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운요호 교전 장면. 그 당시 일본은 국기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태극기와 유관순(柳寬順, 1904-1920)
□최초의 태극기그림 발견-1997년 8월 15일 동아일보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시사신보』 (1936년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되고 있다. 1882년 10월2일자 이 신문은 「조선의 유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의 국기는 옥색 바탕에 태극의 그림을 적홍색으로그렸다고 적혀있다. 이신문 자료는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47세)씨가 최근 일본 도쿄 시부야구히로오에 있는 도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 낸 것. 태극기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교수 (단국대학교)「과거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편년사나 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있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당시 시사신보의 끝부분으로 고종의 애국심이 엿보이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코 청국의 용기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그림을 그리고 네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최초의 태극기의 건곤감이 4괘의 배치는 지금과 크게 달라 좌측 상단에 양효 2개를 그린뒤 음효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 2개를 먼저, 음효2개를 나중에 배치했다. 태극기를 사용한 박영효는 1882년 8월(음력) 일본방문 수신사로 떠나기에 앞서 고종에게 일본에서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태원기자)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동경발행 「시사신보」에 소개한 최초의 태극기모 태극기에 대한 유래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전해 왔다. 첫째는 1882년 9월 朴泳孝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선상에서 그렸으며, 둘째는 朴泳孝 수신사에 의해 그려진 최초의 태극기와 현재의 태극기 모양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유래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최초로 만들었다는 태극기의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은 채 115년이 흘러왔다. 애써 이유를 변명하자면 조선 왕조 몰락, 일본 36년의 침략과 탄압 등이 태극기의 유래를 그토록 어지럽게 했을 것이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태극기가 우리 나라의 국기로 처음 상징된 것은 1882년이었으며, 당시 수신사 박영효(1861∼1939)가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종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발견자 인적사항 성 명 : 송명호(宋明鎬.1950. 10. 2일생. 필명 宋 明) 2)발견자료 자료명 : 시사신보(일본발행.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제179호) 1882년 10월 2일자 제179호 시사신보 발견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사실상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국내의 어떠한 문헌에도 언급되지 않은 태극기 제작 경위를 최초로 소상하게 알아냈다는 점과 특히 주목할만한 일은 고종황제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도안하였다는 사실이다. 셋째로는 이 시사신보를 통해서 최초로 태극기가 우리 나라 국기임을 세계만방에 알렸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큰 의미를 전제로 하여 시사신보의 요약과 기사 내용을 분석해보고 국내 문헌에 나타난 태극기의 기록들도 곁들여서 살펴보도록 한다. 시사신보는 1882년 3월, 동경에서 창간하여 1936년에 폐간한 일간지(일요일 휴간) 신문이었다. 이 신문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자 제179호에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 관련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이 신문을 발견하므로 써 그 동안 추측과 자의적인 상상 속에 온갖 형태로 떠올려 왔던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비로소 역사의 사실적인 기록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는「잡보」난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제정 배경과 설명을 명확하게 밝혀두었다. 시사신보는 4면 발행 일간지신문이었다. 관심의 대상이 된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자 시사신보의 2면은 5단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그중 3단에는「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관련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러면 이해를 돕기 위해 시사신보에 실린 태극기 관련 기사의 원문을 옮긴 다음 알기 쉽게 번역하여 그 내용을 토대로 최초의 태극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배경과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보충해보기로 한다. (원문)「又此흘朝鮮には國旗と云べきものなきに今度支那より來りさる馬建忠が朝鮮の國旗は支那に從ひ三角形の靑地に龍を書くべし本國支那は黃色を用るども朝鮮は支那の東方に當る邦たるを以て東は靑色を貴ぶの意により靑地を用ふべしと指示したるに國王は大に之を憤み決して支那の國旗に倣ふべからぬとして四角形の玉色地に太極の圖(二つ巴繪)を靑赤にて書き旗の四隅に東西南北の易卦を附けたるを自今朝鮮の國旗と定むる旨沙汰せられたりとあり」 (번역)「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상의 기사 내용은 지금까지 국내의 어떠한 기록이나 문헌에도 언급된 바가 없고 오직 본 자료를 통해서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얼핏보기에는 기사의 분량이 짧은 듯하나 그 의미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는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나라 국기의 역사, 국기 제정의 배경, 국기의 도안을 태극기로 정하게된 경위, 국기의 재질, 4괘의 설명 등이었다. 지금까지 잘못 인식해 온 태극기에 대한 관념들을 정상적으로 교정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사의 기록으로 가치가 크다 하겠다. 1)기사의 신뢰성 먼저 시사신보에서 다루었던 태극기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성부터 언급해 두고자 한다. 그 이유로는 우리 국민과 일본간에 쌓여진 감정이 만약의 경우 시사신보에 실린 그 기사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오해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이다. 