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Gallery 운향풍경
 
 
 
카페 게시글
한국화 사랑 스크랩 조선시대의 사군자
해다천사 추천 0 조회 57 09.01.19 12: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사군자

 

 1.서론


 

매·난·국·죽 네가지 식물의 총칭인 사군자는 북송시대(960-1124)이후의 동양 회화, 특히 문인화의 소재로 중국과 한국에서 널리 애호되었으며 일본에서도 무로마찌(1336-1573)시대부터 승려 및 문인화가들 의해 자주 채택된 화목이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제일 먼저 꽃피고,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며, 국화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무릅쓰고 늦게까지 꽃피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싱싱하고 푸른잎을 계속 유지한다. 중국인들은 이 네가지 식물 각각의 특유한 장점을 군자, 덕행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이들을 사군자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사군자가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전에 시문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명대(1368-1644)에 들어온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대나무가 「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등장하였다. 대나무가 독립되어 하나의 화목으로 등장한 것은 북송때 편찬된 「宣和畵譜」에서이며 그 이전에는 송죽도, 죽석도 등의 배합으로, 혹은 화조화의 일부로 나타났으나 북송때부터 대두된 문인화 이론과 더불어 그 상징성과 기법의 특수성 때문에 문인들이 즐겨 그리게 되어 명대 이후 문인수묵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매난국죽의 순서는 이들을 춘하추동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대나무는 아름다움과 강인성 그리고 높은 실용성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인의 생활과 예술에 불가결의 존재로 되어왔다. 「詩經」에는 주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그리고 인품을 대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다.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난초의 향기와 고귀함의 찬미, 그리고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시 「이소(離騷)」에 그가 난초의 향기를 즐겨 넓은 지역에 이 꽃을 가득히 심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국화 역시 육조시대의 전원시인으로 유명한 도연명에 의해서 지조와 은일의 상징으로 그 위치가 굳어졌다. 그는 자기의 뜻을 조금이라고 굽혀야 하는 관직생활을 참지 못하여 3개월도 못되어 사직하고 돌아오며 지은 「歸去來辭」에서 집에 와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겼다고 읊고 있으며, 이외에도 여러편의 시에서 국화와 술을 즐기는 자기 생활을 읊었다. 매화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모습이나 지조의 상징으로 많은 시문에 나타났으며, 당나라의 왕·맹·위·류로 지칭되던 시인 맹호연은 눈 덮인 장안 근교의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아 나서는 파교심매는 문인화의 한 소재가 되고 있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매화처사 임포는 특히 문인들 사이에 유명하다. 이와 함께 아직도 눈이 덮여 있는 매화나뭇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가 문인들의 연중행사로 알려졌다.
 
고사나 문학을 통하여 상징적 의미를 얻게 된 이들 네 식물은 자연히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물론 수묵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에도 이들이 구륵전채법으로 그려졌으나 북송 이후부터는 사대부 여기화가들에 의해서 몰골법 묵화로 그려졌다. 그 중에서 국화잎이나 매화의 수간은 몰골법으로 그리지만 꽃잎 하나하나는 윤곽선만으로 그리기도 하고 난초는 백묘법을 쓰기도 한다. 송대의 문헌에 따르면 대나무가 제일 먼저 9,10세기쯤에 묵화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 다음으로 묵매가 그려졌고 난과 국도 11세기 중엽에는 묵화로 그려졌음이 등춘의 「畵繼」(1167)에 기록되어 있어 북송때 이미 네가지 식물이 모두 목화로 그려져 후대 문인묵화로서의 사군자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산수화나 인물화에 비하여 비교적 간단하고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 화가들인 문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또한,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으로 북송샔부터 사군자화는 화가들의 인품 또는 성격 전체를 반영한다고 믿어져 문인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한편,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 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남송 말기부터 원대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생활을 한 문인들 사이에 무언의 저항 수단으로도 그려졌다. 유명한 예로는 원대 초기의 사대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이 뿌리가 드러난 노근법으로 난초를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았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대나무와 매화는 소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라는 총칭 아래 역시 같은 이유로 원대에 많이 그려졌다. 그밖에도 죽석, 고목죽석, 석란, 난죽 등의 배합으로도 많이 그려졌다. 목죽화를 사대부 화가들의 가장 적절한 자기 표현 수단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은 북송의 소식과 문동이다. 이들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는데 화가로서의 기질이 좀더 탁월하였던 문동의 목죽화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소식의 능숙한 시문에 의하여 그 가치가 더욱 상승되었다. 묵매는 북송 때 화광산의 선승 중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남송의 화가 양무구에 의해서 기법이 확립되었다. 원대에 와서 문인화 이론이 한층 더 발달됨에 따라 특히 목죽과 묵란은 서화일치, 회화의 사의성을 주장한 문인들에 의하여 한층 더 성행하였다. 조맹부, 오진, 예찬 등이 묵죽으로 유명하였고, 오태소, 왕면은 묵매로, 정사초, 조맹부, 설창은 묵란으로 유명하였다. 명대의 문인화가 가운데 왕불, 하창등이 묵죽으로, 문징명은 묵죽과 묵란으로 유명하였고, 심주는 여러가지 묵화와 더불어 묵국을 많이 그렸다. 서위는 자유뷴방한 필치로 묵죽, 묵국을 많이 그렸다. 명대의 가장 유명한 묵매화가 로는 진헌장을 들 수 있다. 청대의 대표적인 사군자 화가로는 정섭과 도제 등을 들 수 있으며 금농은 백매와 홍매를 화려하게 그렸다.
 
