회의 속 기록 내용 중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먼저 국호에 대한 토의가 진행됐다. 제헌의회 의원 총수는 1백98 명. 무소속이 85명으로 가장 많았고 대한독립촉성회 54명, 한국민주 당 29명, 대동청년단 11명, 기타 군소정파 소속 19명 등이었다. 의장 은 이승만(촉성회), 부의장은 신익희(촉성회)·김동원(한국민주당)이 었다.

부의장 신익희 : 제1장 총강에 이의 있습니까('이의 없습니다' 하 는 이 다수있음). 이의 없으면 통과됩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의견 말씀하시지요.
이승만 의원 : 국호 개정이 잘되었다고 독립이 잘되고 국명이 나쁘 다고 독립이 잘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호 개정에 제일 시간이 많 이 걸리기때문에 나는 일분이라도 빨리 헌법을 통과시켜야 될 것이니 까 그것 잘 아시도록 내가 부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면 거기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대다수의 결정에 의하여 그때 법으로 정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옥주 의원(무소속) : 제1조는 원안대로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부의장 신익희 : 그 동의에 재청 삼청이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에서 '민주'를 빼자"
조봉암 의원(무소속) : 의장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1조 국호에 대해서는 우리 전 민족이 다 만족치 않을 것이니 요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합니다.
김병희 의원(무소속) : 대한민국이란 국호에 대해 저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국호를 잘 여 러 가지로 논의한다는 것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제1조에 '대한민 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했습니다. 민국이라는 것은 결국 민주국을 의 미한
것이요, 공화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라고'이렇게 고쳐서 통과하자는 얘기입니다. 민주를 빼자는 것입니다.
(재청한 의원 있음).
부의장 신익회 : 재청밖에 없습니다. 성립 안됩니다. 원문 표결에 부치겠습니다.(거수 표결) 재석 의원 1백88인 중 가 1백63인, 부 2인, 절대 다수로 가결되었습니다.

이렇게 국호가 결정된 데 이어 국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부의장 신익회 : 태극기를 국기로 한다는 것은 성립되었는데. (중 략) 우리 헌법 2조에 반드시 삽입해야 할 것이냐, 따로 넣어야 할 것 이냐 거기에 대해서 의견말씀하십시오.
곽상훈 의원(무소속) : 국기 문제는 4조에 삽입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4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하는 조 항 끝에다가 '국기는 태극기로 한다', 그렇게 삽입하는 것이 좋겠습 니다.
조헌영 의원(한국민주당) : 기초위원회에서 국기 문제가 나왔습니 다. 국기를 조문에 넣지 않은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 제는 태극기에 대해 반대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국민 가운데 많이 있 다는 겁니다. (중략)또 한가지, 국기는 국가의 상징인데 태극기는 48 종류로 복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의사당)에 걸려 있는 국기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확한 국기가 아니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장병만 의원(대한독립촉성회) : 우리나라에서 이미 장구한 세월 동 안 태극기를 사용했고, 또 한국이 시인(인정)된 것도 태극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제2조에 삽입하기를 바라는 바올시다.
이주형 의원(대한독립촉성회) : 국기를 제정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 히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국기 조문을 최초에 원안과 같이 넣지 않기를 제의하는 것입니다.
조옥현 의원(대한독립촉성회) : 이 문제는 그만 토론하고 가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부의장 신익희 : 토론 종결되었습니다. 가부 묻습니다. (거수 표결) 재석 의원 1백88인 중 1백39인 가, 4인 부로 가결되었습니다. 태극기가 우리 국기입니다.