時事新報 2쪽 1단은 「잡보」난으로 수신사 일행 일본 방문 사실을 극진한 예우로 취급하면서 기사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지난 달 28일 하나부사(花房)공사와 함께 동경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최근 조선에는 정치상 대개혁이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을 보충하자면 「지난 달」이란 1882년 9월 28일을 말한 것이며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란 시사신보에서 임의대로 기사를 작성하지 아니하고 인터뷰를 통해서 기사를 작성했음을 의미한다. 기사 첫머리에 그러한 전제를 하고서 태극기에 관한 기사를 언급했기 때문에 태극기의 그림과 설명에 대해서는 그 신뢰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태극기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우리 나라에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라고 시작된 기사가 그 사실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다. 수신사 朴泳孝의 일본 방문에 가장 큰 업적은 독립국가의 상징인 국기를 최초로 제작 사용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면 최초의 태극기 제작 배경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국내 문헌 중에 이 분야를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한국사」(진단학회. 1961)의 한 부분을 간추려서 인용해 보기로 한다. 국기 문제가 논의된 것은 병자수호조약(1876년)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되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정박하자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포격을 가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일본 국기를 게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포격한데 대한 책임을 속시원하게 해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챈 중국은 먼저 황준헌을 통하여 「중국의 龍旗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襲用中國龍旗 爲全國徽章)」는 간섭을 하였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하였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때 박영효는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승한 수신사 일행,영국 영사관 아스톤(W.G Aston), 선장 제임스(James)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하였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의 출발에 앞서 고종 황제가 지시한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태극기는 고베에 도착하였을 때 숙소 니시무라야(西村屋)의 옥상에 게양하였으며 이 사실을 기무처로 보고하였다. 고베 체류중 수신사 朴泳孝가 본국에 보낸 「송기무처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略)이미 각국과 더불어 통상수호한 후에는 사절을 파견할 때마다 예의상 국기가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리하여 각국의 항구에서 각국의 군함을 만나게 될 경우라면 육문 이상의 함재포를 가진 자는 반드시 축포의 예로 대하는 것이라, 이러할 때에는 각국의 사절들이 제각기 국기를 게양하여 서로 분별하는 법이요, 각국의 여러 가지 경축이 있을 때에도 국기를 달아서 서로 축하한 것이며 각국의 사절들이 회합을 할 때에도 국기로써 좌석의 차례를 표시하는 법이니 어느 나라든지 국기를 만들어 휴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영국, 미국, 중국, 일본의 각국도 우리 국기를 그려 갔으니 이로써 널리 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박영효는 수신사 일행 활동 보고서와 일본 방문중 선상에서 만든 태극기 3개(대, 중, 소)중 그중 작은 태극기를 동래부사를 통해 고종황제께 보고하였고 10월 3일에는 동경에 도착하여 왕비(坤殿) 생신 축하 연회 장소에서 다른 나라 국기와 함께 게양하기도 하였다. 박영효가 이렇게 수신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로 고종황제는 1883년 음력 1월 27일(양력 3. 6.화요일)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사용토록 전국에 공표 하였다. 이상의 문헌 소개를 참고로 하면서 이번에 발견한 시사신보의 최초 태극기 관련 기사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시사신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박영효가 최초의 태극기를 도안하고 그린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새로운 사실로 밝혀진 것은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한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라 고종황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朴泳孝는 高宗황제가 창안한 태극기를 일본 방문 도중에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황제의 명령대로 옮겨 그린 인물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시사신보의 태극기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태극기 도안에 대하여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얼굴과 고종이 입은 태극문양이 새겨진 의상> 周易의 태극도를 그대로 그렸다느니, 중국의 압력에 의해 태극도를 그려 국기로 만들었다느니,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박영효가 단독으로 그렸다는 것은 왕권시대의 논리와는 맞지 않다는 등 별의별 억측들이 난무했었다. 이제 그러한 의구심도 이번에 발견한 시사신보에 의해 말끔히 해소하게 되었다. 이 기사에서 확인했듯이 고종황제는 마건충이 제의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였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오히려 고종황제는 국기 도안에 대하여 독창성을 발휘하여 도안의 방향에서부터 재질의 선택에까지 상세하게 지시하였다.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 하여,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홍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易掛)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 이러한 高宗황제의 명령이야말로 태극기 도안의 독창성을 분명하게 설명해준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도안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화두의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황제가 직접 창안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 高宗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朴泳孝의 일기 使和記略(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에도 기록되어 있다.