송나라 때 모든 분야의 학문이 발달되고 출판 기술이 보급됨과 때를 같이 하여 여러가지 지침서가 편찬되였다. 미술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어 남송초에는 이미 화광중인과 양무구의 기법을 쳬계화해놓은「華光梅譜」라는 일종의 화매지침서가 출간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림이 포함되었던 같지는 않고 현존하는 화광매보가 그 당시의 것과 같은지도 확실하지 않다. 1261년에 발간된 송백인의 「梅花喜神譜」라는 묵매보에는 매화꽃의 생장과정 여러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 백개의 매화그림과 더불어 매화꽃의 모습을 읊은 시들이 목판화로 아름답게 인쇄되었다. 이책은 지금도 원래의 모습대로 전하며 간결하고 청초한 남송시대의 묵매화의 양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원대에 이르면서 화보편찬은 백과 사전적 규모로 발달되며 그 대표적인 예로 이간의 「竹譜詳錄」(1320년경), 오태소의 「宋齋梅譜」(1350년경)를 들 수 있다. 이들의 구조와 내용은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그 주된 목적은 문인 목죽, 묵매의 기원과 전통을 밝히고, 화죽, 화매의 지침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기법이나 그림의 양식이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어 개성의 표현을 중요시하는 문인화 본연의 정신에 어긋나는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원대에는 오진과 같은 문인화가에 의헤서 묵죽화첩 형식으로 된 새로운 묵죽보가 만들어지고 이와 같은 전통이 명대로 계속된다. 이에 비하여 묵란화와 묵국화는 청대 이전에는 화보 형식으로 되어 널리 보급된 예는 없는 듯하다. 송대의 몇몇 난보와 국보들이 있으나 이들은 화보가 아니다. 청대에 와서는 왕개등에 의하여 편찬된 「芥子園畵傳」이 1679년과 1701년에 걸쳐 발간되었는데, 그 중 제2집이 「蘭竹梅菊譜 」로 중국화화사상 비로소 사군자가 한꺼번에 화보로 만들어져 화법이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회화의 소재도 다양해지고 송·원의 영향으로 사대부 문인화의 전통이 생기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작품은 없으나 「고려사」또는 당시의 문집에 수록된 기록을 통하여 묵죽, 묵매, 묵란이 고려 왕공 사대부 사이에 널리 그려졌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빈번했던 사신의 내왕을 통하여 중국회화가 실제로 고려에 많이 전해졌으며, 그 중에는 사군자화도 상당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당시 두 나라 사이의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충선왕으로, 그는 원의 수도 연경에 만권당을 짓고 익재 이제현을 불러 원의 조맹부와 같은 사대부 화가들과 교류하게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맹부는 원대 초기의 산수, 묵죽, 묵란의 대가였으므로 원대 사대부화의 이론과 회화양식이 고려에 전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려 시대에 묵매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고려 중기의 문신 정지상과 후기의 차원부 인데, 「동국문헌」에 그냥 '선화매'라고만 하였으니 그 작품의 경향은 상세히 알 수 없다. 묵란화는 말기의 사대부 윤삼산, 옥서침 등이 잘 그렸다고 전하며, 선승 중에도 죽, 란, 매를 잘 그린 석축분 같은 사람도 있다. 이에 비하여 묵죽을 잘 그린 사람들의 수는 더 많고 그에 관한 기록도 화찬이나 화제의 형식으로 많이 남아 있다. 김부식의 집안은 아들 김돈중, 손자 김군수의 삼대가 묵죽으로 이름이 났고, 이인로, 정서, 정홍진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이 당시 대부분의 화찬이나 화제는 묵죽을 그린 사람들을 문동이나 소식에 비교하며 찬양하였고 그들의 인품을 대나무의 여러 가지 특성에 비유한 것도 있다. 이는 전형적인 북송 묵죽화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심사정의 파교심매도■
■우봉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II. 조선 전기의 사군자
조선 전기에도 고려 시대의 뒤를 이어 사군자화가 계속 문인들 사이에 그려졌음은 물론이고 도화서의 화원들 사이에도 필수 화목이 되었던 것 같다. 「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도화서의 화원을 뽑는 시험 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화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 보다 더 중요시 된 것을 알 수 있다. 묵매나 묵란도 화원 시험과목에는 들지 않았지만 중기부터 많이 그려졌던 듯하며 현존하는 작품 구도 많이 있다. 15,16세기부터는 백자에도 매, 죽, 그리고 좀 늦게는 난, 국 등의 그림이 표면 장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사군자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사군자의 유품이 전래되지 않아 조선 전기 사군자의 양식적인 기원을 찾기는 다소 어렵다.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묵죽화, 묵매화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실제로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가장 연대가 이른 묵죽화는 이수문의 「墨竹畵冊」인데 이는 10장으로 된 화첩으로 永樂甲辰(1424, 세종6)의 연기가 있다. 종이바탕에 수묵으로 그린 것인데, 가로 45cm, 세로 30 cm의 크기로 되어 있다. 화면에 균열된 잔금이 많이 보이고 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이수문(1403, 태종3- ?)은 조선 전기의 화가이다. 수문에 관한 우리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일본측의 기록과 일본에 남아 있는 작품들의 양식을 통하여서, 특히 그 가운데 하나인 묵죽화책에 나타난 관기에 의하여 그가 조선 초기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묵죽화책은 동경의 마쓰다이라(松平康東)의 개인 수장품으로 모두 10장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제일 마지막 열번 째 장에 "영락 갑진 스물두살 되던해 일본국에 내도하여 북양에서 그렸다(永樂甲振二十有二歲次於日本國來渡北陽寫秀文)"는 관지가 있고, 이어서 '秀文'이라는 양각방인이 찍혀 있다. 이에 의하여 그가 22세 때인 1424년(세종6)에 일본에 가서 이 묵죽화책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에 관해서는 일본측의 기록인 「변옥집」과 「화공편람」에 그가 명나라에서 왔으며 일본 승아파라는 화파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부상명공화보」라는 일본 문헌에는 명나라 초기의 화가 이재의 자가 주문(周文)이며 소가씨(僧我氏)의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문과 주문의 일본말 발음이 모두 '슈분'이므로 이 기록에 나타난 주문을 수문과 혼동하여 수문을 이수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수문이 과연 이씨였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가 없다. 한편 일본인으로 1423년에 조선에 왔다가 1424년, 즉 秀文이 묵죽화책을 그린 해에 귀국한 '슈분(周文)'이라는 수묵화가가 있는데 그의 수묵화 양식이 조선 전기의 수묵화 양식 또는 수문의 수묵화 양식과 공통점을 보이므로 '슈분'과 수문을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수문이 일본에 와서 이 화책을 그렸던 1424년의 영락22년은 명나라 성조의 연호로, 당시에는 일본과 명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고 왕래가 금지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종래에 명나라 사람으로 간주되어 오던 것이 조선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림의 소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위아래로 배치된 큰 바위 사이에 밀집해 있는 대나무밭. 제2장:태호석을 배경으로 서있는 풍죽. 제3장: 언덕 위의 대나무밭. 제4장:큰 바위와 언덕 아래의 대나무밭. 제5장:개자형(개자형)으로 늘어진 우타죽. 제6장:비바람을 맞고 있는 풍우죽. 제7장:벼랑 사이의 대나무숲. 제8장: 거센 폭풍우를 맞고 있는 풍우죽. 제9장:달밤의 대나무. 제10장:태호석을 배경으로 서 있는 대나무와 죽순. 이상 보는 바와 같이 이 화채의 대나무들은 문인묵주화의 간결하고 서예적인 구성과는 달리 바위, 언덕, 비, 바람, 달 등을 배경으로 밀집된 죽림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특색이다. 수문의 대나무 그림의 특징은 대나무 줄기와 잎이 지극히 가늘고 잎의 길이가 대나무 크기에 비해서 무척 긴 것 등이다. 이는 조선 초기 묵죽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문인묵죽화에는 대기나 안개의 느낌을 표현하지는 않는데 반하여 수문의 그림에는 대기, 안개, 달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수문의 대나무 그림과 비교가 될만한 조선 초기의 묵죽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취금헌 박팽년의 작품으로 전하는 묵죽화와 사임당 신씨의 작품으로 전하는 묵죽화도 대체로 세죽이라는 점 이외에 별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그리거 제3장, 제4장, 제7장의 그림에서는 밀집된 잎들이 서로 병행해 있거나 서로 겹쳐져 우물'정'자를 이루고 있는 규칙적이고 평면적인 죽엽의 배치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특이한 기법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밖의 언덕의 표면에는 변형된 세필의 피마준법이 구사되어 있어 조선 전기의 남종화법의 수용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시 된다. 이 화책은 조선 전기의 한,일간 회화교섭사의 쟁점 중 하나인 수문의 국적문제를 규명해볼 수 있는 뉯사장 유력한 단서일뿐 아니라 1424년의 기년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화풍을 파악할 수 있는 기준작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수문, 박팽년, 신사임당의 묵죽화의 특징은 원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운림 예찬의 묵죽화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운림 예찬의 그림이 당시 조선 화단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그들 상호간에 연관을 짓기가 어렵다. 또한 수문의 그림은 10장 모두가 배경이 비교적 많이 포함되어 산수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서예적인 성격이 강조된 북송과 원대의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수문의 묵죽화책은 조선 전기의 가장 이른 기년작이라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도 작가의 정체나 그림의 양식 등 많은 의문점을 내포하고 있다. 수문의 작품으로는 묵죽화책 이 외에 「악양루도」, 「향산구로도」, 「임화정도」가 역시 일본에 남아 있다.
 