             국기 제작법고시

해방이된지도 몇해가 지난 1949년에서야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차례의 회의와 진통의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국기가 정해지자 비로소 10 15 문교부 고시 2호로 국기제작법공표하였다. 그때 공표한 국기에 관한 사항은 단지 국기를 제작하고 게양하는 방법에만

                         국기 제작법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
                                            1950년 1월 25일 문교부 고시 제3호

1. 기면

1)기면은 백색으로하고 길이와 넓이는 3 2 비율로
2)태극은 기면의 중심을 중심으로 하여 직경이 기면 넓이의 2분지 1 원을 그린 다음 건과 곤을 통하는 사선에 의한 원의 직경을 4등분하여 좌우 4분지1 점을 중심으로하여 향좌(向左) 선하에 향우(向右) 선상에 반면을 그려 양의(兩儀) 이루고 상반부를 새빨간빛(진홍색)으로 하반부를 푸른빛(아청색)으로

3)괘는 대각선상에 태극에서 태극직경의 4분지 1 거리를 두어 우선 직경의 2분지1 3분지 1 장방형을 그리고 넓이를 4등분하여 () 각각 반푼으로 하며 검은빛 으로 . 위치는 건(乾)을 향좌상(向座上), 곤(坤)을 우하(右下), 감(坎)을 우상, 리(離)를 좌하로함.

2. 깃봉과 깃대

1)깃봉은 대체(大體) 구형( 직경이 태극직경의 5분지 1) 가까운 무궁화 봉우리를 상징하되 하반부에 꽃받침 5편(五片) 뚜렷이 표시하며 전부 금색으로함
2)깃대는 () 하되 색칠을 하지 않고 대제(竹製)대로 순색으로

3.기의
1)옥상에 높이 걸거나 식장용의 대기(大旗) 넓이 180센티미터, 140센티미터의 가지로함
2)일반가정용의 중기는 넓이 1미터, 70센티미터의 두가지로
3)손에 소기는 넓이 30센티미터, 20센티미터의 두가지로 . 형편에 따라서는 임의의 치수로 만들어도 좋음

흰색 바탕과 태극문양
흰색바탕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함

태극문양 의미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파랑색 음(陰)과 빨강색 양 (陽)으로 하늘과 땅의 의미도 있지만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4괘의 의미
건곤양괘무궁한 정신이다.
      
괘는 하늘(天), 봄(春), 동(東쪽, 인(仁)을 뜻하며,  기면의 왼쪽
        부분에 "건"괘를  배치한다.
      괘는
땅(地), 여름(夏), 서(西), 의(義)를 나타내며,  기면은 오른쪽
        아랫 부분에 "곤"괘를 배치한다.
     건,곤" 양괘를 취함은 우리나라의 국운도 천지와 함께 '영원무궁'
        하자는 무궁의 정신을 표현한것이다.
리감양괘광명의 정신이다.
     리" 괘는
해(日), 가을(秋), 남(南), 예(禮)를 뜻하며, 기면의 왼쪽
        아랫 부분에 "리" 괘를 배치한다.
     감" 괘는
달(月), 겨울(冬), 북(北),지(智)를 나타낸 것이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감" 괘를 배치한다.
     리,감" 양괘를 취함은 우리나라가 언제든지 '달'과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나라가 되자는 광명의 정신을 표현
        


4괘 그리기    괘그리기 동영상
1. 4괘는 건(), 곤(), 이(), 감()으로 하되, 깃면의 왼쪽
    윗부분에 건을, 오른쪽 아랫부분에 곤을, 오른쪽 윗부분에 감을,
    왼쪽 아랫부분에 이를 각각 배열한다.
2. 괘의 길이는 태극지름의 2분의 1(깃면너비의 4분의 1)로 하고, 괘의
   너비는 태극지름의 3분의 1(깃면너비의 6분의 1)로 하며, 괘와 태극
   사이는 태극지름의 4분의 1(깃면너비의 8분의 1)을 띄운다.
3. 괘의 길이중심을 깃면의 두 대각선상에 두되, 그 길이는 두 대각선과
    각각 직각을 이루도록 한다.
4. 괘의 구성부분은 효(효)로 하되, 그 효의 너비는 괘너비의 4분의 1
   (깃면너비의 24분의 1)로 하고, 효와 효사이 및 끊어진 효의 사이는
   효너비의 2분의 1(깃면너비의 48분의 1)로 한다.
5. 괘는 검정색으로 한다
.


 















 

 

자료출처-태극기 탄생 배경, 유래, 국기게양, 변천 과정, 역사 연표 및 관련 정보 수록.
http://www.songpr.com/

출처 : [기타] 블로그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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