태극기란 태극 무늬를 응용하여 국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렇다면 「태극 무늬」란 무엇으로 설명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이 없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태극기를 한마디로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태극 무늬를 일반적인 도형으로 표현하지 않고 사상과 철학적인 측면에서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 무늬란 둥근 원을 오직 나선형(∼, S)으로 나눈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써 마치 원 안에서 회오리가 치는 것 처럼 보이며 일명 태극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무늬 역시 네모꼴, 세모꼴, 별표 따위처럼 태극 무늬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 도형이기도 하다. 태극 무늬는 독특하게도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국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한 서민적인 생활 무늬였다. 이런 설명이 전제되지 않고 태극기를 설명한다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태극 사상과 철학만을 나열하게 되어 그 이해가 매우 어렵다. 태극사상 또는 태극도 설명을 태극기 설명으로 가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최초 태극기의 4괘는 현재처럼 건(乾). 곤(坤). 감(坎). 이(離)가 아니고 그림에서 보았듯이 손(巽), 간(艮), 진(震), 이(離)였다. 그러나 괘의 의미는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고종황제는 최초의 태극기를 그릴 때 4괘의 의미를 동서남북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라는 부분이다. 역괘중에 태극기의 네 귀퉁이에 그려진 4괘의 설명을 평범하게 동서남북이라고 강조한 것은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4괘가 동서남북을 의미하였다면 태극원은 주역의 음양으로 해석되는 해와 달이 아니라 우주 천체를 으뜸으로 상징하는 하늘과 땅 또는 태양과 지구로 설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현재의 태극기 설명은 주역에 근거하여 무궁한 사상을 주입시키고 온갖 형용사로 상상을 유도하고 있어 4괘와 태극의 문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국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진 것은 데니(Denny)씨 소장 태극기로써 현재 독립기념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이른바 데니 소장 태극기로써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 시사신보에서 태극기 그림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를 데니씨 소장 태극기가 아니면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듯 했다. 그러나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가 발견되므로 써 정확한 사실과 기록에 의해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확인하게 되었음은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 관한 일이자 태극기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史料的 가치로 써 매우 귀중하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時事新報의 기사와 국내의 문헌들을 종합해 볼 때 최초의 태극기가 완성된 날은 1882년 9월 25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수신사 일행이 고베에 도착한 9월 25일 바로 그날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서 태극기가 처음 으로 휘날렸다라는 기록이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일 뒤에 수신사 일행이 동경을 방문하자 시사신보는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태극기 관련 기사와 함께 태극기의 그림을 소개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 모습이 세상 밖으로 나타난 9월 25일에서부터 이 사실이 외국의 신문에 의해 대외적으로 알려진 10월 2일까지는 불과 일주일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박영효가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그렸다는 당시의 태극기 실물 3개에 대한 존재의 기대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한 시사신보에 실린 태극기 그림이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이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최종적으로 취재· 확인하여 국민들에게 감격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와 힌국일보의 기사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1997. 8. 15 금요일 1면)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1936년 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882년 10월 2일자 이 신문은 「조선의 유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의 국기(태극기)는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형을 적, 청색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이 신문 자료는 서울시 총무과 송명호(47)씨가 최근 동경 시부야구 히로오에 있는 도립도서관에서 찾아낸 것.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단국대사학과) 교수는 「과거 신문의 주요 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평년사나 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 동안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 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당시 기사의 끝 부분으로 高宗의 애국심이 엿보이는 대목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하였으나 국왕(高宗)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의 용기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형을 홍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최초 태극기의 건곤감이 4괘의 배치는 지금과 크게 달라 좌측 상단에는 양효 2개를 그린 뒤 음효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를 먼저, 음효 2개를 나중에 그렸다.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는 1882년 8월(음력) 일본 수신사로 떠나기에 앞서 高宗에게 일본에서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태원기자)