묵매는 신사임당(1504,연산군10-1551,명종6)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8장으로 된 화첩(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굵은 수간이 약간 경사지게 화폭의 아랫부분을 가로지르고 거기로부터 가느다란 가지가 뻗어나와 몇 개의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서·화에 두루 능했던 사임당 신씨의 「율곡집」에 나오는 그림에 관계된 기사를 살펴보면 7세때부터 조선 초기 최대의 화가인 현동자 안견의 그림을 방하기 시작하여 산수, 사군자, 포도, 화훼, 초충 등을 즐겨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은 15세기 전반에 활동한 작가로는 유례가 흔치 않을 정도로 오늘날 전래작이 다수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초충도류가 단연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전칭작인데 그것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점하는 그의 위치 및 후대까지 지속된 관심의 대상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평대군 비해당 이용(1418,태종18-1453,단종1)의 수장품 목록에는 원대의 왕면의 묵매화가 기록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왕면의 그림들은 매화 가지에 꽃이 가득히 달린 화려한 매화 그림들이다. 제한된 수의 작품으로 조선 전기의 묵죽, 묵매의 양식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이미 이 시대 그림들은 중국의 사군자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III. 조선 중기의 사군자
중기에는 비교적 많은 작품이 남아 있어 사군자화의 양식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묵죽화에서는 탄은 이정(1541,중종31-1622,광해군14)을 들 수 있다. 그는 세종대왕의 현손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묵죽화가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수운 유덕장, 자하 신위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된 뒤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묵죽화는 대개 이수문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임에 반하여, 그의 묵죽화는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초기의 묵죽화 양식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통죽의 마디를 표현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두르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아래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그리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다. 그는 풍죽도에서 대나무의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나무의 탄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화면의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비하여 그렸다. 요약하여 그의 묵죽화 양식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서예성을 좀더 강조한 것으로 짙은 단색조 농도의 먹과 엷은 먹으로 각각 대나무 한그루씩을 그려 뒤의 대나무는 앞의 대나무의 메아리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사실성을 좀더 강조한 것으로 줄기가 굵은 통죽의 음영효과를 잘 살려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거기에 강한 필치로 몇개의 잎을 가해놓은 것이다. 이상 두가지 양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묵죽화가 수운 유덕장에 의해서 계승된다. 한편 그는 묵죽화에서 토파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조선 중기 당시의 산수화의 유행화풍인 절파화풍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의 대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당대 산수화의 양송당 김제, 글씨의 석봉 한호와 더불어 3절로 불리던 문장가 간이당 최립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칭찬하여 "東坡 蘇軾의 서예성과 與可 文同의 사실성을 겸비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의 것이라기 보다 명대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그는 소식이나 문동의 묵죽양식도 하창이나 주단의 송대 양식을 이어 받아 그들 나름으로 소화한 명대 화가들의 명대 양식일 가능 많다. 그의 작품들은 잘 잡힌 구도를 보이며, 조선 묵죽화의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매화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어몽룡, 오달제, 조속, 조지운를 들 수 있다.
설곡 어몽룡(1566,명종21- ?) 은 충청북도 진천 현감을 지낸 선비화가이다. 묵매를 잘 그려 이정의 묵죽과 황집중의 묵포도와 함께 당시의 3절로 불리웠다. 중국인 양호도 그의 묵매화를 보고 화격이 대단히 좋다고 하였으며, 다만 거꾸로 드리운 모습이 없어 유감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의 묵매화는 굵은 줄기가 곧게 솟아나는 간소한 구도와 단촐한 형태, 고담한 분위기 등을 특색으로 한다. 어몽룡의 그림, 특히 그의 <월매도>는 대체로 신사임당의 구도에 기초를 두었으나, 굵은 둥치와 마들가리의 단순한 대조에서 차츰 벗어나 화면을 좀더 화려 하게 대각선으로 자르는 구도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오달제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지며 매화꽃도 입체감이 좀더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추담 오달제(1609,광해군1-1637,인조15)는 병자호란(1636,인조14)때 청과의 화의를 끝내 반대하여 결국 오랑캐에게 잡혀가서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홍익한, 윤집과 함께 무참한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충절을 드높인 선비이다. 그의 현존 작품으로는 설매도와 묵매도의 두작품이 전하고 있다. 그의 설매는 묵매보다 부드럽고 능숙해 보이지만 설중풍상에 매화가 가지가지 맺히고 바위와 대나무 마저 곁들여 그 기백은 조금도 덜 하지 않다. 늙은 등걸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구불구불 솟고, 다시 그 끝쯤에서 작은 등걸이 왼쪽위로 솟아올랐으며 늙은 등걸 밑에서 가지가 휘어 윗등걸을 거쳐 솟은 것 등 은 그의 묵매의 양식과 비슷하다. 묵매는 좌측 상부에 장문의 발문이 있는데, 이는 공의 충절을 기린 인조의 어제시를 숭정기원후3병자년(1756,영조32) 그의 현손인 당시 성균관 대사성 오언유가 쓴 것이다. 묵매는 약간 진한 담묵에 몰골법으로 기교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능숙, 활달한 필력으로 쭉쭉 그어나간 기백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늙은 매화 등걸이 오른쪽하단에서 좌측상단쪽으로 굽어 뻗고 거기서 다시 큰 가지 등걸이 우측상단으로 뻗어 이 두 등걸이 근간을 이루고, 밑 등걸에서 세 가지가 위로 뻗었는데 가지등걸을 거쳐 솟아 있다. 매화꽃은 세 가지 중 잔가지가 좌우로 솟은 거의 화면의 중심에 있는 가지의 사이사이와 새순 끝에 점점이 피었는데 다른 가지에는 눈만 붙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 표현에 따른 것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서릿발 같은 기백은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숭엄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창강 조속(1595 ,선조28-1668,현종9)은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을 받았다.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함에도 구애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삼절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 죽, 산수와 더불어 수묵화조를 잘 그렸다. 특히 까치나 수금 등을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에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의 수묵사의화조화가인 임량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울어져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국 특유의 정취가 짙은 서정세계와 상통되는 것으로,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조지운에게로 이어졌다.
 
매창 조지운(1637,인조15- ?)은 선비화가인 창강 조속의 아들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으며, 그림을 잘 그려 중국에 다녀온 바 있다. 참봉으로 있을 때 우의정 미수 허목의 청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려준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노론들이 힐란하자 그 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화풍을 계승하여 선비의 기품과 심의가 가득한 묵매와 수묵화조를 잘 그렸다. 그의 묵매화는 아버지를 비롯한 조선 중기의 묵매화법을 고루 갖춘 그림으로, 주로 직립식과 사선식의 구도를 사용하였으며, 거칠고 성근 필치를 이용하였다. 수묵화조에서도 간결한 구도와 사의적인 분위기는 아버지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때에는 또한 비백법으로 된 노간에 윤묵으로 찍은 점들이 대조를 이루며 화려한 느낌을 더해준다.
 
묵란은 그에 관한 기록은 많으나 묵죽이나 묵매에 비여 유작의 수가 적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우와 이징을 들 수 있다.
옥산 이우(1542,중종37-1609,광해군1)는 율곡 이이의 동생이며, 사임당 신씨의 아들이다. 시, 서, 화, 금을 다 잘하여 4절이라 불리웠다. 그림은 사군자, 포도, 초충을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그가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화훼초충을 잘 그렸다. 묵매화는 주로 횡관식 구도로 힘차게 묘사하고 있다.
 