(한국일보 1997. 8. 15 금요일 31면) 현존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가 새로 발견되었다. 태극기 역사를 추적해 온 송명호(47. 서울시청 총무과)씨는 14일 일본 1882년 10월 2일자에 실린 태극기를 공개했다. 이 태극기는 옥색바탕에 태극 무늬가 상하가 아닌 좌우로 갈라져 있고, 4괘의 모습이 손, 간, 진, 이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돼 있어 현재 태극기의 건, 곤, 감,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 신문은 4면짜리 타브로이드판으로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 경제 전문지. 해당 기사에 따르면 1882년 9월 20일 인천항을 떠난 수신사 일행이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이 태극기를 그린 뒤 25일 고베항에 도착해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이를 게양하였다. 박영효는 이미 조정이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데다 당시 일본이 본격 외교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어서 출발전 高宗으로부터 국기 제작을 허락 받고 물감 등 재료를 챙겨 배에 올랐다. 이 배에는 김옥균과 서광범 등 개혁파 지식인들이 동승한 것으로 이 신문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는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 태극기는 4괘의 순서는 현행 태극기와 같지만 태극에 회오리가 많아져 가늘고 길다. 이어 1896년 독립신문의 제호에 태극기가 등장했으며 당시 이화학당 교장 페리씨의 사택에서 또 다른 태극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현행 태극기는 49년 이승만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42인 태극기제정위원회」에서 확정, 법제화한 것이다. 서울대 사학과 신용하 교수는 「이 같은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1882년 가 쓴 사화기략에 태극기를 이미 만들어 섰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물로 확인된 것으로써는 최고의 것으로 추정된다고」말했다(장병욱 기자) 앞에서 제시하고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진 1882년 10월 2일자 時事新報를 통해 그동안 미확인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제작 배경 및 경위를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전해오거나 잘못 기록되었던 태극기의 역사를 올바르게 수정할 근거 자료를 발굴한 셈이 되었다. 가장 시급하게 수정해야 할 사항은 「최초의 태극기 도안자 박영효」로 전해 온 과거의 기록들을 「최초의 태극기 창안 고종 황제」로 수정해야 하고, 이를 전제로하여 박영효가 수신사 임무를 받고 일본을 가던중 황제의 지시에 따라 최초의 태극기를 그렸다라고 기록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최초의 태극기가 그려지기까지 중국의 간섭을 단호히 배격하고 독자적으로 태극기의 도형을 창안한 고종 황제의 고심과 자주성을 설명하므로써 우리의 주권이 당당했음을 밝혀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본인의 주장에 대하여 서울신문은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작품」(1997년 10월 1일)이라는 제하로, 주간지 뉴스피플은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황제 작품이었다」라는 제하로 여러 역사 학자들의 경이로운 반응과 함께 대서특필 보도하였다. (서울신문발행 뉴스피플 1997년 10월 9일자 제288호 특종) 지금까지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 도안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다. 1882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일행과 숙의해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태극기의 유래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박영효가 주도한 작품이 아니라 고종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삼 밝혀졌기 때문이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중 한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이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숭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사」도 고종이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고종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태극 무늬의 모양과 색, 4괘, 바탕색까지 지정하는 등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김철호기자) 이번에 시사신보에서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역사연표의 숱한 오류였다. 즉, 年 표기는 양력인 서기로 하고 달과 날짜를 음력으로 표기하므로써 우리 역사의 기록을 탐구하는데 심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가령 우리 나라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수신사 일행이 고베에 도착한 달을 1882년 8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1882년 9월이었다. 이런 아이러니 때문에 115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기로 표기한 것은 모두 양력으로 환산해야만 한다. 우리는 왜 캐캐 묵은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르나 그 질문 자체가 우둔할 뿐이다. 현재의 태극기가 제정되기 전에 최초의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 한 그 실체를 찾지 않는다면 스스로 역사의 단절을 자행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진지하지 못했거나 방관하였다. 그 동안 잘못 알려진 태극기의 변천사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은 발굴자의 즐거운 소명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국기는 1882년 최초로 만들어진 이후 숱한 시련과 수난 속에서도 그 뿌리와 정신만은 굳건히 지켜왔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이라는 잔인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육신은 비참하게 찢기었어도 '태극기' 그 이름만은 고이 간직해왔다. 이런 과정속에 존재 하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2단계태극기 □3단계태극기
국기결정 5가지와 관련법규
국기결정 5가지안 해방이된지도 몇해가 지난 1949년에서야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차례의 회의와 진통의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국기가 정해지자 비로소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국기제작법을 공표하였다. 그때 공표한 국기에 관한 사항은 단지 국기를 제작하고 게양하는 방법에만 그 국기 제작법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 1. 기면 1)기면은 백색으로하고 길이와 넓이는 3과 2의 비율로 함 3)괘는 대각선상에 태극에서 태극직경의 4분지 1의 거리를 두어 우선 직경의 2분지1과 3분지 1의 장방형을 그리고 넓이를 4등분하여 효(爻)는 각각 반푼으로 하며 검은빛 으로 함. 위치는 건(乾)을 향좌상(向座上), 곤(坤)을 우하(右下), 감(坎)을 우상, 리(離)를 좌하로함. 2. 깃봉과 깃대 1)깃봉은 대체(大體)로 구형(그 직경이 태극직경의 5분지 1)에 가까운 무궁화 봉우리를 상징하되 하반부에 꽃받침 5편(五片)을 뚜렷이 표시하며 전부 금색으로함 3.기의 대 소 흰색 바탕과 태극문양
출처 : [기타] 블로그 집필 - |
출처: 윤상홍의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召湖 尹相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