허주 이징(1581,선조14- ?)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선비화가인 이경윤의 서자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주부를 지냈다. 만년에는 소현세자를 따라왔다가 3년간 머무러고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허균은 그를 가리켜 아버지와 삼촌을 배우고 따라서 화가가 되었으며, 사군자, 산수, 초충에 모두 능하여 이정 사망 후의 본국제일수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였다. 산수화에서는 조선 초기의 안견파 화풍과 중기의 절파 화풍을 즐겨 구사하였는데, 전기의 안견파 화풍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수묵산수화와 더불어 장식적인 취향이 강한 니금산수화도 잘 그려 이 방면의 일인자로 꼽히고 있다. 그의 묵란은 2점이 전하고 있다. 각기 좌우 하단에서 세 모서리를 향해 뻗어 나간 난엽은 변각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뒤틀린 난잎들은 묵의 농도를 달리해 변화를 주고 있다. 꽃대는 엷은 담묵으로 짧게 표현하였다. 선묘에 있어서 고도로 세련됨을 보이는 그의 그림들은 각각 좌우 하단 모서리의 흙을 간략하게 거친 터치로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와 중기의 묵란화가 드문 가운데 그의 한쌍의 묵란은 17세기초의 양상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묵국의 경우는 전기의 작품은 볼 수 없고 중기의 사대부이며 명필로 이름난 아계 이산해(1539,중종34-1609,광해군1)의 그림이 한점 알려져 있으나 그의 필력에 관한 평판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당대 묵매의 대가인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에 이산해의 묵국을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탄은 이정의 설죽도·통죽도·묵죽도■
■설곡 어몽룡의 월매도■
■창강 조속의 고매서작도■
■매창 조지운의 숙조도■
 
IV. 조선 후기의 사군자
조선 후기에는 남종화의 본격적인 수용과 더불어 '서화일치'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군자화가 더욱 성행하게 된다. 또한, 남종화법의 지침서인 「개자원화전」(청나라 초기의 화가 왕개, 왕시, 왕얼 의 3형제가 편찬한 4권으로 된 화보)이 우리나라에 전래됨에 따라 사군자화도 구도나 기법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비교적 전대의 양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김정희의 화론과 묵란, 묵죽에서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최고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묵죽화의 대표적인 존재로는 수운 유덕장과 자하 신위를 들 수 있다.
수운 유덕장(1675,숙종1-1756,영조32)은 중기의 대표적 묵죽화가 탄은 이정의 두가지 양식의 묵죽을 모두 답습한 대표적 인물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그의 묵죽은 탄은 이정의 것보다 먹의 농담대조가 좀 더 단순화된 감이 있어 은은한 맛이 덜하나 힘차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벼슬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는 탄은 이정과 자하 신위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수운 유덕장과 같은 시대의 사람인 신광수는 「석북집」에서 유덕장의 묵죽화를 "당세의 짙푸른 수운의 대나무는 속세를 벗어난 그 기세가 드높다(當世蒼蒼峀雲竹 塵埃掃出勢p6嶸)." 라고, 곰으니, 수운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그 당시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유덕장은 탄은 이정의 화풍을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많은 작품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중에도 특히 대가 굵은 통죽을 그리는 기법은 이정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덕장은 대나무의 마디를 강조하는 선을 거의 직선에 가깝게 그어 마디부분의 입체감이 이정의 대나무 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그밖에도 풍죽 또는 설죽을 그릴 때 짙은 먹의 대나무와 그보다 훨씬 옅은 먹의 대나무를 대조시켜 그들 상호간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메아리 효과(Echo Effect)의 수법도 탄은 이정의 것을 따르고 있다. 다만 토파를 그리는 데는 이정 보다 간단하게 선으로만 그리든지 음영을 조금 넣고 끝이 뾰족한 점을 수직으로 찍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나무잎을 묘사한 필치 또는 먹의 농도 조절 면에서 볼 때 유덕장은 이정의 기량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추사 김정희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다. 즉, 그는 유덕장의 대나무에 대해 "수운의 대나무는 힘차고도 고졸하며 마치 금강저를 갖추고 있는듯하다. 탄은에 비하면 조금 섔어지는 것 같으나 깊이 없는 요즘 화가들로 말하면 모두 이와 거리가 멀어 비슷하지도 못하다." 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하 신위(1769,영조45-1845,헌종11)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문인화가이다. 1812년(순조12)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중국의 학문, 문학, 예술에 대하여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 문인과의 교유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 청의 대학자 옹방강과 화가 나빙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과 예술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28년(순조28)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가, 2년 뒤인 1830년(순조30) 윤상도의 탄핵으로 벼슬을 물러나 경기도 시흥의 자하산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자하도 여기에서 따 온 것이다. 그는 시, 서, 화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림은 산수화와 더불어 묵죽에 능하여, 탄은 이정, 수운 유덕장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 꼽힌다. 그는 당대 예원의 총수인 표암 강세황에게서 남종화의 기법과 함께 묵죽을 배웠다. 그의 대나무 그림은 북송의 소식,문동과 스승 표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이들에 대한 존경과 예찬의 글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신명준, 신명연을 비롯하여, 우봉 조희룡과 같은 추사파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나무 그림은 기본적으로 대나무의 품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우아하게 그모습을 그리는데 특징이 있다. 이는 탄은 이정의 대나무가 꼿꼿하고 강인한 기품을 보여주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자하 시위의 대나무 그림은 수직구도보다는 대각선구도로 비스듬히 올라 펼쳐지는 방식을 많이 취하고 있다. 이파리는 가늘고 유연하게 뻗치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때문에 자하의 대그림은 고아하고 유려하다. 섬세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반면에 힘이 약하다는 인상을 면키는 어렵다. 바로 이 점을 보강하기 위해서인지 자하는 대나무를 그리면서 한쪽에 단애를 설정하여 죽석도로서 많이 그리고 있는데, 이 또한 명대 오파 양식의 부드러운 남종화 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묵매화가는 단연코 우봉 조희룡이다.
 
우봉 조희룡(1789,정조13-1866,고종3)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1851년(철종2) 추사가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그의 벗이자 영의정인 이재 권돈인의 일로 함경남도 북청으로 유배될때 우봉은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 되었다.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렸으며,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글씨는 추사체를 본받았으며, 묵죽과 더불어 묵란도 많이 그렸다. 묵란 역시 김정희의 화풍을 본받아 그렸다. 한편, 저술에도 솜씨를 보여 「석우망년록」이라는 자서전적인 전기와 「호산외사」라는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을 남겨 그 당시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들 중에서 학문, 문장, 서화, 의술, 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7명의 화가(단원 김홍도, 호생관 최북, 수월헌 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에 교우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유작 중에서 가뿡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매화그림이다. 이와같은 자신의 매화벽을 자신 전기인 「석우망년록」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자신이 그린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진 벼루와 매화서옥장연이라는 먹을 사용하였으며, 매화시백영을 지어 큰 소리로 읊조리며,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를 매화백영루라 이름하고, 자신의 호를 매수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매화속에 살며, 매화를 그리고, 매화를 노래하며, 매화를 마시는 매수이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매화서옥도」는 물론 송나라의 매화처사 임포의 일생을 그림으로 그린 남종화의 한 소재로 되어 있는 대목이긴 하지만, 자신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그린듯하여 빙긋이 웃음짖게하는 재미있는 그림이다. 그의 매화 그림 중 새로운 구도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길고 좁은 횡축형식의 그림이다. 대표적인 예로「홍매화」대련을 들 수 있는데, 굵은 노수간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까지 가득채우고 그 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매달고 있는 잔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가 주간의 노수간과 서로 대조(Contrast)와 조화(Harmony)를 이루고 있다. 비백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를 이루는 윤묵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으로 그리고 있다. 또 다른 대표작「백매화」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을 꽃술을 장식하는 구륵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한결 살리고 있다. 그의 묵매화는 조선 전기의 신사임당 이래의 중기의 설곡 어몽룡, 추담 오달제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한편 그는 묵난도 많이 그렸다. 추사 김정희는 우봉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고,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낮게 평가하고 있으나, 그의 묵란화를 보면 절제있고 힘찬 필선으로 그려진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같은 추사의 제자인 고람 전기(1825,순조25-1854,철종5)는 스승의 문기 어린 간일한 표현법을 계승한 반면, 우봉 조희룡은 추사체와 같은 강렬하면서도 거친 표현법을 계승, 발전 시켰다.
 
조선 후기의 묵란화가로는 추사 김정희와 수월헌 임희지를 들 수 있다.
추사 김정희(1786,정조10-1857,철종8)는 조선 후기의 거유로 금석학에서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는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분이다. 그는 금석학을 바탕으로 서예에도 독창적인 심오한 경지에 이르고 있으며, 글씨를 바탕으로한 그림에서도 이른바 남종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한국학자 특유의 개성과 추사의 천재성이 번득이고 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당대 중국의 거유들과도 깊이 교유한데서도 연유하며, 이로 말미암아 서론과 예론에도 매우 높고 뛰어난 경지에 도달해 있으며, 따라서 그의 예술에 대한 감식안 역시 당대 제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추사의 예술을 논하려 한다면 추사와 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해보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그의 예술세계를 설명할 수 없고, 결국 피상적인 관찰로 그치게 된다. 그의 서예와 난초에 대한 이론은 제주 대정의 유배지(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에서 그의 서자 아들인 김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글씨 쓰는 법은 당대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이 아니면 손에 익힐 수 없다. 북송의 조맹부때부터 구성궁예천명으로 해서의 모범을 삼았는데, 그때인들 어찌 왕희지가 쓴「황정견」과 「악의론」이 없었겠느냐. 모두 이리저리 굴러 다니면서 잘못 옮겨져 준칙을 삼을 수 없었으니, 원래의 비석에서 진적을 탁본해 오는 것만 못하였으므로 예나 지금이나 화도사 비석에 머리를 수그리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느니라. 구양순이 쓴 화도사비는 지금 원석은 없어지고, 송나라때 뜬 탁본도 지금은 구하기가 어렵다. 또한, 예서는 대체로 번드르한 모습이나 시정의 냄세를 걸러내야 한다.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가 없느니라. 가슴 속의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기상은 또한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지 않으면 붓끝 아래와 손끝 아래에서 드러나 피어날 수 없으니, 보통 해서 같은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니라." 결국 추사체의 비결은 그의 금석학에 대한 깊은 연구, 고금의 여러 명필들의 서법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난초 그리는 법에 대하여도 같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난초를 제대로 치는 이가 거의 없었고, 오직 선조대왕의 난그림이 뛰어남을 보았을 뿐인데 잎을 치는 법식과 꽃의 품격이 정소남의 법식과 같았었다. 대체로 당시 송나라 사람들의 난초 치는 법이 우리 동쪽 나라까지 흘러 들어와 임모하고 모방하였던가 보다. 정소남의 난그림은 중국에서도 드물게 전해지니 요사이 연습하는 것은 모두 원, 명 이후의 법식일 뿐이다. 비록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난초를 잘 치지는 못한다. 화도에 있어서도 난초는 따로 한 격식을 갖추는 것이니 가슴속에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어야만 가히 붓을 댈 수가 있느니라. 옛 사람들이 난초를 치는데 있어서, 한 두장에 지나지 않아 일찍이 다른 그림처럼 연달아 여러 폭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억지로 난을 칠 수는 없는 것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세상 사람들은 이 경지의 지극한 어려움을 모르고 많은 종이로 억지로 뺏어내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같아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우봉 조희룡 같은 사람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니라. 신기가 모여들고 경우가 무르녹아야 하는 것은 서, 화가 모두 똑 같으나 난초를 치는데는 더욱더 그러한 것이다. 모름지기 그 묘법을 깨달아야 가능하느니라. 난을 치는데는 반드시 세 번 궁글리는 삼전법으로 그 묘법을 삼아야 한다. 이 삼전의 묘법을 알지 못하면 난은 제대로 치기가 어려우니라." 추사는 서자인 상우(추사는 정처 예안 이씨에게는 소생이 없고, 소실에게서 낳은 상우와 나중에 사촌 동생인 김태희의 소생인 상무를 양자로 들였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신기는 문기를 한 단계 넘어선 선미와 같은 것으로 고격의 경지를 말한다. 추사의 대표적인 난그림 가운데「不作蘭圖」(「不二禪蘭」)가 있다. 그 그림에 쓰여진 제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즉,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20년만에 문득 그려낸 것이 성중천이네. 마음속의 자연을 문닫고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의 불이선이다. 만약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비야리성(고대 인도의 바이샬리성의 음역으로 가필라왕국의 기빌라성, 마가다왕국의 왕사성, 코살라왕국의 사위성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중심에 위치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유마거사가 사는 성으로 여러 불교 경전에 자주언급되고 있다.)의 유마힐 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답하겠다." 이 뜻은 대승불교경전 「維摩經」에 나오는 유명한 「不二法問品」의 내용이다. 즉, 모든 다른 보살들은 선열에 들어가는 상황을 굳이 말로 설명을 하는데, 오직 유마거사만은 말 없음으로 그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추사 난법의 부드러운 필력속에 내재되어 있는 법희와 선열의 힘을 충분히 읽어 낼 수가 있다. 추사는 계속해서 말한다. "以艸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W竟又題." 즉, "초서와 예서를 쓰는 방식과 기묘한 글자를 쓰는 방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이 화제에서 우리는 추사의 자신감 넘치는 득의의 절품을 볼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추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그의 난초 그림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좌측 하단에는 좌에서 우로 다음과 같은 화제를 덧붙이고 있다.“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吳小山見而 豪奪可笑.”즉,“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도 그려서는 안된다. 오소산이 이를 보고 얼른 빼앗아 가는 것을 보니 가소롭구나”이 화제의 내용을 보면 방필이라 하는 것은 20년 동안 마음속에 그리던 난을 문득 그렸다는 뜻이요, 다시는 이와 같은 경지의 그림을 자신은 그려 낼 수 없고, 다른 사람은 물론 그려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오소산이라는 사람이 얼른 빼앗아 갔는데 가소롭다고 한 것은 그 뜻을 알고 가져간 데 대한 희열인지, 또는 그깊은 뜻을 알고나 가져간 것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웃음일 수도 있으므로 전체에서 흐르는 뜻은 역시 추사의 자신만만한 법희와 선열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수월헌 임희지(1765,영조41- ?)는 정조, 순조대의 역관을 벼슬은 봉사를 지냈으며, 특히 난초 그림은 추사 이전의 것으로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그는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대부 사회에서 그 기량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신분의 제약을 갖고 있었지만 중인 문사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풍류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사람이다. 우봉 조희룡의「호산외사」에는 그의 풍모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거문고, 칼, 벼루, 거울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옥으로 만들어진 붓거리는 집값의 배가 넘는 귀중한 것이라고 한다. 집이 두어칸에 지나지 않아 빈 땅이라고는 반이랑도 차지 않았지만 반드시 사방에 두어자 되는 연못을 파고 물이 없으면 쌀씻는 물을 모아 부어서 항상 가득히 채워두고 매양 연못가에서 생황을 불며, 노래하며 말하기를「물과 달이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달이 어찌 물을 선택하여 비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자신의 호를 수월헌 또는 수월도인이라 하는 것과 잘 어울리는 일화이다. 둥근 얼굴에 빳빳한 구레나루, 키가 8척이나 되는 깨끗한 풍모의 도인과 같았다고 하는데, 그의 묵란화들은 그런 그의 모습과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다. 그의 난초 그림은 보통 흐늘어지게 뻗은 아름다운 춘란을 즐겨 그린 것으로, 어떤 고격에 얽메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개성을 유감없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그의 묵란도에는 스스로 제시를 붙여「깨끗한 이파리에 흥을 붙이노니, 마음을 같이 한다 한들 어떠하리」라고 할 정도로 개성 표출을 분명히 한 난초를 그렸다. 흔히 난초는 군자에 비견되지만 때로는 가인향, 미인향에도 은유되기도 하는데, 수월헌의 난초 그림은 바로 여기에 진면목이 있다. 그는 아름다운 첩을 거느리면서 「나에게는 꽃을 기를 동산이 없으니 이 사람을 좋은 꽃 한 송이로 본다」고 한 이야기와 걸맞는 풍모라고나 할까. 그림에는 초서체의 유려한 글씨로 수월이라고 쓰는데, 이 처럼 흐늘어진 멋진 필치 때문에 그의 글씨는 부적과 같아서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한편 그의 난죽도에서는 호방하고 패기있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비스듬히 뻗어나온 바위 위로는 대나무를, 그 아래로는 예의 간드러진 난초를 그려 놓고는 화제로“元章之石 子猷之竹 左史之蘭 一朝贈君 何以報之.”즉,“원장(미불)의 돌, 자유(왕희지)의 대, 좌사의 난을 하루 아침에 그려 그대에게 주노니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묵국도 개자원화전의 본을 따라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축되나 남아 있는 작품이 훨씬 적다. 그 가운데 문인화가 이인상()의 「병국도」는 강한 표현력을 가진 셈세한 필치로 작가 자신의 생활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문인 묵죽의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자하 신위의 묵죽도■
 
V. 조선 말기의 사군자
추사 김정희의 영향으로 19세기 중기에는 이미 토대를 굳힌 남종화풍은 말기에도 계속 강세를 보이며 20세기 초기까지 계속된다. 이때는 사군자 중에서 난초가 가장 유행하였다는 인상을 주나 실제로는 매, 난, 국, 죽 모두 상당히 보편화되어 왕공사대부, 도화서 화원 등의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따라서 그림 양식도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띠게 된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묵죽화가는 해강 김규진을 들 수 있다.
해강 김규진(1868,고종5-1933)은 평안남도 중화 출신으로 외삼촌인 김희수에게서 서화의 기초를 배우다가, 18세 되던 1885년(고종22)에 중국에 건너가 수핫하였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조석진, 안중식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나라에서의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기풍을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고, 특히 디필은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대나무 그림에서는 그의 이러한 필력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대나무를 골고루 잘 그렸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성한 잎이 많이 달린 굵은 왕죽인데, 대나무 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윤묵으로 곧게 뻗어 올리고 마디와 마디 사이의 간격을 최소로 남겨 대나무의 곧고, 강직한 인상을 강조하였다. 그밖에도 달밤의 대나무숲을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짙게 변화 많은 먹의 농담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해강묵죽보」를 남기고 있다.
 
조선 말기의 묵매화는 화원들 사이에서 많이 그려졌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양기훈(1843,헌종9- ?), 장승업(1843,헌종9-1897,고종34), 조석진(1853,철종4-1920)을 들 수 있다. 이들의 묵매화는 전대의 묵매화에 비해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현란하며, 기교를 부려 가지의 배치가 상당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석연 양기훈은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감찰을 지냈으며, 평양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1883년(고종20)에 전권대신 민영익을 따라 미국에 다녀 왔으며, 이때「미국풍속화첩」을 그렸다. 그는 묵매와 더불어 노안도를 많이 그렸다. 화풍은 형식적인 필치와 강한 장식성을 띠고 있으며, 화격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오원 장승업은 조선 말기 최고의 화가로 그가 남긴 일화는 상당히 많다. 40세 전후하여 화명이 높이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감찰이라는 관직을 제수 받았다. 장지연의「일사유사」장승업전에 의하면,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씨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다가 수표교 부근에 살고 있던 이응헌의 집에 기식하면서 어깨넘어로 글공부와 원, 명 이래의 명적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신이 통한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어 화명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아름다운 미인이 옆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하며, 또한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방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필법은 그림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의 구도와 특이한 설채법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는 모든 그림을 잘 그렸다. 산수화에서는 원말사대가와 청초사왕오운 계통의 남종화풍과 그리고 각종 북종화풍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으며, 특히 밀폐된 공간개념은 명대의 절파화풍과 상통되는 점이 있다. 사군자, 특히 매화 그림에서는 청말의 조지겸, 오창석의 화풍과 근대감각이 풍기는 음영법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그를 사사한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에게 전해져 우리나라 근대회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소림 조석진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도화서의 화원으로 산수화와 어해화에 능했던 할아버지 조정규 밑에서 학문과 그림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는 여러 분야의 그림을 다 잘 그렸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그림은 1900년대 이후의 말년 그림이기 때문에 화풍의 변천과정을 추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체로 산수화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엮던 남종화풍에 토대를 두기는 하되, 북종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강직한 화풍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묵매화들은 대상의 생동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필치의 활력보다는 정확성에 더 심혈을 기울여 꼼꼼하고도 날카로운 필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난초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활약으로 그때까지 다른 사군자에 비해 미미하게 그려지던 것이 본격적인 개화기를 맞았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석파 이하응(1820,순조20-1898,고종35), 소호 김응원(1855,철종6-1921), 운미 민영익(1860,철종11-1914)이다. 석파 이하응의 난초는 그 대부분이 대련식으로 된 길고 좁은 종폭이고, 이에따라 특수한 구도가 성립된다. 즉, 난초 두 세포기를 화폭의 아래 위로 대각선의 위치로 배치하고 이들이 절벽이나 바위위로부터 옆으로 늘어진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와 같은 구도는 그 이전에 것에 비해 훨씬 동적이며 활달하게 뻗어내려간 난엽과 더불어 전체화면에 활기를 부여하고 있다. 소호 김응원의 난초는 대개 석파의 난을 따르고 있다. 이에비해 운미 민영익의 난초는 전서의 획을 상기시키는 장봉획이며 난엽이 거의 직각으로 한 번 꺽이는 특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청초의 화가 석도의 난초와 비슷하다. 민영익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의 문인화가들과 교류한데 기인한 것이다.
 
석파 이하응은 영조의 현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다.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익종비 조대비의 천거로 세자가 되고, 흥선대원군은 10년에 걸쳐 대내적으로는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등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펼치며 섭정을 하였다. 그는 글씨도 잘 썼지만 특히 묵란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석파의 난초 중에서 압권을 이루는 것으로는 김옥균에게 하사한 묵란도가 있다.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 걸친 암벽에 두포기의 난초가 낭자하게 피어 있다. 추사가 뿌리없는 난을 즐겨 그렸다면, 석파는 호 그대로 바위에 핀 난을 즐겨 그렸다. 위쪽의 난은 큰 무더기이나 엷은 먹으로 난잎을 그렸고, 아래쪽의 난은 작은 무더기이나 진한 먹으로 보다 선명하게 그려 균형과 변화를 꾀하였다. 이 그림의 난잎은 가늘고 길게 뽑다가 반전하여 당두를 만들고 이어 서미를 삐쳤다. 이 그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73세인 1892년(고종29)에 그린 것으로 그의 말년의 작품이다. 조선 말기 정치적 격동기의 갖은 파란을 뛠을대로 뛠고 난 뒤에 수그러진 대원군의 만년을 보는 것 같다. 이 그림은 작품으로서의 가치 못지않게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다. 고균 김옥균이 쓴 제발이 다음과 같다. "石坡老丈年八十 腕底猶有鉤河力 興來尋常寫幽蘭 寄與人間靑眼客 展來如人eb溪路 不勞九疑峯頂覓." 즉, "석파 노장은 나이 80인데도 필력은 오히려 하수를 당길만 하네. 흥이 일면 대개 그윽히 난을 쳐서 다정한 친구에게 보낸다네. 펼치면 삽계로(중국 절강성 남쪽에 있는 강)에 들어 가는 듯 구의봉 꼭대기를 애쓰지 않아도 볼 수 있네." "世之有石坡蘭者 多h寫爲先生 老`倦於染毫 此本特爲林董先生作 其腕力眞不減板橋先生所寫中得意之筆也 林先生使余題其下 遂書一詩以歸之." 즉, "세상에는 석파의 난그림이 있으나 많은 것이 가짜다. 그 이유는 선생이 나이 70이라 그림 그리기에는 피곤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특히 임동선생을 위해 만든 것이나 진실로 그 필력은 정판교선생이 그린 것 중 득의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임선생이 나에게 제발과 그 아래의 시를 부탁하여 마침내 한 수를 지어 도려 드렸다." 요즘도 대원군의 난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한데, 대원군이 살았던 그 당시에도 모조품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1892년에, 흥선대원군은 1882년의 임오군란의 배후 조종자로 청나라 보정부에 잡혀 갔다가 4년만인 1885년에 돌아와 명성왕후 민비의 강한 견제 아래 운현궁에 칩거하고 있을 때이다. 이 당시 김옥균은 1884년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 중일 때이다. 한양의 대원군 그림이 청나라 외교관 임동을 거쳐 어떤 경로로 김옥균에게 전해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전에도 개화파 중에서도 유독 김옥균만이 수구파인 대원군에게 호의를 보인 적이 있고, 갑신정변때의 강령 중에는 대원군의 귀환이라는 조목도 들어 있다. 아무튼 이 그림은 말년의 대원군과 김옥균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드문 자료로서 서화를 통한 교유에서 옛 정치가들의 멋과 낭만을 엿볼 수 있다. 석파 이하응이 청나라 보정부로 납치되기 이전의 작품으로는 위당 정인보 의 제발이 적힌 1881년(고종18)의 묵란도가 있다. 화면의 상단과 하단에는 위당 정인보가 쓴 장문의 제시가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원군의 기개와 업적을 찬양하고, 그 속에서 피어난 난초 한포기를 읊고 이 그림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적고 있다. 농묵의 난잎과 담묵의 난꽃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뿌리 근처의 잎은 가마귀배 모양의 당랑을 각지게 처리하고, 잎끝 부분은 쥐꼬리 모양으로 서미로 길게 내 뽑았다. 각이 지게 굴곡을 주고 반전의 삼전법을 즐겨 사용한 점 등에서 추사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힘차고 날카로운 화풍은 정인보의 지적처럼 여윈 뼈, 맑은 정신, 빛나는 광채로 표현되?그의 영걸스러운 풍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소호 김응원은 출신 배경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철저히 따른 사람이라는 것만 전해지고 있다. 1911년에 근대적 미술학원으로 서화미술협회 강습소가 개설될 때에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과 함께 지도교사진에 들어 묵란법을 가르쳤다. 글씨는 예서와 행서를 잘 썼고 그림은 묵란에서 탁월한 재주를 나타냈다. 그의 묵란들은 대부분 석파의 난을 따르면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는 웅장하고 환상적인 구도의 대작인「석란도」가 있다.
운미 민영익은 조선 왕조 말기에 왕실의 외척으로 태어나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파란만장한 50여 평생을 보낸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회화사에서도 굵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불과 18세의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미국전권대사,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김옥균이 주도하는 1884년의 갑신정변때는 생부인 민태호가 피살되고 그 자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적이 있다. 20대 전반에 미국과 구라파 여러나라를 여행하여 서양 문물을 남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음에도, 명성왕후 민비의 척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갑신정변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여 상해에서 종말을 맞았다. 그는 묵란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오늘날 적지않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오창석을 위시한 당시의 중국문인들과 교유하여 남다른 독특한 그림 세계를 이룩하였다. 망명생활의 고뇌와 우울은 서화의 세계로 전념케한 주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문인화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국제 조류에 뒤지지 않는 화경에 이르렀고, 석파 이하응과 더불어 묵란도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노근묵란도」를 보면, 뿌리가 노출된 난을 포함하여 크게 두 무더기로 나눠진 구도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구도이다. 잎끝이 뭉툭한 난잎, 예외없이 꽃 중심부에 찍힌 묵점, 장봉획을 사용한 고른 잎의 선 등에서 운미란의 특징을 잘 살필 수 있다. 이와같이 운미의 난은 개성이 뚜렷하여 쉽게 타인의 것과 구별이 되는데 그 것은 전통의 흐름에서 볼 때도 확연히 이탈하여 국내에서는 스승을 찾기가 힘들다. 상해시절에 교유했던 오창석과의 강한 연결은 두 사람의 밀접한 교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묵국화에서도 화본의 영향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나, 혜산 유숙(1827,순조27-1873,고종10)과 심전 안중식(1861,철종12-1919)의 작품에서는 화본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한 신선한 국화를 보게 된다.
 
혜산 유숙은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추사 김정희의 지도를 받은바 있다. 그는 19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화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한가지로 일관되지 않아 혜산이라는 작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는 산수화와 사군자에 능했으며, 추사풍의 문인화와 단원풍의 일면을 짙게 풍기는 작품들이 많다. 혜산 유숙은 간결한 구도와 필법, 그리고 담채의 변화로 원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운림 예찬의 그림을 보는 듯한 깔끔한 느낌을 주며, 그가 지향했던 남종화풍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그를 평하면서 "그림에 속기는 없어나, 다만 윤색의 묘가 모자란다."라고 한 것이 가장 적중한 표현법이라 하겠다.
 
심전 안중식은 서양식의 데생법으로 대상의 특색을 정확하게 다루었던 기명절지화에 상당히 능했으나, 어디까지나 그의 화풍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산수화에 있다. 심전 안중식은 소림 조석진과 더불어 조선왕조 회화사의 말미를 장식하는 사람이요, 동시에 한국 근대미술사의 서막을 장식하는 과도기의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역시 오원 장승업의 영향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장식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정형화된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1881년(고종18)에 소림 조석진과 함께 김윤식 이끄는 영선사의 일원으로 중국 천진에 가서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석파 이하응의 묵란도■
■운미 민영익의 묵란도■
■소호 김응원의 석란도■
 
VI. 조선 시대의 포도도
포도는 사군자에 속하는 식물이 아니다. 그러나 포도의 외모적인 형태상의 특징으로 인하여 다남과 다산의 상징물로 많이 그려져 왔다. 포도라는 명칭은 포도의 원산지인 중앙아시아 흑해 연안 지방의 원어 'Budow'에 근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헌 사료로서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 문집에 포도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 숙종때의 실학자 홍만선의「산림경제」에 포도 품종과 재배 기술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한편 문양면에서는 통일 신라시대에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포도당초문이 성행하였다. 와당이나 전에 이러한 포도당초문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경주 부근 사지에서 발견된 다수의 와당에서 포도당초문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형식은 이전의 형식과는 달리 매우 사실적인 포도 넝쿨이 묘사되고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많은 와당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의장문양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청자에서는 12세기 전반기에 많이 쓰였는데 포도넝쿨 사이에 동자가 매달려 노는 모습 등 민화적인 풍취를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백자에서는 이미 문양의 차원을 넘어 상당히 회화적인 포도문이 성행하고 있다. 대개 사실적으로 시문되고 있으나, 간혹 극히 추상화된 포도문도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포도 전래는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로 8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묵포도도는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의 선승인 일관에 의하여 창시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이다. 그림의 소재가 되는 포도의 종류는 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까마귀머루이다. 동아 문화권에 있어 포도는 주로 선승이나, 서화에 뛰어난 사대부들이 여기로 즐겨 그렸는데, 중국에서는 사군자와 같이 뚜렷한 한 분야나 양식으로의 정형화는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소재 자체가 수묵만으로 묘사가 용이하여 시대를 달리해서도 계속해서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특히 빈번하게 그려져 뚜렷한 정형화가 이루어졌고, 괄목할만한 발전이 확인된다. 포도 한 가지만으로도 문인화가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외에 조선 백자에서도 문양의 차원을 넘어 강한 회화성이 간취되는 작품이 적지 않다. 이들 조선 백자의 표면 그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도화서 화원들의 이 분야의 그림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묵포도로 유명한 사람은 전기의 평산 신사임당(1504,연산군10-1551,명종6), 중기의 영곡 황집중(1533,중종28-1593,선조26), 휴당 이계호(1574,선조7-1645,인조23), 호은 홍수주(1642,인조20-1704,숙종30), 죽창 심정주(1678,숙종4-1750,영조26), 후기의 낭곡 최석환(1808,순조8- ?)을 들 수 있다.
신사임당은 포도 그림에 있어서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전칭작이 여러 폭 전할 정도로 이름이 높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묵포도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면이 조금 잘린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대로 짜임새를 갖춘 명품이다. 이 그림은 좀에 의해 여러 군데 훼손된 부분이 보이나 화면 중앙에 수직으로 드리운 줄기를 중심으로 몰골법에 의해 그려진 덩굴손 줄기 등이 완벽에 가깝게 정밀묘사되어 실제 포도 나무를 보는 듯 하다. 성글게 열린 포도송이의 서로 다른 묵색이 선염의 묘와 더불어 사실 표현의 극치에 달한 느낌이며 화면이 가득한듯 하면서도 여백이 적절이 안배되어 전혀 어수선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구성에도 뛰어남을 엿보게 한다. 신사임당의 묵포도는 조선 중기의 영곡 황집중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전래되는 조선 전기의 포도도는 그 밖에 15세기에 활동한 성삼문, 신숙주의 것도 전하고 있으나, 그 진적 여부가 불분명하여 조선 전기의 포도 그림의 양상을 고찰하는데는 부족한 점이 많다. 현존 작품을 중심으로 고찰할 때 영곡 황집중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 진다.
 
영곡 황집중은 16세기 조선 화단에서 신사임당의 한세대 정도 뒤이은 문인화가이다. 그는 같은 문인화가로 대나무를 잘 그린 탄은 이정과 매화 그림에 능했던 설곡 어몽룡과 더불어 당대 삼절로 불리워 진다. 그는 포도를 묵죽이나 묵매에 뒤지지 않는 문인화의 어엿한 소재로 부각시킨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의「묵포도」(모시 바탕에 수묵, 27cm×21cm)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책으로된「화원별집」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화첩에 들어 있는 다른 그림들의 수준과 더불어 영곡 황집중의 묵포도 그림에 있어 기준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화풍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소폭의 작은 그림으로 시계가 좁은 단순한 구성, 사선의 원용에 의한 포치력의 뛰어남, 다양한 여러 형태의 변화있는 잎의 표현, 과장이 없는 사실적인 포도송이, 농담이 강조된 색조의 대비, 동그란 포도알에 있어 선염 효과에 의한 입체감의 표현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사생을 통하여 체득한 표현 기법이면서도 형사에 얽매이지 않고 소재의 특징을 잘 포착하여 간략히 나타내어 문인화로서의 어였한 격조를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라 하겠다.
휴당 이계호는 1645년(인조23)에 그린「포도도」병풍에 "내가 낙상으로 인하여 오른팔이 부러진지 1년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으니 종신토록 이러할 모양이다. 이제 종이 8폭을 구하여 쓰라림을 참으며 붓을 놀려 휴옹의 솜씨를 다시 인식케 하는 바이다."라고 제문을 적었던 점으로 보아 72세 때까지 생존하여 작품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포도 그림은 대체로 영곡 황집중이 이룩하였던 조선 중기 포도화에 전통을 두고 있으명서, 그 보다 좀더 번잡하고 장식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짙은 먹으로 납작하게 처리된 줄기와 옅은 먹의 덩굴손, 그리고 농도를 달리하여 묘사된 포도알과 부채같이 평면으로 퍼진채 화면을 촘촘히 덮고 있는 잎의 모습들은 그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같은 시대의 이우(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의 동생), 홍수주의 포도 화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최석환에게 계승되고 있다.
호은 홍수주는,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조참의를 지낸 홍처윤의 아들로 시와 글씨에도 능한 문인화가이다. 7세때부터 작시를 하여 20세에 이르러서는 이미 시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17세기 후반에 휴당 이계호에 이어 묵포도로 크게 주목받았다. 40세를 넘어서 환로에 들어섰으나 당쟁에 휩싸여 1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전서에 능한 그는 서, 화 두 부분에서 일가를 이루었는데, 태종 헌릉비의 글씨가 바로 그의 것이다. 그에 관한 기사는 숙종실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집에서 산견되는데 매, 죽, 포도를 잘 그렸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술에 취해 매화를 그린 일이며,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딸이 간장물을 엎질러 안타까와 하는 것을 보자 그 위에 포도를 그린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호은 홍수주는 54세(1695년)때 동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때 온 청나라 사신들과 능숙한 문장과 글씨로 역관없이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묵포도는 대폭으로 완숙한 필치가 엿보이는데 이와 같은 구도를 보이는 비슷한 크기의 횡관식과 S자식의 구도를 혼용하여 비백법으로 힘차게 그린 묵매화와 대련으로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오른쪽 상단에서 시작된 굵은 줄기는 비스듬한 포물선을 그리며 왼쪽하단으로 이어지는데 세부묘사는 실제 포도나무를 보고 그린듯이 사실성이 짙다. 그의 포도 그림은 대개가 위에서 아래로 휘어져 내린 도수식 구도로 농담묵을 써서 잎과 열매를 그리는 화법으로 입체감과 변화감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죽창 심정주는 현재 심사정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인 심익창이 과거부정사건과 역모에 가담란 죄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혀 출사하지 못하였다. 현존하는 유작은 홍익대박물관 소장의, 담백하고 깔끔하게 처리된 남종화?의 산수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포도 그림이다. 그의 포도 그림은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가였던 영곡 황집중과 호은 이계호의 화풍을 계승하면서 짜임새 있는 구도아래 짙고 옅은 먹을 조화롭게 구사하고 있다. 「송천필담」에 "당시 수운 유덕장의 묵죽과 더불어 죽창 심정주의 묵포도가 세상을 휩쓸었다." 고 하는 만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묵포도 화가로 평가 된다.
낭곡 최석환은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에서 살았다는 사실 이외에 가정이나 생애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포도를 즐겨 그린 작가로 현존하는 그의 유작을 통해보면 병풍이나 족자 형태의 그림이 대부분이며, 천편일류적이고 장식적인 취향이 강하다. 그는 묵포도는 조선 시대에 신사임당에서 비롯하여, 영곡 황집중, 휴당 이계호, 호은 홍수주, 죽창 심정주로 이어지는 포도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이다.
 
■영곡 황집중의 묵포도■
■휴당 이계호의 묵포도■
■고려청자에 그려진 사군자■
Four Gracious Plants: Plum, Orchid, Chrysanthemum, and Bamboo
of the Koryo Celadon of the Koryo Dynasty
▣청자상감국화운학문매병▣



▣청자상감모란국화문화병▣
▣청자상감포도동자문병▣
▣청자상감모란문호▣
■조선백자에 그려진 사군자■
Four Gracious Plants: Plum, Orchid, Chrysanthemum, and Bamboo
of the White Porcelain of the Chosun Dynasty
▣청화백자매죽문호▣

▣청화백자송죽문홍치2년명호▣
▣청화백자모란문호▣

▣청화백자난국죽문각병▣


▣청화백자진사채장생문호▣

▣백자철화포도문호▣


▣백자철화매죽문호▣
 
출처: bgs.hs.kr/dapsa/jaeju/26-Sakunja.htm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